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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레그라(Allegra), 영혼의 여행자.

그는 기억한다

웹소설 > 일반연재 > 공포·미스테리

제니아.
작품등록일 :
2016.06.13 22:46
최근연재일 :
2016.11.01 2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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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7.31 2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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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기억한다 - 8. 필사의 탈출 (2)

DUMMY

8. 필사의 탈출 (2) : 총격전


저격수들은 와펜실트를 둘러싼 큰 숲 슈네발트(하얀 숲) 곳곳에 숨어 있다가, 엽총을 계속 쏘아댔다. 테레지아는 샤텐의 등 뒤에서 상반신을 바짝 숙인 채 고삐를 꼭 잡고 달렸다. 이상스러운 열기로 후끈 달아오른 전신, 그리고 불에 덴 듯한 손등과 팔뚝 곳곳으로 스치는 날카로운 감촉은 실상 아무 것도 아니었다.

‘제발, 지켜봐 줘! 내가 살아서 프라이메라에 갈 때까지!’

양쪽 팔뚝과 무릎 아래 정강이 표면을 타고, 뭔가 흐르는 것이 희미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이대로 멈출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안장 아래 안낭에 단단히 봉한 함석 상자 안에는, 자비네를 포함한 108명의 원한이 깃들어 있었다.

‘딱 한 번, 너하고의 약속. 아니, 네 말을 어겼다고··· ’

왼쪽 길목에서 날아온 산탄이 아슬아슬하게 콧잔등을 찢으며 가로로 세차게 스쳐갔다. 그 바람에 튄 핏방울로, 테레지아의 시야가 잠시 막혔다. 문득, 테레지아는 눈물과 핏방울에 섞인 시야 속에서, 뜨거운 안개 안에 피범벅이 된 자비네의 손을 보았다고 생각했다.

‘혹시라도 네가 날 안 보려고 할까봐.’

테레지아는, 얀을 포함한 이들에 대한 적개심을 경고했던 자비네의 말을 떠올리며, 찢어진 셔츠 속 몸을 부르르 떨었다. 식은땀 방울들이 피와 섞여서 다시 한 번 주르르 흘러내렸다.

‘그게, 무엇보다도 제일 두렵다!’

정신이 맑았을 때의 자비네의 푸른 눈은, 그 어느 때보다도 아름다워서 숭고함까지 느껴지는 빛을 은은하게 뿜어냈었다. 그러나, 의도적으로 전혀 정제하지 않은 호밀빵을 삼킨 뒤의 자비네는 딴판으로 변해 있었다.

“그 자식이 내 어머니한테 그럴 수도 있을 가능성을 생각했으면서도··· 막지 못했던 건, 분명 내 잘못이야.”

생전의 자비네는, 마지막 실험을 결심하면서 그렇게 말했었다.

“그리고, 사람들이 믿게 하려면··· 이 방법밖에는 없는 거 같다.”

아돌프에게 매수당한 곡물상인에게서, 맥각이 잔뜩 붙은 상태의 호밀을 사들이게 된 여파는 상당히 컸다. 어떻게든 자비네를 굴복시키기 위해, 아돌프는 그야말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게 무슨!”

이미 알아차렸지만, 테레지아로서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었다. 그러자, 자비네는 아돌프를 돌려보낼 때 뿜어내던 냉정한 압도감을 잠시나마 드러냈었다. 테레지아는, 그 얼음으로 만든 여신상 같은 자비네의 무표정을 마주 대하면서, 심장이 멎는 듯한 충격을 받았었다. 분명 자신과 똑같은 사람이었지만, 투명하면서도 차가운 칼날을 다듬어 형체를 만든 듯했다.

“어떤 생각을 밝힐 때는, 그 생각의 주체인 본인도 그 생각 범주에 반드시 넣는 게 맞아. 그리고 그게 지식 내지는 학설의 주체로서 자기 발언에 책임지는 최선의 방법이지.”

자비네는 공증인이 가고 난 뒤에, 검은 상복 차림 그대로 앉아서 그렇게 말했었다. 그녀는 테레지아의 아연실색한 반응을 보고 나서는 말을 이었었다.

