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21화 : 옛 친구들 (2)
TG는 다행히 예전과 비슷하지만 이마니 크리스티가 나를 경계하는 쪽인 건 달갑지 않다.
아마 이번에도 능력은 <라플라스의 악마>겠지.
기능은 단순하지만 그런 이름이 붙을 만한 기술.
눈에 들어오는 범위 안에서 1분 안에 반드시 일어날 일을 알 수 있다. 스킬의 정확도는 복권 당첨번호 기계가 돌아가는 즉시 3개에서 4개의 숫자를 미리 맞추는 정도. 카지노 룰렛이나 주사위 정도는 던지는 순간 어떤 수가 나올 지 안다.
스킬인만큼 항상 켜고 있을 수는 없고 유지하는 데 많은 에너지가 들지만 선택과 상황을 바꾸면 정해진 일 역시 달라지기에 어려운 상황에 가장 큰 도움이 되는 능력. 내가 아니라 미라가 와도 괜찮겠다고 생각한 이유 중 하나.
그리고 이런 계열의 스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다 그렇듯 이마니는 예민하고 까탈스러우며 고집이 세다... 그리고 자기 능력이 악용되면 아주 안 좋은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걸 잘 알고.
그래서 날 경계하는 게 이상하지는 않다. 나는 원래 헌터들에게는 인기가 없으니까.
그래도 작전은 작전, 할 일은 할 일...
적당한 핑계를 대고 화상회의에 참석한다. 나만 이쪽에 있고 나머지는 다 저쪽에 있는 화상회의.
잉그리드. 연기력 좋네... 진심으로 균열을 공략하려는 사람처럼 느껴진다.
이성적이고 정확하고 합리적인 사람 역할을 떠맡았군. 주도권을 잡고.
니콜로의 둘째 형제가 어린 나이인 곤잘레스를 고른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청소년기에 빨리 성인이 되고 싶고 자기 자신이 빨리 다른 뭔가가 되고 싶은 생각이 있다면 둘째가 균열 안에서 사용한 능력과 잘 맞을 거다.
카유의 경우는 아마 그 녀석이 균열 안의 에너지를 잘 다루기 때문. 자신의 에너지를 사용하지 않고도 잘만 공격했지. 넷째는 둘째를 이길 방법만 알고 싶어했다.
거기에 비하면 잉그리드는...
아무래도 앞의 둘보다는 균열 바깥이 전문. 무엇보다 '덜' 망가졌다.
곤잘레스는 여러 번 <리셋>을 반복하면서 이상해져 있었고 카유도 적당히 숨어살기 위해 인격을 왔다갔다했지.
저 자는 그럴 필요가 없어보인다. 누가 봐도 우수한 사람. 연기라고는 해도 어지간히 머리가 좋아야 가능한 행동들.
작전 내용에 대한 질문과 답이 오간다. 어떤 건 이글스프릿이, 어떤 건 잉그리드가 대답한다. 이러니저러니해도 저 두 명 이야기 많이 했네.
화면 너머로 보니 사람들의 분위기나 표정 같은 걸 알기 힘드네.
별거 있나... 잘 뭉쳐갑시다. 서로 잘 봅시다. 각자 능력을 쓸 때 열심히 좀 외치세요 주변에서 모르니까. 정신이 나갈 것 같으면 빨리 말하세요...
포기해야 할 때는 빨리 포기할 것. 아는 사람이라도.
뭐 그런 이야기들. 옛날 생각 나네.
TG가 슬쩍 이야기한다.
"손발 맞춰보거나 안에서 사이좋게 죽거나 둘 중 하나가 우릴 기다릴텐데 다른 분들 의견은요?"
잉그리드가 대답한다.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지원조를 중심으로 트레이닝 커리큘럼은 준비되어 있어요."
몇 명의 고개가 이글스피릿쪽으로 돌지만 다른 대답은 없다. 마르틴... 마르틴이 손을 들고 이야기한다.
"공격조 인원 정말 안 바꿉니까?"
나를 정말 데려갈 거냐는 말이겠지? 이글스피릿이 대답한다.
"그럴 계획은 없습니다."
잉그리드가 마르틴을 달랜다.
"마르틴? 그건 끝난 이야기야. 다시 사람을 모을 시간 같은 건 없어."
어느 정도 윤곽은 잡혔는데 말이지.
방금 보면 잉그리드는 마르틴의 말을 제지하기는 해도 네 말에 일리는 있다는 식으로 민 거란 말이지.
