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캔커피+1

웃는 아이 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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캔커피
작품등록일 :
2014.05.13 10:54
최근연재일 :
2015.08.14 17:42
연재수 :
21 회
조회수 :
53,926
추천수 :
1,767
글자수 :
85,239

작성
15.08.14 17:38
조회
2,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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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
글자
19쪽

#20

DUMMY

처음 왔을 때 나를 찔러보던 시선들은 사라졌다.

오히려 황송할 정도로 밝게 대해주었다.

병실과 데스크에 설치된 에어컨의 힘이 컸다.

낡은 창문들은 열효율이 높은 새것으로 교체되고 있었고, 무소음 공법을 도입한 내부공사도 진행되었다.

기술자들은 법적 문제를 감안해서, 벽과 천정을 뜯기 전에 꼼꼼히 살피고 사진을 찍어 ‘증거’로 남겨 놨다. 그리고 그 증거가 필요한 것인지 형에게 물어왔다.

수간호사도 사진기를 들고 증거수집에 동참했다.

훈은 마른 멸치처럼 변해갔다.

아침 인사는 “오늘은 뭘 하고 싶어?”였다.

나는 녀석의 눈을 들여다보며 하나씩 열거했다.

‘노래듣기, 책읽기, 퍼즐, TV보기, 병원 대탐험, 지구본으로 가고 싶은 나라 고르기.......’ 훈은 곧바로 눈신호를 ‘.......목욕.’ 주었다.

“목욕하고 싶어?”

확인차원에서 다시 묻자, 눈을 깜빡거렸다.

나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형이 도와주었다.

병원 안에 있는 목욕실 중에서 침대차가 들어갈 수 있는 곳을 알아봐주고, 욕조에 물을 받아주었다.

훈이 욕조에 들어갈 때, 형이 먼저 욕조에 들어가서 훈을 받아주었다.

이끼가 벗겨지듯 때가 밀렸다.

살아 있는 증거라고 생각하니, ‘조금만’ 더럽게 느껴졌다.

“좋아! 좋아! 잘했어!”

우리는 가만히 있는 훈을 끊임없이 독려하며 몸을 씻겼다.

등과 옆구리에 붉은 종기가 솟아 있었다.

종기는 다른 피부보다 생기 있어 보였다. 염증 부위가 더 생생해 보이다니! 얄궂은 신체 반응이었다.

훈이 자신의 광팬이라는 사실은 안, 유리는 특수 설계된 휠체어를 보내주었다.

휠체어보다는 침대차에 가까운 구조였는데, 덕분에 목욕 후에 산뜻한 몸과 마음으로 나들이 했다.

병이 나기 전, 훈은 계주대표를 할 정도로 발이 빨랐었다.

그런 녀석이 미라처럼 시들었지만, 인생무상을 느끼기엔 훈의 태도가 진지했다.

녀석은 산들바람에 섞여 있는 아카시아 향을 즐기고 있었다.

형이 매점에서 달디 단 아이스크림을 가져왔다.

나는 돗자리를 깔듯 물티슈를 꺼내서 훈에게 아이스크림을 먹이기 시작했다. 녀석은 넙죽넙죽 잘 받아먹었다.

“뭐야! 죽보다 훨씬 빨리 먹잖아! 이렇게 잘 먹다니! 그동안 밥투정했던 거야?”

‘크크크크’ 훈의 입 꼬리에서 기괴한 웃음이 보였다. 밥투정 맞구나!

차가운 한랭전선이 다가오는 기분이 들어서 옆을 돌아보니, 수간호사가 잡아먹을 듯 노려보았다.

그녀는 아직도 나를 쥐벼룩처럼 대했다.

어쩌면 사무적인 착오로 그녀 방에만 에어컨이 설치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녀 표정으로 보니........ 한 번 알아봐야겠다.

수간호사는 도끼눈을 뜨고 분명하게 말했다.

“웃어!”

“........”

“사진 찍어줄 테니깐. 웃으라고!”

신경질적인 뉘앙스와 협박에 가까운 음성처리....... 내용과 목소리가 일치하지 않았다.

형은 명령에 복종하는 군인처럼 바보 같은 미소를 지었다.

그는 ‘날 따라 해봐요.’ 식으로 나를 보며 방긋했다.

“사진 때문에 억지웃음을 짓는 건 싫어요. 사진을 찍고 싶으시면, 진짜로 웃고 있을 때 찍어주세요.”

요양소 최고 노처녀 수간호사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은 두 가지 경우에만 가능했다.

귀머거리거나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거나.