“상대가 생각지도 못한 방법으로 공격하는 게, 최선의 방어야.”

“자비네!”

테레지아는 겨우 목소리를 쥐어짜내어 외쳤었다. 그러나, 그 다음 말을 이어나갈 수는 없었다. 속에서는, 수없이 많은 말들이 맴돌았었다. 자신이 처음에 학교 식당에서 목격한 일을 말하지 말았어야 했을까. 그렇다면 고가의 밀과 호밀을 대조하고 맥각의 존재를 발견해서 연구할 일 자체가 없었던 건 아닐까. 아니, 그렇게 말한다 해도, 자비네라면, 모든 것은 사용하는 사람들 각자에게 달린 일이라는 대답이 나올 게 분명한 일이었다.

‘그래도, 왜 네가 직접!’

분명 아돌프는, 사람들의 목숨을 볼모로 잡고 자비네를 서서히 압박하고 있었다. 그러나, 테레지아의 눈에 비친 세상 사람들은, 한결같이 자비네 한 사람보다 훨씬 못한 존재로만 보였을 뿐이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 거 같지만, 이건 내가 해야 돼.”

자비네는, 다시 평소처럼 온화한 기색으로 돌아와서 한 손으로 테레지아의 볼을 가만히 쓰다듬었었다. 그리고, 테레지아가 그런 부드러운 손길을 느꼈던 것은, 결국 그 날이 마지막 순간이 되고 말았었다. 자비네는, 죽은 어머니 마그레타가 잘못 먹었던 빵을 똑같은 방식으로 만들게 한 뒤에, 자신의 모습을 하루하루 지켜보며 기록으로 남겨달라고 했었다.

그것으로, 자비네의 짙푸른 눈동자에서는 초점이 영영 사라지고 말았었다. 80일 동안, 맥각의 양을 조절해 가면서, 자비네의 고통 또한 엄청난 기복이 반복되었었다. 불에 덴 것만 같은 가냘픈 몸을 비틀며 괴로워하다가, 그녀 자신의 금발을 움켜잡고 이를 악무는 자비네의 모습은 차마 눈 뜨고 보기 어려웠었다.

그러나, 잠시라도 고통이 잦아들고 눈에 초점이 돌아올 때면, 자비네는 식은땀 범벅으로 축축해진 손을 뻗어 테레지아의 손을 억세게 붙잡았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모습을 빠짐없이 기록하라는 무언의 압박을 가했었다. 테레지아는 할 수 없이 날짜별로 기록했었다. 하지만, 그녀가 매일의 기록을 마치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완전히 기절해버리는 자비네를 볼 때마다, 눈물로 지샜었다.

그 때의 피눈물은 아직도 남아있는 듯했다. 언젠가 아센버그 대학을 떠나서 지났던 길, 슈네발트 숲 속 굽이친 길을 되짚어 달리면서, 부질없는 핏방울들이 테레지아의 뺨 뒤로 스쳐갔다. 테레지아는 루넨버그 도시로 통하는 빈터까지 내려오자마자, 등에 메고 있던 엽총을 꺼내려고 했다.

테레지아가 개머리판과 총대 사이를 연결한 가죽 끈을 돌리려고 두 손을 등 뒤로 향하자, 살점을 스칠 때 일부 박혔던 탄피들 여러 개가, 샤텐의 안장 및 궁둥이 위로 후두둑 떨어졌다. 테레지아는 무수한 상처들 때문에 자신이 열에 들떴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그리고는, 아픔도 잊고 총을 옆구리에 끼며 쳐들어 조준했다.

뒤를 따라오던 미행자들 세 명이, 각각 서쪽과 남쪽 덤불 입구에서 테레지아의 엽총에 맞아 즉사했다. 테레지아는 자신이 쏜 총에 귀 위쪽과 머리 절반이 날아가는 그림자를 보며, 눈물과 동시에 광기 어린 웃음을 낮게 터뜨렸다.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어느 누구라도 결코 막아서는 안 될 일이었다.

