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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게임 속 나혼자 플레이어

무료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퓨전

이찬솔
작품등록일 :
2022.09.15 01:46
최근연재일 :
2024.04.20 20:15
연재수 :
122 회
조회수 :
53,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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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7
글자수 :
928,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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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0.06 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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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8쪽

안녕, 다엘촌

DUMMY

반다르는 달리면서도 흐트러지지 않는 숨을 과시하며 대답했다.


“뭐긴. 화난 다크엘프들이지. 읏차. 내가 툴레도의 부인을 통해 그가 어딨을까 찾다가 마찰을 빚었거든. 마을의 부인을 훔치려는 자라나, 뭐라나? 무도한 누명이지. 내 동료의 부인을 탐하다니.”


그렇게 말하는 반다르는 아주 침착했다. 하지만 그의 미미하게 떨리는 눈가는 그가 얼마나 억울해하고 있는지 말해주는 듯했다.


확실히 점잖은 신사인 반다르가 월담하여 남의 부인을 탐하는 모습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항상 전투와 세월로 단련돼 침착한 반다르는 좀처럼 감정을 밖으로 내보이는 일이 별로 없었는데 동훈은 예민하게도 그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


동훈 역시 달리면서도 흔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정리했다.


“오해로군요. 말로 해결할 수는 없었을까요?”


반다르는 고개를 저었다.


“오해받을 거라는 걸 짐작하고 있었네. 감수해야 하는 일이었고. 칼이라는 좋은 대화수단을 두고 말로 해결하려 들 것 같진 않더군.”


툴레도와 어떤 사이인지 몰라도 오해를 무릅쓰고 그의 행방을 수소문할 정도면 각별한 사이일 것이다.

반다르라는 NPC가 마음에 든 동훈은 툴레도라는 게임 플레이시 들어보지 못한 NPC에 대해서도 궁금증이 생겼다.



뒤를 따르는 다크엘프 무리가 소리치며 쫓아왔다.


“서라! 더러운 인간 범죄자!”

“인간! 우리 다크엘프를 모욕하고도 무사할 성싶으냐!”

“남편을 잃은 부녀자의 집에 침입한 악질적인 부랑자 같으니라고! 잡아라!”


아무튼 오해에서 비롯된 추격전이라는 거지. 동훈은 싹 쓸어버릴 마음을 곱게 접었다.


동훈 역시 칼이라는 좋은 대화수단을 두고 도망을 택하고 싶지 않았으나 반다르와 얼굴 모를 툴레도의 명예를 위해 참았다.


다 죽이는 건 쉬울지 몰라도 정말 다 죽이고 나면 반다르가 툴레도의 부인을 훔치려는 파렴치한 짓을 저질렀다는 기막힌 오해는 기정사실이 되는 것 아니겠나.


다행히 반다르와 동훈은 다엘촌의 다크엘프들 보다 달리기가 빨랐다. 한참을 달려 관도에 들어서자 뒤를 쫓아오는 다크엘프는 보이지 않았다.


오해에서 시작된 한바탕 추격전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이 개는 사냥개 출신이라 그런지 체력도 좋아. 열심히 뛰었는데도 안 지치고 장난인 줄 아나보네.’


동훈은 가볍게 숨을 돌리며 해맑은 표정으로 뒤를 쫓아오는 반다르의 개를 쓰다듬었다.


반다르와 동훈은 한숨을 돌리고 짐을 정비한 뒤 다시 관도를 따라 길을 나섰다. 펠리페 성 쪽으로 방향을 잡고 출발했다.


중천으로 떠오르는 태양을 보며 동훈은 설정창을 켰다. 로그아웃하기 위함이었다.

4레벨도 찍었겠다 잠시 정비를 하는 타임을 가져야 했다. 현실 세상에서 더 현질할 돈도 추려보기도 해야 하고.


그렇게 다음 마을로 넘어가기 전에 로그아웃하는데,


저 멀리 어렴풋이 보이는 플레이어의 네임텍 3개. 그중 [내가니싸부]의 이름은 보이지 않았다.


