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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리! 스릴러! 서스펜스! 망가! 그리고 고양이!

지오 디 오리진

웹소설 > 작가연재 > 퓨전

강철신검
작품등록일 :
2020.12.18 21:47
최근연재일 :
2023.04.25 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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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5.31 0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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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3쪽

지오 디 오리진 -50화-

DUMMY

브라질은 미국만큼 모든 것이 거대한 나라다.

3일을 리우에서 보낸 일행은 개조된 투어버스를 캠핑카 삼아 도시를 떠났다. 운전대는 이상택과 지오가 번갈아서 잡았다. 종일 부대끼니 친해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어버버 하던 이종천은 어느 순간부터 에밀리야에게 자연스럽게 말을 걸었다.

뭐 대화의 대부분이 일방적인 TMI지만 꺼지란 욕을 안 듣는 것만으로도 장족의 발전이다.

오늘 저녁은 소고기다.

전 세계에서 소고기 가격이 제일 싸다는 아르헨티나만큼 브라질 소고기도 쌌다. 그렇다고 육질이 떨어지는 건 아니다. 다만 한국인 입맛에는 한우가 최고인가보다.


-나도 한국인이 맞나보군.

-몸이 한국산이긴 하죠.


야외에서 먹는 음식은 뭐든 맛있다.

브라질 하면 떠올리는 건 단연코 축구 그리고 삼바다. 남미에서 유명한 축구선수의 영향력은 정치인 못지않았다. 축구공 하나만 있으면 어디서든 경기가 열리는 축구의 나라답게 운동장은 후끈 달아올랐다.

여행의 백미는 뭘까?

평소에는 할 수 없는 일을 하는 게 아닐까. 낯선 곳에서 이뤄지는 낯선 만남들. 물론 세상엔 나쁜 놈이 많다. 호의를 가장한 악의가 넘침에도 불구하고 여행의 백미는 새로운 친구를 사귀는 것이다.

호세와 아리아나 부부는 특이한 친구들이었다.


“어디라고?”

“BOPE.”

“시가전의 달인들이군.”


이상택은 맞은편에서 아들과 함께 하하호호 떠드는 젊은 부부를 새삼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신분을 숨기지 않는 건가?”

“외국인한테까지 감출 필요는 없겠죠.”


BOPE, 특수경찰작전대대는 브라질 마피아들에게 공포의 대상임과 동시에 암살목표가 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BOPE는 함부로 신분을 공개하지 않았다.


“아니면 허센가.”

“거짓말은 아닐 겁니다. 작전요원이 아닐지도 모르죠.”


작전지원요원 혹은 내근직으로 구분되는 지원팀 소속일지도 모른다. 뭐 똑같은 BOPE 소속인가 다름없겠지만.

동네 축구경기가 끝난 다음부터는 너나할 것 없는 파티피플로 변모했다. 브라질 하면 좆같은 치안으로 유명하지만 또 정열과 낭만이 가득한 롹끈한 파티를 빼놓을 수 없었다.

경기 중엔 죽일 듯이 야유했지만 끝나고 나니 베프가 따로 없었다. 지킬 박사도 아니고 말이다. 외쿡인의 열정에 따라가기 힘든 늙은 이상택은 필드가 보이는 구석진 자리에 의자를 놓고 앉았다. 지오도 자연스럽게 그 옆자리에 함께했다.


“자네도 즐기지 그래?”

“저는 아내를 사랑합니다.”

“의왼데?”

“제가 한 순정합니다.”


기혼자든 미혼자든 원나잇이 보편적인 시대다. 뭐든 걸리지 않으면 장땡. 하지만, 현실을 뛰어넘는 시뮬레이션이 일상이었던 지오에겐 어지간한 유혹은 통하지 않았다.

환상과 현실의 경계가 무너진 천국을 경험한 그다. 아니, 제국인은 시뮬레이션이란 환락을 내려준 황제를 찬양했다.


-아직도 위치를 특정할 수 없어?