총소리를 낸 것을 의식하자, 문득 사람들의 기척이 있을까봐 두려워졌다. 테레지아는 붉게 충혈된 눈을 이글거리다가, 사슴 한 마리를 발견하고 곧장 목 아랫부분을 쏴서 명중시켰다. 자비네를 따라 아센버그 대학에 따라가기 이전까지는, 생물학적 아비인 얀을 피해 산을 쏘다닌 것이 전부였었다. 그렇기에, 사냥만큼은 자신 있었다.

‘마치, 저 작자들을 보지 못했다는 것처럼.’

언젠가, 와펜실트 혹은 루넨버그 쪽에서 추격자들의 시체를 발견할 것이었다. 테레지아 자신이 죽인 것이 아니라, 오발 사고로 보이게끔 꾸며야 했다. 테레지아는 뜨거운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샤텐의 등에서 잠시 내려왔다. 그러나, 샤텐에게 연결한 고삐만큼은 한 손에 꼭 쥐었다.

어디까지나 자신은 여행자여야 했다. 그리고, 도중에 식량을 구하러 총을 쏘았을 뿐, 죽은 남자들과는 아무 관련 없어 보여야 했다. 모든 물증을 없앤 뒤, 테레지아는 샤텐을 근처 나무에 매어두고, 계곡물에 뛰어들어 참았던 울음을 한꺼번에 터뜨렸다.


“그렇다면, 그, 자비네 브루크너가.”

자이데는 한동안 충격에 휩싸여서 말을 잇지 못했다. 막시밀리안은 지친 기색을 띤 채로 양쪽 어깨를 늘어뜨리고 침묵했다. 자이데는 상대의 피로한 기색을 보고 나서야 겨우 정신을 차리고, 그 상대인 막시밀리안을 부축했다가, 반좌위로 세운 베개에 기대도록 도왔다. 막시밀리안은 지친 듯 그녀에게 몸을 맡기고 베개에 등과 머리를 완전히 파묻었다.

자이데는 다시 침대 앞 보조의자로 돌아와서 앉았다. 생각할수록, 믿기지 않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새로운 학설이 사회의 통념과 충돌하는 일은, 역사 속에서 상당히 많았었다. 그리고, 그 진위를 증명하기 위해 발견자들이 끊임없이 싸워나가는 것도 늘 예견된 수순이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실험 대상으로 삼는 일은 흔치 않았다. 자이데는 거기까지 인식하고 나서, 온몸이 차갑게 식는 것을 새삼 실감했다.

“그래서, 테레지아 님이 기를 쓰고 여기 프라이메라까지 달려왔다는 건가요?”

자이데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물음을 던졌다. 막시밀리안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이데는 막시밀리안의 안색을 다시 한 번 살핀 뒤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예의를 갖춰서 그에게 목례한 뒤에, 침실을 빠져나왔다.

그녀가 침실을 나와서 1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반쯤 내려왔을 때, 그녀의 시야에서는 낯선 남자와 응접실에서 마주앉아 있는 프란츠의 모습이 포착되었다. 프란츠와 마주앉은 낯선 남자는 흑갈색 머리카락에 어깨가 떡 벌어진 모습에, 30대 중반 정도로 되어 보였다. 그녀는 낯선 남자의 모습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멈칫했다. 어쩐지 목덜미가 싸늘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럴 리가 없잖아.’

만약에, 와펜실트 출신으로 들었던 아돌프 만이 실제로 눈앞에 나타났다면, 저런 모습이었을까. 자이데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와펜실트 사람은 그 때 왔던 테레지아 말고는 다 죽었다고 했지. 정말 만 박사가 살아있었다면, 지금처럼 저렇게 젊지는 않을 거고.’

자이데는 간신히 생각을 정리하고 계단을 다 내려왔다. 그러자, 프란츠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아, 자이데.”

“관장님.”

자이데는 두 남자들에게 짧게 목례하고, 다시 프란츠를 바라보았다. 프란츠는 흑갈색 머리의 남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센버그 대학교 도서관 관장, 레오폴트야.”