‘어? 저 아이디들은?’


동훈의 시야가 암전했다.


***


햇볕이 아련하게 들이치는 주말 오전, 동훈은 핸드폰을 들여다보는 중이었다.


“우명바이오는 이제 끝물이네. 화살표도 희미한 게 이제 다 된 것 같네. 다른 종목을 찾아야겠어.”


동훈은 그날로 우명바이오의 보유 주식을 전량 매도를 예약했다.

주말이라 장이 열리지 않아 거래는 할 수 없지만 월요일 장이 열리는 순간 예약을 걸어놓은 물량은 전량 매도될 터였다.


총매입 3,867,400원

총평가 6,169,800원

총손익 +2,302,400원

우명바이오 : 매입가 3,867,400원 / 평가손익 +2,302,400원 / 수익률 +71%


상승의 화살표가 적어진 끝물에는 얕은 상승장으로 마무리됐다.


단물을 빨아먹을 만큼 빨아먹었으니 다음 타깃을 찾을 시간이었다. 돈을 놀려둘 수는 없었다.


욕망으로 빛나는 동훈의 눈에 한 종목이 걸려들었다.


“다음은 이거다.”


동훈이 집은 것은,


“2차 전지.”


동훈이 선택한 종목은 2차 전지였다.


동훈은 지금껏 자신의 스킬 ‘통찰’이 가리키는 종목을 유심히 보고 그곳에 돈을 집어넣으면 됐다.


예전엔, 며칠 전까지만 해도, 이 일련의 과정이 너무 수동적이라는 생각도 하곤 했다. ‘통찰’이 찍어줘야만 돈을 넣고, 수익이 얼마나 될지도 모른 채 ‘통찰’이 팔라고 할 때까지 기다려야 했으니까.


그래서 주식과 경영, 회계에 관해 공부를 해보려고 결심했다.


하지만 그것을 공부하는 과정은,


“젠장! 이게 다 무슨 소리야? PER은 뭐고 PBR은 또 뭔데?”


너무 어려웠다.

단순히 숫자와 단어가 어려워서 포기하는 게 아니었다. 정말 어려운 건 이게 전부가 아니란 거다.


PER이 어떻고 주주 배당이 어떻고 회사 자본금이 얼마며 CEO 성향, 저번 그리고 이번 분기 기업성과, 지분율이 어쩌고.... 이런 것들은 주식시장의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회사 자본이 탄탄하고 CEO의 경력과 성향이 출중하고 지분도 안정적이다. 건실한 회사라는 판단을 하고 ‘통찰’을 통해 결과를 확인하면 그 옆에 붉은색으로 박혀있는 ↓↓↓ 아래로 향하는 화살표 3개.


회사 자본은 형편없고 CEO는 사회면 머릿기사를 장식하기 바쁘고 지분은 엉키고 엉켜 복잡하기 그지없다. 이건 자칫하면 상폐각이다, 생각해서 ‘통찰’로 패를 까보면 파란색으로 박혀있는 ↑↑↑ 위로 향하는 화살표 3개.


예측이 틀린 이유를 분석하려 백날 밤을 새워도 어떤 건 찌라시발 뉴스 때문인 것 같고 어떤 건 국제 정세 때문인 것 같았다.

주식 커뮤니티를 가서 이유를 분석해보려 해도 누구는 CEO 어쩌고, 누구는 대형 인수 호재, 누구는 정부 입김이라고 각양각색의 이유를 늘어놓았다.


이 말인즉 무엇이냐. 뚜렷한 이유가 없다는 말이었다.


주식은 매일 오르내린다. 호재와 악재는 매일 있을 수 없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주식이 오를 이유-호재-도 필요하고 내릴 이유-악재-도 필요했다.


사람들의 악호재에 대한 수요보다 뉴스에서 나오는 악호재의 공급이 턱없이 적으니 사람들은 이유를 만들어내서라도 주식의 가격을 끌어올리고 끌어내렸다.


