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밖의 자장면
근시일 내 공격적으로 어떤 고수입을 기대할 수 있는 종목은 없었다.
하지만 미래를 내다보기로 한 선택에서 내 나름대로 최선의 만족이 들었다. 놓친 게 많을 지라도 후회하지 않기로 하자.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렸다.
빅테크 미장에 50억, 강남 압구정 현대 아파트 두 채에 또 51억 정도를 지출. 안산의 저층 아파트에다가는 1억 초반을 투입했고.
최후의 보루로 남겨둔 나머지 10억을 제외하고서라도 제법 많은 가용 금액이 남는다.
이 전금은, 내가 나에게 선물해줄 수 있는 처음이자 마지막 용돈일지도 모른다.
‘이제는 경차로부터 해방돼도 괜찮지 않을까?’
머릿속에서 수많은 차종들이 스쳐 지나갔다.
람보르기니, 페라리. 포르쉐, 마세라티 등등.
한 번쯤 내 인생에서 플렉스 하는 순간을 기념비적으로 차에 투자할까 생각해 봤지만, 아쉽게도 희망사항은 꼬리를 감췄다.
아직 감가가 실효될 수밖에 없는 사치품에 많은 돈을 쓰는 건 조심스럽다. 더군다나 이제부터는 서울에 집 두 곳을 포함한 다주택자로 분류되기에 앞으로 내야 할 세금들도 무시하지 못할 것이니, 아낄 수 있는 건 일단 아껴두기로 한다.
모든 빛의 탕감을 이루고도 남은 130억은 앞으로 나날이 내 불변의 수익이 되어줄 것이다. 돈이 일을 하게 만드는 최초의 골자를 건축한 것이다.
남은 원제의 시급한 해결을 봐야 한다.
원룸 오피스텔 관리인에게 제일 먼저 전화를 했다.
“안녕하세요. 703호 서우라고 합니다. 계약이 한 달 정도 남았는데 미리 방을 좀 빼려고요. 이번 달 월세 중도금은 안 주셔도 되니 대신 그 돈으로 청소비와 도배에 드는 제반비용은 청구하지 않는 걸로 해주셨으면 합니다.”
그제가 월세 납기일이었고 이번 달만 지내면 이곳 오피스텔 계약은 만기가 된다.
나는 적당한 선에서 절충안을 내놓았고, 관리인은 잠시만 기다리라고 말한 후 다시 전화가 와, 나갈 때 드는 청소비와 도배 비용을 받지 않기로 흔쾌히 답변을 해주었다.
대신 방은 오늘 빼기로 하였다.
돌아오는 주말이었던 지라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
나는 대형 이삿짐 박스에 조촐하게 짐들을 욱여넣기 시작했다.
딱히 소형 이삿짐센터에 연락할 필요도 없이 대형 단프라 박스 3개에 모든 옷가지와 나머지 주방과 욕실비품들이 들어찼다.
필요 없는 것들은 과감히 정리를 해버리기로 마음먹고서 오랜 시간 나와 한 몸이 되어주었던, 내가 누운 자리만 푹 꺼져버린 매트리스 토퍼와 보풀이 잔뜩 난 이불 등등에 폐기물 스티커를 붙여 놓았다.
“그동안 고맙다.”
말을 할 수 없는, 소모품에 불과한 모든 무기물들에게조차 감사하게 된다.
난 이제 이곳에서 해방되지만 나의 추억들은 길이길이 이곳에 남아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내가 회귀를 이루게 된 장소니 훨씬 더 뜻깊은 곳이기도 했다.
한참 동안이나 집안 이곳저곳을 정성스럽게 어루만지듯 바라보다가 걸음을 옮겼다.
나머지 냉장고에 있는 상한 식품들도 전부 음식물쓰레기 봉투에 넣고 정리를 하고서야 마지막으로 박스를 옮기기 위해 다시 엘리베이터를 타려 했다.