레오폴트라 불린 남자는, 자이데를 향해 형식적으로 고개를 까딱하는 것으로 답례했다. 자이데는 어리둥절했다가 프란츠에게 말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해야 될 거 같아서요. 이만 가보겠습니다.”

“아니, 당신 끝날 때까지 기다린 거야.”

프란츠는 자이데에게 가지 말라는 손짓을 하며 말했다. 자이데는 고개를 갸웃했다가 물었다.

“그게 무슨···?”

프란츠는 미간을 살짝 좁혔다가, 자신의 맞은편에 앉은 레오폴트에게 말했다.

“바로 이 사람이 우리 쪽 선임입니다.”

그러자, 레오폴트는 자이데를 탐색하듯 훑어보았다. 프란츠는 그런 레오폴트의 움직임을 달갑지 않다는 기색으로 보다가 말했다.

“앉아, 자이데. 내가 설명해 줄 테니까.”

자이데는 등받이가 없는 보조 의자를 찾아서 가지고 왔다. 그리고는, 두 남자 사이에 있는 사각 탁자 앞에 의자를 놓고, 그 위에 다소곳이 앉았다. 의자의 위치는, 프란츠에게 약간 가깝게 놓여 있었다. 프란츠는 자이데를 향해 말했다.

“내가 전에 금서 분류 지시했다가, 보충 자료가 아센버그 쪽에 있는 거 같다고 했을 때.”

“네?”

자이데는 속으로 소스라치게 놀랐지만, 애써 내색하지 않고 외마디 소리만 냈다.

“아센버그에서 어떤 분류를 찾아야 하는지 딱 집어서 알려주는 걸 깜박했어.”

프란츠는 자이데를 쏘아보는 것처럼, 눈을 짐짓 강하게 빛내며 계속 말했다. 자신이 설정한 상황에 따라와 달라는, 무언의 신호인 듯했다.

“그러다 보니 가장 포괄적인 수사학부터 짚어가고, 거기서 본의 아니게 묻혀 있던 자료를 보게 된 모양이야.”

이번에는 레오폴트에게 하는 말이었다. 레오폴트는 아무 감정이 실리지 않은 듯한 시선으로, 가만히 프란츠와 자이데를 각각 일별했다. 묘하게 침착하면서도 꼼꼼하게 보는 모습이, 오히려 더 무서운 느낌을 주었다.

“그래서.”

레오폴트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780년대 수사학 자료를 본다고 하고는, 우리 사서들도 잘 모르는 대학교 논문을 봤다는 얘깁니까?”

“아무래도, 대분류로 먼저 접근하려면 수사학 쪽 서고로 제일 처음 가는 게 기본이니까?”

프란츠는 싱긋 웃어 보이기까지 했다. 레오폴트는 한쪽 입끝을 살짝 올렸다가 내렸다. 조소하는 것인지, 혹은 형식적인 반응인지, 언뜻 구분하기 어려울 만큼 미묘한 표정이었다.

“리히터 관장님.”

레오폴트는 굵직한 눈썹을 쓱 치켜 올렸다가 내린 뒤에 말했다.

“그래서, 저 선임분을 저희 쪽으로 보내서 원래 찾으려던 건 뭐였습니까?”

프란츠는 자이데를 돌아보며 말했다.

“접때 폐간된 논문 어쩌다 본 거 말고, 당신이 원래 찾으려던 분류 말해도 돼.”

자이데는, 순간적으로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분명, 와펜실트 마을의 수수께끼를 조사하게 된 계기는, 자신의 개인적인 일인 지타 마이어의 죽음에 얽힌 의문을 찾다가 우연히 본 기록 때문이었다. 그러나, 프란츠에게는, 지타 마이어의 죽음에 대해서 한 번도 언급한 적이 없었다.

‘와펜실트 일은 더 찾아볼 실마리가 없는데. 내 일을 말해도 될까.’

자이데는 잠시 망설였다가 입을 열었다.

“관장님께서 찾아보라고 지시하신 일은, 의학 쪽이었습니다. 그래서 전직 의사였던 관장님 부친께 몇 가지 여쭙고 내려오던 길이었고요.”

