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캔커피+1

웃는 아이 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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캔커피
작품등록일 :
2014.05.13 10:54
최근연재일 :
2015.08.14 17:42
연재수 :
21 회
조회수 :
53,909
추천수 :
1,767
글자수 :
85,239

작성
15.08.14 15:50
조회
2,182
추천
78
글자
10쪽

#11

DUMMY

그동안 모의고사 때마다 나를 앞서던 존재가 있었다.

놈은 올해 초 홀연히 사라졌다.

전국적으로 시행되던 모의고사 성적 분포가 그것을 말해주었다.

녀석이 없어졌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머리 위에 있던 모자가 바람에 날아간 느낌이었다.

그 녀석이 훈이었다고? 국제 올림피아 수학대회에 나가서 우승을 차지한……. 녀석이 없었다면 내가 우리나라 대표로 뽑혔을 것이다……. 녀석은 노력만으로는 절대 도달할 수 없는 경지에 이른 운 좋은 천재였다.

힉스 입자를 발견해서 노벨상을 타겠다는 야망을 품고 책을 파고 있을 줄 알았는데……. 은단풍 요양소에서 식물인간처럼 누워 있다니! 믿기지가 않았다.

반드시 확인하고 넘어가야 했다.

“작년 스페인에서 열렸던 국제 올림피아에 네가 나갔었니?”

나는 죽을 먹이면서 물어보았다.

훈은 잠시 입 동작을 멈추고 날 쳐다보았다.

그의 눈에 눈물이 맺히려 했다.

과거의 영광을 되새기는 건, 지금 처지에서 너무 가슴 아픈 일이겠지.

“이제 알겠어. 네 사진을 봤어. 살이 여위어서 매칭이 안 됐는데, 너였구나. 제타 함수를 급수로 표현하려고 하는데 말이야. 어떻게 전개하는 게 좋겠어?”

‘로....... 렌....... 츠.’

녀석은 필사적으로 말했다.

한 음절 발음할 때마다 훈은 엄청난 에너지를 쏟아야 했다....... 때문에 녀석은 표정과 눈짓으로 의사를 전달했다.

로.렌.츠. 대화가 통한다.

그는 잠시나마 해방감을 느꼈을 테고, 나는 잠시나마 그의 불편을 실감했다.

갑자기 그에 대한 의문이 샘솟았다.

언제부터 병이 시작된 걸까? 녀석의 장래희망은? 지금은 무슨 생각을 하며 시간을 보낼까? 왜 가족들은 그를 돌봐주지 않는 걸까? 코앞에 있는 죽음을 알고는 있을까? 누구보다 뛰어난 잠재력과 능력을 가졌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 어떤 느낌일까?

“일 층 도서실에 가봤는데, 읽을 만한 책에는 어김없이 노란 스티커가 붙어 있더라고. 상당히 두꺼운 책도 있던데........ 시간이 많이 드는 일이었을 텐데........ 오늘부터는 내가 읽어줄까?”

훈의 눈동자가 내 뒤에 있는 곳을 가리켰다.

뒤돌아보니, 냉장고 위에 수학 정석이 놓여 있었다.

분명 어제에는 보이지 않던 책이었다.

예쁜 스티커가 붙어 있었는데, 여학생의 책이 분명했다.

병실 내부에 화장실 겸 목욕실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인기척이 났다.

문이 열리고 짐작대로 여학생이 얼굴을 내밀었다……. 웅녀였다.

“여기서 뭐해?”

그녀는 자연스레 길에서 마주친 것처럼 말했다.

“밥 먹이고 있어.”

뜻밖에도 나 역시 태연했다.

서로 서로에게 놀라워하기엔, 상황이 애매모호했고 환경도 어수선했다.

“잘해. 너무 서둘면 힘들어해.”

그녀는 훈을 바라보며 나에게 말했다.

“알아. 그러는 넌?”

“우리 할아버지셔.”

그녀는 침대벨트에 묶여 있는 할아버지에게 가서, 벨트를 풀고 할아버지의 자세를 바꿔주었다.