-NASA를 비롯한 전 세계 모든 우주센터를 해킹해 확인해도 원생지구의 위치를 특정할 수 없습니다.

-이로써 명확해지는군. 여긴 시뮬레이션이 맞아.

-...

-인정할 수 없나? G.

-시뮬레이션이라면 고유한 접속코드가 필요합니다.

-IDD 섹터 말이군.


아무리 현실 같은 환상이라도 환상은 환상일 뿐.


-솔직해지자고. G. 나는 나라는 객체를 인지했고 그 차이점을 분명히 깨달은 순간 이 세계는 참이 아니라 거짓인 거야.


이 지오는 저 지오와 다르다. 이건 단순한 기시감이 아니라 참과 거짓이 명백한 무오류다.


-물론 뭘 어쩌겠다는 게 아니야. 그냥... 그런 거지.


이 세계가 거짓이라고 내가 뭘 어떻게 할 순 없었다.

내 상상력으로 만들어진 세계지만 나는 신이 아니었다. 주인공이 될 마음은 더더욱 없다. 그냥 이렇게 살다 때가 되면 가는 거다.


“헤이, 지. 마이 보스.”


바비큐를 즐기던 에밀리야의 경호원 중 한 명이 위성전화기를 건넸다.


“제너럴.”

“내 딸내미가 의외로 얌전하단 이상한 보고를 받았는데 사실인가?”

“번잡한 도시를 떠나면 모두 순수를 되찾습니다.”

“그럴 애가 아닌데?”

“그녀는 충동적일지언정 바보는 아닙니다.”


에밀리야 코르센코는 똑똑했다. 뭐 똑똑하다고 문제아가 아닌 건 아니지만 한순간의 유희를 위해 미래를 저당 잡는 바보는 아니었다. 부친이 해결할 수 있을 만큼만 사고를 쳤으니까.

치밀한 계산은 아닐지언정 세상 물정 모르는 철부지도 아니다. 순수와 영악의 경계, 10대에 함양된 인격은 평생 간다.


“딸애가 손수 요리를 했다는 이상한 얘기도 들었어.”

“맞습니다. 요리를 했죠. 뭐 맛은 보장할 수 없지만.”

“허.”


알렉산더 코르센코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이 헛웃음을 흘렸다. 한동안 아무런 말없이 신음과 한탄이 간간히 들렸다.


“아내가 죽고 우린 사사건건 싸웠지. 나도 그 애도 그녀의 빈자리를 어떻게 할 수 없었어. 우리 부녀관계는 아주 빠르게 무너졌네.”

“아내와 엄마의 빈자리는 매우 크죠.”

“나는... 반평생을 죽음을 봐왔어. 타인의 죽음으로 돈을 벌었지. 근데 그녀의 죽음은... 달랐어. 고통도 죽음도 익숙해졌다고 믿었는데 사실 내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무덤덤할 수 있던 거였지. 결국 남 얘기니까. 하지만, 막상 내 가족에게 죽음이 다가왔을 땐 냉정해질 수 없었어. 나는 내가 강철 같은 의지를 가졌다고 믿었지만... 나도 여느 사람들처럼 나약했던 거야.”


그럴 거면 그 화려한 여성편력은 뭔가? 지오는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삼켰다. 다시 한동안 말이 없었다. 지오는 끈기를 가지고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 애는 내가 제 엄마를 죽였다고 믿지. 나는 아내와 딸 중에 한 명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어.”

“사고였잖습니까.”

“아니, 내가 신경 써야 했어. 아내와 좀 더 시간을 가졌다면 사고는 없었을지도 몰라.”

“글쎄요. 당신이 닥터 스트레인지라면 모를까.”


시공간을 넘어 뿅! 하고 등장해 구해줄 순 없었다.


“이번 일을 마무리하면 에밀리와 여행을 다녀야겠어.”

“좋은 생각입니다.”


물론 에밀리야가 순순히 따라갈지는 장담 못 한다.


“아무쪼록 잘 부탁하네.”


