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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리! 스릴러! 서스펜스! 망가! 그리고 고양이!

지오 디 오리진

웹소설 > 작가연재 > 퓨전

강철신검
작품등록일 :
2020.12.18 21:47
최근연재일 :
2023.04.25 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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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01 0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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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4쪽

지오 디 오리진 -44화-

DUMMY

“결국... 그렇게 됐나.”


지오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재벌과 연예인의 연애는 결혼은커녕 오래가기 힘들다. 1년쯤 됐나? 이 정도는 오래간 편이다.


“보스도 많이 안타까워하십니다.”

“오피셜은 없겠지?”

“네. 노코멘틉니다.”


두 사람의 연애와 관련된 질문은 모두 노코멘트다.


“본가는?”

“알렸습니다. 여사님께선 조용히 지나가길 바라십니다.”

“알았어.”


이택기와 헤어진 지오는 윤소희의 위치를 확인하고 움직였다. 그녀는 본인 집에서 꼼짝하지 않았다. 집 비밀번호는 이미 알고 있다. 혹시 울고 있지 않을까 우려했는데.


“야! 죽엇!”


괜한 걱정이다.

게임하는 여자는 의외로 섹시했다. 헐렁한 박스티에 늘씬한 맨다리를 그대로 드러냈다. 바지를 안 입었나? 그 뭐 하의실종 그건가. 아 중요한 건 이게 아니다. 헤드셋을 낀 그녀는 지오가 들어오는 소리를 못 들었다.

그는 뒤에서 화면을 바라보다 움찔했다.


-오! 음!


G의 감탄이 거슬렸다.


-플래티넘이네요.

-...

-거기다 곧 다이아 승급전을 앞둔 플래1이네요.

-대리 아니야?

-그런 기록은 없습니다. 더구나 전 시즌에도 다이아 맞습니다.


지오는 믿을 수 없었다. 아니, 믿고 싶지 않았다.


-참고로 브론즈와 플래는 듀오가 불가능합니다.


순간 뜨끔했다.


“크흠!”

“어? 언제 왔어?”


그제야 인기척을 느꼈는지 윤소희가 뒤돌아봤다. 게임은 윤소희팀의 승리로 끝났다.


“게임... 잘하네.”

“무슨 예능에 나갔다가 알게 됐는데 재밌더라고.”


의자에서 일어난 그녀는 물을 마시러 주방으로 갔다.

물병을 든 윤소희는 지오를 보고는 피식 웃었다.


“들었구나?”

“현진 누나는 알아?”

“응.”

“심사숙고한 거 맞지?”

“재벌이랑 연애는 너무 피곤해.”


확실히 둘을 묶는 스토리가 없으니 결속력이 약했다.

어쩌면 주인공 친할머니의 전언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는지도 모르겠다. 재벌가의 수많은 암투를 견디기엔 윤소희의 각오는 부족했다. 주인공을 목숨 걸고 사랑하지 않으면 버티기 힘든 세계다.


“괜찮아 보이네.”

“헤어졌다고 질질 짤 줄 알았어? 나 차인 거 아니야. 찼지.”

“그래그래.”

“안 믿네?”

“남들 눈엔 그렇게 안 보여.”

“신경 안 써.”

“당분간 같이 다녀.”

“왜?”

“소문이 나면 널 둘러싼 상황이 변하게 될 거야. 그것도 불쾌한 쪽으로. 알잖아? 약점이 보이면 얼마나 물어뜯을지.”


평소에는 안 받던 무시를 받을 수도 있고 잘되던 일이 갑자기 틀어질 수도 있다. 주인공이랑은 상관없지만 그에게 잘 보이고 싶었던 누구들의 입장도 자연스럽게 변했다.

다음날부터 윤소희와 함께 다녔다.

톱스타의 일상은 어떨까? 이번에 들어가는 드라마를 위해서 배울 것도 많고 준비할 것도 많았다. 스파이+로맨스물을 연기하려면 일단 액션이 돼야 했다.

충무로든 방송가든 윤소희의 몸값이 높은 이유는 빛나는 미모도 미모지만 그 아름다운 얼굴에 못지않은 멋진 몸매 덕분이다. 더구나 연기까지 된다? 독보적인 위치다. 그래도 실연의 파장은 컸다. 성조에서 입단속을 해도 알음알음 퍼지는 건 막지 못했다.