할아버지는 미라처럼 말랐는데, 골격이 큰 편이었다.

“나 때문에 고생이 많구나.”

할아버지는 웅녀에게 몸을 맡기며, 한탄하듯 말했다.

그는 가벼운 경련으로 팔을 휘둘렀다.

그의 주먹이 웅녀의 왼쪽 귀를 스쳤다. 훈은 깜짝 놀란 표정이 되었다.

내가 수저를 가져갔지만, 녀석은 입을 열지 않았다. 아직 반 그릇도 못 먹었는데 벌써 배가 부른 걸까? 녀석은 집요하게 웅녀를 쳐다보았다. 그녀를 도와주라는 뜻이었다.

나는 웅녀 할아버지의 팔을 붙잡았다.

웅녀는 나의 도움을 자연스레 받아주었다.

빌려준 책을 돌려받는 것처럼 당연하게 여겼다.

예의상 ‘고마워.’라고 한마디 해줬다면, 좀 더 자연스러웠을 텐데........ 아쉬웠다.

“왼쪽 엉덩이에 종기가 생겼어요. 베개를 깔아서 옆으로 누일게요.”

그녀는 능숙하게, 마치 내가 수학문제를 풀듯이, 베개로 할아버지 몸을 고정시켰다.

할아버지가 경련을 일으키며 팔꿈치로 내 턱을 쳤다. 얼굴 전체가 욱신거렸다.

“미안하네. 내 몸이 내 몸이 아니라서.”

“괜찮습니다. 빗나갔어요.” 나는 웅녀를 보며 말을 이었다. “이거 제대로 맞으면 멍들겠는데.” 농담으로 말했는데, 그녀의 대답은 진지했다. “알아.”

생각났다. 눈이 멍들었던 웅녀의 얼굴이.

내가 주춤하고 있을 때, 그녀가 다시 말했다.

“이제 됐어. 훈이 배고프겠다.”

명령에 가까운 말투였다.

나는 그녀 말을 믿고 훈에게 죽을 먹였는데, 웅녀는 그 후로도 삼십 분 이상 할아버지를 뒤적거렸다.

내가 도왔다면 오 분이면 끝났을 일이었다.

그녀는 훈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훈이 요양소에서 왔을 땐 어느 정도 말할 수 있었고 둘은 많은 대화를 주고받았다.

“척척박사 수준이었어. 내가 모르는 걸 다 가르쳐줬거든.”

그녀는 병상 옆에 앉아 수학 정석을 넘기며 말했다.

훈의 눈동자에 그녀의 모습이 들어와 있었다.

병약한 몸이었지만 녀석도 사춘기를 앓고 있었다.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자연스레 녀석의 감정이 읽혔다.

뜻하지 않게 남의 일기장을 훔쳐본 것 같아 미안했다.

훈이 눈을 깜빡거렸다. 짧게 한 번, 길게 두 번......... 모스신호 같았다.

신호는 연희가 책장을 넘길 때마다 발생했다. 그런 거였구나.

“넘기는 속도가 너무 느려. 고삼이라면 두 시간 안에 정석 한 권을 읽을 수 있어야 해. 훈이 밥을 다 먹는 동안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봐. 중간에 모르는 내용이 나오면 표시를 해두고 건너뛰어. 내가 가르쳐줄게.”

내가 말하자, 웅녀는 정석을 내려놓고 날 쳐다보았다. ‘네가 무슨 상관이야!’라고 따지는 눈치였다. 맞는 말이다.

나의 괜한 오지랖일 뿐이다. 머쓱해졌다.

훈이 목을 움직이며 힘겹게 신음을 냈다.

“넌...... 할...... 수....... 있........어.”

쉰 소리가 섞인 가냘픈 목소리는 어딘지 모르게 가슴을 울렸다.

훈에겐 미래가 없다. 오늘 하루 무사히 넘겼다고 해서, 내일 더 건강해지지 않는다.

빗물에 녹는 석회석처럼 생명이 씻겨 내려가고 있다.

하루살이 같은 인생. 녀석이 할 수 있는 건, 근근이 시간을 끌며 버티는 것뿐이다.