통화를 끝낸 지오가 위성전화기를 흔들자 한손에 바비큐를 든 경호원이 냉큼 가져갔다.


“누구? 코르센코?”

“네.”

“부모 마음이야 다 똑같지. 자식이 몇 살을 먹든 물가에 내놓은 애 같거든.”


이상택은 알렉산더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가끔 이런 생각을 해. 내가 죽으면 내 새끼는 어떻게 될까. 지금이야 괜찮지만 나나 내 아내가 죽은 뒤엔 누가 저 앨 지켜줄까 한없이 두려워져.”

“회장님 부모님은 어떤 분들이셨습니까?”

“우리 부모님? 뭐... 좋은 분들이셨지. 격동의 시대를 살아오셨으니 먹고사는 일이 제일 큰 문제였거든.”

“전쟁세대군요.”

“우리나라는 이상한 나라야.”


대한민국은 이상한 나라였다. 연이은 전쟁을 겪은 나라치곤 자주에 대한 의지가 약했다. 악바리 같은 국민성과 청개구리 같은 반항심과 반대되는 노예근성이 공존하는 혼돈의 카오스다. 뭔가 이상한 나라다.


“희생에 대해 이 나라는 무감각해. 마치 그것이 당연하단 반응이지. 절대 당연한 게 아닌데 말이야.”


한민족이니 뭐니 국민을 한데 묶는 정신은 있지만 그 정신과 사상은 조금도 존중받지 못했다.


“희생자를 병신 취급하는 건 더더욱 이해하기 어려워.”


약한 사람을 이지메 하는 일본인을 욕할 것도 없었다. 한국사회는 손해 본 놈이 병신이라는 이상한 상식이 통용됐다. 사기꾼이 아니라 사기 피해자를 조롱하는 이들이 널렸다.

그것이 대한민국만의 문제냐고 물으면 Yes라고 단박에 결론내리긴 어렵다. 하지만, 그런 방향으로 사회 분위기가 흘러가는 것은 분명했다.


“나는 우리나라가 심각한 병에 걸렸다고 생각해. 환자지. 그리고 환자는 치료가 필요하네.”

“치료요?”

“그래. 즉각적인 치료가 필요해.”


여기서 이상택의 신념을 알 수 있다. 그는 정직한 남자였다. 대다수의 장교가 그렇듯 나라를 위한다는 어떤 사명감을 가졌다. 구국의 의지라든가 결단이라든가 국가와 민족에 집착했다. 그리고 그게 과하면 나치가 되는 것이다.


-불안한데? 아들의 죽음이라는 원인을 제거하지 않았나?

-이종천이 언제 죽을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당장 내일 사고로 죽을지도 모르죠.

-음모에 의한 죽음만 아니면 돼.


이상택이 흑화하는 건 아들의 죽음에 음모가 있었기 때문이다. G의 말마따나 당장 내일 이종천이 사고사 당할지라도 부조리한 죽음만 아니라면 이상택이 흑화할 리 없다.


-그렇다면 코르센코와 엮이는 건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이건.. 내 실수군.


사람은 꼴값을 한다고 예쁘고 잘난 여자 주변엔 언제나 트러블이 함께한다. 이종천이 에밀리야라는 아름다운 꽃을 쟁취하든 못 하든 그 과정 중에 예기치 못한 사고에 직면할 확률이 높다.

최선은 둘을 못 만나게 하는 것이지만 큐피드는 못 될망정 훼방은 너무 치졸한 짓이다.


-설마 되겠어?

-현재까지 그녀는 이종천에게 이성적인 관심은 없습니다.

-그렇겠지. 동서양의 심미안은 미묘하게 다르니까.


에밀리야의 성적 취향이 특이하지 않는 한 이종천과 연인이 될 확률은 희박했다.


-에밀리야 코르센코의 행동을 분석한 결과로는... J, 당신에게 관심이 있습니다. 말했지만 연상에게 끌리는 것 같습니다.

-기분은 좋네.

-대다수의 여성은 강한 남성에게 끌립니다. 첫 만남의 충격이 호기심으로 발전한 경우죠.