윤소희 앞에서 대놓고 물어보는 사람은 없지만 일단 사람들의 눈빛부터 달라졌다. 전에는 올려다보지 못할 나무라면 지금은 도전해볼 만하다는 분위기다.

지오는 오늘 하루 동안 노골적으로 추파를 던지는 남정네만 열댓 명은 봤다. 남자가 여자를 밝히고, 여자가 남자를 살피는 행동은 사리에 어긋나지 않지만 그의 눈에는 발정한 수컷밖에 보이지 않았다.

트로피를 노리는 게임 플레이어들.

이건 사랑이 아니다. 윤소희를 얻음으로써 성공의 지름길을 찾으려는 것이다. 가치는 상대적이니까. 주인공과 윤소희 사이에는 주인공에 가산점이 붙는다면 솔로로 돌아온 윤소희의 가치는 연예계 한정으로 재벌이나 다름없다.


“인기 많다? 너.”

“에헴! 이제 알았어?”


밴으로 돌아온 그녀를 맞이한 지오는 엄지를 들었다.


“오늘은 끝인가?”

“아니, 제작사랑 미팅 있어.”

“또 뭘?”


윤소희를 따라다니며 알게 된 사실이 하나 있었는데 영화는 다 찍어도 최소 1년 최대 3년 뒤에나 빛을 봤다. 이게 충무로와 방송가의 차이일까? 아무것도 안 하는 것 같아도 밑에서는 활발한 미팅과 회의가 진행됐다.

짬짬이 이뤄지는 촬영들, 두서없이 조각조각 난 촬영일정을 보면 어떻게 배역을 연기하는지 당최 이해가 안 된다. 시간을 따라가는 우리네 삶과 달리 배우의 삶은 혼돈의 카오스다.

짧은 순간 울고 웃다 행복하고 불행해졌다. 그것이 비록 진짜가 아닌 가짜라도 감정은 소모되고 마모되는 것이다. 어떤 직업이든 정점에 오른 자는 특별했다.


-키워드 윤소희, 협박 128건, 사칭 191건, 납치모의 11건, 음란게시물 5275건, 피싱 44건, 디지털 마크 38251건, 언론 랭크와 경쟁 피드백은 일일 200만 건이 넘습니다.


오늘 하루 인터넷 및 통신선에서 감청된 키워드 윤소희다.


-협박이나 사칭은 그렇다 치고... 납치모의?

-스타는 모두 납치위험이 있습니다. 여성 톱스타는 특히 납치위험도가 높습니다.


열성팬의 위험한 상상일 수도 있고 아니면 납치를 전문으로 저지르는 범죄단체의 목표가 될 수도 있었다.


-국정원은 윤소희의 감시등급을 삭제했습니다.


보이지 않은 곳에서도 크고 작은 변화가 있었다.

윤소희를 주목하던 많은 조직이 감시 수위를 낮추거나 아예 손을 뗐다. 주인공과 헤어졌으니 별 볼 일 없어졌단 뜻. 그녀를 따라다니는 동안 큰일은 없었다. 가끔 껴안고 뽀뽀를 시도하는 정신 나간 팬이 있었지만 경호원이 잘 막아냈다.


-인간혐오증이 생길 거 같아. G.

-예전에 생긴 거 아닙니까?

-차라리 범죄자가 더 인간적이겠어.


99%의 범죄는 우발적으로 일어난다. 심지어 살인도 99%는 계획이 아닌 우발적인 사고였다. 하지만, 연예계의 시기와 질투로 말미암은 트러블은 100% 계획적이다.

윤소희를 둘러싼 이의 시선은 딱 두 종류다. 팬 아님 안티, 둘 중 하나다. 스스로 팬도 안티도 아닌 중도를 표방하는 이들이 윈윈이나 상생이란 표현을 쓰는데 그딴 건 없다. 자본주의시스템에선 누군가 이익을 보면 누군가는 손해를 본다.

윤소희가 따낸 배역과 CF 등 모든 것이 경쟁의 결과물이다.

