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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6굴림실패 님의 서재입니다.

치킨 없는 판타지에 구원은 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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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D6굴림실패
작품등록일 :
2019.10.28 19:34
최근연재일 :
2021.03.04 14:24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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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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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20.03.24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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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8쪽

진보를 위한 땀과 눈물 #3

DUMMY

세상 만물의 모든 숨소리가 멎어버린 것 같은 고요함이 하늘에서 내리쬐는 햇살과 함께 정원에 내려앉았다.

하이엘프 왕국의 수도 스도티르에 위치한 왕궁의 삼엄한 경비 속에 있는 손님용 별궁의 정원에는 세 명의 인간과 두 명의 엘프가 있었고 정원 주위를 인간과 엘프의 비율이 반반인 경비병들이 에워싸고 있었다.


율리아누스 티베리우스 알티로스, 율리아누스 1세는 전쟁 직후 자신이 해야 할 일들을 해왔고 신들이 깨어나고 제국의 분열이 시작될 조짐이 보이자 자신의 심복인 카토 군단장을 시켜 대비를 하였으나 필멸자의 힘에는 한계가 있는 법.

율리아누스 1세의 대책은 반란을 종용한 신들의 힘 앞에 짓눌리며 제국의 운명은 풍전등화와 같았다.


허나 필멸자들은 원인을 알 수 없는 여러 우연이 겹쳐서 전쟁의 신이 자신의 수하들의 소식을 듣고 귀환하였고 오늘에 이르러 율리아누스 1세의 삼남 세베루스 콤니노스 알티로스, 세베루스 황자가 에스티아 왕국에 사신으로서 파견되었다.

밀사도, 첩자도, 주재 외교관도 아닌 공식적인 제국의 사신으로서 하이엘프들의 왕국 에스티나를 방문한 그가 내걸고 있는 직함은 다름 아닌 전쟁의 신 마헤스 무르간의 전권대사였다.



"우리 에스티나 왕국에서 자랑하는 마리닌 지방의 차입니다."


"제대로 세컨두스 플러쉬 시기에 채취한 것이지요? 차에 새콤한 독특한 향이 깃들어 있습니다."



세베루스 콤니노스 알티로스는 자신이 왜 전권대사로 선택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최대한 제국에 유리한 협정을 체결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만큼은 제대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에스티나 왕국으로 오는 동안 철저하게 에스티나 왕국에 대해 공부하며 모든 걸 배웠고 지금 차에 대한 감상도 겨우 며칠 만에 간신히 머릿속에 때려박은 것이었다.



"차에 대해 잘 아시는군요. 제국의 유명한 차 생산지인 아삼 지역의 차와 비교한다면 어떻습니까?"


'자꾸 차에 대해 물어보지 말라고! 젠장! 나는 술이 더 좋은데'



세베루스 황자는 자신과 동석하고 있는 에스티나 하이엘프 왕국의 외교대신 혹은 외교장관인 라이그란이 자꾸 쓸데없는 사안을 물어보는 것에 속으로 당혹했으나 평소 세베루스의 형님들이 흔히 말하는 천것들과 즐기던 주사위 놀이를 할 때의 경험을 살려 얼굴 근육 하나 움직이지 않은 채 필사적으로 황궁에 있을 때 종종 시종들이 내줬던 차의 맛과 향을 기억해내며 대답했다.



"아삼 지역의 차는 향과 맛이 더 강하지만 그 때문에 쌉싸름하고 떫은 끝맛이 있습니다. 이것도 찻잎을 어떻게 취급하냐에 따라 많이 달라집니다."


"과연 듣던대로입니다. 아삼의 찻잎은 맛과 향이 굉장히 진하고 풍부하지만 그에 따른 단점이 확실해서 그 떫고 쌉싸름한 맛을 어떻게 다루냐가 찻잎을 다루는 장인의 실력을 판가름한다 들었습니다. 헌데 황실에 납품되는 최고급품은 그 단점마저 장점으로 승화되었지만 저급품들은 그 특성 때문에 서민들이 많이 꺼린다고 들었습니다만?"



외교부 수장 라이그란은 슬쩍 세베루스 황자의 반응을 살폈다.

만약 첫째나 둘째 황자가 이 말을 들었다면 어떤 식으로든 반응이 나왔겠지만 세베루스 황자는 진짜로 찻잎에 대해서는 아무런 생각이 없기 때문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세베루스는 그보다 언제쯤 본론을 꺼내야 할지 신경쓰고 있었을 뿐이었다.