“완전 지들 맘대로네, 이거. 세력도, 개미도 보고 싶은 것만 봐.”


시장을 주도하는 기관과 세력이 기본적으로 찌라시와 뉴스를 만든다지만 그들 또한 찌라시와 뉴스에 펄쩍 뛰는 건 마찬가지였다.

오르락내리락하는 그래프에 담긴 사람의 욕망과 공포. 주식이라는 숫자는 욕망을 먹고 컸다. 공포를 먹고 쭈그러들었다.


주식판은 이런 판이었다.


주식이야말로 진정한 인간 광기를 계산해야 하는 영역 아니겠나.


그런 연유로 동훈은 주식 공부하기를 그만뒀다.

주식에서 쓰이는 단어와 재무제표 보는 법, 성과 및 뉴스 체크하기, 기업 자본금 확인하기 등 기본적인 개념만 머리에 박아넣고 나머지는 스킬 ‘통찰’을 적극적으로 따랐다.


가상 투자로 제멋대로 돈을 넣어봤을 땐 천천히 우하향하던 그래프가 실제 돈으로 ‘통찰’을 기반해 투자하니 미친듯한 우상향을 보여줬다.


“그래. ‘통찰’이 최고다. 이건 내 능력인데 아껴서 뭐하냐. 최대한 활용하는 게 낫지.”


주어진 능력을 다 활용하지 않는 것 또한 능력을 낭비하는 셈이었다.

그래서 이번에 고른 종목 2차 전지도 동훈의 ‘통찰’이 가장 많은 상승의 화살표를 예지한 종목이기 때문에 골랐다.


동훈에게 주어진 더 벨룸이라는 능력, 그곳에서 오는 모든 것은 동훈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썩히라고 온 것이 아니었다.


동훈은 깔끔하게 자신의 능력과 스킬, 힘과 상황을 인정하기로 했다.


난 특별한 능력을 가진 놈이고, 이것이 틀리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게 인정하자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

불안한 마음은 불확실한 미래에서 오는 것에 불과했고 능력에 대한 불신은 무지한 오만에 불과했다.

만사 할 수 있는 것을 하고 해야 하는 일을 하는 게 다 아니던가.


동훈은 너무 많은 것을 걱정하고 그것도 모자라 하지 않아도 될 걱정까지 사서 하고 있던 셈이었다.


고민을 마치자 동훈은 한결 머리가 가벼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묵은 고민을 해결한 셈이니 오늘은 나 자신에게 상을 줘야겠는데. 뭐라도 맛있는 걸 먹어야겠어.’


일단은 잠 좀 자고. 회사원이 주말에 낮잠 안 자면 직무유기지.


***


주말 저녁, 서울 중구에 위치한 고급 호텔인 ‘호텔 실라SILLA’.


한국의 전통 건축 양식과 현대적이고 도회적인 설계가 절묘하게 융합된 독특한 호텔 건물은 실라 호텔의 시그니처였다.

화려한 조명과 정중한 호텔 도어맨과 벨맨, 사근사근하고 부유한 분위기는 고급 호텔의 멋을 살렸다.


소시민 동훈이 호기롭게 자신에게 주는 상으로 서울에서 제일가는 고급 호텔을 고른 건 이색적이었다.


“와, 역시 주말 저녁인가? 사람이 엄청 많네.”


우리나라 사람들 다 돈 잘 버나 봐, 호텔에 이렇게 많이들 다니고. 동훈은 실없는 생각을 하며 택시에서 내려 호텔 입구를 멀찍이서 관찰했다.


원래는 호텔 입구에서 내릴 작정이었는데 택시기사는 뭐가 그리 바쁘다고 별 같잖은 이유를 대며 동훈을 입구에서 멀찍이 떨어진 곳에 내려주고는 유턴해 가버렸다.


동훈은 더 벨룸에서도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하고는 말도 섞지 않았는데 택시기사가 딱 그랬다.

무슨 말이 통해야지. 자기 할 말만 쏟아내는 사람과는 대화가 통하지 않았다.