그런데.
“이제 들어가세요?”
여기서 뜻하지 않은 사람을 만나게 된다.
바로 강윤아였다.
벌써 그녀와의 만남은 세 번째다. 나도 모르게 긴장감이 담긴 날숨이 떨려 나오려는 걸 참으며 태연한 척 말했다.
“안녕하세요, 윤아 씨. 오늘 이사 가려고요.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안 그래도 관리자에게 전화 받고 오는 길이에요.”
“예?”
설마 내가 703호에 산다는 걸 알고 있기라도 한 걸까?
이윽고 갑작스럽게 가까이 얼굴을 가져다 대는 강윤아로 인해 더욱더 곤혹스러운 건 내가 되었다.
“이삿짐은요?”
“네?”
“아니, 이사가신다면서요. 이삿짐은···.”
“아··· 이제 옮기려고요.”
“도와줄 친구 분이나 이삿짐센터는 따로 안 부르시고요?”
“단프라가 세 박스밖에 안 돼서요. 저 혼자서도 충분합니다.”
“그래도 그렇지. 이사하는 날이면 기념비적인 날이기도 하잖아요. 어디로 가시는 거예요?”
“고잔동으로요.”
강윤아가 대뜸 어깨를 으쓱 들어 올리면서 온기가 도는 입가에 웃음을 드리워냈다.
“이사 도와드려도 돼요?”
“···!”
오늘 여러 번 놀란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강윤아가 이사를 도와준다는 사실에 내 얼굴에 또 다른 당혹감이 스친 것도 잠시.
“왜, 이사 가면 짜장면 먹잖아요. 멀리 가시면 못 도와드릴 텐데 기껏 고잔동이라고 하시니, 우리 저번에 골프도 같이 쳤는데, 이제 지인 정도 된 거 아니에요?”
“아··· 무거우실 텐데요.”
“저 힘세요. 703호 사셨죠?”
“···.”
난 멍하니 쳐다보다 고개만 주억거렸다. 역시 알고 있었구나.
그런 내 눈치를 의식한 듯 강윤아가 싱긋 웃더니 입을 열었다.
“부모님끼리 아는 사이신데 그 정도도 모를까 봐요. 가요.”
“예···.”
원래 내가 말끝을 흐릴 성격은 아닌데.
강윤아의 순진무구한 시선이 왠지 아찔하게 얼굴에 꽂히는 기분이었다.
고작 이사를 도와준다는 말임에도 이상하게 갑자기 얼굴이 화르륵 달아올랐다. 정작 떡도 안 줄 강윤아는 감정조차 배제한 얼굴이었음에도 말이다.
“으쌰!”
그녀는 파이팅 넘치는 소리를 내더니 이윽고 박스를 양 손으로 들어 올렸다.
그나마 제일 가벼운 걸로 부탁했는데, 역시나 힘에 부치는 모습이다.
그럼에도 내가 말리지 않은 건 강윤아가 직접 나서준다는 수고로움을 굳이 방해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사실 좀, 귀여웠다.
자기 몸보다 더 큰 박스를 들고 내게 짐이 되지 않기 위해 낑낑대는 모습을 보니 문득 희비가 교차했다.
당연하게도 박스 두 개는 내가 들었다.
박스가 컸기 때문에 스파크 트렁크에 간신히 가로로 하나가 들어가고 나머지는 뒷좌석에 욱여넣어야만 했다.
“자, 출발!”
나는 오묘한 표정으로 뜬금없이 내 이사를 도와주는 강윤아를 향해 조심스레 물었다.
“시간 괜찮은 거예요? 바쁘신데 괜히 제가 민폐 끼친 거 아닌 가 해서요.”
“민폐라니요. 부모님끼리도 동맹인데 우리도 동맹 맺는 건데요. 아니면 짜장면 사주기 싫어서 그러시는 거 아니죠?”