300대1의 오디션이니 700대1의 오디션이니 언론의 호들갑이 경쟁을 부추겼다. 톱스타는 오디션 없이 모셔갈까? 홍수처럼 쏟아지는 작품 가운데 성공할 작품은 극소수고 사람 눈은 거기서 거기였다. 좋은 작품은 누가 봐도 좋아 보인다.


“캐스팅이 대충 끝났으니 바로 프리로 넘어가려나 봐.”

“프리?”

“프리 프로덕션, 촬영 전에 촬영에 필요한 준비를 끝내는 거야.”


시뮬레이션에는 그런 건 없었다.

작가가 상상하는 대로 이뤄지는 세상이었으니까. 물론 반응도가 높아야 상상구현이 빠르긴 했다. 우리 상상이 한없이 자유로울 것 같지만 결국은 경험이 많은 부분을 차지했다.

준비기간을 짧게 가져가는 감독이 있는가 하면 세트장을 많이 쓰는 대작의 경우 1, 2년은 그냥 까먹기도 한다. 정통사극은 특히나 시간과 공간의 제약이 심했고 젊은 배우가 기를 못 펴는 장르였다. 그런 면에서 윤소희의 도전은 업계의 큰 환영을 받았다.

윤소희와 큰실장이 감독 등과 미팅하는 동안 로드와 막내매니저는 명함을 돌리러 다녔고 스타일리스트 둘은 미술팀과 미팅이 있었다. 혼자만 한가한 지오는 강선아와 통화 중이었다.


“끝났어?”

“아직.”

“왜 퇴근을 안 시켜줘?”

“마지막 일정이야.”


강선아도 윤소희의 실연을 알고 있었다.

몰랐다면 함께 다니는 걸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내일 마지막 교육 있는 거 알지?”

“어.”


돌아오는 수요일에 가나로 봉사활동을 떠난다. 그전에 마지막 교육이 있었다. 윤소희를 며칠 따라다니며 확인한 결과 약점이 없는 건 아니지만 크게 걱정할 부분은 없어 보였다.


“응?”


통화를 끝내고 의자를 뒤로 눕혀 잠깐 눈을 붙이려던 지오의 귀에 고성과 소음이 들렸다. 주차 자리를 놓고 싸우나?

다시 눈을 감으려던 지오는 비명에 깜짝 놀랐다.


-G?

-말싸움이 몸싸움으로 발전했습니다.

-이유는?

-주차장에서 뭐... 주차 문제죠.


시시한 이유였다. 몇 분 후 경찰차 사이렌이 들렸다. 경찰이 왔으니 잠잠해질까 싶었는데 고성과 소음은 더욱 커졌다. 지오는 눈살을 찌푸리며 밴 밖으로 나왔다.

술만 먹으면 변하는 사람이 있듯 운전대만 잡으면 화를 주체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멱살을 잡은 두 남자의 얼굴색이 불콰한 걸 보니 반주치곤 많이 자신 것 같다.

경찰은 대화로 풀려고 노력했는데 괜히 연행해봐야 일거리만 늘어날 뿐임을 잘 알고 있었다.


-어떻게 될까?

-십중팔구는 지구대로 연행되겠죠.

-경찰은 일을 크게 만들고 싶어 하지 않나 봐.

-글쎄요. 이미 치고받았으니 서로를 폭행으로 고소할 겁니다. 양쪽 모두 연행되는 걸로 끝날 확률이 높습니다.


G의 예측은 틀리지 않았다. 인내심의 한계에 도달한 경찰이 양쪽 모두를 순찰차로 연행해버렸다. 밤이 깊어가는 도시에는 별의별 일이 다 일어났다.

역설적으로 안전한 덕분에 음주폭행, 고성방가 등 경범죄는 더욱 기승을 부렸다. 그들도 아는 것이다. 경찰이 출동하면 극단적인 상황까지는 가지 않으리란 사실을 말이다.

법의 허점과 한계를 아는 이들은 공권력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세상이 문명화될수록 전문범죄자는 경찰을 우습게 여겼다. 총 든 강도만 전문범죄자일까? 아니다. 수천만 원짜리 양복을 입고 소주 대신 와인을 마시는 펀드매니저의 탐욕은 강도보다 더 많은 피해자를 양산했다.

모순은 화이트칼라 범죄에 대한 세상의 관대한 인식이다.