더 벨룸에서야 시원하게 PK 뜨면 그만이었는데 나이 지긋한 택시기사와 드잡이질할 수는 없었기에 동훈은 택시비를 깎아내고 말았다.

택시기사가 택시비를 흥정하는 지독한 놈, 어쩌고 하는 것 같았으나 동훈은 택시비를 조금 세이브해 기분이 좋았다.


“잠깐, 여기 화장실이 어디야?”


동훈은 길을 헤매다 어느새 주차장 근처에 있는 화장실에 다다랐다. 길이 복잡해 헤매다 사람들과 뒤엉켜 걷다 보니 주차장까지 오는 기묘한 모험을 하고 만 것이다.


일단 대충 일을 마치고 화장실을 나오니 보이는 것은 주차장.


“분명 로비층에 있다고 그랬는데 난 어디로 온 거지? 일단 호텔로 들어가야겠다. 라운지가 어디야.”


주차장을 통해 올라온 실라 호텔은 너무나 복잡했다. 안 그래도 널찍한 부지를 차지하는 호텔은 오래되어 증축과 리모델링을 거듭한 탓에 그 내부가 복잡하게도 엉켜있었다.

어디로 가야 어디가 나오는지, 이리로 올라가면 뭐가 나오는지 알 수가 없었다.


분명 지나다니는 직원을 붙잡고 물어보면 친절하게 알려줄 테지만 고급 호텔에서 자신감 부족에 시달리는 동훈은 물어보기가 꺼려졌다.


그렇게 한 층 한 층 올라가다 그 스스로도, ‘어? 이상하다. 여기까지 올 게 아닌 거 같은데?’ 싶을 지경에 이르러서야 직원에게 물어볼 마음이 들었다.


3층, 다이너스티홀이라 불리는 층계에는 고급스러운 느낌이 물씬 풍겼다. 부드러운 주홍색 카펫은 밟기 미안할 정도로 푹신했고 포근한 감촉은 호화로운 수준이었다.


더 늦기 전에 길을 물어야겠다고 생각한 동훈은 바쁘게 움직이는 호텔 직원 하나를 붙잡고 물었다.


“저기요. 길 좀 물을게요.”


하지만 동훈이 그 직원에게 물었다는 게 실수였을 것이다.


그간 만나온 호텔 직원들은 분주히 어디로 움직였지만 조금씩은 여유가 있었다.

동훈이 붙잡은 이 직원만큼은 그런 여유조차 보이지 않는, 거의 일적인 패닉에 빠져있는 상태였다.


왜 그렇게나 바쁜 직원을 붙잡았느냐고 묻는다면 동훈으로서도 그라면 과하게 친절하지 않고 동훈에게 딱 필요한 답만 해줄 것 같아서, 라고 답했을 것이다.


“라운지, 더 라이브러리로 가려면 어디로 가야 하나요?”


그러면 그렇지. 호텔 라운지, 동훈이 큰맘을 먹고 자신에게 주는 상이라고 말하기에는 조금 짜치는 구석이 있었다.

호텔에서, 혹은 호텔 레스토랑에서 한 끼 식사를 거하게 챙겨 먹는 것도 아니고 라운지에서 빙수 하나를 먹겠다는 작정이었으니까.


호텔 빙수는 분명 비쌌기에 동훈은 먹어보고 싶다는 생각만 했지 실행에 옮기진 못했었다.


이 기회를 타 호텔 빙수 하나를 사먹겠다는 동훈의 포부는 분명 제 딴에는 웅대했다.


“저기 문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밑으로 내려가실 수 있으세요.”


직원은 복도 한쪽에 난, 동훈이 왔던 비상구 계단을 가리켰지만 모호하게 가리킨 탓에 동훈은 그의 손가락이 다이너스티홀의 고풍스러운 문짝을 가리킨다고 착각했다.


“이쪽이요?”


동훈이 되물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건조했다.


“네.”


직원은 뭐가 그리 바쁜지 동훈 쪽을 보지도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동훈에게는 고풍스러운 문으로 들어가는 게 맞다는 직원의 확답으로 들렸다.