레오폴트는 알겠다는 의미로 묵묵히 고개만 끄덕였다. 자이데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확실히 맥각으로 인한 질병 <마녀열>과, 이를 밝혀낸 논문 때문에 생긴 일이었으니, 아주 틀린 말도 아니었다. 상대에게는 그런 정도의 분류만 밝혀도 충분할 듯했다.

“그리고 그게 끝나고 나면, 더 찾아보려던 게 있었습니다.”

“뭐요?”

레오폴트는 곧바로 물음을 던졌다. 자이데는 멈칫했다. 지타 마이어가 활동했던 시기, 그리고 죽음을 맞이한 시기는 730년대 후반에서 40년까지였다. 왕정 말기의 범죄 사건 기록을 모은다고 다 모았지만, 지타가 맡아서 해결했던 사건들에서는 도통 연결 고리를 찾기 어려워진지도 오래였다.

‘고모할머니가 생전에 아센버그 범죄 사건을 주로 맡았다고는 하지만.’

자이데는 생각을 정리한 끝에 말을 꺼냈다.

“730년대에서, 740년대까지.”

연대를 밝히는 순간, 레오폴트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자이데는 순간적으로 바짝 긴장했다가 계속 말했다.

“왕정 시대의 미해결 범죄 사건 기록을 찾을까 했습니다.”

“미해결 범죄라면.”

레오폴트의 어조에는 한 치의 동요도 없었다. 유난히 잘 울리면서 힘 있는 저음이라, 말을 적게 해도 단어 하나하나마다 상대의 귀를 확 트이게 하는 듯한 묘한 느낌이 있었다.

“왕궁 비화입니까, 아니면 일반 시민들끼리의 일입니까?”

자이데의 녹회색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흔들렸다. 관장으로서 도서관 자료 열람 허가 여부를 결정하려는 질문치고는, 레오폴트의 물음은 어딘지 모르게 지나칠 정도로 구체적이라는 느낌이 있었다. 그녀가 얼른 대답하지 못하자, 레오폴트는 다른 질문을 했다.

“선임 사서, 당신 이름이 자이데 마이어라고 했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자이데는 당황했다가 얼른 대답했다. 레오폴트는 어느 정도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손 하나를 아랫입술 바로 밑으로 가져가서 턱을 누른 채 생각에 잠겼다. 이번에는, 프란츠가 의혹을 담은 눈빛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가며 힐끔거렸다.

“730년대부터라면, 아센버그 쪽에 마이어란 이름의 조사관이 있었다고는 하는데.”

레오폴트는 감정이 전혀 실리지 않은 어조로 말을 꺼냈다.

“내가 전임 관장님께 인계받으면서 그 조사관이 담당한 사건 기록만은 죄다 보안 강화하라는 얘길 들은 적 있습니다. 그래서 외부 유출은 철저히 금지시키고 있죠. 근데 리히터 관장님한테서 선임 이름 처음 들었을 때는 혹시나 했습니다.”

말을 마친 레오폴트의 흑갈색 눈동자는, 비로소 감정이 실린 듯 매서운 빛을 띠었다. 말투는 흔들림 없이 정중했지만, 눈빛은 상대를 얼어붙게 할 만큼 날카로웠다. 자이데는 레오폴트의 시선을 힘겹게 받아내며 말을 꺼냈다.

“왜 그 조사관 기록을 그렇게 분류해야 됐는지는, 혹시 들으셨습니까?”

“나도 정확한 이유는 못 들었습니다. 전대 방침이 그렇다니, 따르는 것뿐이었고요.”

레오폴트는 말하던 끝에, 큼직한 두 손으로 깍지를 꼈다. 그리고는 눈을 내리깐 채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자이데는 마른침을 삼키고, 다소 긴장된 기색으로 상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하지만.”

레오폴트는 한참 뒤에 고개를 들어, 자이데를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이런 경우는 정말 처음이라, 직접 확인해보고 싶었습니다.”

“이런··· 경우라니요?”

“아센버그 사람들도 으레 그러려니 해서 안 찾는데, 외부인, 그것도 중앙 도시 사람이 딱 집어서 말하는 건 지금이 처음이니까요.”

