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가 되어간다
식사를 끝내고 이성우 기정을 비롯해 강 사장 부부, 강윤아는 가벼운 2차 대신 귀가를 택했다.
이 기정은 나에게 무언가를 말하고 싶어 했지만, 의도적일지는 몰라도 강필수 사장이 난입하는 순간 입맛을 다시며 물러났다.
월요일에 보자는 말을 끝으로 해산.
조금은 홀가분한 기분이다.
골프로 열흘 안에 가시적인 성과를 낼 수는 없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을 다 했던 거 같다,
그리고 여기서 한 가지.
조금 이상한 생각을 해본다.
강윤아와 꽤 그럴 듯하게 인연이 맺어지지 않았나 하는 기대감.
그렇게 강윤아를 모르는 척 하자고 다짐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 내 결심도 한낱 무너질 모래성에 지나지 않았구나.
‘나란 놈도 참.’
걸음을 옮기려 할 때였다.
“서우야.”
“?”
서영도가 가려는 내 발길을 붙잡았다.
“아직 안 갔어?”
“초저녁이잖아. 약속도 없고. 잠깐 걸을래?”
“추위 잘 타잖아, 형.”
“괜찮아. 좀 걷자.”
오늘 제대로 된서리 맞은 서영도가 불안하기는 했던 모양이다.
어쩌다 보니 서영도와 호숫가를 함께 걸었다. 걷는 동안 우리는 말 한 마디 섞지 않았다.
사실 서영도와 그리 많은 추억이 있는 건 아니다. 거기다 일진사건이 있고 난 후로는 데면데면해졌고.
어슴푸레한 정경을 뚫고 나오자 제법 운치 있는 정경이 눈을 빼곡 채웠다. 아직 달빛이 닿지 않는 물의 흐름이 잔잔했다.
아직 춥기는 하다.
얼마 안 있어 날카로우면서 건조한 바람에 호수에 잔잔한 파동이 일었고,. 난 옷깃을 안쪽으로 여몄다.
“너 말 잘 하더라.”
그때 들리는 서영도의 말.
난 대꾸하지 않았고, 녀석이 천연덕스럽게 말하는 것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이 기정 앞에서도 할 말 다 하는 모습을 보니 대단하더라고. 무슨 외운 대사 같이 유연하게, 술술 강 사장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고. 아까 전에 놀라는 눈빛들 다 기억이 나. 내가 아는 서우가 맞나 싶더라.”
‘그야 네가 날 강 사장 앞에서 나를 폄훼했을 테니 더 그런 반응이 나올 수밖에.’
서영도의 섣부른 한 마디로 인해 강 사장의 가라앉았던 눈에서 불빛이 들어온 순간이 떠오른다.
바야흐로 내가 강필수 사장에게 AVT와 하나 케미칼의 접근법을 좀 달리하면 어떻겠냐고 순간순간 주제를 전환하던 시점이었다.
하던 얘기를 전부 끝내고 화장실에 갔다 오던 강 사장이 무심코 말했었다.
“자네가 듣던 것처럼 그리 보이지는 않는군.”
“예?”
귀에 익은 강 사장의 목소리에 사모님이 고개를 들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윤아 아빠가 하는 말은 신경 쓰지 말아요.”
“무슨···.”
“자네 형이 그러던데. 서우라는 동생이 있는데 참 못 말리는 녀석이었다고.”
아.
그 한 마디만으로 모든 전후맥락이 파악되었다.
아까 전 무분별했던 서영도의 화두가 그 이전에 내게 전이되었던 것이다.
골프장에서 처음 인사를 나눴을 때 내가 강 사장 부부에게 영도 형 본인은 어떤 사람이었는지 물어보았었다.
사색이 된 서영도를 두고 나도 모르게 그냥 웃으며 유야무야 넘어갔었는데.
똑같은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 침묵을 선택했었다.
“조금 더 옳은 길을 위한 선택을 한 거야.”
“분별력 없는 말들이 아니었으니까 거기 모인 사람들이 놀랐던 거지. 나도 네 말 듣고 내심 감탄했어.”
“조금만 곱씹어 보면 답이 나오는 문제였으니까.”
난 서영도의 앞에서 여기까지만 말했다.
최고의 인생은 아니지만 이제라도 최선으로 살면 그만이다. 그렇게 최선이 쌓이고 쌓여 결국 최고에 근접하는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난 만족하며 살아갈 수 있다.
무슨 천우신조인지는 몰라도 회귀라는 걸 겪었다.
