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케빈가넷 님의 서재입니다.

검은 배의 주인

웹소설 > 일반연재 > 대체역사, 판타지

케빈가넷
그림/삽화
케빈가넷
작품등록일 :
2020.06.23 22:47
최근연재일 :
2021.06.04 00:00
연재수 :
75 회
조회수 :
5,591
추천수 :
33
글자수 :
501,682

작성
20.08.03 16:32
조회
67
추천
0
글자
12쪽

39화. 사악한 노인 1

DUMMY

1535년 가을. 제르바 섬 남쪽 초원지대, 북아프리카.


“쉿!”

카린이 몸을 일으키려 하자 시에나가 손끝으로 그녀의 어깨를 눌렀다. 까무룩 잠이 들었던 카린은 영문을 몰라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바닥에 바짝 엎드린 시에나는 덤불 사이로 반대편을 응시하는 중이었다.

“누가 오고 있어요.”

시에나가 속삭이듯 말했다. 과연 한 무리의 낙타가 그녀들이 은신하고 있는 덤불을 향해 다가오는 게 보였다. 아직 거리가 멀어서 이들의 정체를 판단하기는 어려웠다.

“후······”

카린은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내뱉었다. 튀니스를 떠나온 지도 벌써 스무 날이 지나 그녀는 이미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다. 혹시나 추격자가 쫓아올 까봐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하고 걸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녀의 부드러운 발바닥은 이제 더 이상 걸을 수 없을 정도로 물집이 크게 부풀어올랐다. 누구라도 나쁜 마음을 먹고 공격해 온다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추격자들 같진 않은데 숫자가 많아요.”

“낙타 상인들인가?”

밀려드는 졸음에서 겨우 벗어난 카린은 무리의 정체를 짐작해 보았다. 그녀의 예상대로 그들은 낙타를 몰고 가는 베르베르인 유목민들이었다. 부자 관계로 보이는 노인과 청년이 느긋한 표정으로 낙타 무리를 이끌고 있었다.

“어떡할까요?”

시에나가 단검 손잡이에 손을 대고 물었다.

“저들을 무력으로 제압할 순 없어. 그보다 낙타를 우리에게 팔라고 해보자.”

카린은 시에나와 눈빛을 교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둘 다 돈은 충분하기에 거래를 제안해볼만 했다. 이들은 다시 덤불에 웅크리고 앉아 낙타 무리가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마침내 그들이 덤불 앞까지 근접하자 카린이 먼저 무리 앞으로 뛰쳐나갔다. 초원 한복판에서 갑자기 사람이 나타나는 바람에 낙타들은 깜짝 놀라 뒷걸음질쳤다.

“누구냐?”

노인과 청년은 지체 없이 칼을 뽑아 침입자들에게 겨눴다. 오랜 유목민 생활로 산전수전을 다 겪은 그들은 생각보다 침착한 모습이었다.

“놀라게 해서 죄송합니다. 우린 타라불루스로 가는 여행자들인데 마침 낙타가 필요해서 염치 불구하고 길을 막았어요.”

시에나와 카린은 양 손을 활짝 들어 공격할 의사가 없음을 알렸다. 허리에 칼을 차고 있었기에 그들을 안심시킬 필요가 있었다. 노인은 자신을 가로막은 소녀들이 한눈에 봐도 일반적인 여행자가 아님을 알아차렸다.

“아힘! 칼을 집어넣거라.”

노인은 우렁찬 목소리로 청년에게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는 천천히 소녀들에게 다가가 행색을 살폈다.

“저런······ 굶은 지 오래되었군.”

노인의 눈빛은 날카로웠다. 카린은 의외로 건장한 노인의 풍채에 놀라 뒤로 물러섰다. 여차하면 처치할 생각도 해봤지만 쉬워 보이진 않았다. 그저 낙타를 끌고 다니는 유목민으로만 보기엔 만만치 않은 상대들이었다.

“더 다가오지 말아요!”

결국 위협을 느낀 시에나가 칼을 뽑아 들었다. 노인은 그제서야 근엄한 표정을 풀고 빙그레 웃었다.