그 외 경우에는 혹독한 보복이 뒤따랐다. 그녀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네가 진짜 웃음의 의미를 알기나 해?”

오호! 인생 경험으로 날 눌러 보시겠다? 좋다! 나도 듣고 보고 배운 게 있다.

“그럼요! 매점에 걸려 있는 사진으로 봤어요.”

슬픔은 고이지 않고 흐른다.

슬픔이 흐르고 흐르면 모난 돌이 둥근 조약돌이 되듯이 분노와 원망이 환한 웃음으로 변한다. 간단한 공식이 만들어진다.

많이 슬퍼할수록 많이 웃을 수 있다.

나와 수간호사 사이에 낀 형은 피에로 미소를 유지했다.

“훈이는 사진 찍을래?”

그녀의 표정은 나를 대할 때와는 완전히 달랐다.

너무나 다정해서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싶을 정도였다. 이건 명확한 인간차별이었다.

찰칵!

나는 훈과 형의 소품으로 사진에 참여했다.


현정이가 보내오는 문자가 쌓였다.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었는데, 대부분 날 저주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녀에게 보상을 받아야 했다.

- 나에게 그런 식으로 너의 욕구를 해결할 생각이라니, 넌 변태야!

그녀는 제대로 화가 나 있었다. 내가 원하던 반응이었다.

- 나한테 이런 일을 시키지 마. 너무 힘들어. 내가 잘못했어.

- 너 때문에 내가 시집 못가면 책임 질 거야!

나는 곧바로 결코 책임 질 수 없다고 답장을 날렸다. 그리고 내 뜻대로 안 해주면 ‘절차’를 밟게 될 거라 했다.

길고 지루한 절차의 끝에는 퇴학이든 정학이든 내신 점수 삭감이든....... 다양한 옵션이 기다리고 있었다.

견디다 못한 그녀가 날 직접 찾아왔다.

예상보다 훨씬 야한 복장이었다.

아주 짧은 반바지에 반팔 티셔츠.

은단풍에서는 죽음을 연상시키는 검은 양복이나 어두운 넥타이 정장 차림을 반기지 않았다.

오히려 현정처럼 재기발랄하고 ‘간소한’ 복장을 좋게 평가했다.

병실 문을 연 그녀는 한동안 말없이 서 있었다.

나는 훈의 관절운동을 하고 있었다.

훈은 팔다리를 움직이지 못했지만, 외부에서 조금이라도 움직여 줘야 혈액순환에 도움이 되었다.

연희는 과산화수소의 노말 농도를 퍼센트 농도로 환산하고 있었다.

분명 같은 농도의 같은 용액인데, 환산된 농도로 표시해보면 뭔가 느낌이 달랐다.

“잠깐 얘기할 수 있을까?”

현정은 나에게 조용히 말했다.

“물론이지.”

나는 VIP룸으로 안내하는 웨이터처럼 왼팔로 병실 안쪽을 가리켰다.

“여기서? 굉장히 사적인 건데?”

현정은 숫자를 세듯 할아버지와 연희 그리고 훈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나갔다와 그게 좋겠어.”

연희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답은?”

내가 연희에게 물었다.

“삼 퍼센트.”

정답이었다.


느티나무 아래 의자에 앉았다.

나무에는 송진처럼 굳어진 매미허물이 여러 개 붙어 있었다.

현정에게 아침에 사용했을 법한 샴푸냄새가 났다.

레몬과 알로하가 적절히 배합된 향이었다.

“이렇게 될 줄 정말 몰랐어.”

그녀는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마치 자신이 가장 큰 피해자라는 듯.

“내가 왜 그랬는지 알아?”

알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는다.

현정이가 자세히 설명해준다면, 어렴풋이 이해할 순 있겠지만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다.

“너는 나에게 너무 차가웠어. 그래서 너랑 친하게 지내고 싶었던 거야.”

그랬구나! 그래서 연희를 원조교제로 몰아가고, 나를 왕따 제조기로 꾸몄구나! 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나는 네가 나에게 도움을 청할 줄 알았어. 연희를 어떻게 도와주면 좋겠냐고 물어볼 줄 알았어. 그렇게 했다면 모든 것이 다 잘 됐을 거야.”

그녀는 말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어트렸다.

악어의 눈물로 치부하기엔 눈물방울이 너무 컸다.

그녀의 내면을 알 순 없었지만 일을 꾸미는데 탁월한 능력이 있는 건 분명했다.

외교부나 마케팅 부서 프로젝트를 맡으면 꽤 잘해낼 것이다.

