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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6굴림실패 님의 서재입니다.

치킨 없는 판타지에 구원은 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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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D6굴림실패
작품등록일 :
2019.10.28 19:34
최근연재일 :
2021.03.04 14:24
연재수 :
287 회
조회수 :
766,378
추천수 :
28,912
글자수 :
2,157,900

작성
20.04.10 12:00
조회
1,638
추천
76
글자
12쪽

아카이아 #7

DUMMY

이변을 가장 먼저 눈치 챈 것은 불침번도, 당직사관도 아닌 주둔지의 짬통을 찾아 어슬렁거리던 고양이었다.

시각과 청각 중 그 어느 것에도 감지되지 않건만 그곳에 뭔가 있다는 걸 눈치챈 것은 냄새 때문일지 고양이의 육감 때문인지 모른다.

허나 그곳에는 분명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음에도 뭔가가 있었다.

으스스한 유령처럼 싸늘한 기운이 자신 근처에서 느껴지는 기분 나쁜 감각에 고양이가 앙칼지게 울음소리를 내려고 하는 순간 고양이의 목과 몸통이 분리되었다.


고양이의 토막난 몸뚱아리가 바닥에 떨어져내렸지만 이상하게도 아무런 소리가 나지 않았다.

피가 공중에서 한움큼 흙바닥에 떨어져내렸건만 철퍽하는 소리 하나 나지 않은 것이다.

천막들 바로 옆에서 일어난 일이었음에도 천막 안에서 곤히 자고 있던 병사들은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


그 유령들은 투명하게 보이는 칼날에 묻은 피를 털어내고 계속 전진하였다.

꾸벅꾸벅 졸고있는 불침번의 구부정한 허리를 곧게 펴주고, 잠 기운에 쓰러지지 않으려는 이들의 뒤로 돌아가며 들리지 않는 격려를 해준 유령들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경보와 알람 마법들이 꿈나라로 떠나듯이 하나씩 침묵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해제가 아니라 일시적인 침묵이기에 만약 공중에서 주둔지의 마력 활성 현황을 볼 수 있는 자가 있었다고 해도 아무런 이상을 감지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름다운 백옥으로 만들어진 신의 하프는 언제나 고고한 분위기를 뿜어내며 어두운 밤에도 새하얀 빛깔을 자랑하였다.

던전 입구가 있는 동굴 안에 옮겨진 제단 위에서 고고하게 빛나고 있는 하프는 모두가 거의 잠든 깊은 새벽에도 은은한 백색광을 뿜어내고 있었고 적당한 조명 덕택인지 신전에서 파견된 신관병들조차 완전히 정신줄을 놓고 있지는 않았지만 꾸벅꾸벅 졸고 있었고 그때 갑자기 하프가 스스로 연주를 시작하였다.


하프는 하프의 소리만 내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악기 소리를 내고 있었다.

대체 어떤 원리로 현을 뜯는 것만이 아니라 관악기와 타악기 소리까지 내는지 이 하프를 만들어낸 여신 말고 아무도 알 수 없으나 하프가 내기 시작한 느리고 슬픈 선율은 마치 거대한 성당 한가운데에서 여성 음유시인이 비극으로 끝난 이야기에 대한 노래를 부르는 것 같이 퍼져나갔다.

그 와중에 하프는 단순히 현을 뜯는 소리만으로 그 속에 있는 영혼들이 메아리치는 것 같은 착각이 드는 소리까지 만들어냈고 그 선율에 불침번을 담당하던 병사들은 반쯤 감겼던 눈이 확 떠졌다.



"200걸음 내에 허가되지 않은 자가 오고 있나?"


"옆 대륙 제국 놈들 잠이 덜 깨서 여기로 온 거 아니야?"



병사들은 규율에 따라 즉시 긴 창을 들고 동굴의 가장자리로 이동해 하프의 공격 범위에서 벗어난 동시에 동굴 입구를 차단할 수 있도록 무기를 들어올렸다.

