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캔커피+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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캔커피
작품등록일 :
2014.05.13 10:54
최근연재일 :
2015.08.14 17:42
연재수 :
21 회
조회수 :
53,934
추천수 :
1,767
글자수 :
85,239

작성
15.08.14 14:35
조회
3,074
추천
83
글자
12쪽

#3

DUMMY

쉬는 시간, 웅녀는 책상 위에 엎드렸다.

책상 위에 팔을 올리고, 손목을 겹치고 손목 위에 이마를 얹은 불간자세.

(불여우가 간을 파먹는 자세라고 해서, ‘불간자세’로 불린다.)

나는 책상 위에 초콜릿 상자를 놓았다.

수작업으로 만든 스위스 제품이었다.

압축 펄프를 사용한 포장지는 초콜릿의 질감을 흉내 냈다.

인기척을 느낀 웅녀가 고개를 들어 초콜릿 상자와 나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이유를 캐묻는 눈빛이었는데, 서두르는 기색은 없다.

상황이 분명해질 때까지 판단을 유보하겠다는 듯 차분했다.

나에게 초콜릿을 받고도 이렇게 차분할 수 있다니........ 조금은 신선했다.

보통은 얼굴을 붉히거나 남에게 알리겠다는 듯 호들갑 떨었을 텐데.

“좋아할 것 같아서.”

“........ 고마워.”

그게 전부였다.

그녀의 허세에 속은 것일지도 모르지만, 죽음 따위를 결심한 사람으론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뭐랄까? 건실 해보였다.

섣부른 판단일지도 모르지만 걱정할 필요 없어 보였다.

무엇보다 고급 초콜릿을 받고 나서 자살 따위를 할 여자는 이 세상에 없다.

한 가지 맘에 걸리는 것은 그녀 왼쪽 눈이 멍들었다는 점이었다.

넘어져서 생긴 것이 아니라, 제대로 한 방 맞아서 생긴 흔적이었다.

그러고 보니 여학생들이 ‘펜더 웅녀’라고 수군거리던 모습이 생각났다.

“얼굴은 왜 그래?”

“왜 그런 거 같아?”

그녀는 길게 대화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나는 어깨를 으쓱거리고 자리로 돌아갔다.

괜한 바보짓을 한 것 같았다. 초콜릿……. 내가 먹을걸.


수업이 시작되자, 웅녀는 무대에서 조용히 퇴장하듯이 엎드려 잠을 잤다.

그러니깐 네가 수의사가 되고 싶단 말이지? 아무리 열심히 자도 그건 어렵지 않을까?


야간 자율 학습이 시작될 때, 학교에서 빠져나왔다.

성적향상을 위한 집단행동에 동참할정도로 절박하지 않았다.

남아 있는 학생들은 공부라는 철장 속에 갇힌 가축처럼 보였다.

나라고 크게 다르진 않겠지만, 은근슬쩍 철장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간혹 복도에서 선생님에게 들켜도 선생님들은 모른 척 해주었다.

그들이 원하는 학업성적이란 일류대학에 합격하는 수준이었고, 대학 진학률을 높일 수 있다면 포르노 비디오를 보여줄지도 모른다,

나는 그 수준을 한참이나 뛰어넘고 있었다.

고등학교에서 탑 성적은 자유를 뜻했다.


홍대 거리 카페에서 블루 칵테일을 시켰다.

주위에는 젊은 사람들이 웃고 놀고 떠들며 춤추었다.

운 좋게 스타가 된 가수와 영화배우 그리고 좋은 집안에서 태어난 사람들이었다.

카페에는 골품제도의 시대적 배경을 암기해야 하는 고등학생의 족쇄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이곳이 좋다.

책 속에 나오는 골품제도를 경험케 해주는 곳.

이른바 살아 있는 교육현장.

재능과 능력 그리고 우월한 사회적 배경은 자유라는 퍼즐을 완성했다.

“준: 짱! 오늘도 왔구나!”

유리가 반가워하며 내 곁에 앉았다.

그녀는 선글라스를 쓰고 길거리를 나가도 알아볼 수 있는 유명한 아이돌 가수였다.

그녀의 연습실이 카페 근처였다.

유리는 실력도 좋았고, 끼도 넘쳐났다.

그녀가 몸담은 세계는 단순히 노래를 잘 부르거나 춤을 잘 춘다고 해서 성공할 정도로 만만한 곳이 아니었다.

그녀가 두각을 나타낼 수 있었던 것은, 이곳에 온 다른 사람들처럼 운이 받쳐주었기 때문이었다. 전문용어를 사용하자면 컨셉이 좋았다.