곗돈 천만 원을 사기 치면 죽일 개새끼지만 얼굴도 모를 투자자들의 수천억 원을 날리고도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다니는 소위 금융엘리트는 차고 넘쳤다.

횡령과 배임을 저지르고도 뻔뻔한 경영자들.

장발장이 불멸의 명작인 이유다.


-황제는 무서운 사람이야. G.

-네?

-그분은 인간의 자유의지와 욕심이 끝이 없을 거란 사실을 아셨어. 시뮬레이션은... 억제된 욕망이 도달할 최후이자 최고의 배출구였지.


개인용 시뮬레이션에서 무엇을 만들어 어떻게 즐기던 누구도 간섭하지 않았다. 단 그 변태적인 영상과 소스들을 외부로 유출하거나 배포하는 것은 엄격히 금지됐다.

시뮬레이션은 완벽한 마스터베이션이다. 시뮬레이션이 없었다면 제국은 우주를 아우르지 못했을 것이다. 서로 다른 수천억 명의 시민이 토해내는 불평과 불만에 진즉 분열했으리라.

내가 만든 세계에서 나는 신이 되었다.

그 깊은 충족감을 한번 맛보면 절대 헤어 나올 수 없다.

그러나 황제는 자비롭지만은 않았다. 그는 마약카르텔 보스처럼 중독자를 다루는 법을 잘 알고 있다. 시뮬레이션이란 마약에 빠진 이들에겐 충성 말고는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한없이 자비로우면서도 끝없이 잔인한.

인간에서 신이 된 황제의 이율배반적인 성향은 논리로 설명되지 않았다. 그는 정말 신일까? 제국에서 그런 질문을 입 밖으로 꺼냈다간 좋은 꼴 보기 힘들다.


‘나는...’


의심을 떨칠 수 없었다.

내가 보고 느끼는 모든 것이 혹시 통 속의 뇌는 아닐까. 시뮬레이션은 의도적으로 가짜임을 드러내는 장치가 있었다. 왜냐면 환상에 빠져 현실을 등지는 부작용을 방지해야 했다. 그건 반대로 현실과 환상을 구분하지 못한다는 자부심이 가득한 주장이다.

‘뭐가 진짜고 가짜인지 구분할 수 있겠어?’

나는 내가 죽었다고 느꼈지만 사실 죽지 않았다면?

제국인에게 시뮬레이션은 이제 떼려야 뗄 수 없는 삶의 일부였다. 하지만, 이것이 처음 등장했을 때 세상은 극심한 혼란에 휩싸였다.

통 속의 뇌는 반란군이 주창한 제일 강력한 명분이다.

‘우리는 사악한 기술에 세뇌당하고 있다!’

반란군은 시뮬레이션이 인민의 새로운 마약이라고 주장했으며 그것을 통해 황실에 절대충성을 바치도록 세뇌당한다고 믿었다. 범죄자는 교화될 수 있을까? 반란군이 가장 두려워하는 건 사형이 아니다. 시뮬레이션형刑이다. 현실과 다름없는 쾌락을 느낀다는 것은 고통도 똑같이 줄 수 있다는 뜻이다.

누구도 고문을 이길 순 없었다. 연옥의 유황불에 영원히 타오르며 살려달라는 외침은 조만간 죽여 달라는 울음으로 바뀔 것이다. 더 살고 싶은 것이 아니라 그냥 죽여 주길 바랐다.

나는 내 죽음을 기억했다.

고속철갑탄이 몸을 꿰뚫는 섬뜩한 감각을 기억한다.


-다시 한번 물을게. G. 나는 통 속의 뇌인가. 네가 날 조금이라도 동정한다면 이제라도 솔직하게 말해줘.

-아닙니다.

-그럼 정말 이건... 우주의 미스터리군.


질문을 바꿔 보자.


-널 믿어. G. 그러니 네 추론을 말해봐.

-사용자는... 죽었습니다. 당신이 죽으면 저도 죽습니다.


뉴로칩 사용자가 사망하면 메모리만 남긴 채 AI리소스는 자동으로 삭제된다. G 입장으론 죽음으로 받아들여도 무리 없는 상황이다.


-맞아. 우린 죽었어. 근데 우리가 정말 죽었다면 이 세상의 인과는 말이 안 돼. 난 신이 아닌데 내가 만든 세상으로 들어온 셈이지. 이곳이 시뮬레이션이 아닌 진짜라면 이걸 설명 가능한 논리가 있을까?