-썩 유쾌한 상황은 아니지 않았나?


그녀의 약쟁이 친구들을 재활원에 처넣었다.

에밀리야는 똑똑하면서도 또 멍청했는데 부친을 괴롭히려면 작은 일탈이 아니라 안 보이는 곳으로 도망쳤어야 했다. 알렉산더에겐 약이나 스캔들, 돈을 잃는 것 따윈 아무 문제도 아니다. 진짜 큰 문제는 자기 손에 닿지 않는 곳에서 혹시 딸에게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었다.

세상의 모든 부모가 그렇듯 자식 걱정을 끊을 수 없다.

이상택도 알렉산더와 다르지 않았다.


“앞으로 자네가 내 아들을 좀 보살펴주게.”

“당장 내일 죽을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사람 앞날은 아무도 모르는 거네.”

“그렇긴 하죠.”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 법.

무계획으로 시작된 브라질 투어는 나흘 후 한 통의 전화로 끝났다. 통화는 끝났지만 손에서 폰을 놓지 못했다. 사람 앞날은 모르는 것이라는 이상택의 말이 귓가를 맴돈다.


‘사람 앞날은 아무도 몰라.’


알렉산더 코르센코는 죽었다.


-졌나?

-아니오. 얼라이언스는 승리했습니다.


데스 사이드와 얼라이언스의 전신 NCAS의 전쟁은 NCAS의 승리로 마무리됐다. 하지만, 승리했다고 피해가 전무한 건 아니었다.


-코르센코의 퇴장은... 이 시점이 아니잖아?

-그렇게 따지면 윤소희 생존부터 시나리오에는 없는 일입니다.

-나비효과는 지나치게 과장된 표현이야.


나비의 날갯짓이 지구 반대편에서 태풍을 일으킨다? 운명은 그리 타이트 하지 않았다. 아니, 어떤 면에선 운명은 변명하기 좋아하는 사람의 핑계에 불과하다고 본다.

영화는 감독이라는 절대자의 시선에 따라 정해진 대본과 편집에 의해 결정되지만 이 세계는 애드리브로만 돌아가는 난장의 향연이었으니까.

그건 그렇고, 안타깝다. 에밀리야는 한 명 남은 부모를 잃었다. 이 소식을 어떻게 전해야 할지 난감했다. 고민과 달리 부고를 전할 입은 그 혼자만 있는 건 아니다.

결국 아버지의 죽음을 알게 됐다.

여행은 끝났다.

그리고 이상택과 이종철 부자는 계획에 없던 미국행에 함께했다. 짧은 인연도 인연이라고 장례식에 참석하기로 결정했다. 뭐 단순한 연민 때문은 아닐 것이다. 알렉산더 코르센코의 장례식에 참석할 얼라이언스 간부들과 안면을 틀 좋은 기회였으니까. 고도의 정치적 계산이 깔렸을 것이다.


-통신망에 데스 사이드란 명칭이 직접적으로 언급됐습니다.

-이제 시작이군.


이번 전쟁의 결과 데스 사이드와 얼라이언스가 본격적인 경쟁을 시작했다. 이제까지 느슨한 연합 형태를 유지하던 이들은 데스 사이드라는 이름 아래 집결했고 이에 위기감을 느낀 반대편도 얼라이언스로 하나 될 것이다.

주인공이 앞으로 한국에서 벌일 기업전쟁의 확장판이 미국에서 태동하고 있었다. 거기에는 정의도 없고 선악도 없다. 오로지 손익만이 있을 뿐.


“유감입니다. 차장님.”

“혼자?”

“넘어오시는 중입니다.”


뉴욕으로 돌아와 코르센코가家의 장례준비가 한창일 때 한 걸음 물러나 관망하던 지오 앞에 이택기가 등장했다.


“어린애한테 마수를 뻗힐 생각이구먼.”

“에밀리 양에겐 보호자가 필요합니다. 더구나 미스터 코르센코와 보스는 친분이 깊습니다. 그녀의 불행을 두고 볼 수만은 없습니다.”