제국 황실의 일원으로서 나름대로의 자부심을 지니고 있던 세베루스 황자는 두 형들과 달리 전장에 나간 적이 없기에 그동안 전쟁의 신이 돌아왔단 소식을 듣고도 그게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제대로 알 수 없었으나 이번 일로 신이란 존재가 얼마나 큰 영향력을 지니고 있는지 제대로 실감할 수 있었다.


세 번의 큰 전투를 승리로 이끈 전쟁의 신은 제국 황제와 황족들이 있던 황궁 위에 강림해 자신의 귀환을 알리며 황족들에게 제국에 대한 모든 전권을 자신이 다시 가져가겠노라 선포했다

말 한마디 한마디가 떨어질 때마다 인간들의 마음속에 있던 자만심과 반항심이 꺾여나가고 끝까지 그걸 버리지 못한 이들은 신의 음성에 내장이 짓눌려 피를 토하며 죽었고 살아남은 제국의 모든 관료와 황족과 심지어 황제마저 그 앞에서 머리를 조아려야 했다.


전쟁의 신은 남아있는 이들에게 가장 먼저 자신에게 복종할 생각이 없던 자들의 시체를 치우라 명한 뒤 제국 내부를 정리하였다.

전쟁의 신이 제국의 영토 전체에 자신의 기운을 흩뿌리자 전쟁의 신을 믿지 않는 교단 연합의 끄나풀들은 몸을 뒤틀며 고통에 찬 신음을 내뱉었고 전쟁의 신을 믿는 이들은 순식간에 오래된 상처가 낫고, 그 어떠한 신도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아무런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전쟁의 신은 다른 신을 믿고 있기에 자신의 기운에 닿자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교단 연합의 첩자들을 전부 처형해서 그 목을 교단 연합에 보냈고 그 뒤 알티로스 제국 내전에 뛰어들지 않아서 힘을 보존하고 있는 에스티나 왕국에 사절을 보내기로 하였고 그가 선택한 것은 황태자인 첫째 황자도, 무력으로 이름을 날리는 둘째 황자도, 총명한 둘째 공주도 아닌 틈만나면 황궁에서 빠져나가 사냥을 즐기로 놀고 먹고 서민들과 어울리는 셋째 황자 세베루스였다.


전쟁의 신은 세베루스가 전권대사로서 파견될 거라고 선포한 뒤 세베루스를 따로 불러 계시를 내려주었다.

그는 영토 할양은 절대로 안되며 현재의 제국이 감당하지 못할 금전이나 식량 요구 없이 에스티나 왕국과의 동맹을 선사시키면 최고고 못해도 대량의 귀금속 정도를 지불하는 정도로 불가침 조약을 맺으면 된다는 말을 해주었다.


문제는 전쟁의 신이 그러면서 자신의 창과 활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제대로 일처리 못하면 세베루스를 자신의 창의 녹으로 만들어버리겠다는 의지가 엿보이는 전쟁의 신 앞에서 세베루스는 고개를 조아릴 수밖에 없었다.


세베루스는 섬뜩하게 빛나던 사자 머리를 한 전쟁의 신의 눈빛이 떠오르는지 살짝 다리를 떨면서 슬슬 본론을 꺼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 마침 딱 적당한 때에 오는군요."



하지만 그때 갑자기 별궁의 정원으로 들어오는 문이 열리고 음식 수레가 와서 그들이 앉은 테이블 위에 3개의 병을 내려다놓았다.

유리가 아니라 천연 수정을 깎아만든 병이 빛을 받아 안에서 반사되며 진한 와인색깔의 액체를 빛냈다.

그것들은 외국인인 세베루스조차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비싸고 맛있고 훌륭한 에스티나 왕국의 특산 포도주들이었다.


에스티나 국왕 직할지 중 하나인 코카서스에서 생산되는 그 포도주는 먼 옛날 엘프들의 시조가 살던 전설 속의 도시 엘븐델에서 엘프의 시조가 키웠던 포도나무 중 하나를 대숙청 속에서도 계속해서 지켜내고 개량해서 만들어졌다는 전설이 있었다.


외교장관인 라이그란은 마치 니가 이걸 보고도 계속 포커페이스를 유지할 수 있을지 보자는 속뜻이 담긴 웃음을 지으며 시종에게 코르크 마개를 열라고 지시하였다.