내가 꼽는 그녀의 장점은 자신이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어떻게 스타가 되셨습니까? 라는 질문을 받으면 그녀는 항상 운이 좋았다고 대답했다.

그녀는 운이 없으면 아무리 뛰어난 재능일지라도 세상에 알려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녀는 당장에라도 자기보다 노래도 잘 부르고 춤도 잘 추는 사람들을 열 명 이상 말할 수 있었지만, 그 열 명 모두 유리보다 인기가 별로였다.

유리는 자신보다 뛰어난 가수 지망생들이 많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녀는 소속사와 앞으로 오 년간 연애를 하지 않기로 계약을 맺었다.

그래서 나와의 관계는 그저 친구였다.

그녀와 내가 친하게 된 계기는 나의 어머니가 S 그룹 회장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후였다.

S 그룹은 그녀 소속사의 최대 주주였다.

“오늘, 사람이 많아 보이는데?”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평소보다는 왁자지껄한 분위기였다. 월드컵 시즌의 생맥줏집처럼 들뜬 열기들.

“요한의 생일이야.”

요한은 한창 뜨는 영화배우였다.

하버드대 출신으로 할리우드 영화에도 몇 편 출연했었다.

카페 중앙에 앉아 있는 그가 보였다.

여자배우들과 조연 배우들이 그를 왕처럼 떠받들고 있었다.

최근 그가 주연을 맡은 ‘왕세자’라는 영화가 개봉되었다.

요한이 술잔을 들고 내 자리로 건너왔다. 피난보다는 영토 확장을 위한 원정이었다.

“자네가 준짱이지! 비쥬얼 좋은데, 무슨 영화에 출연했어?”

가볍게 혀 꼬는 소리가 섞여 있었는데, 미국 생활의 흔적인지 음주 효과인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두 마리의 개가 서로 냄새를 맡듯이 나에 대해 알고 싶어 했다.

그의 미소는, 언젠가는 황제가 될 것을 꿈꾸며, 주변 국가들과 동맹을 맺으려는 지략가의 것이었다.

아마도 동맹이 굳건해지고 형세가 유리하게 돌아가면 가장 먼저 배신을 때리고 본격적인 정복전쟁을 시작할 것이다.

나는 그가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려 할 뿐이었다.

인생의 게임은 규칙과 가능성을 망각하는 순간 파멸하는 법이니깐.

“생일 축하해.”

나는 블루 칵테일 잔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요한이 나보다 다섯 살 정도 많았지만, 존칭은 붙이지 않았다.

카페에선 암묵적으로 반말 사용을 표준으로 삼았다.

“멋진 빛깔인데. 나도 같은 걸로 하나!”

그는 내가 든 블루 칵테일을 본 후, 바텐더에게 말했다.

“그건 준:짱!의 것이야. 다른 사람에겐 줄 수 없어.”

바텐더는 냉담하게 말했다.

상대가 어마어마한 스타라는 사실을 감안할 때, 어마어마한 사건이었다.

‘긴급뉴스! 바텐더, 대스타의 청을 거절하다!’ 그러나 뉴스에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바텐더의 냉담함은 이 카페의 매력이었다.

스타들에게 이런 대접을 해주는 곳은 이곳이 유일했다.

회원제로 유지되는 카페는 비밀유지에도 철저했고, 간혹 들어오는 기자들을 귀신처럼 잡아냈다.

하지만, 비밀로 해야 할 만큼 퇴폐적인 곳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런 것이 카페의 비밀이었던 것 같다.

신문기자가 밀착취재에 성공했다고 해도, 뉴스가 될 만한 내용은 없어 보였다.

“준짱! 네가 좀 말해줘!”

요한은 나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는 오늘 나를 처음 보았지만 마치 오래전부터 친구였던 것처럼 말했다.

녀석의 자연스러운 말투에 나도 잠깐 헷갈렸다.

“블루 칵테일은 미완성 작품이야. 완성될 때까지 참아.”

내가 말하자, 요한은 무표정한 얼굴로 날 쳐다보았다.

무표정한 표정 뒤에는 자신의 청이 거절되었다는 무안함과 불쾌함이 감춰져 있었다.

“완성되지 않았다고?”

그는 왼쪽 눈썹을 치켜떴다.

“말 그대로야. 아직 한 가지 성분이 덜 들어가 있어.”

“그게 뭔데?”

“알코올.”

대답을 들은 요한은 말없이 있다가, 갑자기 폭포처럼 커다란 웃음을 터트렸다.