이런 식일 거다. 나에 대해 수상한 점은 차고 넘친다. 다른 건 소문이라 해도 체코에서 내가 쿠들락과 간부들 두 명을 앞에 두고 적지 않은 시간 버틴 건 미국이 몇 초인지까지 알고 있을 거야.
그리고 유출돼서 떠돌아다니는 그날 체코의 영상 중 내가 나오는 부분은 다 사람을 망설임 없이 잡는 내용들.
당연히 이상하고, 그 이상함을 설명할 방법이 두 가지 있지.
내가 지금 이 상황과 직접 관계가 있거나,
아니면 전세계 곳곳에 나타난 괴물체를 제거한 마고를 죽여 그 힘을 빼앗았거나.
뒤쪽의 말도 제법 그럴듯하지. 마고로 사람들 앞에 나타난 건 한국뿐이었으니까. 위키백과 보니까 국적 한국으로 적혀있더라.
물론 내가 마고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지만.
너무 가만히 보고만 있는 것도 그러니까 말을 좀 얹자.
"다수의 사람 대 사람으로 싸우는 경우에는 준비가 많이 필요하지만 특이하다고 해도 균열이고 괴물체잖아요. 상황이 안 좋게 돌아간다 싶으면 뒤로 돌아 나오면 되겠죠."
마르틴이 뭔가 말하려는 눈치였는데 잉그리드가 말을 가로챈다. 화면 너머로 봐도 알겠으니 저 안의 사람들은 모두 알겠지.
"그 부분은 크리스티 씨가 잘 판단해 주실 거예요."
"다행이네요."
어차피 들어가서 할 일은 뻔하다... 흩어지지 않고 자신의 공격에 아군이 휘말리지 않게 주의하고. 절대 혼자 판단하지 말고 맨 뒤에 있을 이마니 크리스티의 말을 들을 것.
알아야 할 건, 잉그리드가 무슨 목적으로 이러고 있냐는거다. 아무래도 균열 안에서 싸우는 건 불리하니 바깥에서 날 잡겠다는 걸텐데 구체적인 방법을 알아야 해.
좋은 사람 놀이 하면서 나를 차츰차츰 구석으로 몰 생각이겠지만 그게 그렇게 쉽게 될 리는 없다. 그리고 그걸 모를 만큼 멍청이는 아니고.
어쨌든 이번 공격을 계기로 삼을 텐데... 두고보자고.
그렇게 어수선한 회의를 마치고 아침 식사 시간. 이글스피릿이 굳이 내 자리 건너편으로 오고 TG도 주변을 돌아보다 이글스피릿의 옆에 앉는다.
TG는 굳이 떠들고 싶은 화제가 없는 것 같고 나와 이글스피릿은 자연스럽게 킬리 누님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사서가 많이 도와줬다고 하던데요."
"누님이 그렇게 이야기해도 그렇지 않아요. 다 혼자 힘으로 하셨죠."
"그분이 첫 번째 공격의 날 동생을 잃었다는 기록을 봤습니다. "
"예... 그 동생분하고 그때 체코에 저와 같이 온 송태광 삼촌하고 아는 사이였고요."
킬리 누님이 왜 나를 피하는가 묻고 싶긴 한데 보아하니 말해줄 게 없겠군.
이글스피릿과 내가 하하호호 덕담만 나누니 TG가 지루한 듯 끼어든다.
"두 사람 속에 재미있는 말들 숨어있는 눈치인데 서로 피하시네. 좀 사적인 이야기라 제가 없어야 할 수 있나요? 그렇지 않으면 듣고 싶은데."
...
하하.
나는 이글스피릿에게 먼저 말하길 권한다.
"궁금하신 게 있죠? 뭐라도 물어보세요."
"그러죠."
내 진짜 출력은 뭐냐, 마고와는 무슨 관계냐. 코어는 어디서 어떻게 얻었냐, 준비해 온 말은 많다.
이글스피릿이 눈에 힘을 준 채 천천히 입을 연다.
"이새롬 씨 말입니다. 그분 애인 있으신가요? 아니, 배우자라던가요."
...
...
누님이 참 매력있긴 해...
맞아...
"제가 알기론 혼자예요."
"감사합니다. 그 혹시... 그러니까."
"어떤 남자가 좋은가 어떤 사람과 살고 싶다 같은 거 이야기한 적 있냐고요?"
"바로 그겁니다."
"저는 모르고 저희 팀에 여성 멤버들하곤 좀 했을지도요."
