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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랑고래 님의 서재입니다.

마법사로서 살아가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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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랑고래
작품등록일 :
2024.02.09 05:46
최근연재일 :
2024.03.29 16:00
연재수 :
39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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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220,424

작성
24.02.19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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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Beautiful Days (2)

DUMMY

[(메레이라 대륙에서) 마법사로서 살아가는 방법] 여덟 번째 이야기






올던은 머리가 잘 돌아갔다.

안드레이프가 보기에는 그랬다.

그렇다면,


‘먹을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확실하게 붙잡을 수단이 더 필요했다.

그래서 보험을 들기로 했다.

중세인의 미신으로 가득한 마음에는 신의 이름을 걸고 하는 맹세가 제격이었다.


‘이제 맹세의 의식을 치를까?’


안드레이프 본인도 한 번쯤은 치르고 싶은 의식이었고.


***


마키아 시에 도착하고 이 주가 지난 날이었다.

쾌청한 아침의 햇살을 보고 안드레이프는 오늘 의식을 치러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이렇게 따뜻한 날이면 바닷바람도 선선하니 불어올 거야.’


다가오는 겨울을 전혀 느낄 수 없는 따사로운 날씨였다. 길가의 점포에 수확한 과일이며 채소, 곡식들이 넘쳐났다.

아직은 풍요로운 시기였다.

안드레이프는 정육점을 눈여겨 봤다.


‘겨울 소시지가 슬슬 나올 때가 됐는데······.’


어서 아이들의 몸을 단단한 근육질로 바꿔야 했다. 연금술사들의 해부학 연구에 따르면, 고기를 많이 먹을수록 근육이 늘었다.


젠트리 하나가 시청 건물에서 나와 안드레이프에게 다가왔다. 색채 있는 옷을 맵시 있게 차려입은 폼이 산뜻했다.


“안녕하세요, 법사님.”


둘이 대화하는 동안 올던과 막심은 주위를 구경했다. 광장의 가게에는 온갖 신기한 것들이 여전히 많았다. 태엽을 감으면 검을 내리치는 기사 인형이라든가.


“저런 건 어떻게 만드는 거지?”

“마나공학 공방에서 만든다던데······”


올던과 막심이 곳곳을 구경하는 동안 자유민과 안드레이프는 흥정에 들어갔다.


“다 합쳐서 50코퍼로 가능합니까?”


올던은 안드레이프의 대화가 신경 쓰여 힐끔힐끔 쳐다봤다.

이 마법사라는 아저씨가 자꾸 저 시청 사무실을 오갔었다. 요새 매일 저 건물을 들어가던데.


‘무슨 흥정을 하는 거지.’


대화를 마친 안드레이프가 시장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올던과 막심을 불렀다. 따라가던 막심이 기대감에 차서 물었다.


“오늘은 뭐 먹어요?”

“우리 먹을 건 조금 이따 사고······.”


시장 이곳저곳을 돌며 안드레이프의 스승이자 아이들의 사조(師祖)에게 바칠 공물을 샀다.

안드레이프는 꽃을 고르다 한숨이 나왔다.


‘스승님이 좋아한 건 들꽃이었는데, 이렇게 잘 가꿔진 꽃들 말고.’


올던은 물건을 고르고 또 고르는 안드레이프를 보며 평소와 뭔가 다르다는 걸 직감했다.


‘또 깐깐하게 구네. 뭐가 있나?’


원하는 만큼 구색을 갖출 수가 없어서 공물로 쓸 과일과 향초 정도만 사서 북쪽으로 향했다.

막심은 이미 배가 고팠다. 올던의 옷 뒷자락을 붙들고 조용히 속삭였다.


“우리 밥은 언제 먹어?”


안드레이프는 뒤에서 무슨 말을 하건 앞서 걸어갔다.

수평선이 보이는 항구 옆 언덕, 등대와 가까운 곳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멈췄다.


“여기서 의식을 치르자.”


