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장피에르 고다르 박사
흰 가운을 걸치고 나타난 장피에르 고다르 박사는 차가운 인상에 어딘지 모를 깐깐한 분위기를 풍겼다.
“진찰실 앞에서 이렇게 소란을 피우면 어떡해!”
박사가 나타나자 아이의 아버지가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선생님! 제발 저희 아이 좀 봐주세요! 아이가 죽어가고 있습니다! 약을 먹여도 열이 떨어지질 않습니다! 으흐흑.”
축 늘어진 아이를 잠시 쳐다본 고다르 박사가 물었다.
“열이 언제부터 떨어지지 않았어?”
“3주 가까이 된 것 같습니다
“뭐? 3주나 됐다고? 빨리 안으로 데리고 들어와.”
“아- 감사합니다, 박사님! 정말 감사합니다!”
그러자 진찰실 앞에서 대기하던 사람들이 너도나도 불만을 터트렸다.
“아니, 이런 경우가 어딨어요? 어렵게 예약해서 차례를 기다린 우리는 바보입니까?”
“맞아요! 돈을 적게 내는 것도 아니고, 받을 건 다 받아놓고서 이런 불공정한 일이 어딨습니까? 예약 순서대로 해야죠!”
고다르 박사가 걸음을 멈추고 돌아섰다.
“예약 같은 소리 하고 앉아 있네. 내 맘이야! 맘에 안 들면, 환불받고 다른 병원으로 가든지!”
박사의 표정에서 지독한 고집이 느껴졌다.
그 누구와도 타협하지 않을 것 같은 성격이었다.
그러자 거구의 흑인 남자 하나가 일어나 거세게 따졌다.
“아니, 보자 보자 하니까 도저히 못 참겠네! 그런 억지가 세상에 어딨어? 지금 장난해? 다른 병원 갈 수 있으면 우리가 여기에 왜 왔겠어? 며칠 전부터 배가 너무 아파서 힘들게 예약하고 한 시간 넘게 기다리고 있는···”
덜컹-
저벅- 저벅-
불만을 쏟아내던 흑인 남자가 쿠아레의 등장에 입을 꾹 다물었다.
“누구야? 누가 감히 박사님 말에 토를 달고 말썽을 피우는 거야!”
곰 같은 덩치만큼이나 육중한 그의 목소리가 복도를 쩌렁쩌렁 울렸다.
“이 병원에 처음 접수할 때 얘기 못 들었어? 여기선 고다르 박사님의 지시에 무조건 따라야 한다는 거? 방금 차례네 뭐네 개소리 지껄인 놈이 누구야? 당장 앞으로 나와봐! 어느 놈이야?”
2미터 가까운 키에 얼굴만 한 주먹을 휘두르며 사납게 고함치는 쿠아레.
항의하던 사람들 모두 시선을 피하기에 바빴다.
“프랑스에서 돈 벌어보려고 불법으로 넘어온 주제에 뭔 불만들이 이렇게 많아!
박사님이 치료해주지 않으면 너희가 어쩔 거야? 여기가 무슨 허가를 받고 운영되는 자선병원인 줄 알아? 언제 문 닫을지 모르는 병원이라고! 불법 병원! 남의 나라에 기어들어 온 너희들도 불법이고!
여기 문 닫으면 너희 같은 버러지들이 어디서 치료받을 건데? 고마운 줄 모르고 순서를 따지고 들어? 분수를 알아야지, 분수를!”
거칠게 불만을 터뜨리던 흑인 남자도 언제 그랬냐는 듯 쭈그리고 앉았다.
소란이 정리되자 고다르 박사가 아이의 아버지에게 재촉했다.
“지금 보고 있는 환자 끝나는 대로 바로 봐줄 테니까, 애 데리고 들어와 있어.”
“네, 네! 선생님!”
안도의 한숨을 내쉰 아이의 아버지가 박사를 따라 재빨리 진찰실로 들어갔다.
그때 쿠아레가 지라르에게 소리쳤다.
“야! 너도 빨리 따라 들어가! 박사님 말로는 언제 머리 뇌혈관이 터질지 모른다니까. 저 아이 끝나면 바로 너도 들어가서 진찰받아야 해! 아주 위험한 상황이라고 하시니까.”
그렇지 않아도 아이의 치료 모습이 너무나 궁금했던 지라르.
기다렸다는 듯이 벌떡 일어나 대답했다.
“그렇게 하겠소이다!”
“먼저 들어가서 얌전히 앉아 있어. 나는 화장실 갔다가 곧 다시 올 테니까.”
“알겠소. 정말 고맙소.”
지라르의 말투에 사람들의 시선이 쏠리자, 쿠아레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화장실로 향했다.
*
진찰실로 들어간 지라르의 눈이 반짝거렸다.
모든 것이 그저 놀랍고 신기하기만 했다.
‘저게 다 뭐람? 약인가?’