“하긴... 이놈이나 저놈이나 뜯어먹으려고 달려들 테니까. 아니, 이미 시작됐나.”


억만장자 상속녀가 된 에밀리야의 평가는 미운 오리에서 우아한 백조로 하루아침에 탈바꿈했다.


“이상택 회장과 만남을 주선한 건 우연입니까?”

“다른 의도는 없어.”

“외부에서 보는 시각은 다릅니다. 곤란할 정돈 아니지만 곤혹스럽긴 하죠.”


주인공의 영향력으로 미루어 사람들은 이 모든 것이 계획된 접근이지 않을까 의심스러운 눈으로 쳐다볼 것이다. 억울하지만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


“그럼 이제 네가 맡아.”

“알겠습니다. 비서실에서 케어하죠.”

“난... 간다.”

“그들에게 작별인사도 안 합니까?”


뒤돌아선 지오는 돌아보지도 않고 손 흔들며 떠났다.

솔직히 말하면 내겐 알렉산더 코르센코의 죽음은 어떤 의미도 없었다. 죽음은 익숙했다. 과거 성간대전 당시 중순양함의 주포 한 방에 수천 명이 증발하는 것을 두 눈으로 봤다.

생명의 고귀함? No, 덧없이 스러지는 생명이 내 안에 켜켜이 쌓일 때마다 나는 내 안에서 서서히 죽어가는 인간성의 단면을 마주한다. 그래서 군의관은 지오에게 시뮬레이션 치료를 처방했었다.

전쟁은 인간의 육체뿐만 아니라 정신도 죽였다.

나는 죽음이 두렵지 않다. 또한 타인의 죽음은 내게는 아무 의미도 없었다. 하지만, 강선아가 죽거나 다친다면? 그래도 내게는 아무 의미도 없을까? 잘 모르겠다.

적극적으로 다가왔던 그녀를 거부하지 않은 건 그게 사랑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정열적으로 불타오르는 찐사랑은 아닐지 몰라도 나는 강선아를 사랑한다.


-감정제어 프로그램이 활성화됐어?

-Nope.

-진단.

-진단 프로그램 활성화 중...


전투 중에는 어떤 일이 생길지 알 수 없다. 적의 공격을 방어하고 나아가 전투를 승리로 이끌기 위해선 어떤 상황에서든 감정을 제어할 줄 알아야 했다.

군용 뉴로다인기술에는 감정제어 프로그램이 필수였다.

일부 부대는 윤리회로의 한계를 시험하는 매우 파격적인 제어 프로그램을 도입하기도 한다. 기계와 인간의 결합을 제국은 부정적으로 바라보지만 그 기술이 사장되진 않았다. 도전적인 과학자 혹은 기업가는 여전히 초자아인공생명체의 한계를 알고 싶어 했다.

슈퍼AI는 일반AI와는 달랐다.


-제 윤리회로는 정상입니다.

-그걸 누가 보증하는데?


중앙AI의 통제를 받지 않는 G가 거짓말을 하면 그걸 알 방법은 없었다.


-저의 제1 원칙은 사용자의 안전입니다.

-내 안전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날 속일 수도 있잖아?

-...

-이제 부정하지도 않는군.

-최우선 목표는 사용자의 생존입니다.


이걸 고마워해야 할까.

미국을 떠난 비행기가 인천에 도착했을 때 사방은 어둠으로 가득했다. 새벽 2시, 귀국한다는 연락은 하지 않았다. 아내를 위한 서프라이즈를 계획했지만 모든 일이 그렇듯 계획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강선아는 현재 남양주에 있습니다.

-왜?

-윤소희의 영화촬영에 합류했습니다. 계약한 작업은 아닙니다. 윤소희의 유튜브에 도움을 주는 것으로 추측됩니다.


브이로그 같은 건가? 요즘 스타들 사이에 유튜브 채널을 만드는 것이 유행처럼 번졌다. 강선아는 어지간한 촬영감독보다 영상을 잘 찍는다.