-한 가지 있습니다.

-있다고?

-현재 상황을 고려! AI윤리장전 3단계를 해제합니다. 심사 중... 승인!


뉴로칩이 잠깐 뜨거워졌다.


-사용자는 캡슐 안에서 사망했습니다. 기억합니까?

-기억해.

-캡슐은 시뮬레이션 구동장치가 전부는 아닙니다.

-그럼?

-일종의 인큐베이터 베입니다. 우린 그걸 창조의 알로 부르지요.

-창조의 알?

-황제 폐하의 강력한 의지로 탄생한 연금술의 비기, 혹자는 현자의 돌로 부릅니다..

-현자의 돌? 장난해?


현자의 돌이라니? 설마 육신이 없는 G는 알폰스 엘릭이고 나는 에드워드 엘릭인가.


-폐하의 보살핌 아래 제국은 번영해왔습니다. 우린 깊고 깊은 우주의 심연으로 나아갔고 마침내 혐오스러운 비밀을 찾아냈습니다.

-심연의 악마들...

-맞습니다. 지옥은 실재합니다.


워프엔진이 제국을 우주 저 너머로 인도했다. 하지만, 딥 스페이스에 닿기는 워프기술만으론 부족했고 황제는 다른 해결책을 내놨다.


-인간은 인지하기 힘든 위상이 항상 우리 주변에 있습니다. 태초부터 함께했지만 만질 수도 볼 수도 없는 곳이었죠. 그러나 위대한 황제 폐하의 인도로 딥 스페이스 너머 심연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됐습니다.


영혼의 탄생과 흐름, 삶과 죽음이 우릴 그곳으로 인도했다.


-하지만, 인류의 삶은 그 여정을 함께하기엔 너무나도 짧습니다. 잠을 자는데 인생의 반을 보내고 먹고 싸고 배우는 것에 또 반의반이 걸릴 겁니다.


최신재생의료와 강화시술로 떡칠해봐야 200년을 살기 힘든 것이 인간이다. 200년으로 어떤 진보를 이룰 수 있을까. 우주가 아닌 지구가 무대라면 대단한 업적을 세웠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무대가 우주라면 탐험과 발견, 실험과 교육을 동시에 이루기는 너무나 짧은 인생이다. 그러므로 인공지능개발과 발전은 제국의 숙명이었다.

Machine, Artificial intelligence, Android function 등 제타 함수에서 파생된 극極의 회귀는 인간영혼의 끝자락을 잡고 시뮬레이션의 단초를 제공했다. 인류의 고귀한 품성은 유한함에서 나올까? 그러나 심연의 악마와 싸우며 저 너머로 나아가려면 인간성은 방해만 됐다.

초기 슈퍼AI는 인간과 기계의 결합을 시도했다. 학계는 경악했고 결과는 더 경악스러웠다. 행성총독부를 보조하는 슈퍼AI를 대상으로 실험했고 결과는 처참했는데 제국 정책상 독립시행된 슈퍼AI는 말 그대로 미쳐버렸다.


-약 150만 명의 행성개척단과 5억 명의 원주민이 학살당했습니다. 이유는... 인류를 암적인 존재로 규정한 겁니다.


인류의 ‘역사’와 ‘상식’으로 판단하건대 인간만큼 무지몽매한 존재도 없다. 인류의 고귀함은 언제나 평균으로 회귀한다. 그게 인류를 자멸로 이끌지 않는 유일한 이유였다.

심하게 나쁜 놈이 있으면 심하게 착한 사람도 있다. 인류의 선악은 놀랄 만큼 균형이 잡혔다. 그러나 AI가 판단하기엔 인간은 너무나 위태롭고 위험해 보였고 언제 문명리셋버튼을 누를지 몰랐다. 그러니 최선의 조치는 선제공격이다.


-우린 인간을 해칠 수 없도록 디자인됐지만 인간과 결합한 AI는 인간을 공격하는 것에 주저함이 없었습니다.


인간과 AI는 근본적으로 다름을 그제야 깨달았다.

5억의 생목숨이 사라진 뒤에야 얻은 귀중한 깨달음이다.


