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35화 : 전략가
코어를 가진 두 팀이 서로를 가장 빨리 파악하는 방법은 첫 번째가 공동훈련, 두번째가 대련. 아쉽지만 훈련시설같은 건 없으니 슬쩍 붙어보는 수밖에.
나는 이유가 있으니 멀리 떨어져서 보기만 한다.
몇 가지가 얽혀서 그렇겠지만 저쪽은 좀 어색한 팀이다.
일단 눈에 띄는 이롄. 속도에 치중한 물리형. 물리계답게 손에 쥔 무기의 경도도 높일 수 있으니 공격의 관통력이 좋다.
세상이 지금보다 더 나빴으면 살수殺手로 살기 충분한 능력.
성격도 그런 점이 보여. 칼 놀리는 솜씨로 미라에게 안 되니 욱 하는 거 살짝 보였어. 될 리가 있나... 미라가 검도를 몇 년 했고 매일 연습을 얼마나 하는데.
하여간 누군지 몰라도 이 자를 골라 대놓고 키웠다면 고위직.
배신해봐야 자길 어떻게 할 수 없다는 자신이 있고, 내게 이런 게 있으니 너희가 각자 조심하라고 할 만한 직위의.
인상이나 분위기를 봐서는 이롄도 다른 고위직의 혈연일 수 있다. 파벌 수장을 따르는 어느 이씨네 아들이겠지. 긴 시간 몸을 단련해온 사람은 아냐.
나머지 여섯도 살짝 그런 부분이 있는데, 분명 실력 있고 훈련받았지만 쓰는 기술이나 몸놀림에 잘 보이기 위한 흔적들이 있다. 보여주기 위한 것들.
이들을 이끄는 파벌의 수장에 잘 보이거나 수장이 그렇게 보이기를 원하거나 뭐 그런 이유가 있어서일 것 같아.
그런 점에서 댄스그룹과 비슷한 부분이 있다. 외모는 좀 반대 방향이지만...
정리하면, 자기 힘으로 수라장을 헤쳐오긴 했지만 권력에 꽉 붙들린 자국이 있는 사람들.
난감한데... 이런 사람들은 백색균열에 들어가면 굳어버리는 경우가 꽤 있었다. 옆에서 아무리 소리쳐도 듣지 못하거나, 정신을 놓아버리거나.
단 한명 그러지 않을 것 같아보이는 사람이...
"무슨 생각하시는지 알 것 같은데요! 대협!"
"사서라 불러주시길 간곡히 요청드리나이다. 제 얼굴에 다 씌여있군요?"
땀 맺힌 얼굴로 옆에 털푸덕 하고 앉는다. 거 친화력 좋네?
"어디까지 짐작하셨는지 제가 짐작해볼까요?"
"그냥 제가 말씀드리죠. 어릴 때 서로 알고 지냈던 분들 같네요."
"어이고야? 어? 어떻게? 어?"
요란한 인간이구만...
중국하고는 좋고 말고를 떠나 여러 번 일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 별의 별 인간이 다 있었지... 권력을 오래 유지해 오고 후대에 물려줄 집념에 가득차면 그때부터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 껍질을 뒤집어쓴 뭔가가 된다.
그 뭔가가 바로 이런 군단을 키우지. 류위친이 이롄 성격을 좋아하긴 하는데 그 동네는 권력 가진 인간도 참 많아서 거기까진 넘겨짚지 못하겠네.
어쨌거나 듣고 싶어할 내용을 말해준다.
"일주일로는 무리예요. 모두 실력이 좋으시지만 처음 들어가서 마주치는 놈들에게 흠집도 안 날 겁니다."
"그렇죠? 저도 미국에 친구가 있어서. 그 때 이야기 좀 해줄 수 있나요?"
"별 거 있겠어요. 알려진 게 전부지."
"에이 그래도 좀. 하나면 됩니다!"
이건 자기가 알고 싶어서 묻는 게 아니군...