"아, 그 부분. 궁금했어요. 임효진 씨가 한국의 중견기업 3세 후계자라는 사실이 맞습니까?"
효진이는 우선순위가 많이 낮다... 하지만 임효석 상무가 받을 부분에는 어느정도 관여할지도 모르지. 두 사람 남매치고는 사이가 괜찮은 편이니까.
"기업 화학 쪽에 지분이 조금 있을 것 같네요. 자세한 구조는 저도 모르고요."
"그분이 우리에게도 좋은 자극이 되거든요. 코어 쓸어모은 사람들에게 목숨 걸지 않을 거면 걸 사람들에게 내놓으라고 강한 압박이 들어갑니다."
사람 사는 거 세계 어딜가나 똑같구만.
TG는 아주 재미있다는 듯 싱글벙글 웃는다. 이글스피릿이 몇 살이었더라? 나보다 두 살 많나? 그럼 누님보다 한 살 어릴 텐데.
내가 궁금한 건...
"그래서 이글스피릿. 되겠어요? 균열에 들어가는 것보다 제가 더 걱정인 사람들 같은데."
"설명은 했어요. 균열 안에서는 작동하지 않는 스킬일 거라고. "
"그거 일급비밀인데 어떤 스파이가 빼갔나요?"
"처음 들은 거야 레이디 킬리에게 들었지만요. 정보를 저장하는 위치가 따로 있고 거기에 연결이 되어 있는 거 아닙니까? 그 구조를 응용해서 사람 간에 정보를 잇는 기술도 갖고 있다고 하셨고. 그런 게 있다면 균열 안에서 동작할 리가 없지요."
마지막에 한 말...
"이글스피릿."
"예."
"동작할 리가 없다는 말, 뭔가 밝혀진 게 있어서 하신 말이죠?"
조금 고민한다. TG가 이글스피릿의 눈치를 보다 슬쩍 일어나려고 하니 이글스피릿은 팔만 움직여 TG의 옷자락을 끌어들인다.
"기밀은 아니니까 괜찮습니다. 여러 가지가 증명됐잖아요. 균열과 우리 공간의 단절성이. 새뮤얼과 싸운 날 한국 남쪽 섬에서 진입해 서울로 나온 사람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렇죠."
"균열 안에서 <비행>해 보셨죠?"
"어렵더라고요. 중력 발원지가 굉장히 멀리 있고 중력가속도가 더 빠른 느낌?"
"맞습니다. 지구상의 공간이라면 그 중력이 나올 수가 없잖아요? 지금 다중우주상의 교차공간, 인접영역 진입으로 이해하려는 사람들이 있어요."
예전이면 뭔 소리냐 싶었겠지만 지금은 이해할...
TG가 불쑥 끼어든다.
"거품과 거품 사이라는 말이죠?"
나보다 이글스피릿이 더 놀란다.
"누구에게 들으셨어요?"
"얽힌우주론 연구하는 분들이 신났겠네. 삶에 비극 중에도 환희는 있는 것이 마땅하니 신났다는 말에는 다른 뜻 없어요? 우주는 종과 횡으로 무한, 이말은 곧 우주의 모든 가장자리는 광속을 초월한, 그 너머의 사건이 우주 안의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사상적 특이점 영역이죠? 블랙홀처럼."
이글스피릿은 진지하게 듣고... 몰라, 나는 피곤해. 둘이 이야기해.
이젠 또 우주 구조까지 따지라고? 아니 우리 은하를 두고 투닥거리는 놈들만으로 이 난리인데.
내가 속으로 어떻게 생각하던 TG는 계속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 우주가 지금과 같은 구조를 유지할 수 없으니 그 영역을 관측 가능한 다른 정보구조가 있어야하고, 그 모델 중 우주끼리 여러 조건으로 얽히고 물려있는 게 얽힌우주론. 맞지요?"
이글스피릿이 전화기를 꺼내서 농담을 한다.
"델마, 델마? 아니 리온 요나스를 찾아달라고 했잖아요. 여기 이상한 사람이 와 있다고요."
TG는 날 슬쩍 보더니 흥미롭다는 얼굴이다.
"사서도 좀 아나보네요?"
"저도 알아보는 게 좀 있어서요. 어렵지만요."
TG가 웃음을 띈 채 팔과 손목을 두드려 듣기 좋은 소리를 낸 후 말한다.
"수많은 다른 사람들을 두고 구루만 노렸다는 건 구루에게만 있는 이유가 있다는 말, 그리고 구루는 아무도 하지 않으려 한 일을 했지요. 다들 같은 생각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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