한쪽 벽면에는 여러 개의 찬장이 줄지어 놓여 있었고, 그 안에는 수천 개는 될 것 같은 병과 통, 각종 상자가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병이나 상자마다 복잡한 글자와 숫자, 기호들이 쓰여 있었지만, 17세기에서 막 넘어온 지라르로서는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방 한구석에 놓인 책상에서는 고다르 박사가 중년 남성을 진찰하고 있었다.
“술하고 담배 당장 끊지 않으면 죽을 거라고 몇 번이나 말했어?”
“죄송합니다. 그런데 그게 말처럼 쉽지 않네요.”
“숨을 크게 들이셔봐! 쇼메! 상의를 좀 더 올려.”
“네, 박사님.”
쇼메라는 젊은 남자가 박사를 보조했다.
‘보아하니 의사의 진료를 돕는 조수 같은데. 의사가 되기 위한 견습생 같은 건가?’
지라르 바로 옆에는 조금 전 소란의 주인공이던 아이가 진료를 기다리고 있었다.
“쿨럭- 쿨럭- 컥- 컥-”
아이는 아버지의 품에 안긴 채로 연신 기침을 해댔는데, 끙끙대며 코를 벌름거리는 것이 숨 쉬는 것도 힘겨워 보였다.
게다가 얼굴이나 목 아래의 여러 부위에서 눈에 띌 정도의 경련이 지속해서 일어났다.
모든 것이 로슈푸코 백작 아들의 증상과 꼭 닮아 있었다.
‘한쪽으로 누워 무릎을 가슴까지 올리려는 모습까지도 비슷해. 하지만, 얼굴색이나 신체 반응을 보면 모리스보다 훨씬 더 병이 진행된 상태야. 이렇게 악화된 환자를··· 정말 치료할 수 있단 말인가?’
만일 17세기 아이에게서 이 정도의 증상이 발현됐다면, 십중팔구 얼마 안 가 죽고 말 것이다.
지라르가 치료를 포기하고 도망친 것도 백작의 아들이 곧 죽을 것이란 확신이 들어서였다.
그런데 진찰실 앞에서 아이를 살펴보던 고다르 박사의 얼굴은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이었다.
‘병이 깊어져 죽을 게 확실해 보이는 아이를 저 의사는 대체 어떻게 치료하겠다는 거지?’
지라르는 금세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지, 아니야. 지금은 말이나 노새가 없이 마차가 움직이는 400년 뒤 미래 세상이잖아? 그렇다면 의술도 상상하지 못할 수준으로 발전돼 있을 게 분명한 일이야.’
지라르는 기대 가득한 표정으로 고다르 박사를 바라보았다.
그때 진료를 끝낸 박사가 아이의 아버지를 향해 손짓했다.
“이리로 와서 애를 눕혀봐.”
“아, 네, 네!”
아버지는 황급히 일어나 아들을 진찰용 침대 위에 조심스레 눕혔다.
뭔가를 귀에 꽂은 고다르 박사가 아이의 가슴에 동그란 물체를 대고 한참을 들었고, 입안과 몸 여기저기를 세심히 살폈다.
17세기에서도 몸에 귀를 대고 심장이나 내장 기관의 소리 들으며 병세의 정도를 체크하곤 했다.
‘저런 검사 방식은 우리와 비슷하네. 그런데, 저 장치를 사용하면 훨씬 더 잘 들리는 건가?’
청진기를 뺀 고다르 박사는 쇼메에게 뭔가 지시를 내렸다.
쇼메는 아이를 데리고 옆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얼마 뒤, 쇼메가 시커멓고 번쩍이는 종이 같은 것을 들고 와서 박사에게 전달했다.
그것을 받아 살펴보던 박사가 아이의 아버지를 나무랐다.
“찍어보니 예상대로 세균성 폐렴이구먼. 아이가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아버지라는 사람이 도대체 뭐 했나?”
“그냥 단순한 감기라고만 여겼습니다··· 약을 먹이고 열을 떨어뜨리면 금방 나을 거로 생각했는데···.”
박사는 고개를 저었다.
“폐렴 초기에 열이 난다고 무턱대고 해열제를 복용하면 폐렴인지도 모르고 지나칠 수 있어. 소아폐렴은 그래서 더 위험한 거고. 조심했어야지.”
박사의 말에 집중하고 있던 지라르는 이상한 용어에 귀가 솔깃해졌다.
‘세균성 폐렴··· 소아폐렴? 그럼 세균이란 것이 어린아이의 폐에 어떤 병을 만들어 냈다는 얘기인가···?’
세균이나 폐렴 등에 대한 의학적 지식이 전혀 없는 지라르였지만, 타고난 눈치로 금세 이들의 대화를 이해하고 있었다.
체온계를 확인한 고다르 박사가 설명을 이었다.
“열도 너무 높아. 그동안 먹으면 다 토해서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있었지?”
“네, 네. 그렇습니다!”
박사는 근육 경련이 일어나고 있는 부위를 손으로 가리켰다.