레오폴트는 다시 눈을 날카롭게 빛내며 물었다.

“그 때 자료들 찾으려는 목적이 뭡니까?”

자이데는 재빨리 적당한 대답을 찾으려고 궁리해보았다. 이미 지타의 성(姓)인 마이어가 자신과 똑같았기 때문에, 레오폴트가 아니라 다른 어느 누구라도 연관 관계가 있을 거라고 짐작할 수는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레오폴트는 지타가 전직 조사관이었다는 것은 알아도, 정확한 내막은 모르는 듯했다.

“730년대에 활동했던 지타 마이어 조사관은.”

고심 끝에, 자이데는 말을 꺼냈다.

“제 할아버지의 여동생, 즉 고모할머니가 되십니다.”

“그래요?”

“생전에 제 할아버지께서는, 일찍 돌아가신 그분 칭찬을 수시로 하셨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이었는지 항상 궁금했습니다.”

자이데는 프란츠를 돌아보았다가, 다시 레오폴트를 향해 덧붙였다.

“그래서 제 상관이신 리히터 관장님께도, 개인적인 일이라 자세히는 말씀드리지 못했다가 지금 밝히게 됐습니다.”

“유감이군요.”

레오폴트는 미간을 찌푸렸다가 계속 말했다.

“당신이 말한 대로, 마이어 조사관의 정식 이름은 지타 마이어가 맞습니다. 개인적인 심정은 어느 정도 이해가 되지만, 조사관의 신상이나 담당 사건 자료를 보려면 관청 허가를 정식으로 받고 오는 게 좋을 겁니다.”

자이데는 한동안 할 말을 잃었다. 아센버그 관청에서는 이미 <호밀빵의 저주>를 변칙적인 방법으로 열람한 그녀에 대해 경고를 내린 상태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오랜 시간 동안 공식 기록에서 삭제하려고 애썼을 지타 마이어에 대해 알아보려고 한다면, 관청에서 허가를 내려줄 가능성은 지극히 희박했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레오폴트는 간결하게 작별 인사를 마치고 떠났다. 프란츠는 저택 현관에서, 마차를 타고 떠나는 레오폴트를 배웅한 뒤에 자이데를 돌아보았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죠, 관장님?”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인데?”

프란츠는 다소 굳은 표정을 하고 반문했다. 자이데는 또 다시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프란츠는 다시 응접실로 들어가며 말했다.

“일단, 당신이 그 <호밀빵의 저주> 초판본을 봤던 일은 최대한 간단히 넘어가도록 손 써놨어.”

“네.”

“하지만, 우리 도서관에서 금서 찾던 게 그런 이유였다면 처음부터 솔직하게 말해도 문제 없었을 텐데.”

프란츠의 어조에는 희미하게 화난 느낌이 배여 있었다.

“죄송합니다, 관장님.”

자이데는 고개를 숙이며 사의를 표했다. 프란츠는 약간 찡그린 기색으로 그런 그녀를 보았다가, 2층 침실로 올라갔다. 그의 아버지인 막시밀리안에게 잠시 가보는 듯했다. 잠시 후, 프란츠는 다시 모습을 드러내며 1층으로 내려왔다.

“도서관에 가서 얘기하지.”


프라이메라 중앙 도서관 관장실.

프란츠는 창가를 등진 자리의 안락의자에 기대앉아서 생각에 잠겨 있었다. 자이데는 책상 앞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접대용 소파에 앉아 있었다.

“마이어 조사관은.”

프란츠는 생각에서 깨어나서 말을 꺼냈다.

“내가 듣기로는, 왕정 때 왕실 전속 조사관으로 주로 아센버그 쪽 사건을 맡았다고 했는데.”

“맞아요. 근데 관장님은 그걸 어떻게 알고 계셨어요?”

“당신 고모할머니라는 그 조사관을 알고 싶다면.”

프란츠는 의자에서 일어나며 계속 말했다.

“아센버그보다는 선더버드 쪽으로 가보는 게 더 빠를 거야. 위에서 알고 손 쓰기 전에.”