“너 아주 재밌는 놈이잖아! 왜 이제야 나타난 거야! 다들 준짱이라고 부르던데! 뭐 하는 놈이야? 개그맨?”

나를 개그맨으로 분류하려 하다니, 신선했다.

나는 이런 식의 오해를 좋아했다.

상대의 가벼움을 측정할 수 있고, 성격까지 볼 수 있으니깐.

잠깐이었지만, 개그맨이 되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웃기겠다는 일념으로 인생 외길을 걷는다면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한다.

속임수에 능해야 하는데, 특히 자신의 감정을 철저하게 속여야 한다.

여간 피곤한 짓이 아닐 것이다.

“준:짱!은 아직 학생이야.”

유리가 말했다. 마치 애완견의 털을 자랑하는 말투였다.

학생이라는 사실을 이렇게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싶었다.

“학생이라고? 배우나 가수도 아니고 그냥 학생? 그런데 어떻게?” 고민하던 요한은 나름 현실적으로 인정할 수 있는 해답을 찾아냈다. “아하! 가수 지망생이구나!”

녀석은 나를 아무 곳이나 취직시키고 있었다.

개그맨에서 가수 지망생, 그다음엔 뭐가 될까? 트랜스 젠더? 두렵고도 기대되었다.

유리가 고개를 흔들었다.

요한이 목덜미를 긁고 있을 때, 중앙 테이블을 점령한 동료가 그를 불렀다.

요한은 정체성 모호한 나를 연구하는 대신 패거리에게로 돌아갔다. “나중에 다시 보자!” 그는 나와 유리에게 윙크를 한 후, 자리를 떴다.

요한은 동료와 끊임없이 이야기하며, 낚싯줄을 던지는 낚시꾼처럼 번번이 나를 쳐다보았다.

“인간관계를 넓힐 생각이 아니라면 오늘은 일찍 가보는 게 좋겠어.”

바텐더가 블루 칵테일을 채워주며 말했다.

“그래야겠어요.”

블루 칵테일은 토니워터에 블루베리 주스를 섞은 것이었다.

바텐더는 처음부터 내가 고등학생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내 셔츠 깃에 단 학교 배지를 알아본 것이었다.

예리한 관찰력이 아닐 수 없었다. 학교 배지는 은행 나뭇잎 사이에 포효하는 호랑이가 있는 문양이었다.

학교(學校) 라는 학문이 조잡하게 끼워 맞춰져 있었지만, 고등학교 배지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제대로 된 단서가 없는 탁월한 디자인이었다. (그래서 학생들이 좋아했다.)

그런데도 바텐더는 내 정체를 단번에 알아냈다.

어쩌면 학교 선배일지도 모른다. “블루칵테일에 스카치나 위스키를 섞는 건 학교를 졸업한 후로 하지.” 그는 그렇게 말하며 덧붙였다. “......... 대신 알코올 섞을 때까지 다른 사람에겐 팔지 않겠어.” 카페에 있는 나만의 칵테일? 손해 보는 거래는 아니었다.

나도 알코올을 탐닉하는 촌뜨기가 아니었다.

바텐더는 나에게 담배를 권했는데, 그의 기준에서 볼 때 고등학생 흡연은 허용 가능한 탈선인 듯했다.

이번엔 내가 거절했다. “그건 건강에 좋지 않아요. 폐암을 유발한다고요.” 그는 곧바로 담배를 치웠다. “그래. 하지만, 담배가 폐암을 유발하지 않는다면 의미가 없어. 스릴이 줄어들거든.” “그런 스릴을 탐낼 정도로 절망적이지 않아요.” “아! 그래 다행이군.” 바텐더는 왕년에 배우지망생이었다고 한다.

연기를 위해서 춤을 배우고, 노래를 배우고, 제빵기술까지 익혔다.

필요했다면 십자수와 목수 일도 배웠을 것이다.

그는 연예계 변두리를 돌고 돌다가 지친 몸으로 카페에 자리를 잡았다.

연기를 위해 배워두었던 칵테일 기술을 써먹게 된 것이었다.

“지금이라도 섭외가 들어오면 응할 건가요?”

위스키를 마시던 유리가 그에게 물었다.

“배역을 따려고 애쓸 때에도 섭외가 없었는데, 지금 올 리 없잖아.”

바텐더는 잘라 말했다. 수준 이하의 가능성은 취급하지 않겠다는 투였다.

그는 카페를 둘러보았다. 그가 그토록 염원하고 꿈꿨던 스타가 된 사람들이 그가 만든 칵테일을 마시고 있었다. 뭐랄까? 그에겐 운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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