“허허. 검술을 어디서 배웠나 보군. 칼을 쥔 자세가 아주 야무지구나.”

노인은 칼을 치켜 든 시에나가 안중에도 없는 듯 매우 평온했다. 터벅터벅 낙타 무리로 돌아간 그는 선두에 선 낙타의 고삐를 풀어 근처에 자라난 나무에 단단히 묶었다.

“좀 쉬었다 가자. 아힘.”

노인의 명령에도 아힘이라 불린 청년은 미동도 없었다. 그는 낙타 등에 그대로 앉아 주변을 살폈다.

“타라불루스로 간다면 아직 한참 멀었군. 마침 우리도 그쪽으로 가는 길이야.”

노인은 낙타 옆구리에 걸어 둔 주머니에서 하얗게 구운 빵과 물을 꺼내 먹기 시작했다. 카린은 노인이 빵을 입에 넣는 순간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 같았다. 튀니스를 탈출할 때 챙겨온 음식들은 이미 동이 나서 오늘은 하루 종일 굶은 그녀였다.

“그래. 낙타를 산다고 하니 당연히 팔아야지. 얼마에 살 텐가?”

노인은 그녀들의 뜨거운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빵을 우물거리며 물었다. 카린은 당황한 눈빛으로 시에나를 쳐다보았다. 가격은 미처 생각 못했기 때문이었다.

“은자 두 개에 어떨까요?”

잠시 고민하던 시에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상황이 상황인 만큼 그녀가 생각한 가격보다 훨씬 후하게 값을 불렀다.

“하하하. 안타깝게도 난 죽음에서 그대들을 구하러 온 천사가 아니라네. 그냥 초원을 지나가던 흔한 낙타 장사꾼일 뿐이지. 그 돈으론 어림도 없어.”

노인은 한 개만 꺼내 먹고 남은 빵을 보자기에 싸서 주머니에 챙겨 넣었다.

“······그럼 얼마에 파실 건가요?”

이번엔 카린이 나섰다.

“글쎄, 얼마가 좋을까······ 그대들의 짐 보따리가 꽤 무거워 보이네. 그 안에 든 은붙이 전부를 준다면 팔겠네.”

한가로이 주변을 경계하던 아힘이 깜짝 놀란 눈으로 노인을 바라보았다. 몹시 당황한 시에나와 카린 역시 눈을 커다랗게 떴다.

“어르신······ 다시 한번만 생각해주세요. 이건 타라불루스에 도착했을 때 우리에게 꼭 필요한 돈입니다.”

카린이 울다시피 간청했지만 노인은 단호했다. 그녀들은 거래가 단단히 잘못되었음을 직감하였다.

“그건 내 알 바 아니지. 비싸다 싶으면 안 사면 그만이고. 살 생각이 있으면 지금 말하게. 빵도 다 먹었으니 우린 이제 출발해야 돼.”

카린은 어쩔 도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지금까지는 어떻게 악으로 버텨왔지만 이젠 무리였다. 이대로 낙타 없이 더 걷다간 이 드넓은 초원에서 굶어 죽을 게 뻔했다. 자포자기한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몸에 지닌 보따리를 풀기 시작했다. 보따리에서 생각보다 많은 은자가 나오자 시에나가 깜짝 놀랐다.

“조반니에게서 받은 물건들은 모두 두고 온 게 아닌가요?”

“이건 그와 상관없어.”

카린은 착잡한 표정으로 은자들을 노인에게 내밀었다.

“이걸로는 안되지. 내가 분명히 말한 것 같은데? 낙타 값은 너희 둘의 보따리에 들어있는 돈 전부라고 말이야.”

매정하게도 노인은 한 푼도 양보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 돈은 정말 안돼요.”

시에나는 자기도 모르게 메고 있던 보따리를 가슴에 끌어안았다. 그녀로선 절대 내어줄 수 없는 돈이었다. 사실 그녀는 혼자였다면 낙타가 없이도 타라불루스로 갈 자신이 있었다.

“그래? 그럼 거래가 안되겠군.”