동훈은 이 커다랗고 화려한 문이 정말로 망고 빙수를 파는 호텔 라운지, ‘더 라이브러리’로 가는 문인지 재차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곧 스스로 수긍하고 말았는데 그건 전적으로 망고 빙수의 가격 때문이었다.


‘망고 빙수 하나에 십만원이 넘는다는데 이런 고-급 호텔에서는 라운지도 이렇게 커다랗고 화려하게 꾸며놓았나 보다.’


그렇게 십만원이 넘는 망고 빙수를 생각하며 미심쩍은 마음으로 문을 여는데.


벌컥!


반대쪽으로 문이 열리며 동훈의 품으로 누군가 들어왔다.


그때의 기억은 시트러스 향이 훅 끼쳐오고 홀 안 샹들리에에서 나오는 빛이 너무나 눈부셨다는 것뿐이었다.


품 안으로 들어온 누군가를 깜짝 놀라 확 껴안을 때도 동훈은 눈이 너무 부시다는 생각만 가득했다.


“어어, 손님! 거기가 아니라,”


당황하는 직원의 목소리와 문 안쪽에서 들려오는 거친 목소리가 교차했다.


“야, 송이현! 지금 이대로 나가면 그쪽에서 가만히 있을 거 같아? 우리 아버지는 다 조카인 너하고 큰아버지 도와주려고,”


여러 목소리가 배경에서 뒤엉키고 동훈은 그제야 품으로 들어온 누군가를 확인할 수 있었다.


0과 1로 이루어진 컴퓨터 세상도 사람의 손이 닿으면 분명히 버그가 생기고 만다. 만든 사람은 분명 의도하지 않았을 버그가.

더 벨룸에서도 버그로 인한 핫픽스가 자주 발생하지 않던가.


“죄송합니다.”

“괜찮으세요?”

“네. 괜찮아요.”


짧은 대화를 나누며 동훈은 이현과 눈이 마주쳤다. 커다란 눈에 길고 고운 속눈썹, 검은색으로 뚜렷한 눈동자는 사람을 빨아들일 듯 깊었다.


‘어? 이 사람. 어디서 본 사람인데.’


동훈의 뇌리에 스쳐 지나가는 뉴스 한 토막.

한국의 20대 중 가장 부자는 누구인가, 하는 섹션에서 스치듯 지나갔던 얼굴이었다. 열 번째였나, 열두 번째였나 어느 조선기업 회장의 딸이라던가?

특유의 냉막하면서 우아한 미모로 잠깐 시끌했던 여자로 기억했다.


“저, 잠시 이것 좀.”


이현이 뒤로 물러서려 종종걸음으로 움직였다. 그녀의 수수하지만 세련된 원피스의 자락이 동훈을 휘감았다.


갑자기 부딪혔음에도 이현은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았다.


적어도 그곳에 있는 다른 모든 사람은 그렇게 느꼈다. 얼음공주라는 별명이 붙은 송이현은 날 때부터 표정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동훈은 달랐다.


이현의 단단하게 굳은 표정 안에서 동훈은 그녀의 감정을 수월하게 읽어낼 수 있었다.


그녀의 잘게 비틀대는 눈가의 3번째 잔주름에서 당황을, 떨리는 입술 끝에서 피로를 읽었다.


이현의 뒤로 씩씩거리는 서른 중반대의 남자가 보였다. 어울리지 않게 딱딱한 턱시도를 입은 남자였다.


이현과 외형적으로 비슷한 구석이 있는 남자는 고급스러운 이현에 비해 어딘지 천박해 보였다.

이현에게 얼음공주 같은 우아함을 주는 차가운 인상은 남자에게로 가면 시니컬하고 오만한 염세주의자의 인상으로 바뀌었다.


누가 봐도 이현이 남자에게 시달리는 상황.


동훈은 무심코 뒤로 가려는 이현을 잡고 자연스럽게 슥 돌려 문 바깥쪽으로 물러나게 만들었다.