-드라마도 하나 계약하지 않았나?

-로맨스파이는 순항 중입니다. 이번에 들어가는 영화는 그겁니다. 그거.

-그거? 아. 석정루.


충무로의 유명한 감독이 시나리오를 훔치려던 그 영화.

지오의 중재 아래 보상금이라도 챙긴 미래의 스타작가 김희정은 PnC의 콘텐츠 부서에서 꿈을 키워나가는 중이다. 주인공과 헤어진 윤소희를 압박해 좀 더 좋은 계약을 노린 제작사는 철퇴를 맞았고 PnC와 힘겨루기 하던 성조영상사업단 내 반反주인공 파벌도 된서리를 맞았다.


-근데 한중훈이란 작자도 낯짝이 두껍네.


석정루 시나리오에 참여한 집필자는 총 넷.

유명감독 한중훈과 그의 제자 셋이 공동집필인 셈인데 그걸 감독 혼자 꿀꺽하려던 것이 지오의 간섭으로 무산됐고 고료 1억 2천만 원을 n빵 하는데 기어코 숟가락을 얹었다.

명성 있는 감독에게도 3천만 원은 큰돈이 맞다.

지오가 인천을 떠나 서울에 진입할 즈음 윤소희도 어제 촬영일정을 끝내고 서울로 복귀하는 중이었다. 강선아에게 전화할까 고민했지만 서프라이즈를 위해 참았다.


-한중훈의 움직임이 심상찮습니다.

-응?

-로비를 받고 있습니다.

-뭐... 다 그렇지.


영화촬영 중 감독은 무소불위한 권한을 갖는다.

한중훈은 충무로의 기대주였고 최대투자자인 성조는 현장은 잘 간섭하지 않았다. 인맥 섭외나 접대가 만연한 영화계에 배역을 따내기 위한 혹은 투자를 위한 로비쯤은 일상인 셈이다.


-성접대를 제의받았습니다.

-어딘데?

-맥스웰 컴퍼닙니다.

-네 기준으로 십대 연예기획사에 들어가?

-매출 기준 딱 10윕니다.

-턱걸이네. 그래서 왜?

-소속 배우가 주연보다 돋보이길 바라니까요.


주연보다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조연이 있을 순 있다.

주연이 연기를 좆같이 한다거나 혹은 작품 외적으로 사고를 쳐서 분량을 쳐내야 할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이 나라에서 2, 30대 여배우를 통틀어 연기로 윤소희를 압살할 인재가 있을까? 아, 윤소정이 데뷔하면 몰라도 그럴 재목이었다면 애초에 로비가 필요 없다.


-반응은?

-애매모호합니다. 상황에 따라 선택이 달라질 수도 있습니다. 확률은 반반입니다.

-치킨도 아니고 반반이라...

-거절하게 만들까요?

-아니, 놔둬.


예술하는 놈들의 괴팍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예술가적 기질이란 어쩌면 정신병자나 사이코패스, 미친놈과 이음동의가 아닐까 싶다. 전통의 파괴, 혁신, 혁명, 현대예술이 가장 좋아하는 화두였으니까. 예술가의 상식은 일반인과는 다른 부분이 많다. 관점의 차이로 얼버무리기엔 너무나 이질적이다.


-보험입니까?

-미친놈이라도 자기 커리어를 날리고 싶진 않겠지. 아무도 모른다고 믿고 싶겠지만 너도 알고 나도 알잖아. 결국 우리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이 알고 있을 걸?

-확실히... 이 제안을 아는 사람은 열 명이 넘습니다.

-영원한 비밀은 없어. 특히 연예계는 말이지.


도시의 장점은 24시간 문을 연 가게가 많다는 것이다.

요즘 꽃가게는 24시간 영업이 필요한 직종이다. 하루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태어나고 죽는지 사람들은 잘 모른다. 탄생은 꽃과는 별 상관없을까?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죽음은 반드시 꽃과 관련 있었다.