***


안드레이프의 바람대로라면 스승이 이 세상을 떠난 자리에서 치러야겠지만, 여기서 가기에는 너무 먼 곳이었다.


꽃을 두고, 큼지막한 과일 몇 개와 육포를 놓는다.

양쪽으로 향초를 하나씩 태웠다.

스승 에이미의 초상화가 있어야 할 가운데 자리에는 나무판을 하나 세워뒀다.

나무판 위를 바람의 정령과 물의 정령이 재주껏 채웠다.


물의 정령이 물이 되어 위에서부터 흘러내렸다. 바람의 정령이 물의 흐름을 불어가며 매만지고 다듬었다. 곧 흐르는 물의 표면에 상이 맺혔다.

어느 여인의 희미한 초상화였다.

정령들도 기억하는 얼굴이었다. 웃음기를 머금은 얼굴, 따스한 호기심이 어린 맑은 눈빛.

그런 느낌이었다.


“누구야?”

“너희 사조님이다.”

“사조가 뭔데?”


스승의 스승.

너희들이 그 이름과 그 뜻을 익숙하게 알아야 할 분이다.


안드레이프는 한 발짝 앞으로 나갔다.

모자를 벗어 내밀었다. 막심이 모자를 받았다.

눈높이까지 한 손을 들어 올렸다가 내리며 허리를 숙였다.

고전적이고 우아한 인사 동작이었다.

예를 갖춘 안드레이프가 강하고 분명한 어조로 맹세를 시작했다.


“나 안드레이프 볼로비치 야크신, 정령을 모시는 자로서 모든 정령을 걸고 신실하게 맹세합니다.

오망성의 지혜를 건네주는 스승으로서 인내심을 갖고 제자의 이해와 발전을 도울 것이며, 까닭 없이 모질게 굴지 않겠습니다.”


안드레이프는 한 발짝 뒤로 물러 나와 올던에게 눈짓했다.


올던은 망설임이 없다.

불다람쥐들이 날아가 멧돼지들을 혼내주던 장면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의식에 거부감은 없었다.

그런데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거지?

뒤늦게 상황을 눈치챈 안드레이프가 뒤에서 일러줬다.


“먼저 이름 말하고······.”


올던은 한 발짝 나서서 안드레이프가 알려주는 대로 말을 이었다.


“나, 올던. 성은 없어.

오망성의 지혜를 이어갈 제자로서 끊임없이 원숙함을 위해 노력할 것이며, 순리에 어긋난 지혜를 쫓지 않을 것을 맹세할게.”


안드레이프가 속삭였다.


“무엇을 걸고 맹세할 거냐?”


덩달아 올던의 목소리도 조용해졌다.


“내가 걸 수 있는 게 없는데 뭘 걸어.”


다시 속삭이는 소리.


”믿는 신이 있냐?

“있을 리가.”


신 같은 게 있다면 왜 그렇게 살았겠어.

신이 있다면, 내가 미워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고마워해야 할 걸.

잠깐 생각해본 안드레이프가 조언해줬다.


“그럼 너를 따르는 모든 정령의 이름으로 맹세하고,”


올던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울렸다.


“나를 따르는 모든 정령의 이름으로 맹세해.”


다시 안드레이프의 조언.


“네가 가장 싫어하고 두려워하는 일을 벌칙으로 정해.”


올던은 잠시 숨을 골랐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거?


“이 맹세를 어기면······ 내 긍지와 의지가 죽을 때까지 꺾여도 상관없어.”


안드레이프의 도움을 받은 올던이 맹세를 마쳤다.


‘좋은 사람이네요.

긍지 있게 살아온 인간이라면, 꺾이지 않는 의지의 가치를 아는 정신력이라면 제자로서 충분해요.’


에이미라면 그렇게 말했을 거였다.

제단 가운데 물의 정령들이 흐름을 바꾸고 바람의 정령들이 위치를 조금씩 옮겼다.