그것도 혼자서는 불가능하다.

어느 날 횡격막 마비가 오면 그것으로 끝이다.

그전에 심장마비가 먼저일 수도 있고, 운 나쁘게 호흡곤란으로 몸부림치다가 숨이 끊어질 수도 있다.

그런 놈이 연희를 향해서 외쳤다. ‘할 수 있다고.’

고작 해야 정석 한 권을 두 시간 안에 훑어보는 것뿐이다.

누구나 할 수 있다.

연희는 사나운 시선을 거뒀다.

훈 앞에서 칭얼대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을 것이다.

“할 수 없어도 해야 해. 수의사가 되고 싶다며?”

나는 쐐기를 박듯 말했다.

그녀가 눈을 치켜떴다.

그녀의 눈동자가 일렁거렸다.

자신의 장래 희망을 다른 사람이 들먹이는 게 싫었을 것이다. 특히 이뤄지기 어려운 경우라면…….

“네가 뭔데?”

연희는 책을 덮었다.

“호모 사피엔스.”

웅녀의 어처구니 없어하는 표정. 웃음을 터트린 것은 훈이었다.

덕분에 파편처럼 튄 죽들을 닦아내야 했다.

나는 죽들을 닦아내면서 결심했다. 훈을 웃기는 건 식전이나 식후로 하겠다고!

“너 정말 여기 왜 온 거니?”

그녀는 팔짱을 꼈다.

히스테릭한 여성 특유의 짜증이 돋보였다.

유치원생을 혼내기 전에 이유를 물어보는 선생님 같았다.

덧붙이자면 유치원생이 어떤 이유를 대든, 벌칙을 피하지 못할 것 같았다.

웅녀는 추문에 얽힌 나에 대한 소문을 알고 있을까? 만일 알고 있다면 어떤 의견을 갖고 있을까? 내가 여기에 온 이유는........

“의견 교환에 약간의 문제가 있었어.”

“네가 직접 찾아온 거야?”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을 선택하는 고등학생은 드물걸. 나도 배정받았어. 위대하시고 고귀하신 아버님께서 지정해준 곳이야.”

“봉사활동으로 대학교에 갈 셈이야?”

“내가 봉사활동 점수를 챙길 정도로 찌질해보여?”

나는 윗눈썹을 위아래로 움직이며 눈을 깜빡거렸다.

“치! 뭐야 그 바보 같은 표정은?”

“내 비밀 무기야. 이 표정으로 세상을 정복할 계획이야! 기대되지?”

나의 유머가 통할까? 보통은 통하지 않았다.

이 유머를 이해하려면 제타 함수의 멱급수가 무한으로 수렴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웅녀는 가는 눈초리로 나를 쳐다보았다.

“눈썹을 움직이는 속도를 높이면 가능성이 있어 보여. 다시 해봐. 내가 시간을 재 줄게. 일 초에 백만 번 시작!”

놀랍게도 그녀는 나의 유머를 받아주었다.

하루에 두 번씩이나 대화가 통하다니! 폭풍 같은 감동이 밀려왔다.

훈에 죽을 먹이지 않고 있었다면, 내가 조금이라도 방심을 했다면, 눈물 흘릴 뻔했다.

“고마워.”

나는 무심코 말했다.

“뭐가?”

그녀가 고개를 갸웃했다.

“덕분에 이곳 생활이 재밌을 것 같아.”

“고....... 마....... 워.”

훈이 말했는데, 나에게 고맙다는 건지 웅녀에게 고맙다는 건지 분명치 않았다.

훈은 나와 웅녀의 대화 속에서 잔잔한 즐거움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할머니가 지극한 정성으로 돌봐주셨지만, 대화가 절대적으로 부족했을 것이다.

그런데 십 대 둘이 그것도 남녀가 농담 따먹기를 했으니....... 얼마나 재미있었을까!

“자! 우리도 시작해 볼까!”

나는 수저로 죽을 떴다.

훈은 모범을 보이듯 필사적으로 죽을 받아먹었다.

우리 둘을 지켜보던 연희는 말없이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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