그럼에도 아는 정보는 극히 제한되어 있고, 내 나름대로 풀이해 살아가야 한다.
인리를 위해하는 일 없이 잘 살아가기만 하면 될 뿐이다.
굳이 세계 최고의 부자가 될 필요도 없다. 내가 내 자신에게 만족하며 살면 그뿐인 거 아닌가.
지금 강 사장을 만나 나에 대한 인식을 재정립해주는 것만으로 이미 내게는 충분히 놀라움의 연속이다.
난 내 자신을 아껴주려 하고, 나답게 살아갈 것이다.
오히려 서영도가 대화의 본질을 훼손시켜 준 것에 대해 감사한다. 그런 최악의 순간이 만들어지지 않았더라면 내가 나설 일도 없었을 것이고, 날 이곳까지 불러낸 아버지를 염두에 두더라도 할 말이 곤궁했을 테니까.
이성우 기정이 대화의 연결망을 트게 해준 것도 주효했다.
“나, 이 길이 맞는 건가 싶다.”
또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싶었다.
“삼성SDI 말이야. 내 길이 아닌 거 같다고.”
마침내 서영도가 삼성SDI를 거론하기 시작했다.
이미 거짓부렁이로 삼성 자회사에 합격했다고 허풍을 친 서영도 입장에서는 슬슬 똥줄이 탈만한 일이겠지.
그런데 참 웃기다. 알아볼 수 있으려면 얼마든 입사 합격이 거짓이라는 걸 간파해낼 수 있을 텐데도 굳이 서류조작까지 할 필요가 뭐가 있을까?
잘못된 야망은 맹목적인 믿음을 부르기 마련이다.
녀석은 널빤지가 너무 가벼운 길만을 선택하다가 지금 추락 위기에 처해 있었다.
“입사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맞지 않는다는 말을 해.”
모르는 척하기로 했다. 가족 간의 협연이 아무리 불협화음을 낸다고 하더라도 때로는 모르는 척 해야 할 때도 있으니까.
“아무래도 공기업이 체질에 맞는 거 같아서. 사기업이 뭐겠냐? 일차적 사명이 이윤 극대화인데, 그 부분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성격이었더라고, 내가. 공기업은 1인분만 해도 인생 밸런스 유지하며 살 수 있잖아. 직무도 행정직이나 기술직밖에 없는데, 어차피 삼성SDI쯤 되는 곳에 합격도 해봤으니까 내 입장에서는 부모님에게 보여줄 건 다 보여줬다는 입장이고.”
저러다가 잘못된 사업의 길로 빠졌었지.
그리고 몇 번 말아먹은 끝에 자존심만 남은 주정꾼이 되었다.
‘아버지가 다 알고 있는데도.’
서영도는 아마 꿈에도 모르고 있겠지. 그 일로 인해 지금도 아버지의 근심 가득해하는 얼굴을 말이다.
뭐, 내가 상관할 일은 아니다.
“형 인생이니 형이 알아서 해야지. 뭘 하든 어머니와 아버지, 실망시켜드리지 않으면 돼.”
난 놈의 얼굴에 암운을 선묘하게 해주는 대신 여전히 말 없는 그림자를 자처하기로 했다.
“춥다. 갈게, 조심히 가고.”
입술이 반쯤 열린 서영도를 두고 지나치기로. 그런데 갑자기 이런 말이 들려온다.
“너 뭐 딴 마음 품고 있는 거 아니지?”
“뭐?”
돌아보자 제법 상냥한 말투가 들려왔다.
“윤아 씨 말이야. 강 사장님. 언젠가 내 장인어른 되실 분이야.”
한숨 같은 웃음이 튀어나왔다.
드디어 본심을 드러내겠다 이건가.
명백한 선전포고였다.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왜 전생에서 저런 놈을 그토록 부러워하면서 살았을까?’
인생은 회전목마라더니.
서영도가 갑자기 가여워지는 느낌이다.
지금 그런 거나 신경 쓰고 있을 때가 아닐 텐데.
“그건 내가 신경 쓸 부분이 아니지. 그리고 형이 되고 싶다고 해서 될 수 있다는 것도 아니니까. 잘해봐, 간다.”
어쩐지 기묘한 모양으로 입을 비트는 서영도에게서 난 일별이 아닌 잠깐의 이별을 택했다.
***
리플로 인해 뜨거워진 비트코인에 대한 열기는 하나 케미칼 직원들에게도 예외는 아니어서, 시간이 될 때마다 모이는 흡연구역에는 언제나 코인들에 대한 대화들로 극성이다.