하지만 탁 트인 200걸음 내의 전방의 공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하프가 있는 곳으로부터 200걸음, 동굴 입구로부터는 160걸음 저 너머에 있는 천막 쪽 불침번들은 아무런 이상을 깨닫지 못한 것처럼 그냥 하품만 쩍쩍 하면서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도 없는데?"


"우리한테 안보이는 사각지대에 누가 있나?"


"이봐 거기! 동굴 근처에 누구 없어?"



하프를 지키던 불침번들은 동굴 안에 있어서 시야가 완전히 확보된 게 아니라 자신들이 보지 못하는 사각지대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천막 쪽 불침번들에게 외쳤으나 천막 쪽 불침번들은 그들의 외침을 듣지 못한 것인지 자기들끼리 떠들기 시작하였다.

하프 쪽 불침번들은 자신들의 말을 무시하는 천막 쪽 불침번들의 태만에 화를 냈지만 허가나 교대인원 없이 자리를 비울 수도 없는 노릇이라 고래고래 악을 써가며 소리쳤다.



"야! 대체 뭐하는 거야! 동굴 근처에 누구 있냐고!"



분명 이쯤 성량을 높였으면 저쪽에서 뭔가 반응이라도 해야 할 텐데 천막 쪽 불침번들은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결국 화를 참다 못한 하프 쪽 불침번 중 하나가 창을 들고 동굴 밖으로 나가려고 했지만 그때 다른 한 명이 동료를 제지했다.



"잠깐만 기다려봐. 뭔가 이상해."


"저놈들 귀가 먹은 거?"


"아니야. 바람 소리가 안 들리잖아."



그 말을 듣고서야 다른 불침번은 종종 바람이 불 때마다 동굴의 벽에 반사된 휘이잉 거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분명 동굴 밖의 가장 가까운 천막의 쫙 펼쳐진 천이 바람에 부르르 떨리고 있는 게 보이고 있는데도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는 건 이상한 일이었고 그제야 그들은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닫고 급히 종을 치기 시작하였다.



땡땡땡땡!!



긴급사태를 알리는 타종 연타를 열심히 했지만 어째서인지 동굴 밖의 인원들은 아무런 소리도 듣지 못하고 서로 떠들다가 둘 다 졸음이 쏟아지는지 눈이 반쯤 감기고 있었다.

동굴 내부에 있는 이들은 확실히 소리가 차단되고 있다는 걸 깨닫고 급히 돌을 주워서 바깥 쪽 불침번을 향해 돌을 던졌다.

이 시대에는 마법이나 신성력의 보조를 받지 않은 금속 갑옷과 창, 약간의 식량과 물이 담긴 배낭을 착용한 인간 병사가 330걸음의 거리를 전속력으로 달려가는데 15초 가량이 소모되는 것이 보통이니 하프로부터 200걸음, 지금 그들이 있는 곳으로부터 180~190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이들에게 돌을 던진다면 거기까지 도달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몇 초가 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병사들이 던진 돌은 동굴 입구에서 갑자기 허공에 멈춰섰다.

그리고 이상 현상을 보고 얼어붙은 병사들의 기분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것인지 거기에 맞춰서 신의 하프의 소리는 갑자기 다시 선율이 바뀌었다.

방금 전까지 연주되던 곡이 여성 음유시인이 들려주는 슬픈 이야기에 대한 것이었다면 이번 곡은 슬픔과 동시에 장엄하고 근엄한 이에 대한 노래를 부르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순간 다시 곡조가 바뀌었다.



-무섭고도 텅 빈 운명의 노예여. 구르는 운명의 바퀴에 매달린 죄수여. 사악한 마음 품었으니 부귀도 헛되고 언제나 무로 돌아가는 것. 싸움에서도 미덕에서도 운명이 그대를 대적한다.



지금껏 하프의 현을 뜯는 소리가 사람이 웅얼거리는 소리로 들린 적은 많았지만 그 뜻을 이토록 쉽게 알 정도로 선명하게 들린 적은 없었다.

엄숙하면서도 끓어오르는 분노에 대해 말하는 것 같이 신의 하프는 노래하고 있었다.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은 불침번들은 그리고는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전신갑옷을 입은 기사들을 볼 수 있었다.