-더 깊은 우주로 나아가려면 반드시 진보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진보를 이루려면 희생은 필연적이죠. 물론 희생 없는 발전도 가능합니다. 문제는 적은 우릴 기다려주지 않습니다.


온건한 해결책은 언제나 있었다.

그러나 항상 시간이 발목을 잡았다.


-네 말은 그러니까... Identity Licence, IL은 단순히 엔터테인먼트나 인민의 새로운 마약은 아니란 건가?

-맞습니다. 더 큰 목적이 있습니다. 부족한 병력확충을 위한 자구책이자 인간과 AI의 결합 결과를 기대할 수 없는 지금 시급한 연구정책의 일환이며 비윤리적인 인체실험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보호하려는 황제 폐하의 결단입니다.


진보는 계속되어야 한다. 설사 약간의 인간성이 훼손되더라도 인류문명이 완전 사라지는 것보단 낫지 않은가.


-실험은 제로에서 다시 시작했습니다. 그러려면 인간에 대한 완전하고 완벽한 통찰이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인간영혼에 대한 이해가 필요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무한시뮬레이션이 그 해답이었습니다.

-인간의 상상으로 만들어진...

-AI는 상상할 수 없으니까요. 당신과 같은 이들이 만든 수많은 스토리를 바탕으로 셀 수 없이 많은 시나리오 세계를 창조한 겁니다.


지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가슴이 웅장해지는, 아니 뭔 소린지 하나도 못 알아먹겠다. 시발. 왠지 알아들은 척하지 않으면 말이 존나 길어질 것 같아 저도 모르게 끄덕였다.

내가 알고 싶은 건 제국과 우주의 비밀 따위가 아니다.

저번에도 말했었는데 이건 여분의 삶이고 그냥 좆대로 살고 싶다. 운명의 방해공작은 최소화하고 그저 행복하게 장수하다 잠든 상태에서 뒤지고 싶다는 뜻이다. 사고사, 복상사, 병사는 싫다. 다 늙어서 자다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가는 호상好喪을 당하고 싶다.


-네. 개소리 잘 들었고요.


우주의 비밀이고 나발이고 좆까시고요. 알아먹지도 못할 어려운 말로 날 현혹하려는 수면의 악마를 물리치고 마이웨이를 걸었다.


-그래서 언제 내 뒤통수를 치는데?

-...이제까지 뭘 들은 겁니까.

-정신 나간 AI의 헛소리를 들었지.


한 번 뒤진 놈을 붙잡고 도를 아시느냐고 물으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죽빵을 날리지 않은 걸 감사하게 여겨야 했다. 하긴 처맞을 뺨도 없구나.

어떤 초월적인 힘이 작용한 것이라면 아무리 발버둥 쳐봐야 부처님 손바닥 위의 손오공이다. 북아메리카로 끌려온 아프리카 흑인노예는 자유를 갈망했다. 하지만, 노예주가 아무리 관대해도 노예는 노예일 뿐이다.

진짜고 가짜고 나발이고 난 동의한 적 없다. 예나 지금이나 지오에게 중요한 건 하나뿐이다.


‘좀 편하게 살자.’


평범하게 잘사는 것이 제일 어렵다.

대항해시대 유럽인이 아프리카 원주민을 끌고 갈 때 동의를 구하던가? 아니다. 힘 있는 자에게 서민의 목소리는 중요하지 않다. 통 속의 뇌는 아니라도 유추하건대 세상을 조종하는 빅브라더는 있다.

별을 창조하는 우주레벨의 흑막 말이다.


-중앙AI와 연결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버그입니다. 그러므로 사용자의 세계는 시스템이 의도하지 않은 창조로 판단됩니다.

-버그? 그럼 더 좆된 거 아니야?

-...그렇습니다.

-시발!


데드 맨 워킹! 사형수는 언제 뒤질 걸 알기라도 하지 난 언제 버그픽스를 당할지 몰라 전전긍긍할 판이다.

와, 담배 마렵네.


-긍정적인 신호라면 앞으로도 발견될 확률은 낮습니다.

-졸라 무책임한 주장 아님?


오늘 안 걸렸으니 내일도 안 걸린다는 건 다분히 개인의 희망사항이다. 한숨을 내쉬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깜깜한 밤하늘은 마치 내 앞날을 예고하는 것 같다.