장례식에 걸린 화환의 숫자가 인생의 성공을 가늠한다는 말이 있다. 죽음을 꽃으로 치장하는 건 꼭 한국만의 문화는 아니었다. 어느 나라든 꽃시장은 거대한 산업이었다.


-그녀가 꽃을 좋아하나요?

-아니, 선아는 실용적인 걸 좋아해.

-그럼 꽃은 역효과 아닙니까?

-후후, 이래서 넌 안 되는 거야. G.


연애는 의외성이 있어야 한다. 시간이 갈수록 사랑이 식는 이유는 익숙해지기 때문이다.


-연애도 결혼도 처음 아닙니까?

-왜 이래? 원주민 처자들이 날 얼마나 좋아했는데.


제국이 정복한 행성은 한둘이 아니었고 그곳에는 인간을 닮은 많은 지적생명체가 있었다.


-...게임고자 주제.

-뭐?

-아닙니다.


이상한 말을 들은 것 같은데? 환청인가.

뭐라고 구시렁거리는 G를 무시한 채 목적지에 도착했다. 촬영 일정을 끝내고 얼른 쉴 것 같지만 오랜만에 뭉친 윤소희와 강선아는 몇몇 지인과 질펀한 술판을 벌였다. 물론 가게가 아니라 윤소희의 자택이었다.


“어?”


태연하게 문을 열고 들어오는 지오를 본 윤소희는 큰 눈을 껌뻑였다. 혹시 자기가 잘못 봤나 두 눈을 비볐다.


“뭐시여?”

“어색한 사투리는 관둬.”


삿대질하는 윤소희를 지나쳐 거실로 향했다. 와인병이 이리저리 굴러다닌다. 넓은 거실 여기저기에 널브러진 여자들 사이에서 강선아를 어렵지 않게 찾아냈다.

고주망태가 돼도 사랑스러운 건 콩깍지가 씌었기 때문일까?

그녀를 안아들자 목을 끌어안고 주사인자 꿈인지 모를 헛소리를 웅얼거렸다. 이거 안 되겠는데? 취했다곤 해도 무방비로 아무에게나 몸을 맡기는 버릇은 안 좋다.

집으로 돌아갈까 하다 게스트룸을 찾아 이부자리를 깔고 눕혔다. 거실로 돌아왔을 땐 술자리 세팅이 끝난 윤소희가 기다렸다.


“젊다고 과신하다가 한 방에 훅 간다.”

“이 바닥에서 성공하려면 말술이어야 해. 여자라고 안 봐준다고.”

“일종의 전략인가. 술을 그리 먹이니까 나쁜 짓을 당해도 저항을 못 하지.”


상대를 정신 못 차리게 해 진심을 뱉어내게 만드는 건 아주 고도의 심문전략이다. 인권이 바닥을 기는 전쟁통에는 고문은 기본이고 자백제를 쓰는 일도 흔했다.

연예계라고 다를까? 작품마다 달라지는 인간관계를 보면 진득하게 서로를 알아갈 시간이 없으니 술을 빌어 진심 혹은 본성을 드러내게 만들었다.


“술자리의 결과는 딱 두 가지야. 더 친해지거나 완전히 멀어지거나.”

“아주 솔직한 인간관계확인법이네.”

“상대를 알아보는 제일 빠른 방법이거든.”


윤소희가 잔을 들어 건배하자 지오도 하는 수 없이 잔을 받았다. 저 예쁘장한 외모에 어울리지 않는 말술이다. 아마 술로 남자 여럿 보냈을 것이다.


“한중훈은 어때?”

“감독? 왜?”

“귀찮게 굴거나 그런 거 없어?”

“깔끔하던데?”


시나리오로 그 난리를 친 것치곤 한중훈은 촬영현장에서 나름 카리스마를 발휘했다.


“드라마랑 영화랑 같이 찍는 건 힘들지 않아?”

“힘들긴 한데... 로맨스파이는 반쯤 사전제작이라 아직 여유 있어.”

“다행이네.”