초상화 속 여인이 소리 내 웃는듯했다.


막심의 차례.


“막심입니다. 성은 잊었습니다.

오망성의 지혜를 이어갈 제자로서 끊임없이 원숙함을 위해 노력할 것이며, 순리에 어긋난 지혜를 쫓지 않을 것을 맹세합니다.

숲의 어머니의 이름으로 이 맹세를 지킬 것이며, 어길 시에는 칠 일간의 포박형도 달게 여기겠습니다.”


정중하고 간결하게.

막심의 맹세가 정석이었다. 그러나 안드레이프는 맹세를 두고 더 이상 왈가왈부하지 않았다. 나름의 방식으로 예를 지켰으면 그대로 좋은 거였다.

그것이 스승님 에이미의 방식이었다.


안드레이프가 셋을 대표해 마무리에 들어갔다.


“우리가 여기서 사제의 예를 맺게 됨에 따라, 과거의 일들에 대해선 서로 캐묻지 않고 아픔을 보듬어가며, 앞으로 남은 시간 동안 우애 있게 함께할 것을 약속합니다.

떨어져 있을 때도 서로의 고난을 모르는 체하지 않을 것이고 기쁨은 나누려 노력할 것입니다. 우리 각자의 믿음에 걸고 이를 맹세합니다.”


사제 간에는 예의가 있어야 하지만, 가족 같은 끈끈함도 있어야 한다는 게 에이미의 지론이었고, 안드레이프는 그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


중세인에게 신을 걸고 하는 맹세란 매우 중대한 사안이었고, 신으로부터 받는 벌, 신벌은 자신의 죄과를 응징하는 가장 무서운 벌이자 가장 겪고 싶지 않은 결과였다.


‘가끔 신벌도 무서워하지 않는 잡놈들이 등장하긴 하지만 말이야······.’


올던이나 막심이 그런 잡놈이 될 거 같지는 않았다.

지금까지 봐 온 바로는.


한시름 놓은 기분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제자를 받아들이는 일은 십여 년간 안드레이프의 무의식 한쪽을 늘 뒤숭숭하게 해왔던 중대사였다.

큰일을 마치고 잠깐 감상적인 기분에 젖었다.


스승님 보고 계십니까?

떠나신 지 어언 십 년.

십 년 만에 첫 제자를 받게 됐습니다.

스승님 말씀처럼 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영리한 녀석인 건 맞습니다.

지금 저는······


마음의 편지를 미처 끝내지 못했는데, 올던이 치고 들어왔다.


“사조는 어떤 사람이었는데?”

“너 이 녀석 이제 말 제대로 해야지. 사부한테는 말을 길게 하는 거다. 말끝마다 요 자 붙이고.”

“흥. 내가 알 게 뭐야. 그런 법칙 같은 거.”


그래, 그게 너답긴 하다.


***


마키아 시로 온 지 한 달이 되었을 무렵,

안드레이프가 그들에게 내민 건 삼 주 전에 보여줬던 편지였다. 읽기 교본으로 쓰려고 한 장 더 사본을 떴었다.


“올던부터 읽어보자.”


두 아이는 안드레이프가 시키는대로 한 문장씩 이 편지를 읽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안녕하십니까? 저는 안드레이프 볼로비치 야크신이라는 마나공학자입니다.

들판을 가득 메우고 출렁이던 황금빛 윤슬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황홀한 추수의 기쁨이 채 지나기도 전에 어느덧 겨울의 초입에 들어섰습니다.

겨울밀의 파종도 끝난 지금, 댁내 겨울준비는 다 되셨는지요? 동쪽 숲에서 벌채한 땔감들이 성 곳곳에 쌓이는 걸 보면 올해 겨울도 따스하게 보낼 수 있으리라 기대됩니다.

이 모든 게 다 시장님과 시민위원회 여러분의 노력 덕분이겠지요.


다름이 아니오라, 올해 서쪽 해자 보수와 관련한 제언을 하나 드리려고 합니다.