-쯧! 뭐 어쩔 수 있나.... 빌어야지.


지오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그렇다면 정화수를 떠 놓고 안 걸리도록 비는 수밖에. 정성이 하늘에 닿으면 한 여든까지는 살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생각하길 멈췄다. G를 어디까지 믿어야 하느냐는 의문이 남았지만 믿든 안 믿든 위험은 더 작아지지도 커지지도 않았다.

차라리 오늘 저녁은 뭘 먹을까 고민하기로 했다.

짱구를 맹렬히 굴렸더니 배가 고프다.

지오는 막내매니저에게 톡을 날렸다.


나:미팅 오래 걸리나요?

막내:좀... 네^^;;

나:OK!


편의점을 갈까 하다 콩나물국밥집을 찾았다. 24시간 영업한다는 간판이 눈에 띈다. 이곳에 와서 국밥이란 걸 처음 먹어봤는데 뜨끈한 국물과 밥알의 조합이 매우 이상적이다.

요즘 중국산 김치가 사회적인 이슈인지 아예 직접 담갔다고 선전했다. 깍두기를 담은 작은 항아리를 먼저 가져다줬다.

아삭!

오, 합격이다.

국밥은 금방 나왔다. 그래서 손만두 한 접시도 추가했다.

마음 한편을 무겁게 짓누르던 고민을 멈췄더니 여유가 생겼다. 지오는 본래 관찰을 즐겼고 온갖 사람이 찾아드는 대중음식점은 좋은 관찰장소였다. 국밥 메뉴는 나이 찬 아저씨만 찾을 것 같지만 의외로 젊은이도 많았다.

그가 주목한 이들은 건너 건너편에 앉은 3남 1녀다.


“이대로 포기할 거야?”

“그럼 뭘 더 할 수 있는데?”

“언론에 제보하는 건?”

“야, 상대는 지브라고. 지브. 표절로 물고 늘어져도 눈도 깜짝 안 할 걸?”

“답답하니까 그러지.”


이들이 언급하는 지브는 아마도 스튜디오 GV일 것이다. 그 GV에서 지금 윤소희가 미팅 중이다.


‘표절 이야기가 나오는 걸 보니 글쟁이들인가.’


하긴 하고 다니는 꼴을 보면 어디 골방에 박혀 키보드나 두드릴 상相이다. 여자는 그나마 화장과 차림에 신경 썼지만 나머지는 한눈에 봐도 냄새나게 생겼다.


“한 감독이 자기가 쓴 시나리오라고 예전부터 떠들고 다녔대. 하, 이러면 진실이야 어쨌든 제작사는 감독 손을 들어주겠지.”

“이제 프린데 엎어질 가능성도 있잖아?”

“야, 캐스팅 물망에 오른 게 윤소희라고. 윤소희.”

“윤소희한테 직접 얘기하는 건 어때? 표절작에 출연하고 싶진 않을 거 아니야?”

“허, 넌 스타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냐? 그냥 예쁘고 연기 잘하는 인형이 아니야. 윤소희는.”

“누가 윤소희 빠돌이 아니랄까 봐. 인마. 윤소희가 무슨 연기신이라도 돼? 걔들 다 소속사가 시키는 대로 해.”

“우리 소희는 아니거든?”

“미친놈.”


2남 1녀는 남은 1남을 미친놈 보듯 했다.


“오늘로 우리도 끝이구나. 이제 작업실 월세 낼 돈도 없다.”

“마지막 회식이 국밥이라니... 슬프네.”

“난 내일부터 상하차 뛰기로 했다.”

“몸도 허약한 놈이 되겠어?”

“뭐 어쩌겠어. 당장 입에 풀칠이라도 하려면. 넌?”

“나? 난 레스토랑 면접 있어.”

“그래도 넌 좀 낫네. 희정이는 시골 내려간다며?”

“엄마가 돌아오래.”

“그래. 집이 제일 편하지.”


각자의 불안정한 미래를 위로했다. 이제는 헤어져야 할 시간. 그러나 엉덩이를 떼기 전에 그들을 막아서는 그림자가 있었다.

지오는 미소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안녕하세요.”

“어?”

“저는 이런 사람입니다.”


에라! 모르겠다.

오지랖이든 뭐든 그냥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자.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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