오늘도 어느 부서의 누가 얼마를 벌었다더라, 하는 자체적인 도시전설을 꺼내드는 동료들은 곧 나를 에워싸고 있었다.
“서 과장님. 지금이라도 리플에 탑승할까요? 애가 끝이 없이 오르는데.”
“이번에는 리또속이 아닌가 봐요.”
25센트, 즉 200원 중반 대에 산 리플의 평단가는 어느새 2,000원을 돌파했다.
내가 5억 7,000만원을 투자했던 리플의 평가 금액만 해도 어느새 50억이 갓 넘어가고 있었는데.
말이 50억이지. 일평생 50억을 벌어보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태반이다.
손가락질 한 번에 거래 수수료를 빼더라도 온전히 50억이 넘는 거액을 거머쥘 수 있는 코인 거래소 어플이 온전히 내 핸드폰 안에 있었다.
이걸 꺼내들어 보여주는 우를 범하지는 않을 것이다.
짜릿했다. 심장이 튀어나올 정도로.
이렇게 벌리게 된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전율이 오를 정도이다.
팀원들에게 애써 태연함을 가장하는 건 또 다른 문제였다.
“글쎄요. 이제라도 신고점 연일 갱신하는 리플에 투자할 깡이 있다면요.”
“에이. 아무래도 너무 올라서. 금방 바닥 칠 거 같아서 난 못하겠다.”
“저도요. 서 과장님은 발목에서 주워 담으셔서 지금도 들고 있을 수 있는 거지. 이제 들어간다고 한들 수익이 나겠어요? 당장 내일 떨어지지만 않으면 다행이지.”
“내일이 뭐야. 태우는 순간 진짜 태워져버릴 걸?”
팀원들은 역시나 주저만 할 뿐, 선뜻 리플에 투자할 생각은 하지 못했다.
“괜히 리또속이 아니라니까.”
김평우의 말이 들린다.
난, 오늘도 조심할 뿐이다.
코인 거래소를 가끔 기웃거리는 것 말고는 달리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단 하나만은 알고 있었다.
내가 평생 꿈에도 그리던, 부자가 되어간다는 사실을 말이다.
***
사람의 욕심이라는 건 참 무섭다.
어느 누가 어디에 투자를 해서 얼마를 벌었다더라, 하는 도시전설 같은 말들은 심심찮게 누군가의 입에서 또 누군가의 귀로 전달이 되어가고 있다.
부동산, 주식. 혹은 비트코인으로.
그걸 내가 겪을 줄은 몰랐다.
‘50억만 있어도 세상 부러울 게 없구나.’
일전에 로또 1등과 2등을 두 번 중복에 당첨되어 세금을 뗀 실수령 금액이 13억 후반이다.
50억이라고 하면 세후 1등 당첨만 못해도 약 4번에 달해야 한다는 소리다.
내게 주어진 축복의 낱장들이 뭉치로 변해간다는 걸 알면서도 가끔은 어안이 벙벙해지는 느낌이다.
그런데 앞으로도 더 벌릴 거라는 걸 나만 알고 있는 사실이 여간 무서우면서도 짜릿한 게 아니었다.
앞으로도 요지부동, 들고 있을 생각이다.
1,000만 달러.
130억을 가뿐히 상회하는 실현 수익으로 앞으로 뭘 하면 좋을까?
이 돈이면 많은 걸 할 수 있다.
안산에서는 지역 유지로 통할 수 있을 정도의 거액이다.
최신형 람보르기니 운전대를 잡고 주말 저녁 무렵, 브랜드도 없는 허접한 트레이닝 복 차림으로 중앙동 초입에 진입만 해도 그 순간 구경꾼들로 인해 빛나는 주인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행복한 상상은 결정이 아닌 과정에서의 가용으로만 끝내기로 한다.
거머쥐게 된 이 돈의 일부로 반드시 해야 하는 것들이 있지만, 어쨌든 매번 편의점 안에서 1+1만을 눈여겨보며 반강제로 선택지가 좁혀지던 내 인생에 드디어 봄날이 찾아왔다.
아직 만개하지는 않았다지만 난 꽃보다 이들을 개화시키는 꿀벌이 되기로 했다.
하지만 의외의 훼방꾼이 이 공장 안에 있다는 걸 안다.
서두필.
드디어 놈이 과거의 오늘로부터 작전을 개시하기 시작했다.
- 작가의말
함께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건강 잘 챙기시고, 오늘도 좋은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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