되짚어 보자면, 담임이 나에게 연희에게 신경 써라! 라고 말했을 때, 내가 현정에게 도움을 청했다면 마법처럼 일이 잘 풀렸을 것이다.

어쩌면 나는 우수 봉사활동 상장을 받았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현정은 그녀의 바랐던 대로 나와 더 친하게 됐을 것이다.

내가 그녀에게 손수 구운 쿠키를 그녀에게 선물 했을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연희에게 초콜릿 하나만 휙 던져주고 나 몰라라 했다. 그게........ 편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문제의 핵심에 다가가는 대신, 요식행위로 때우려 했다.

나의 요식행위는 현정의 시나리오에서 벗어나 있었다.

하지만 그 후 일어난 원조교제 루머는? 그녀답지 않은 무리수였다.

그것만 없었어도 일은 이렇게 커지지 않았다.

“초콜릿을 받은 연희가 미웠어. 쿠키를 준 건 나였잖아! 그런데 나에겐 선물도 주지 않고, 어떻게 연희에게만 초콜릿을 줄 수 있니!”

헐....... 그녀는 말 그대로 폭풍처럼 울어댔다. 여자의 질투는 정말........

“이제라도 됐어. 준비는 다 됐어?”

“정말 나에게 그 짓을 시킬 거야? 그런 건 정말 못하겠어. 차라리 다른 걸 시켜 줘.”

그녀는 내 허벅지 위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눈물을 따라 화장이 지워지고 있었다. 울기 전에는 몰랐는데, 가벼운 눈 화장을 하고 있었다.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면 눈치 채지 못했을 것이다.

“그것도 하고, 다른 것도 할 수는 있어. 하지만 그것을 안 하는 건 안 돼.”

나는 차갑게 말했다. 타협의 여지를 남겨두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질렀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어떻게 네가 나한테........”

그녀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녀의 푸념은....... 내가 하고 싶은 말이기도 했다.

나는 아직도 그녀가 왜 그랬는지 알지 못한다.

희미하게 이해할 뿐이다.

안다는 것은 그것을 그대로 해낼 수 있음을 뜻한다........ 나는 그녀처럼 할 수 없다.

우리는 인생 모든 것을 알 수 없다. 그저 나름대로 짐작하고 이해할 수 있을 뿐이다.


‘사랑은 자신 외에 무언가가 존재함을 깨닫는 것이다.’


블로그에 있는 훈이 일기는 그의 증세가 심해짐에 따라 철학적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아주 작은 일에도 감사했고, 아무리 큰일에도 화내지 않았다.

어머니가 그냥 같이 죽자며 가스를 열어놨을 때에도 그는 반항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평소보다 일찍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면, 이미 한줌의 재가 되었을 것이다.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산다. 어머니 아버지 죄송해요.’


그날 나는 훈의 발을 마사지하면서 갑자기 생각난 듯 말했다.

“아참!....... 널 만나서 좋았어. 살아 있어줘서 고마워.”

훈에게 꼭 하고픈 말이었다. ‘살아줘서 고마워.’ 마사지 자극에도 반응 없던 그의 발이 움찔했다. 코뿔소와 같은 콧김 소리가 들렸다.


훈과 나는 생일 파티에 적합한 몸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 특수 훈련을 했다.

훈은 한눈에 보기에도 몸 상태가 나빠졌는데, 그렇기 때문에 그 어느 때보다 ‘목표’가 필요했다.

“괜한 짓이 아니었으면 좋겠구나.”

훈의 체력 훈련을 겸한 관절운동을 하고 있을 때, 할아버지가 말했다.

그는, 훈이 있을 때 말하진 않았지만, 한시라도 빨리 죽는 게 서로를 위하는 일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그런 논리라면 삶의 의미가 없어진다.

삶이 생략 가능한 풀이과정이라면 모두가 서둘러 죽어야 한다.

생명이란 문제는 언제나 죽음이란 답으로 이어진다.

출발과 끝이 명확할수록 그 과정은 소중해진다.

몸에 깃든 생명이 다할 때까지 최선을 다하는 것은........ 그것이 고통일지라도....... 존중하고 존중받아야 한다.

훈은 내색하지 않았지만 생일파티를 기대하고 있었다.


약화되는 씹는 능력에 맞춰 죽이 묽어졌다. 이제 죽보다는 국에 가까운 형태였다. 먹는 시간은 점점 더 길어지고 있었다. 훈의 목소리가 들렸다.

‘쭌:짱! 나도 고마워.’

깜짝 놀라 고개를 들어보니, 죽을 먹이던 내가 훈 앞에서 졸고 있었다.