“왜 선더버드라고 생각하세요?”

자이데는, 짐짓 모르는 것처럼 물었다. 740년에 지타 마이어가 맡았던 마지막 사건은, 자이데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었다. 잘 안다기보다는, 할아버지에게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것과 각종 기록들을 조합한 기억이라고 해야 더 정확할 듯했다.

“그분이 아센버그에서 맡았었다는 건, 그야말로 왕실의 자잘한 비화들이나 일반 시민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고만고만한 범죄 사건들이었을 걸? 범죄 조사관이라면 으레 손댈만한 거라, 다른 종사자들 이력하고 딱히 다를 게 없는 기록들일 거야.”

프란츠는 그 다음에, 레오폴트의 발언을 살짝 상기시켰다.

“아까 아센버그 대학 도서관 관장이, 당신한테 뭘 알고 싶냐고 물은 것도 그래서일 거고. 왕실 비화냐, 아니면 일반 사건이냐 하는 거.”

자이데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선더버드에서 있었다는 사건을 떠올려보았다. 아마도, 마지막 영주였던 제이드 러쉬의 일이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왕정 시대에는 마법이 어느 정도 있었다는 거, 관장님도 아시죠?”

“당연히 알지.”

“근데 740년대에는, 선더버드에 마법이 잠깐 있었다는 소문이 돌았다나봐요.”

“무슨 마법?”

프란츠는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하이덴에서 마법의 명맥이 완전히 끊어진 것은 표준력 600년대의 일이었다. 360년대 초에 전설적인 영웅으로 전해지던 울리히 폰 베르크의 영향력으로 인해 마법이 점차 쇠퇴해간 것은 기정사실이었지만, 완전히 사라지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던 셈이었다.

“우리 국교인 아이슬라 교 신화를 찾아보다 보면, 사물을 바꾸는 권능이 있었다고도 하잖아요.”

“그거야 기록상으로는 그렇지.”

“당시 선더버드에서는 어떤 사제분이 워낙 독실하다 보니 주신 아이슬라의 성령을 받아 그런 힘을 쓰고, 영주 한 분을 개심시켰다는 소문이 돌았대요.”

자이데는 친할아버지에게 들었던 소문을 조심스럽게 언급해보았다. 프란츠는 황당하다는 듯 고개만 살짝 꼬아보았을 뿐, 별 말이 없었다.

“아무튼, 제 고모할머니인 지타 마이어 조사관은, 그 소문만이 아니라, 그 개심했다는 영주의 행동이 이상하다는 걸 전해 듣고는, 정식 수사권을 받아서 조사했다고 들었어요. 그 다음엔 어찌 되었는지 전혀 모릅니다.”

자이데는 거기까지만 말하고 끊었다. 막시밀리안의 손에서 펼쳐진 연감 속에, 지타의 이름이 들어가지 않았다는 사실 너머에 무엇이 숨겨져 있는지는, 아직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시기상으로도, 740년대에 선더버드에서 있었던 괴담의 실체를 발견하고 유골 검시법을 지시한 조사관은 지타밖에 없었다.

‘그 때의 공은 크게 인정받았다가 느닷없이 길에서 비명횡사했는데. 위에서 그분 죽음을 덮으려 한 건 대체 무슨 이유일까.’

자이데에게 최종적으로 남은 의문은, 대략 그 정도였다. 프란츠는 묵묵히 듣고 있다가 말을 꺼냈다.

“문제는 그 다음이겠군.”

자이데는 망설이다가,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프란츠는 자이데의 앞까지 성큼성큼 걸어와서 멈춰섰다.

“난 당신 덕분에, 아버지의 지난 일을 조금씩 알아가고 있지. 설령 여기서 더 알아보다가, 아버지가 어떤 역할을 맡았었다 해도 놀라진 않을 거야. 그저, 어떤 고충이 있었는지 사실 관계를 알고, 아버지 가시기 전에··· 좀더 이해하고 싶을 뿐이고.”

“관장님.”

“당신은, 어떤 사실을 알게 된다 해도, 흔들리지 않을 자신 있어?”