코르크 마개가 열리자마자 처음에는 달콤한 꿀 같은 향이, 몇 초 뒤에는 목에 침이 절로 나오게 하는 정체모를 상큼하고 새콤한 향이, 마지막으로 후각을 마비시킨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풍부한 포도의 향이 코를 가득채웠다.

세베루스는 목구멍에 침이 고였지만 자신의 뒤쪽에 서 있는 제국의 외무부 대관이 침을 삼키는 소리를 듣고 정신차리고 아무 소리도 내지 않은 채 침이 자연스럽게 목구멍을 넘어가도록 기다렸다.



"코카서스의 포도주 장인들은 안노나(1년간의 곡물세)를 포도주로 대신 납부합니다. 하지만 1년에 한 번씩 그해 최고의 포도주를 가리는 대결을 하고 거기서 우승한 장인은 그 1년의 안노나를 면제받게 되지요. 이 포도주는 5년 전 우승한 바르베라 포도원의 작품입니다. 지금쯤 아주 잘 숙성이 되어있을 겁니다."



라이그란은 굳이 바르베라 포도원이 작년과 올해에는 코르비다 포도원에게 밀려 우승을 놓쳤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수정을 깎아만든 볼륨있는 잔에 라이그란이 직접 포도주를 따라주자 넘실거리는 진홍빛의 파도가 잔속에서 요동쳤지만 단 한방울도, 단 한방울도 그 소용돌이와 파도 속에서 잔 밖으로 넘쳐나지 않았다.


라이그란은 그동안 가식적이고 외교관다운 웃음만 내보였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진심으로 와인에 대한 자부심이 넘치는 웃음을 지으며 6개의 잔에 포도주를 나눠담았다.



"어떤 포도주 장인들은 포도주의 성향에 따라 식전, 식사, 식후에 쓸 것을 나눠야 한다는 급진적인 주장을 하지만 좋은 술은 언제 마셔도 좋은 법입니다."



라이그란과 엘프 외교관들은 웃으면서 하나씩 잔을 들었고 세베루스는 중요한 일이 있다는 것도 순간적으로 잊은 채 자신도 잔을 들었다.

잔에 손이 닿아 차가운 감촉이 느껴지자 세베루스는 아차 싶었지만 이미 잔을 잡아버린 상태에서 마시지 않겠다고 하는 것도 좀 그렇기에 그대로 잔을 들어올렸다.



"그럼 제국과 왕국의 안녕을 바라며"


"바라며"



세베루스는 라이그란이 포도주를 마시는 걸 보고 자신도 따라 마셨고 그는 눈을 부릅떴다.

가장 먼저 혀에 닿는 와인의 맛이 느껴지는 것보다 먼저 향이 입천장을 통해 코로 흘러들어갔고 지금까지 맛봤던 수많은 와인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부드럽지만 육중한 느낌이 양쪽 볼에 느껴졌다.

아주 잠깐, 아주 잠깐동안 세베루스의 눈앞이 깜깜해졌지만 뒤늦게 세베루스는 자신이 맛과 향을 더 음미하기 위해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는 걸 깨달았다.

눈을 감고 눈꺼풀의 어둠 속에서 온갖 휘황찬란한 빛깔들이 보이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지만 수많은 빛깔들은 세베루스를 조롱하듯 순식간에 사라지고 그 끝에 와인의 향을 남겨놓았다.


천천히 목구멍 너머로 넘어가는 핏빛의 액체는 진실로 그의 피라도 되는 것처럼 사르르 녹아들었고 세베루스는 지금 이 순간만이라면 자신의 앙옆에 있는 제국 외교관들의 감정을 읽어낼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하였다.

세베루스가 다시 눈을 뜨고 손에 있는 잔을 바라보자 반쯤 차있던 잔은 어느새 반절이 줄어든 상태였다.


평소에 마시던 황실에 납품되는 포도주조차 시중과 군에 돌아다니는 물 탄 포도주처럼 느껴지게 할 정도로 풍부한 향과 맛과 그 속에서도 균형을 잡아놓은 이 포도주에 대한 감상을 세베루스가 말하려고 했을 때 갑자기 이변이 일어났다.



"뭐야?!"



갑자기 외교관들이 있는 테이블 왼쪽의 꽃밭 위에 시커먼 어둠이 밝은 색깔의 꽃잎을 집어삼키며 열렸고 그 끈적끈적한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걸어나오는 게 보였다.