“보아하니 애가 폐렴에 걸리면서 염증반응 때문에 저마그네슘혈증도 심하게 온 것 같구만.”
“네? 저···저마그네슘··· 그게 뭐지요?”
“폐렴 때문에 탈수 현상이 생겼고, 그 때문에 몸 안에 꼭 필요한 마그네슘이 많이 부족해졌다는 얘기야. 그러니 여기저기 심한 경련이 일어나는 거고.”
“아··· 네.”
박사의 설명에 집중하다가 자기도 모르게 아이의 곁에까지 다가온 자크 지라르.
진찰실의 분위기가 다소 어수선하다 보니 가까이 온 그를 제지하는 사람은 없었다.
아이 떨림을 유심히 살펴보던 지라르의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몸에 일어나고 있는 저 경련이 마그네슘인가 뭔가가 부족해서 생긴 증상이란 건가? 그렇다면 백작의 아들 모리스도 세균성 폐렴이란 병이 생긴 후에 마그인가 뭔가 하는 것이 부족해 신체 여기저기가 떨리고 경련이 일어났을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인데···.’
고다르 박사가 쇼메에게 지시했다.
“쇼메! 가서 항생제 좀 가져와.”
“어떤···?”
“암피실린(ampicillin)!”
“아, 네!”
쇼메는 수많은 약병이 있는 유리 찬장 쪽으로 급히 걸어갔다.
그제야 지라르를 발견한 박사가 의아한 눈길로 쳐다봤지만, 쇼메가 약병을 건네자 곧 치료에 집중했다.
물 같은 맑은 액체가 들어있는 작고 단단한 병.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지라르는 박사의 손에 들린 병을 내려다보았다.
‘저게 뭐지? 무슨 항생제라고 한 것 같은데? 저걸로 죽을 병을 살릴 수도 있다는 말인가? 뭐로 만든 거지? 수은인가? 아니면··· 비소를 물에 섞은 거?’
고다르 박사는 저 약 때문에 치료에 자신 있어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눈으로만 봐서는 저 액체의 성분이 무엇인지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지라르로서는 17세기 치료에 많이 쓰이던 수은이나 비소를 떠올리는 게 전부였다.
박사는 익숙한 솜씨로 약병에서 항생제의 용액을 주사기로 뽑더니, 묶어 놓은 아이의 팔을 손끝으로 더듬으며 뭔가를 찾았다.
“아이한테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라고 하게.”
고다르 박사의 말에 아이의 아버지는 외국어로 뭔가를 말했고, 아이는 힘겹게 주먹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정맥 보이지?”
박사가 쇼메에게 묻자, 그가 머뭇거리며 답했다.
“아··· 네···. 보이는 것 같습니다.”
“어디야? 손으로 짚어 봐. 어디다 주사를 꽂을 거야?”
쇼메는 아이의 팔뚝 위를 손끝으로 살짝 더듬더니, 자신 없는 목소리로 한 곳을 가리켰다.
“···여기.”
이내 박사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멍청한 놈! 거기가 무슨 정맥이야? 모르겠으면 손등부터 촉진하면서 타고 올라가 보라고 했잖아! 아이나 노인들은 특히 잘 안 잡힌다고 내가 몇 번을 얘기했어!”
혼쭐이 난 쇼메는 손가락 두 개를 가지고 아이의 손등부터 무언가를 찾듯이 열심히 훑으며 올라갔다.
이 모습을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는 지라르.
‘약물을 저 가느다란 바늘을 통해 몸 안에 주입하려는 거구나. 그러려면 바늘이 정맥이란 곳에 들어가야 한다는 거고. 흠··· 그럼 정맥이란 건 필시 피가 이동하는 혈관을 얘기하는 거겠네.’
그동안 셀 수 없이 많은 환자를 거치면서 임상경험만큼은 현대 의사 못지않은 지라르였다.
이론적 지식은 형편없었지만, 수많은 환자의 몸을 만지고, 절단하고, 해체하면서 온몸에 흐르는 혈관 자리를 경험적으로 체득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혈관이 어느 위치에 있으며 어디에 숨어 있는지, 또 어디를 눌러야 효과적인 지혈이 되는지에 대해 많은 경험적 지식을 가지고 있는 그였다.
여기에다 뛰어난 관찰력 덕분에 아주 미세한 신체의 움직임도 놓치지 않았다.
지라르의 머릿속에는 이미 아이의 팔 등을 타고 흐르는 미세한 혈관이 그려지는 듯했다.
‘······.’
쇼메가 진땀을 흘리며 아이의 팔뚝 바깥쪽을 손가락으로 훑어나갔다.
하지만, 혈관이 지나는 길을 제대로 찾지 못해 엉뚱한 곳만 계속해서 헤맸다.
못마땅한 표정의 고다르 박사가 신경질적으로 그의 손을 걷어냈다.
탁-
“손 저리 치워! 한심한 놈 같으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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