상냥하게 웃어주는 강윤아를 빤히 쳐다보고 있다가 멍을 때리는 내 모습을 자각하고는 서둘러 시동을 걸었다.
길가로 접어들기 직전에 몇 번의 방지턱을 넘었는데, 잠깐 민망해진 기분으로 말했다.
“벤츠 타시다가 경차 타니까 불편하시죠?”
그러자 강윤아가 웃고는 손사래를 치며 부인했다.
“왜요. 통통거려서 재미있는데요.”
“···.”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말에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이상하게 씁쓸한 맛이 입안에 가득 퍼졌다.
회귀 전 강윤아는 지금 한 말과 거의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똑같은 말을 해주었기 때문이다.
내 인생은 새로운 화차를 시작했지만 여전히 그녀의 순수한 본성은 변하지 않은 채로 남아있었다. 그게 좋았다.
그러다가, 이상한 상상에 직면했다.
강윤아와 어쩌면, 잘 될 수 있지 않을까.
난 변하려고 노력하는 중이고, 변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좋게 변화하려 한다.
변질이 아닌 변화.
그러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나도 참··· 뭘 기대하는 것인지에 대한 헛된 상념에 헛웃음이 나온다.
그게 다였다.
아무런 말없이 창밖으로 시선을 던지는 강윤아와 나.
미묘하게 바뀐 분위기는 어색하면서도 어색하지 않은 거 같은 익숙함의 향수를 불러일으켜주고 있었다.
그리고.
“골프. 어렵더라고요.”
늘 그렇듯이 대화가 뚝 끊길 때면 지금까지 무슨 말이라도 꺼내던 강윤아는 오늘 그럴 기미가 보이지 않아 내가 먼저 말을 꺼내들었다.
때마침 바뀐 신호에 서서히 속도를 낮추자 그녀가 흘긋 나를 바라보았다.
“안 그래도 그 말 하려고 했었는데.”
“무슨 말이요?”
“아빠가 그러시더라고요. 지금 서 사장님 미국에 출장 가 계신다고.”
“네, 이틀 후에 오실 겁니다.”
“그래서 그 주 주말에 저번에 모였던 데서 다시 라운딩 한 번 하기로요.”
설마 했던 기대감이 실재가 되어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참 이게, 재미있는 감정이다.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강윤아는 내 옆에 앉아있는 상황이었고, 난 그녀와 일상적인 대화를 하고 있다는 것.
줄곧 정면으로 시선을 고정했던 내가 스르륵 고개를 돌렸다.
“요즘에 연습 많이 했거든요. 저번처럼 허무하게 지지는 않을 거예요.”
그녀는 아닌 척하며 입꼬리를 당겨 올렸다.
“아하. 그래요? 그럼 기대해야겠네.”
“기대는 하지 마시고요.”
잠깐의 대화뿐이었어도 즐거웠다.
슬며시 풍겨 나오는 강윤아의 샴푸 향기도 살랑거리는 봄바람처럼 기분이 좋아지게 해주었고, 그녀의 말소리도 청아하게 들렸다.
마침내 도착한 고잔동의 아파트.
역시나 엘리베이터 없는 낡은 연립 아파트에 강윤아는 벌써부터 질린 모습이었다.
“5층인데 엘리베이터가 없네요?”
“네. 여기서부터는 저 혼자 할게요. 짜장면 값 이미 충분히 하셨으니까 미리 올라가 계세요.”
“무슨 말씀이세요. 탕수육 값도 벌어야지. 으차!”
강윤아는 박스의 무게들이 다 동일한 줄 알았던지 내가 하나를 내려놓기 무섭게 들어 올리려고 했다가 화들짝 놀란 얼굴이었다. 이윽고 민망한 표정으로 웃었다.
“그, 아까 제가 들었던 게 저건가요?”
저절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정말 아무것도 아닌 순간이었는데, 그런 상황인데 강윤아도 나도 벌어진 잇새에서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어 들썩거렸다.