자이데는 무슨 말을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프란츠가 이미 어떤 모종의 내막을 알고 있을 가능성도 짚어보았지만, 차마 입 밖으로 내어 말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과연, 막시밀리안은 30여년 전에 테레지아의 편에 서서 행동했을까. 혹은 주치의로서 사건 제보자인 그녀를 보살폈다가 한순간에 등을 돌렸을까.

어떤 압박이 있었기에, 막시밀리안은 오랜 시간이 지나 죽음을 앞두게 되고 나서야 낯선 여자인 자이데에게 입을 열게 되었을까. 프란츠는 어떤 일이 있었다 해도, 받아들일 자신이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지타 마이어에 대한 자이데 자신의 감정이 어느 정도인지는, 아직 확신할 수가 없었다. 만약, 지타의 의문사에 실제로 흑막이 있다면, 감당할 자신이 없을 듯했다.

“아직 대답할 수 없다면, 지금은 말하지 마.”

그 때, 프란츠가 말했다. 그는 말을 마치고, 지타의 한쪽 어깨를 짚어 주었다가 바로 손을 치웠다.

“일단은, 내가 부탁한 거부터 조심해서 알아보면서. 천천히 생각해.”

자이데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그 다음날 저녁에 곧바로 아센버그를 지나 선더버드로 향하는 버넨 숲에 접어들었다. 그곳 또한 <숲 속의 기수>라고 일컬어지는 테레지아의 유령이 떠도는 지대였기 때문이었다. 처음 아센버그 도서관에 들어설 때와는, 새삼 다른 느낌이 들기도 했다. 버넨 숲은, 생전의 지타 마이어가 맡았던 선더버드의 괴사건과도 일부 관련이 있는 지역이기 때문이었다.

자이데는 버넨 숲의 벼랑바위를 떨리는 손으로 짚어보았다. 그 때, 파르스름한 기운이 희미하게 섞인 뿌연 안개가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손끝에서 느껴지는 움푹 파인 감촉에, 이상하게 마음이 아려왔다.

‘이 길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문득, 아득하게 말발굽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또 다시 버넨 숲에는 한기가 돌았다. 여름밤이라기에는, 지극히 싸늘했다. 어쩌면, 말을 탄 테레지아의 유령이 전보다도 더욱 분명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자이데의 예상과는 달리, 누군가 총을 장전한 듯 철컥! 하는 소리가 밤의 정적을 뚫고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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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기억한다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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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그는 기억한다 - 에필로그 16.11.01 389 0 13쪽
15 그는 기억한다 - 14. 그는 기억한다 [完] 16.11.01 268 0 35쪽
14 그는 기억한다 - 13. 폐허 위에서 16.10.28 253 0 30쪽
13 그는 기억한다 - 12. 깨어진 방패, 와펜실트(Wappenshild) 16.10.23 263 0 28쪽
12 그는 기억한다 - 11. 행정관들의 모의 16.08.11 303 0 30쪽
11 그는 기억한다 - 10. 숨겨진 사랑 16.08.07 238 0 31쪽
10 그는 기억한다 - 9. 프라이메라(Freimera)를 향해 16.08.04 309 0 30쪽
» 그는 기억한다 - 8. 필사의 탈출 (2) 16.07.31 312 0 26쪽
8 그는 기억한다 - 7. 필사의 탈출 (1) 16.07.31 255 0 30쪽
7 그는 기억한다 - 6. 아돌프의 음모 16.07.28 254 0 33쪽
6 그는 기억한다 - 5. 숲 속의 기수 (4) 16.07.27 292 0 27쪽
5 그는 기억한다 - 4. 숲 속의 기수 (3) 16.07.24 444 0 21쪽
4 그는 기억한다 - 3. 숲 속의 기수 (2) 16.06.21 269 0 24쪽
3 그는 기억한다 - 2. 숲 속의 기수 (1) 16.06.21 277 0 31쪽
2 그는 기억한다 - 1. 죽음은 계속되고 16.06.18 310 1 31쪽
1 그는 기억한다 - 프롤로그 16.06.15 723 1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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