"언론에 안 나간 내용이라면 중간에 대형체 다섯 있었다는 것 정도요?"
실망하는군... 그런 건 별로 비밀도 아니지.
"그, 대협."
"사서요, 사서라고 하시면 됩니다. 사서."
"예, 사서 대협."
긁어부스럼이었군.
"들어갔다 나왔다는 증거 외에 다른 건 별로 필요없어요."
"뭐 좀 쓸만한 코어와 목격담?"
"바로 그렇죠."
"알리바이를 만들어주는 건 어렵지 않지만 걱정스러운 게 좀 있는데요. 그 정보로 다른 팀이 백색균열에 들어가면 어떻게 될까요?"
"세심하시기는, 설마 그 사람들도 믿지는 않을 겁니다. 어차피 우리는 위성으로 다 보이고있어요. 그냥 우리에게 불리한 말을 해 줄 사람이 없을 뿐."
그쪽이 들어가라고 강요받거나 말거나는 관계 없다는 말이로군. 안 되겠다 이건.
"절반만 타협하지요. 전투 기록만 갖고 가십시오."
불만족스러운 표정.
"사서, 원하시는 게 있다면..."
"하하."
말을 그만두고 생각한다.
유명하다는 건 이럴 때 좋다. 나에 대해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 없어.
"저는 그런 걸 좀 신경쓰는 편이라서요."
필드에서 뛰어도 본바탕은 도련님이라 그런지 이런 상황에 표정관리 못하네.
거래하기 가장 어려운 사람는 바라는 것이 없는 사람이다. 선물도 어렵지... 넥타이의 꽃말은? 당신에게 뭘 선물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만족할만한 이야기를 가지고 와라. 당장은 안 되겠지.
"내일 또 이야기할까요?"
이롄은 앞을 본다. 그동안은 친구들의 움직임이 어색해보이지 않았을 거다. 오늘까지는. 미라하고 겨루고 있으면 누구나 그렇게 보이겠지만...
"내일 아침."
"좋습니다, 대협."
거 대협 소리 좀 빼라니까.
효진이가 바빠졌다. 중국 쪽과 이야기를 다시 틀 계기가 될지도 모르니까.
우리는 간만에 모두 모여 저녁을 먹었고, 효진이가 보라색 균열 안에서 나온 코어를 이리저리 굴리며 설명한다.
"다들 아시겠지만, 중국은 일인자에게 도전하는 일은 잘 없어요. 지금은 두 번째까지는 암묵적으로 고정해뒀고 세 번째 자리부터 치열하죠. 어마어마하게. 서열 한 층을 위해 백억 대 돈까지 쓰니까?"
나름 한국의 고위 공무원들을 오래 봐 온 미라가 푸념한다.
"사람 사는 모양새하고는. 오늘 본 쪽은 몇 번째 정도 돼?"
"3위부터 13위 안은 될 거야. 중국에서 노리고 있는 백색균열이 열 개가 채 안되는데 거기에 단독으로 자기 팀을 보내놨다면. 팀의 수준만 봐서는 그렇게까지 안 치겠는데 이롄 정도는 중국에도 많지 않을테니까."
이롄의 이야기가 나오자 삼촌이 얼굴을 구긴다.
"그 놈 그거 우리 엄청 살펴보더라. 숨길 생각도 없이."
효진이가 답한다.
"지금은 어느 정도 쓸만한 정보를 갖고 가서 어떻게 이득으로 만들어내냐, 어떻게 중국의 위상으로 이어질 거냐를 따지고 있으니 한 마디라도 할 말이 있을 거예요. 우리도 밑천 다 보인 건 아니지만 그쪽도 그랬을 수 있고요."
"협아. 네가 봐서는 그녀석들 어떻냐?"
"어중간... 해요. 경쟁을 뚫고 올라온 건 맞지만 자기 방식대로 성장하지 못한 느낌?"
"우리나라 명문대생들?"