마키아 시에서는 해마다 이맘때쯤, 눈이 내리고 땅이 얼기 전에 으레 해자를 보수하곤 합니다. 저잣거리의 소문으로는, 시에서 매해 인부와 마소들이 부족해서 곤란을 겪으신다고 들었습니다.


입 가벼운 사람들의 헛소리일지 몰라 이러한 말들을 가벼이 흘려 넘겼던 저는, 우연히 그 소문이 사실이었음을 확인받았습니다. 서쪽 성문에 살고 있는 익명의 제보자로부터요. 시를 걱정하는 마음이 우직한 분이었습니다.


제가 진실로 걱정하는 것은 도시 성벽의 방어가 미비하여 저의 삶이 불안하게 느껴진다는 게 아닙니다. 그보다는 제가 도울 일이 많지 않다는 점에 있습니다.


황제 폐하의 성실한 신민으로서 이러한 공동방어의 의무는 함께 치러야만 하는 것이지요. 기꺼운 마음으로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고는, 가능한 도움을 드리고자 이렇게 펜을 들었습니다.


제 소유의 말 한 마리가 마침 한 달 정도 대여가 가능합니다. 제 말을 빌리실 의향이 있으신지 여쭙고 싶습니다.


더불어 제가 보호하고 있는 두 명의 꼬마를 막노동꾼으로 쓰실 생각이 있는지요? 제 생각에는 진흙터브를 채우는 일을 시키면 좋을 거 같습니다.

어찌나 진흙을 갖고 놀길 좋아하는지, 매일 진흙투성이가 되는 아이들이거든요. 적성에 잘 맞을 겁니다.

말과 말몰이꾼으로서의 제 보수는 하루 50코퍼, 두 아이들의 보수로는 하루 10코퍼가 어떠실지요?


관심이 있으시다면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

저희는 남쪽 성문 밖 세탁부들의 집에 세들어 있습니다.


마키아 시의 무궁한 발전을 빌며.


안드레이프 배상.」


“모르는 단어 있니?”


아이들의 입에서 질문이 터져 나왔다.


“배상이 뭐야?

“절하며 올림이라는 뜻이다. 정중하게 드린다는 뜻을 표현하고자, 서간문에서 주로 쓰는 어휘지.”


아이들이 모르는 단어가 꽤 많았다. 단어를 파악하느라 전체 내용 이해는 뒷전이었다.


“마법사가 말몰이꾼도 하는 거야?”


상황파악이 안 되는 걸까?

이 녀석들 독해능력은 아직이네.


‘글을 빨리 읽고 이해하는 능력이 떨어진다.’


괜찮다.

이렇게 몸으로 배우면 되는 거지.

체력도 키우고, 인생 교훈도 얻고.

글을 빠르게 읽고 이해할 수 있어야 손해 볼 일이 적다는 교훈을 어디 가서 얻겠어.

그게 일일이 말로 얘기해봐야 감이 안 오는 거거든.

그 때 올던이 질문을 했다.


“우리가 돈을 받고 일해?”


아아.

오해를 했다.

이 녀석들 초점을 다른 데 맞추고 있었네.

안드레이프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아이들을 바라봤다.


“응, 돈을 줄 거다. 진흙 터브를 끌기만 하면 돈을 줄 거야.”


올던이 눈을 깜박였다. 이해가 안 됐다는 눈빛을 보냈다.


“진흙터브는 뭐야?”

“아직은 몰라도 돼. 힘만 좋으면 되거든. 얼른 먹고 나갈 준비하자.”

“어디 가는데?”

“밥값 해야지. 운동도 좀 하고.”


성루에서 종소리가 울려 왔다. 해자 준설을 할 일꾼들에게 시간을 알리는 소리였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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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안드레이프의 끝나지 않는 여행 +2 24.02.10 584 26 14쪽
1 프롤로그 +2 24.02.09 828 30 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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