세베루스는 스도티르 상공에 펼쳐진 마력 결집 방해 결계가 아직 남아있는 걸 보고 엘프들이 무슨 수작을 부린 게 아닌가 생각했지만 정작 고개를 돌려보니 라이그란과 엘프 외교관들 역시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경비병들을 부르고 있었다.



"제국 사신들을 보호해라! 그리고 플레비스 경을 부르..."



하지만 라이그란은 어둠 속에서 튀어나온 다리가 꽃밭을 짓밟고 이내 거대한 거인이 그 안에서 모습을 드러내자 할 말을 잃은 채 그를 올려다보았다.

비좁은 통로에서 나오고 있느라 고개를 숙이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거인은 정원에 있는 모두를 내려다볼 수 있을 정로도 거대했다.


세베루스는 자신의 검을 찾았지만 아까 별궁에 입장할 때 경비병에게 자신의 검을 줬다는 걸 기억해냈다.

그의 손에는 아직 덜 마신 와인이 담긴 잔만 있을 뿐이었고 그 와중에도 와인이 아까웠는지 세베루스는 와인을 단숨에 삼켜버리고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은 채 뒤로 물러났다.


거인은 그 거대한 몸집만 눈에 띠는 것이 아니라 타오르는 불꽃 같은 눈동자와 사자 갈기 같은 수염과 머리카락을 지니고 있었다.

구리빛 피부를 덮는 회색 수도복은 넘쳐나는 근육을 주체하지 못한 채 울끈불끈한 형태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거인은 주변을 둘러보더니 세베루스를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에스티나 왕국에 온 걸 환영한다. 전쟁의 신 마헤스 무르간 님의 사도여."



거인의 뒤로 2명의 엘프들이 천천히 걸어나왔고 그들은 자신들이 있는 화단을 보고 잠깐 옆에 있는 엘프들의 눈치를 봤지만 자기 상관을 믿고 배짱 부리기로 한 것인지 시선을 앞으로 고정하였다.

거인은 화단 밖으로 한걸음 나왔고 세베루스 황자의 경호원들이 앞으로 나섰으나 거인은 그들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무기를 거둬라. 나는 전쟁의 신께서 보낸 사절과 대화하기 위해 내려왔다."


"죄송합니다만 이번 일은 폐하께서 저에게 직접 맡기신 일입니다. 괜히 여러분께서 나서실 필요도 없습니다."



외교부 장관 라이그란은 급히 엘프 경비병들을 뒤로 물러나게 하고 직접 앞으로 나서서 말했다.

세베루스는 갑자기 나타난 이들이 누구인지 알고 있는 것 같은 태도인 라이그란을 보고 이들이 에스티나 왕국의 대신급 혹은 장관급 인사조차 굽신대야 하는 존재라는 걸 추측할 수 있었다.



"너는 자신의 역할을 훌륭하게 해냈다. 추후 포상이 있을 것이니 필리우스에게 내가 왔다고 알려라."



허나 거인은 세베루스의 예상마저 넘어서는 존재였다.

그는 공적인 자리에서 에스티나 왕국의 국왕을 아무런 존칭과 칭호 없이 이름으로 부를 수 있는 자였고 세베루스는 그제서야 그가 자신과 마찬가지로 신들에게 권한을 부여받은 전권대사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라이그란은 감히 명을 거역할 수 없다는 듯이 왕에게나 하는 예를 보이며 경비병들과 함께 물러났다.

별궁의 정원에는 이제 세베루스의 경호원들과 정체모를 거인과 2명의 엘프만 남게 되었고 거인은 라이그란의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앉게나"



세베루스는 자신이 아직도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는 걸 깨닫고 호의를 받아들여 자리에 앉았다.

라이그란과 마주하고 있을 때는 속내를 알 수 없는 능구렁이를 대하는 것 같았지만 이 거인과 마주앉는 것은 마치 수도에 강림했던 전쟁의 신을 대하는 것처럼 엄청난 압박감을 몸으로 느껴야 했다.



"그러고보니 자기 소개를 하지 않았군. 나는 폰티펙스 포이부스 막시무스. 경건하고 자비로운 하로나스 님의 아이이며 마법의 신 올'쏜 님의 뒤를 따르는 자이자 만신전 신들의 시종이고 불과 번개의 신 이그니의 종이다."