대체 어떻게 저런 소리가 잘 날 수밖에 없는 이들이 여기까지 오는데 아무도 몰랐던 것일까?

답은 그들이 자신들의 일정 범위 안의 소리를 차단하는 마법을 걸어놨고, 동굴 입구에 진을 치고 있어서 동굴 내부의 소리가 밖으로 퍼지지 않았던 것이다.



-등 떠밀리고 모욕당하며 늘 노예나 마찬가지. 그러니 이 순간 주저함 없이 떨리는 현을 타라.



하지만 그들이 간과한 것이 있었다.

마법으로 평범한 소리를 차단할 수는 있어도 신의 하프가 내는 소리는 막을 수 없었다.

하프가 내는 노랫소리에 천막 쪽 불침번들이 하프 쪽으로 시선을 돌렸고 그들은 동굴 안쪽이 보이지 않는 건지 뭐하는 건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눈만 깜빡였다.



"전진"



그리고 기사들의 너머로 붉은 갈기를 지닌 거인이 나타나고서야 하프 쪽 불침번들은 침입자들이 소리만 막은 것이 아니라 시야까지 가리는 마법을 사용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저런 거대한 거구를 바깥에 있는 이들이 보지 못한다는 건 말이 안되는 일이었으니까.



끼이잉!



거인의 명령에 맞춰 침입자들이 동굴 안으로 진입하려고 하자 신의 하프가 날카로운 파괴의 선율을 연주하기 시작하였고 증폭된 음파가 파괴적인 충격파로 변환되면서 동굴을 일직선으로 휩쓸었다.

이전에 던전 입구에 침투하려던 누군가를 피와 살점과 부러진 뼈 무더기로 바꿔버린 충격파는 한순간에 3번 발사되었다.


하지만 침입자들은 마법과 신성력의 복합 장벽들을 펼쳐 제1파와 2파를 막아내고 제3파에 떠밀려 뒤로 튕겨나갔다.

마지막 3파를 맞은 것만으로 갑옷의 약한 부분이 찌그러질 정도였으니 아마 3번을 다 맞았다면 그들이라고 해도 무사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붉은 사자 갈기 같은 수염과 머리카락을 지닌 거인은 그 충격파 속에서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타오르는 것 같은 붉은 눈동자는 부라리며 앞으로 나서는 그 거인은 불침번들의 창을 앞으로 뻗으면 닿을 거리까지 다가왔지만 불침번들이 창을 앞으로 찌르는 순간 그들은 자신들의 창이 거인의 몸에 박히는 대신 커다란 성벽을 때린 것처럼 튕겨나가는 걸 볼 수 있었다.



-불타는 속내로 솟아오르는 분노로 쓰라리게 그대 마음에 말하네.



신의 하프는 이제 보이지 않는 입을 나불거리는 것처럼 계속해서 노래를 뽑아내고 있었다.

그 한마디 한마디가 충격파로 변환되었지만 거인은 그저 머리카락을 휘날릴 뿐이었다.


대체 이 거인이 어떤 삶을 살아왔기에 하프가 이토록 선명한 음색을 내는 건지 불침번들은 이해할 수 없었고 그들은 거인이 자신들의 창을 맨손으로 잡고 꺾어버리자 전의를 상실해 하프의 공격 범위 밖인 동굴 가장자리에 바짝 달라붙어 침입자들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하프가 내는 소리는 점점 더 커져서 주둔지에 있던 이들이 하나씩 잠에서 깨어나 밖으로 나오고 있었고 하프를 지키는 불침번들은 바로 그들에게 달려가 침입자에 대해 말하고 싶었지만 지금 자신들의 위치를 조금이라도 벗어나는 순간 거인을 때리는 음파에 맞아 산산조각날 것을 알고 있기에 움직일 수 없었다.



-악에 몸 내 주고 선에는 관심 없이 구원보다 육신의 환락에 목말라하는 영혼은 죽었다 하니 헛된 과거의 음식을 탐닉할 수밖에.



거인은 이제 하프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그는 허리춤의 철퇴도, 도끼도 들지 않고 그저 양 손으로 제단 위의 하프를 번쩍 들어올리고는 힘을 주면서 외쳤다.