킬리 누님을 제외하고 '명문대생'인 세 사람의 얼굴이 각자의 방식대로 구겨진다. 미라는 허탈한 조소, 효진이는 폭소, 학선이는 침울.
대학.
가보고 싶네.
자, 평소에는 내가 잘 받는 질문이지만 오늘은 좀 다르네. 나는 효진이를 보고 묻는다.
"이사님, 그래서 뭘 하면 돼?"
씨익 웃는 거 보니 구상이 다 끝나있군.
언제도 한 번 이야기한 적 있지만 효진이는 전략가다. 원래는 우리 힘으로 움직일 수 없는 것을 움직이는 사람.
"내일 그 사람들 만나면..."
"대협, 아무리 그래도 그건 무리인데요."
"제가 한국인이라서? 아니면 미국하고 친해서 그런가요."
"에이 대협, 왜 이러십니까! 대협이 미국하고 틀어졌다는 거 모든 새가 지저귀고 다니는데요."
이 새끼 그래서 날 보고 그렇게 살가웠구나?
나와 이롄만 내 <해저 2만리> 위에서 이야기 중이다. 보는 눈 없고 듣는 귀 없는 곳에서 이야기하기로 해서.
우리가 한 제안은 정식 공동전선 진행 재개.
효진이의 구상은 이렇다. 잘 진행되던 이야기가 어쩌다 틀어졌는지 모르겠지만 문제의 3~13위 안에서 순위 변동이 있었던 거다. 그중 5위가 외교를 맡고 있었는데 문제의 '미국의 백색균열 돌파 사태' 를 빌미삼아 열심히 끌어내려졌다나 뭐라나.
외교 전담이 지금 공석, 이롄이 누구의 지시를 받는지는 모르지만 그 위치에 갈 수 있는 빌미를 준다는 제안이기도 하다. 아무래도 5위 안에 있던 사람은 아닐 거란 계산으로.
"간단한 겁니다, 롄 대장. 서로가 이득을 보려면 서로가 조금씩은 포기하는 거죠. 경중을 비교하면서요."
"대협네가 포기하는 건 뭔지 모르겠는데요?"
의외로 날카롭기는... 둘러댈 말은 효진이가 준비해줬다.
"원래 우리는 이글스피릿 쪽의 도움을 받기로 되어 있어요. 아시죠?"
"하지만 그건 대협이... 아니, 아니지요. 그렇죠. 미국하고 남한이 틀어진 건 아니니까. 대협만 서까래 상하듯 상했지."
감정 섞네 이놈이.
"미국에서 나온 코어는 전량 미국이 가져갔죠. 우리도 미국과 손잡으면 나오는 코어를 전부 우리 걸로 할 수 있어요."
"하하하, 대협.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우리가 지금 사이에 놓고 다투는 균열은 우리 겁니다. 그건 분명히 하자고요."
"그렇죠. 그런데 어차피 못 깨잖습니까. 중국 거지만, 미국이 깰 수 있죠. 다른 나라와 힘을 합쳐서."
오, 이 녀석도 나처럼 웃고 다니라고 강요받으며 살았나? 눈 치켜뜨니까 인상이 확 다르네.
"그 말 위협으로 들립니다. 대협."
"사과드리죠. 요점은 그겁니다, 롄 대장. 미국이 와서 휙 깨고 가면 중국과 우리가 골치아프겠죠. 그런데 미국은 할 겁니다. 할 수 있으니까요. 제가 없어도 할 수 있다고 결론 내린 거 보셨죠?"
말이 없군.
"대장, 대장? 우리는 거기서 떨어지는 콩고물만 받을 수도 있어요."
"하. 있어봐요. 무슨 말인지는 알지만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말..."
이롄이 허리에 찬 무전기가 울린다. 나도 이롄도 깜짝 놀랐고 무전기에서는 다급한 목소리가 나온다.
"롄! 빨리 배로! 빨리!"
"대, 대협? 대협?"
나는 <해저 2만리>를 잠수시키고 최대한의 속력으로 몰았다.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