훈은 코끼리처럼 큰 눈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듯 평화로운 눈빛이었다.

“방금 네가 말한 거야?”

대답이 없었다. 그의 표정이 때아니게 새침해보였다.

“깜빡 졸았어. 뭐하고 싶어? 유리가 아주 큰 세계지도를 보내줬는데, 오늘은 새로운 실크로드를 개척해볼래?”

훈은 황제처럼 거룩하게 눈을 꿈뻑했다.

나는 훈의 명령에 따라 미얀마와 인도, 파키스탄과 이란을 가로질러 터키에 이르는 훈의 실크로드를 만들었다.

터키의 이스탄불에서 배를 타고 그리스로 들어갔는데, 가는 곳마다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우리가 가져간 상품은........ 알코올 솜?

“뭐가 좋을까?”

꽤나 고민스러웠다.

“웃는 아이 출판사에서 발행한 민서의 그림엽서가 어떨까?”

연희가 불쑥 끼어들었다.

훈의 눈동자가 커졌다.

연희는 훈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하나, 둘, 셋, 넷, 다섯! 천천히 말하며 수를 셌다.

그녀가 큰 소리로 열을 외치자, 병실 문이 열리면서, 폭죽이 터지며 형과 간호사들이 들어와 생일 축하 노래를 불렀다.

“이런! 미친놈들.”

깜짝 놀란 할아버지가 투덜대셨다.

아직 건강하다는 증거였다.

훈을 둘러 싼 사람들은 박수를 치며 축하해주었다.

그들은 훈이 결코 뜯어보지 못할 포장지에 감긴 선물을 건넸다.

훈은 순식간에 한 아름 선물상자를 받았다.

내가 훈의 손을 대신했다.

포장지를 곱게 뜯고, 선물을 꺼내서 훈과 모두에게 보여주었다.

책, 음반, 만년필, 노트, 야구공, 헤드폰, 스피커, 인형, 전문가용 색연필과 파스텔, 그림액자........ 훈은 ‘오홋’ 콧김을 냈다.

기분 좋다는 신호였다.

우리는 여세를 몰아 훈을 침대 휠체어에 태우고 매점으로 향했다.


임시 콘서트 홀로 개조된 매점에서 유리가 훈을 위해 노래했다.

매점에는 다른 환자분들도 많이 와계셨다.

유리의 노래는 단순한 생일파티를 축제로 만들었다.

누군가 내 어깨를 톡톡 건들었다. 아버지였다.

그에 얼굴에는, 내가 전에 보지 못했던, 미소가 그득했다.

“이미 와 계신데....... 널 먼저 보고 싶다는 구나.”

나는 침대 휠체어 손잡이를 연희에게 넘겨주고 아버지를 따라갔다.


나를 본 그 분은 바닥에 넙죽 엎드렸다. “고맙습니다.” 훈과 너무 닮아서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훈의 아버지였다.

당황한 나는 그 분을 일으켜 세웠다. “훈은 몰라요. 부모님이 외국으로 돈 벌러 간 줄 알죠.” 갑자기 훈의 아버지가 날 끌어안았다.

훈의 어머니는 나의 아버지에게 허리를 숙이셨다. “교수님 고맙습니다.” 아버지는 도움이 되어서 기쁘다며 훈의 어머니의 손을 잡아주셨다. “지체하지 마시고, 어서 빨리 아들을 봐야죠.”


부모님을 만난 훈의 가슴이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 실로 오랜만에 보는 웅장한 심호흡이었다. 그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아들을 안아주었다.

누구도 대신 할 수 없는 포옹이었다.

매점은 콘서트홀에서 전시장으로 모습을 바꾸었다.

천정에는 ‘제 1 회 웃는 아이 출판사 전시회.’라는 현수막이 걸렸다. 액자에는 병원 곳곳에 숨겨져 있던 민서의 작품들이 들어 있었다.

수간호사와 사진작가들이 공사현장을 시작으로 병원 구석구석 누비며 찾아낸 것들이었다.

그들은 작품 감별을 형에게 맡겼는데, 감별 전의 작품들을 ‘증거’라고 불렀다.

대부분의 증거들은 민서의 작품으로 판명되었다. 작품수와 퀼리티로 추측해 보건데, 민서는 마지막까지 치열하게 생을 불태우고 있었다.

민서가 구석기 시대에 태어났다면, 인류유산으로 남게 될 동굴벽화를 그렸을 것이다.

훈의 블로그에 있던 시와 그림들도 조명 받았다.

훈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침대 휠체어를 밀며 전시회장을 오갔다.