노인은 미련없이 뒤돌아섰다. 그가 묶어 둔 낙타의 고삐를 풀기 시작하자 카린은 울상이 되었다. 그녀는 노인과 시에나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둘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젠장!”

시에나는 최악의 상황에 맞닥뜨린 기분이었다. 노인에게서 낙타를 사지 않는다면 카린은 얼마 걷지 못해 쓰러지고 말 것이다. 그렇다고 그녀를 업고 타라불루스까지 갈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노인을 노려보는 시에나의 몸이 희미하게 떨렸다.

“괜찮아, 시에나. 내가 좀더 힘을 내 볼게. 이제 얼마 안 남았으니까.”

더 이상 방법이 없다고 생각한 카린이 시에나를 향해 힘겹게 미소를 지었다.

“빌어먹을 늙은이!”

시에나는 결국 끌어안고 있던 보따리를 노인의 발치에다 집어 던졌다.

“전부 가져가고 낙타나 내줘요!”

보따리를 본 노인은 빙그레 웃었다.

“오랜만에 제값을 받겠구만.”

노인은 그녀들에게서 받은 은붙이들을 꼼꼼하게 세어본 뒤 모두 자루에 넣었다. 그리고는 무리의 꽁무니에서 쫓아오던 가장 작은 몸집의 낙타를 끌고 와 카린에게 넘겼다.

“이놈이 덩치가 작아 보이긴 해도 타고 가는 데는 별 문제가 없을 거야. 너희들도 몸이 작으니까.”

카린과 시에나는 또 한번 속았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지금으로선 그 낙타만이라도 감지덕지한 상황이었다. 낙타를 넘기고 그대로 출발하려던 노인이 갑자기 카린에게 다가왔다. 그는 짐주머니에서 조금 전에 먹고 남은 흰 빵을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날 생명의 은인으로 기억해줬으면 좋겠네. 하하하.”

마지막까지도 소녀들을 농락한 노인은 남은 낙타들을 모두 데리고 원래 가던 방향으로 부지런히 사라져갔다. 카린은 황당하고 분한 마음에 금방이라도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꾹 참아냈다. 나름 온갖 험한 꼴을 다 겪었다는 시에나 조차도 이번만큼은 견디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그런 것도 배고픔 앞에서는 사치한 감정일 뿐이었다. 낙타 무리가 눈앞에서 사라지자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노인에게서 받은 빵을 잘라 허겁지겁 나눠 먹었다.

“어서 출발해야겠어요. 아까 그들도 타라불루스로 간다고 했으니 발자국을 따라가면 더 수월하게 갈 수 있을지도 몰라요.


배가 찰 정도는 아니지만 모처럼 허기를 채운 소녀들은 얼른 낙타 위에 올라탔다. 낙타의 힘을 빌리더라도 아직 며칠은 더 가야 하기에 조금도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다행히 전 재산을 털어 산 작은 낙타는 그녀들을 모두 태우고도 힘이 남을 만큼 건강했다. 예전에 낙타를 몰아본 적이 있는 시에나가 앞자리에 앉아 고삐를 쥐었다. 하지만 낙타는 마치 아는 길을 가는 것처럼 별다른 고삐질이 없이도 능숙하게 잘 걸어갔다.

‘······달이 참 밝구나.’

초원의 밤하늘은 오늘따라 유난히 맑았다. 카린은 흔들리는 낙타 등에 기댄 채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낙타 덕분에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생겼지만 주린 배와 쓰라린 발바닥은 아직 그대로였다. 거기에 더해 차가운 밤하늘은 그녀를 더욱 울적하게 만들었다. 식어가는 들판을 따뜻하게 보살피는 보름달도 그녀의 마음을 달래진 못했다.

‘로카는 잘 있을까? 오스발도도······ 드레이······’

마치 금기어라도 된 듯 언제부턴가 떠올리지 않으려 애썼던 이름들이 달빛처럼 가슴 위에 내려앉았다. 생각만 해도 너무나 그리운 얼굴들이었다. 늘 그려왔던 로카의 얼굴까지 생생하게 떠오르자 카린은 자기도 모르게 두 뺨 위로 뜨거운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아버지는 살아있는 걸까? 나는...... 나는 어디로 가야 하는 거지?’