왜 그런 게 있잖은가.
아무것도 아닌데 웃게 되고, 그걸 보고 따라 웃게 되는 거.
우리가 그랬다.
고맙게도 강윤아는 그런 나를 보는 척 마는 척 낑낑거리며 박스를 날라주었다.
“남자 혼자 사는 곳인데 집이 크네요. 와. 밖에서 보던 거랑 완전 다르다.”
그녀의 눈에 비치기로는 그럴 법도 하다. 나도 그랬으니까.
외부 벽만 보면 때가 끼고 넝쿨 같은 게 올라가 있는 아파트 외부 벽은 여기저기 페인트가 깎여 나가 있었다.
그런데 안으로 들어와 보면 말이 달라진다.
사람 혼자 사는 집에 방이 자그마치 네 개라니.
바닥 장판도, 도배도 새로 전부 다 마쳤기에 집안은 아주 새것 같지는 않아도 제법 새 집으로 이사 온 느낌을 가져다주었다.
필라멘트테이프와 벨크로 테이프를 씩씩하게 푸는 그녀의 동공에서 약간의 지진이 일어나기 시작한 건 그쯤이었다.
“왜··· 아. 그건 제가 할게요.”
“아, 네.”
하필 강윤아가 푼 박스 안에 내 속옷들이 들어있는 것이었다.
나는 쓴웃음을 지어보이며 입꼬리를 올렸다.
“식탁이 따로 없는데. 앉아서 먹는 짜장면도 괜찮을까요?”
그녀는 그게 뭐가 이상하냐는 듯 눈꺼풀을 접었다 들어올렸다.
“이삿짐 풀고 난 후에 짜장면은 바닥에 신문지 깔고 먹는 게 국룰 아니었나요?”
“···.”
고요한 침묵 뒤로 다시 잔잔하게 퍼지는 웃음.
곧 해가 저무는 서편 가운데로 강윤아의 입술만이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짜장면 곱빼기 2개와 탕수육을 대자로 주문했다.
“마음 변하기 전에 다른 거 또 드시고 싶으신 건 없고요?”
“깐풍기도 혹시 되나요?”
“당연하죠.”
깐풍기 소자를 추가 주문.
이후 다행이게도 우리의 어색한 침묵은 오래 가지 않았다.
고작 약 10분 후에 번개처럼 신속하게 배달이 되었고, 우린 정말 말 그대로 신문지 위에 철퍼덕 앉아 자장면 래핑을 뜯어냈다.
“제가 계산한다니까···.”
“아니에요. 오늘은 제가 사고 싶어서 그러는 거니까 아무 말 말고 드셔주세요.”
옷이 더러워지는 것도 마다하지 않고 이사를 도와주더니 중식 값까지 계산을 해버리는 강윤아를 보고 멋쩍게 관자놀이를 긁었다.
“냄새 좋다.”
강윤아와 중식을 먹으려 하면 늘 내가 해주던 버릇이 있다.
그녀는 손이 작아 자장면을 한참이나 비벼야 한다. 그래서 과거에 늘 강윤아의 자장면을 비벼주었다.
“감사합니다.”
예쁘게 말하는 그녀가 자장면 한입을 입에 넣고 우물거리며 방싯 웃었다.
“역시 이사 후에 짜장면은 최고네요.”
분명 비싼 바지일 텐데, 박스를 들다가 여기저기 먼지가 묻은 것도 아랑곳하지 않아주는 강윤아에게 고마웠다.
그리고 아무 것도 아닌 자장면인데도 맛있게 먹어줘서 더 고마웠다.
그러다가 강윤아에게서 전혀 예상치 못했던, 뜻밖의 질문 하나가 날아와 귀로 박혔다.
“혹시 저 스토킹 당했던 거, 알고 도와주셨던 거예요?”
Comment '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