이현이 뒷걸음질로 다시 문 안에 들어가려 했다면 동훈의 움직임 덕에 반대로 문 바깥으로 빠져나오게 한 것이다.


왜 갑자기 이현을 도와주고 싶었을까?


버근가? 그래, 버그일지도.


제 앞가림에 바빠 좀처럼 남을 돕지 않던 동훈이 호의를 베푼 건 늘어난 잔고만큼의 배포 덕일지도 몰랐다.


“제가 여기 길을 잘 몰라서. 안내 부탁드려도 될까요? 바쁘시다면 제힘으로 찾아보겠습니다.”


동훈은 스스로도 자기가 이렇게 말을 조리 있게 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이현의 부담을 덜어내고 자연스럽게 이곳에서 빠져나갈 구실을 주는 말이었다.


이현의 눈가에 의외의 빛이 떠올랐다.

탈출구를 만난 안도감일까, 남자의 수작에 대한 지겨움일까.


그래도 이현 또한 동훈의 순수한 호의를 느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좋아요. 안내해드릴게요.”


이현의 차분하고 매끄러운 목소리는 고혹적이었다. 가까이서 들으니 더욱.


물론 이에 동의하지 않을 사람도 많을 것이다. 얼음공주의 감정 없는 냉정한 목소리를 두려워하는 사람도 많았으니까.


“감사합니다. 한시름 덜었네요. 호텔이 너무 넓어서 길을 찾을 수가 있어야죠.”


동훈의 너스레에 이현이 살짝 웃었다.

그녀의 미소는 바위틈에 끼어 숨겨진 채송화 같은 매력이 있었다. 아무나 볼 수 없는 그녀의 웃음은 아주 관찰력 좋은 사람만이 발견할 수 있었다.


관찰력 없는 이들은 그저 이현이 숨을 조금 소리 나게 쉬었다고만 여길 테지.


이현과 다투던 저 턱시도를 입은 남자처럼 말이다.


“거기 당신. 길 묻는 건 직원한테나 물으시고. 이현이 기분 나쁘다고 한숨 쉬잖아. 송이현, 너 나랑 아직 할 말 남았어.”


턱시도의 남자는 그렇게 말하며 동훈을 기분 나쁘게 머리부터 발끝을 훑듯이 쳐다봤다. 사람을 깔보는 삼백안의 눈동자는 오만하게 번들거렸다.


남자는 동훈을 스캔하는 걸 마친 뒤 명품이 하나도 없는, 평소 편하게 입는 평상복 차림을 한 동훈의 착장에 혐오를 섞어 덧붙였다.


“격 떨어지게.”


그리고 덧붙여 남자의 곁에 딱 붙어 수행하는 호텔 직원 하나에게 귀엣말로 속삭였다. 지배인쯤 되는 직책 있는 이라 나이가 마흔은 넘어 보이는 중년의 직원이었다.

남자는 당연하다는 듯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그에게 반말로 지껄였다.


“뭐하자는 거야? 호텔에서 밥 한 끼 먹자고 돈 모아서 오는 서민들이랑 내가 엮여야겠어? 수준 떨어지게 이게 뭐하는 짓이야?”


작가의말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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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행운(1) 22.10.16 529 8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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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퇴사각(2) 22.10.13 551 18 20쪽
27 퇴사각 22.10.12 547 13 14쪽
26 함 뜰까? +1 22.10.11 576 12 17쪽
25 반왕 22.10.10 624 12 20쪽
24 손동훈의 혈맹 22.10.10 628 13 12쪽
23 PK유저의 수수께끼 22.10.09 657 11 12쪽
22 PK 유명인 +1 22.10.08 656 13 17쪽
21 과감하게 가자 쫄지 말고 22.10.06 659 15 16쪽
» 안녕, 다엘촌 22.10.06 722 11 18쪽
19 [내가니싸부] 22.10.05 765 11 19쪽
18 퀘스트 완료 22.10.03 818 11 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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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메인퀘스트 22.09.30 887 15 19쪽
15 자리 22.09.29 901 18 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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