"저는 율리아누스 티베리우스 알티로스, 20주의 군주이며 다섯 방위의 주인이자 뮤 대륙의 패자이며 백만의 군대의 전쟁군주인 율리아누스 1세의 네 번째 아이이자 세 번째 아들인 세베루스, 세베루스 콤니노스 알티로스입니다. 이번에 위대하고 전능한 전쟁의 신 마헤스 무르간 님의 전권대사로서 파견되었습니다."


"그래, 세베루스 대사. 마헤스 무르간께서는 무엇을 원하시지?"



서로 자기 소개가 끝난 뒤 거인은 라이그란과 달리 바로 본론부터 꺼냈다.

본래 외교란 서로의 힘과 카드패를 감춰가며 서로가 원하는 걸 얻는 자리다.

어느 한 쪽의 힘과 명분이 압도적이지 않는 이상 함부로 패를 드러내는 행위는 권장되지 않는 것이었고 지금 이 거인은 풍기는 분위기와는 달리 라이그란보다 손쉬운 상대일지 모른다는 기대감이 세베루스와 외교관들 사이에 번져나갔다.



"어쩌면 평화, 어쩌면 전쟁일지도 모릅니다. 저희 같은 필멸자들이 감히 신들의 속내를 어찌 짐작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한 명의 필멸자이자 제국의 일원으로서 그저 제국의 안녕을 위해 일할 뿐입니다."



세베루스는 슬쩍 자신의 양옆에 앉은 제국 외교관들과 눈빛을 교환했고 외교관들은 표정은 아무런 변화가 없는 채로 손가락을 아주 작게 움직여 나쁘지 않다는 신호를 보내왔다.

하지만 그 다음 포이부스가 보인 행동은 그들의 상상을 넘어서는 일이었다.



"하긴 그 말이 맞군. 우리 같은 필멸자들 따위는 그분들의 속내를 전혀 짐작할 수 없지. 전권대사라고 해도 어쩔 수 없나..."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러더니 포이부스는 갑자기 의자에서 일어나고는 정원의 넓은 터를 향해 무릎을 꿇고 두 손을 하늘을 향해 뻗었다.

그 행동은 외교관이라기보다는 사제, 어쩌면 원시적인 주술사들이나 할 법한 행동이었고 갑자기 무시무시한 마력이 요동치며 하늘에 펼쳐진 스도티르의 결계가 뒤흔들리더니 이내 수도 전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뒤늦게 별궁의 문이 열리면서 국왕 필리우스 2세가 허겁지겁 뛰어오는 게 보였고 세베루스와 제국 외교관들은 뭔가 단단히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았지만 너무 늦어버린 상태였다.



"위대하신 천상의 주인들이시여! 이 세상의 첫번째 만신전의 일원들이시여! 에스티나와 레헴, 소드라우프니르, 크나시아의 주인들이시여! 그대들의 가장 오랫동안 고통받은 종이 바라옵니다! 부디 모습을 드러내소서!"



땅으로부터 온갖 신들의 상징들이 솟아오르며 마력과 신성력이 차올라 포이부스의 유도에 따라 특정한 패턴으로 상징들에 깃들었다가 포이부스의 외침과 함께 폭발하듯 확산하였다.

허겁지겁 달려오던 국왕 필리우스 2세가 그 힘을 견디지 못하고 뒤로 나자빠지고,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제국의 외교관들과 세베루스 황자가 밀려나 날아갈 뻔한 것을 포이부스와 함께 온 팔라딘들이 붙잡아주는 사이 마력과 신성력의 폭발 속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어떤 웃음소리는 따뜻하고 친근했지만 어떤 웃음소리는 소름끼쳤다.

세베루스는 폭발의 섬광조차도 어두운 빛으로 보이게 하는 신성한 빛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일곱 개의 형체를 볼 수 있었고 자신도 모르게 무릎을 꿇었다.

전쟁의 신이 강림했을 당시와 마찬가지였다.


작가의말

컴퓨터가 갑자기 검은 화면에서 안넘어가다가 전원이 저절로 꺼지는 현상이 발생해서 금요일에 수리 보냈다가 월요일 저녁이 되서야 도착했습니다.

자료를 하드가 아니라 외장하드나 어디 클라우드 저장소 같은데 보관해놨어야 했는데 많이 아쉽네요.


141화와 142화는 한꺼번에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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