되살아난 기억들은 오롯이 혼자 견뎌온 수많은 시간들과 뒤섞여서 그녀의 머리 속을 사정없이 헤집어 놓았다. 그녀가 떠나온, 그녀를 떠난, 그리고 그녀가 다시 만나야 할 사람들······ 그녀는 마치 낭떠러지에 혼자 선 기분이 들었다. 자신을 도와줄 사람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터진 눈물은 결국 주체할 수 없는 서러움이 되어 카린은 오열하게 만들었다.

“괜찮아요?”

시에나는 등 뒤에 기댄 카린의 흐느끼는 소리를 듣고 살며시 낙타의 속도를 늦췄다. 카린은 처음으로 우는 모습을 들킨 것 같아 괜히 부끄러워졌다.

“미안해, 시에나. 돌아보진 말아줘.”

“저도 별로 보고싶지 않은 모습이네요.”

시에나는 가볍게 대꾸하고 다시 낙타의 속도를 높였다. 그녀가 왜 서럽게 우는지 알 것도 같지만 괜히 아는 척하고 싶진 않았다. 사실 그녀는 빼앗긴 돈을 어떻게 다시 만들어야 될 지 생각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아까 그 노인에게 준 은자, 어디에서 난 건지 알아?”

겨우 마음이 진정된 카린이 화제를 돌렸다.

“글쎄요. 저도 그게 궁금하긴 했네요.”

시에나도 적당한 때에 물어보려던 이야기였다.

“파올로가 줬어.”

“파올로가요? 왜죠?”

깜짝 놀란 시에나가 뒤돌아봤지만 카린은 여전히 달을 바라보고 있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검은 배의 주인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45 44화. 배신의 대가 20.08.11 48 0 16쪽
44 43화. 위험한 거래 2 20.08.10 72 0 14쪽
43 42화. 위험한 거래 1 20.08.07 80 0 18쪽
42 41화. 탐험가 발레리오. 20.08.06 58 0 16쪽
41 40화. 사악한 노인 2 20.08.04 50 0 13쪽
» 39화. 사악한 노인 1 20.08.03 68 0 12쪽
39 38화. 괴짜 항해사 2 20.08.01 53 0 13쪽
38 37화. 괴짜 항해사 1 20.07.31 111 0 15쪽
37 36화. 환란의 시간 2 20.07.30 52 0 17쪽
36 35화. 환란의 시간 1 20.07.29 43 0 15쪽
35 34화. 폭풍전야 2 20.07.28 137 0 13쪽
34 33화. 폭풍전야 1 20.07.27 40 0 12쪽
33 32화. 출정식 3 20.07.26 37 0 13쪽
32 31화. 출정식 2 +4 20.07.25 43 1 14쪽
31 30화. 출정식 1 20.07.24 39 1 13쪽
30 29화. 해적 도시 +1 20.07.23 40 1 18쪽
29 28화. 황제의 의뢰 20.07.22 44 0 17쪽
28 27화. 우울한 도시 2 20.07.21 52 0 14쪽
27 26화. 우울한 도시 1 20.07.20 42 1 14쪽
26 25화. 마지막 구출작전 2 20.07.18 40 0 13쪽
25 24화. 마지막 구출작전 1 +2 20.07.17 37 1 16쪽
24 23화. 합리적인 방법 20.07.16 57 0 16쪽
23 22화. 맘루크의 마지막 왕자 +2 20.07.15 43 1 14쪽
22 21화. 불가피한 선택 20.07.14 43 1 17쪽
21 20화. 구출 작전 2 20.07.13 47 1 15쪽
20 19화. 구출 작전 1 20.07.12 45 1 15쪽
19 18화. 불안한 우정 20.07.11 45 1 11쪽
18 17화. 피의 복수 2 20.07.10 45 1 15쪽
17 16화. 피의 복수 1 20.07.09 48 0 16쪽
16 15화. 아버지의 과거 2 20.07.08 51 1 16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