나는 거리를 두고 빈자리에 앉았다. 아버지가 내 옆으로 오셨다.

“네가 원하던 것이 이거니?”

그는 훈의 가족을 보며 물었다.

“도와주셔서 고마워요.”

“뭘. 아들이 부탁한 건데, 꼭 해줘야지.”

간절히 듣고 싶었던 따듯한 목소리였다.

사진기를 들고 사람들을 찍는 수간호사가 보였다.

웃는 아이 출판사의 작품들은 잔잔한 웃음을 주었지만, 그녀가 선호하는 활짝 핀 웃음을 몰아주진 못했다.

뭐랄까, 박장대소하는 웃음을 유발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뭔가 있다 싶으면, 주저 없이 셔터를 눌렀다.

별거 없는 장면에서도 셔터를 누르는 걸 보면, 관대한 성격을 지닌 것이 분명했다.

그녀를 도와줄 외인부대가 무대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른바 ‘현정이와 친구들.’ 그들은 왕따 사건의 주역들이었다.

시한부 환자들을 웃기는 것은 전문가들에게도 어려운 과제였다.

현정이가 잘해낼 수 있을까? 그녀는 잘해야만 했다. 그것만이 ‘절차’를 피할 수 있는 유일한 면죄부였다. 공연이 시작되고........


‘한 아주머니가 여학생에게 길을 묻는다. 학생 유진박물관으로 가려면 어디로 가야 해?........ 여학생은 껌을 씹으며 성의 없이 - 몰라요. 라고 대답한다. 아주머니가 다시 묻는다. 학생 이 근처 가까운 은행은 어딨어? 여학생은 한층 더 불손하게 - 몰라요! 라고 내뱉는다. 아주머니가 다시 묻는다. 학생 이문 사거리가 어디야? 여학생은 아주머니를 보지도 않고 저 그런 거 몰라요. 라고 대답한다. 화가 난 아주머니가 학생에게 따져 묻는다. 학생! 도대체 어느 학교 다녀....... 저요? 은단풍 고등학교 다니는 데요? 왜요?........ 움찔하는 아주머니는 약간 뜸을 들인 후, 반가운 미소를 띤 얼굴로 천천히 말한다....... 은단풍 고등학교 다닌다고? 어쩐지! 목소리도 좋고 인간성도 참 좋게 느껴지더라니. 나도 거기 나왔잖아. 어쩜 그때랑 변하게 하나도 없을까?’


이게 웃긴가? 나는 멍하니 현정이의 공연을 보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불꽃놀이 같은 웃음을 터트렸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굉장한 성공이었다.

사람들이 미친듯이 웃어대자, 수간호사는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바빠졌다.

현정이와 아이들이 준비해온 레퍼토리는 TV중계를 해도 될 정도로 다양하고 재밌었다.

현정이가 아니라면 불가능한 작품들이 눈에 보였다.

내 곁에 앉아 계신 아버지도 내 등을 때리며 웃어댔다.

분명 처음일 텐데........ 얼마나 많은 준비와 연습을 했는지 모든 것이 자연스러웠다.

환자들의 왁자지껄한 웃음을 보던 현정과 나는 눈이 마주쳤다.

오늘도 눈 화장을 했구나........ 쉽게 알 수 있었다.

공연을 보면서 현정에 대한 엉킨 감정들이 스스로 풀리는 것을 느꼈다.

흔적은 사라지지 않겠지만, 예전처럼 꼬인 형태는 아니었다.

갑자기 현정이 무대에서 내려와서 연희에게 달려갔다.

현정은 연희을 껴안으며 ‘내가 잘못했어!’ 울음보를 터트렸다.

다 큰 여학생 둘이 우는 모습은 남자인 나를 숙연케 했다.

공연에는 남자로 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보여주는 내용도 있었다.

남자로 사는 것은 여자로 사는 것보다 훨씬 어려웠다. 왜냐고?........ 여자들을 상대해야 하니깐.

“정말 쟤가 걔야?”

뒤늦게 오신 어머니가 현정을 보면서 내게 물었다.

“정말 모르시겠어요? 이런 공연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은 따로 있어요. 쟤는 환경에 맞게 제 능력을 발휘했던 거예요.”

현정이의 시나리오와 공연에는 밀고 잡아당기는 팽팽한 긴장감이 있었다.

뭐랄까? 그녀는 본능적으로 인간을 이해하고 있었다.

우리는 그녀에게 쉽게 빠져들었고, 무척이나 재밌었다.

아주 한참 후에 어머니가 중얼거렸다.

“........ 누군들 아니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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