"카르미나 부라나를 나한테 맞춰서 즉석 편곡, 개사 하는 걸 보니 다른 것도 부를 수 있지?! 로니 제임스 디오 형님의 레인보우 인 더 다크나 헤븐 앤 헬 틀어줘! 아니면 퀸의 보헤미안 랩소디라도 제발!"


-Bluetooth disconnected


"매정한 새끼..."



그러더니 하프는 의미를 알 수 없는 소리를 내고는 빛이 꺼져버렸다.

거인은 어쩐지 하프가 꺼져버린 것에 상심한 얼굴로 하프를 내려놓고는 터벅터벅 걸어갔다.

백날 음파 공격을 퍼부은 것보다 그냥 매정하게 연결 해제된 쪽이 타격이 컷는지 거인은 우울한 표정으로 여럿이 달라붙어서 열어야 할 던전 입구의 석문 앞에 서서 한참을 하프 쪽으로 곁눈질 하였다.


하지만 하프는 결국 다시 불이 들어오지 않았고 결국 포기한 것처럼 거인은 문의 틈새로 손을 집어넣고는 그대로 잡아당겼다.

거대한 석문이 끼기긱 거리는 소리를 내며 활짝 열리자 거인은 그 안으로 들어가면서도 계속 하프를 바라보다 어둠 속으로 사라졌고 열둘의 기사들은 하프 쪽에 신경도 쓰지 않은 채 던전의 어둠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잠시 후 그들 모두가 들어가자 주둔지의 사람들이 모여들기 전에 두꺼운 문이 쿵 소리를 내며 닫혀버렸고 불침번들은 그 즉시 동굴 밖으로 달려나가며 외쳤다.



"침입자다! 하프가 뚫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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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 아카이아 #2 +6 20.04.03 1,725 63 13쪽
164 아카이아 #1 +6 20.04.02 1,676 61 13쪽
163 진보를 위한 땀과 눈물 #10 +22 20.04.01 1,682 73 18쪽
162 진보를 위한 땀과 눈물 #9 +11 20.03.31 1,673 68 14쪽
161 진보를 위한 땀과 눈물 #8 +10 20.03.30 1,730 64 15쪽
160 진보를 위한 땀과 눈물 #7 +17 20.03.27 1,764 63 16쪽
159 진보를 위한 땀과 눈물 #6 +10 20.03.26 1,830 72 15쪽
158 진보를 위한 땀과 눈물 #5 +13 20.03.25 1,740 76 18쪽
157 진보를 위한 땀과 눈물 #4 +13 20.03.24 1,727 73 14쪽
156 진보를 위한 땀과 눈물 #3 +6 20.03.24 1,651 66 18쪽
155 진보를 위한 땀과 눈물 #2 +22 20.03.19 1,862 67 14쪽
154 진보를 위한 땀과 눈물 #1 +6 20.03.18 1,765 71 14쪽
153 뜻하지 않은 재회 #7 +16 20.03.17 1,812 77 21쪽
152 뜻하지 않은 재회 #6 +13 20.03.16 1,790 67 17쪽
151 뜻하지 않은 재회 #5 +11 20.03.12 1,985 70 14쪽
150 뜻하지 않은 재회 #4 +16 20.03.11 1,838 68 14쪽
149 뜻하지 않은 재회 #3 +11 20.03.10 1,847 77 16쪽
148 뜻하지 않은 재회 #2 +15 20.03.09 1,831 74 17쪽
147 뜻하지 않은 재회 #1 +11 20.03.06 1,867 84 13쪽
146 곤드 대륙 #12 +14 20.03.05 1,818 80 13쪽
145 곤드 대륙 #11 +17 20.03.04 1,814 82 17쪽
144 곤드 대륙 #10 +14 20.03.03 1,805 82 17쪽
143 곤드 대륙 #9 +11 20.03.02 1,819 79 20쪽
142 곤드 대륙 #8 +5 20.02.28 1,971 70 19쪽
141 곤드 대륙 #7 +13 20.02.27 1,897 69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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