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상에서의 휴식.
"···잡설이 길군."
한서준이 대꾸했다. 그는 빈 잔을 바텐더 앞으로 밀고 굽혔던 허리를 폈다.
"용건만 말해라."
옷주름 펴지는 소리가 사방으로 퍼져 나갔지만 라운지 내의 사람들은 쳐다보는 것 외의 행동은 하지 않았다.
"용건?"
아직 가시지 않은 웃음기가 깃든 목소리로 담서은이 입을 열었다.
"용건이라? 좋아. 짧게 짧게 끝내지. 그럼 네 이야기를 해라, 한서준. 내 용건은 대화니까."
"···그래? 아쉽군. 내 이야기는 주제가 없다. 그러니 이제 가라."
한서준이 말했다.
"아니. 그러면 다시 내 이야기를 하지."
담서은이 말했다.
"···질기군. 됐다. 이제 올라갈 테니까."
한서준은 리필된 브랜디를 단번에 들이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담서은이 따라 일어났다. 한서준은 품속에서 3000루블을 꺼내 카운터 위에 올려놓고 라운지를 나왔다. 녹색 눈동자의 담서은이 그의 뒤에 따라붙었다.
"···언제까지 따라올 셈이냐?"
한서준이 담서은을 돌아보고 물었다.
"글쎄? 미안하지만··· 지금의 나는 시간이 많다, 한서준."
담서은이 말했다.
"전혀 급할 게 없다는 소리지."
"···그래서, 만족할 때까지 따라오겠다는 거냐?"
"정답이다."
"···끔찍하군."
한서준은 길게 숨을 내뱉으며 엘리베이터를 조작했다. 그는 8을 누르려던 손을 옮겨 13을 누르고 벽에 등을 기댔다.
"그보다··· 이제 그 모습은 안 써도 되지 않나?"
한서준이 팔짱을 끼고 물었다.
"그렇긴 하지. 하지만, 익숙해져라, 한서준."
담서은은 두 팔을 양옆으로 벌리고 서서 말을 이었다.
"앞으로 이 모습을 자주 볼 테니까."
"···정말이지, 너처럼 끈질긴 것은 처음 보는군."
한서준이 말했다.
"그야 우리가 서로를 이해하는 데에 쓴 시간은 아주 약간에 불과하니까."
담서은은 미소를 지었다.
"나도 한서준, 네가 이렇게 고집이 센 줄은 몰랐다. 이제 그만 적응할 때도 되지 않았나?"
"···적응도 조건이란 게 있다, Messorem."
한서준이 한숨을 내쉬었다.
"조건이라. 그렇게 생각한다면 어쩔 수 없지."
담서은의 녹빛 눈동자가 보랏빛으로 물들었다. 가로로 찢어졌다 세로로 봉합된 동공이 다시 한서준의 모습을 담은 채 아른아른한 빛을 흩뿌렸다.
"됐나?"
담서은이 물었다.
"그게 된 거냐?"
한서준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 정도면 많이 양보해 준 거다, 한서준. 이건 내 본래의 눈이니까."
"···네가 의태를 한 본체의 눈은 애초에 녹색도 아니었다."
"아, 미안하군. 나한텐 녹색으로 보여서 말이지."
담서은이 말했다.
"그나저나, 이 인간 꼬마는 힘들겠어. 한서준, 널 보는 것만으로도 목이 아플 지경이니까."
"그럼 그 모습을 바꿔라. 원래대로."
한서준이 팔짱을 풀고 말했다. 담서은이 입꼬리를 올렸다.
"이제 와서 그럴 순 없지. 인간의 몸으로 의태를 한 건 여러 번이지만, 이렇게 인간 꼬마의 몸으로 바꾼 건 처음이니까. 게다가··· 난 이 느낌을 좀 더 즐겨두고 싶다, 한서준. 그러니, 어쩔 수 없지만 네가 적응해라. 적응이 답이다."
담서은이 말했다. 한서준은 길게 숨을 뱉어 내고 13층에서 멈춘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담서은도 한서준을 따라 내렸다. 한서준은 계속 걸어 엘리베이터와 마주보는 계단을 올랐고 옥상에 다다르고 나서야 담서은을 돌아보았다.
"게임 하나 하지."
그가 말했다.
"게임?"
주위를 둘러보던 담서은이 한서준을 응시했다.
"그래."
"게임이라. 어떤 게임을 말하는 거지?"
담서은이 물었다.
"간단하다. 따라와라."
한서준은 눈 쌓인 실외기와 환풍기가 전부인 옥상 한가운데에 담서은을 세웠고 무감동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넌 버티는 거다."
"버틴다라."
담서은의 보랏빛 눈동자가 빛을 발했다.
"날 공격하겠다?"
"그래."
한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딱 한 번. 내가 공격을 하겠다. 만약 버틴다면, 네가 원하는 대로 대화를 해 주지. 하지만···, 네가 버티지 못한다면, 이 이상의 대화는 없다."
"재밌군. 한서준, 네가 아무리 신원 불명자의 신체를 갖게 되었다지만···."
담서은의 말이 옥상의 모든 눈을 일으킨 바람에 휩쓸려 흩어졌다. 동시에 눈밭에 긴 흔적을 남긴 담서은은 삽시간에 난간을 박살 냈고 새카만 밤하늘에 먹혀 사라졌다. 한서준은 별 하나 뜨지 않은 밤하늘과 핏방울 하나 묻지 않는 주먹을 바라보다 몸을 돌렸다.
"그래. 네가 옳다, 한서준. 영양가 없는 대화는 생략해야지."
한서준은 하나뿐인 눈을 길게 감았다 떴다. 그는 주먹을 말아쥐고 몸을 돌렸다. 길게 패인 눈밭 위에서 몸에 묻은 눈을 털어 내던 담서은이 미소를 지었다.
"좋은 공격이다, 한서준. 신원 불명자의 신체가 된 게 제법 성과가 있긴 한 모양이야."
"···멀쩡하군."
한서준이 말했다.
"당연하지."
담서은이 대답했다.
"그런 걸로 죽을 몸뚱이였으면 이미 오래 전에 죽어 없어졌을 테니까. 이건 당연한 거다, 한서준."
"···예전에, 공기총으로 쐈을 때는 안 그랬던 것 같은데."
"모든 생물에게는 약점이 있는 법이니까. 내가 왜 너한테 흥미를 느꼈는지 아나, 한서준? 넌 내 투명화를 간파한 것도 모자라··· 내 약점을 찾아낸 유일한 생명체다. 그러니 흥미가 없을 수가 없지."
"···그래. 머리를 날린 게 실수였군."
"정답이다. 넌 실수를 하고 말았지."
담서은이 말했다. 담서은의 보랏빛 눈동자가 한 차례 확장됐다 축소되며 세로로 그어졌다.
"하지만, 버티질 못했으니 내 패배는 확정이군."
"···날아간 것과 버티는 것은 별개다."
"날아가지 않고 제자리를 지키는 것도 엄연히 버티는 거다, 한서준."
담서은이 미소를 지었다.
"됐다. 쓸데없는 잡담은 그만 두지. 네 바램대로, 불청객은 이만 사라져 줄 테니까. 조만간 또 찾아오지."
"···찾아오···."
한서준은 하던 말을 끊고 입을 다문 채 몸을 돌렸다. 그는 건빵 주머니에서 사탕을 꺼내 입에 넣었고 텅 빈 옥상을 가로질러 계단을 내려갔다. 눈 위에 남은 두 개의 크고 작은 발자국이 떠올랐던 눈가루에 묻혀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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