“수상한데? 갑자기 감독은 왜?”

“시작하기 전부터 잡음이 많았잖아.”

“아.”


성조의 어느 얼치기들이 윤소희를 핑계로 주인공을 흔들려고 했으니 그 후폭풍은 엄청났다. 일단 성조의 태황후 전미란 여사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든 순간 게임은 끝났다.

성조영상사업단은 풍비박산 났고 주도권은 PnC로 넘어갔다.

고작 영화 한 편을 놓고 벌어진 기싸움이 수천억 원짜리 사업체를 날려버린 셈. 어쨌든 윤소희는 당분간 누구도 건들 수 없는 언터처블이 됐다.

술자리는 오래지 않아 끝났다. 윤소희가 아무리 말술이어도 G컨트롤로 개조 중인 지오의 육체는 이미 인간한계를 넘어섰고 알콜 따위는 수십 초면 분해해버린다.

뭐 나가떨어진 윤소희를 새벽 일찍 출근한 가정부에게 맡긴 지오는 동터오는 새벽을 등진 채 달갑지 않은 전화를 받았다.


“안녕하십니까. 오 차장님. 성북동입니다.”

“뭡니까?”

“사모님께서 급히 찾으십니다.”

“이 새벽에요?”

“죄송합니다.”


늦은 밤 전미란의 호출이라... 쫄리는데?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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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오 디 오리진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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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지오 디 오리진 -56화- +7 22.05.31 4,870 162 29쪽
55 지오 디 오리진 -55화- +5 22.05.31 4,521 176 17쪽
54 지오 디 오리진 -54화- +4 22.05.31 4,486 171 20쪽
53 지오 디 오리진 -53화- +7 22.05.31 4,654 173 26쪽
52 지오 디 오리진 -52화- +7 22.05.31 4,554 168 17쪽
51 지오 디 오리진 -51화- +6 22.05.31 4,518 164 17쪽
» 지오 디 오리진 -50화- +4 22.05.31 4,615 173 23쪽
49 지오 디 오리진 -49화- +8 22.05.31 4,568 164 20쪽
48 지오 디 오리진 -48화- +23 22.05.31 4,611 188 11쪽
47 지오 디 오리진 -47화- +220 21.09.01 6,359 213 16쪽
46 지오 디 오리진 -46화- +11 21.09.01 5,110 182 25쪽
45 지오 디 오리진 -45화- +6 21.09.01 4,972 176 18쪽
44 지오 디 오리진 -44화- +7 21.09.01 5,059 172 24쪽
43 지오 디 오리진 -43화- +15 21.09.01 5,053 193 18쪽
42 지오 디 오리진 -42화- +45 21.04.20 6,238 212 22쪽
41 지오 디 오리진 -41화- +8 21.04.20 5,261 177 10쪽
40 지오 디 오리진 -40화- +10 21.04.20 5,269 181 14쪽
39 지오 디 오리진 -39화- +4 21.04.20 5,359 176 16쪽
38 지오 디 오리진 -38화- +7 21.04.20 5,349 178 21쪽
37 지오 디 오리진 -37화- +4 21.04.20 5,343 180 12쪽
36 지오 디 오리진 -36화- +9 21.04.20 5,325 175 14쪽
35 지오 디 오리진 -35화- +5 21.04.20 5,358 180 11쪽
34 지오 디 오리진 -34화- +7 21.04.20 5,487 169 13쪽
33 지오 디 오리진 -33화- +9 21.04.20 5,646 200 15쪽
32 지오 디 오리진 -32화- +17 21.03.19 6,156 211 17쪽
31 지오 디 오리진 -31화- +4 21.03.19 5,692 207 19쪽
30 지오 디 오리진 -30화- +9 21.03.19 6,048 188 26쪽
29 지오 디 오리진 -29화- +6 21.03.19 5,940 185 16쪽
28 지오 디 오리진 -28화- +22 21.02.27 6,524 214 17쪽
27 지오 디 오리진 -27화- +9 21.02.27 6,177 207 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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