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화 롱빌의 계획
검은 망토를 걸치고 지팡이를 짚은 채 당당히 서 있는 그랑세 공작.
멀쩡한 그의 모습에 롱빌 보좌판사는 물론, 집안의 하인들까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놈들! 여기가 감히 어디라고 소란을 피우는 것이냐! 내가 병석에 누워있다고 우리 가문을 무시하고, 이처럼 무도한 짓을 벌이다니! 내 당장 파리 고등법원 법원장을 불러들여 그 죄를 엄히 물을 것이다!”
조금은 야윈 모습이었지만, 이 시대의 공작으로서 위엄은 그대로 살아있었다.
“아아- 공작님!”
“정말 나으셨군요!”
“으흑- 공작님!”
공작 집안의 하인들이 일제히 바닥에 넙죽 엎드려 감격에 겨워했다.
병세가 급격히 호전되고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그동안 침실에만 있어 얼마나 나아졌는지 그들도 알지 못했다.
롱빌 판사가 함께 온 시립병원 의사에게 급히 귓속말을 건넸다.
“공작님 맞지 않소?”
“네, 확실히 맞습니다.”
그랑세 공작과 개인적 친분은 없었지만, 롱빌 보좌판사와 시립병원 의사는 그의 얼굴을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런데 공작을 돌본 의사마다 여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그랬는데? 너무 괜찮은 모습 아니오?”
“판사님, 괜찮은 정도가 아닙니다. 혈색을 보아하니 완전히 병을 털고 일어나신 것 같은데요?”
그랑세 공작이 몇 발짝 앞으로 걸어 나오자, 집사가 달려가 부축하려 했다.
“공작님!”
“됐네! 자네는 그 자리에 가만있게! 모두 다가오지 말고 멀찌감치 떨어져 있어. 내 몸에 있는 병을 누구한테도 옮기고 싶지 않으니.”
공작의 말에 롱빌 보좌판사의 눈빛이 번뜩였다.
‘병을 옮기고 싶지 않다니? 그럼 전염병이란 걸··· 공작은 이미 알고 있다는 말이잖아?’
전염병 일 수 있다는 사실을 공작 스스로 알았을 리는 없다.
주치의였던 몽페르사 교수조차 전염병 가능성을 전혀 모르고 있었으니까.
‘그렇다면, 전염병임을 알려준 사람은···?’
롱빌 보좌판사는 지라르를 슬쩍 쳐다보았다.
현재로서는 그걸 알려줄 사람은 저 지라르라는 자밖에 없었다.
하지만 롱빌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저택 주변에 잠복시켜 두었던 경관들에 따르면, 지라르는 공작의 집에서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았다고 했다.
‘의대 교수들이 저 사람의 치료법은 말도 안 되는 것이라며 무자격 돌팔이로 확신했었는데?’
돌팔이 사기꾼은 말 그대로 가짜 의사라 의학적 지식이 부족할 수밖에 없다.
그런 자가 무서운 전염병을 치료하겠다고 그렇게 오래 붙어 있을 리가 없었다.
무엇보다 무자격 돌팔이가 전염병 여부를 알아냈다는 것 자체가 모순처럼 느껴졌다.
‘뭔가 뒤죽박죽이야. 주변에 공작님과 비슷한 병이 퍼지고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나와 시립병원 의사뿐이었어.
거기다 코와 입을 가리지 않고 치료를 하고 있었던 것을 보면, 지라르라는 자는 전염병인 것을 모르고 있었던 것 같은데···.
그런데 왜 공작님은 전염 여부를 걱정하고 있는 거지? 누구한테 들어서? 어, 잠깐··· 저게 뭐야?’
롱빌 보좌판사의 눈에 지라르와 공작부인의 손을 덮고 있는 얇은 장갑이 보였다.
‘어라? 장갑을 착용하고 있었잖아? 그럼 전염병이란 걸 알고서 대비하고 있었다는 말이 되는 건가? 그런데 왜 입과 코는 가리지 않고 장갑만 착용하고 있는 거지?
무엇보다 공기 중에 떠도는 전염병을 태우기 위한 연기도 피우지 않았어. 설마 전염병이 공기 중으로 전파된다는 사실을 모르는 건가?’
17세기에는 의료용 마스크가 없었다. 다만 전염병은 공기 중으로 확산된다고 보았기 때문에, 강한 향을 잔뜩 묻힌 천으로 코와 입을 막아 전염병이 흡입되는 걸 막으려고 했다.
롱빌 보좌판사는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자신 옆에 오지 못하게 하는 그랑세 공작이나 장갑을 끼고 있는 모습, 철저히 침실에서 격리하고 있었던 상황 등은 분명 일상적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전염병임을 이미 간파하고 일정한 방역 거리를 유지하면서 치료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였다.
다시 그랑세 공작의 추상같은 경고가 이어졌다.
“지라르 선생은 내 목숨을 살려준 은인이시다! 그 누구도 내 집에서 선생을 체포해 갈 수 없다! 내 몸이 낫는 대로 고등법원 네놈들이 저지른 일을 끝까지 추궁해 그 죄를 모두 물을 것이니 각오하라!"
그랑세 공작은 비록 ‘대귀족(Pair de France)’은 아니었지만, 그다음 가는 권세를 가진 혈통 귀족 가문.
17세기 초중반 프랑스 공작의 지위와 파워는 상상을 초월했다.
파리 고등법원의 수석 법원장이라고 해도 법복귀족에 불과하다 보니, 함부로 공작 집안을 수색하거나 집안사람을 체포하기가 어려웠다.
물론 법을 내세워 억지로 할 수는 있겠지만, 그 이후에 벌어질 후폭풍을 감당하기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정신을 차린 롱빌 판사는 돌아가는 상황을 재빨리 정리했다.
‘큰일이다. 지금 지라르가 문제가 아니야. 그랑세 공작이 멀쩡하게 살아났고, 만일 의대 교수들의 말과는 달리 지라르라는 사람이 무자격자가 아니라 정말 길드에 가입된 외과의사라는 것이 밝혀지면 큰 낭패가 아닐 수 없어.
그랑세 공작은 제대로 조사도 하지 않고 자기 집을 함부로 쳐들어왔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면, 결코 우리를 용서하지 않을 거야. 일단은 이 상황을 벗어나고 봐야 한다.’
롱빌 보좌판사는 그랑세 공작에게 공손히 머리 숙여 용서를 구했다.
“공작님, 물의를 일으켜 정말 죄송합니다. 하지만 모두가 공작님의 안위를 걱정하고 있는 와중에 뭔가 단단히 착오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무슨 착오가 있었다는 것이냐?”
“공작님의 주치의였던 몽페르사 교수가 공작님이 무자격 돌팔이에 속아 목숨이 경각에 달렸다는 말에 저는 앞뒤 잴 겨를이 없었습니다.”
“······.”
“공작님도 잘 아시듯이, 백작 가의 아가씨가 돌팔이의 손에 처참한 죽임을 당한 이후, 우리 고등법원에서는 그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많은 신경을 써왔습니다.
그런데 고귀하신 그랑세 공작님께서 돌팔이에 걸려 죽음을 앞두고 있다는 주치의의 고발에 한시바삐 나서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공작님의 안위를 지키는 것은 곧 프랑스의 귀족과 조국의 근간을 튼튼히 지키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오로지 공작님을 살려야 한다는 마음에 제 독단으로 결정한 일이니 부디 용서하십시오!”
“독단? 그럼 체포 명령서도 없이 지라르 선생을 체포하려고 했던 것이더냐?”
“죄송합니다. 몽페르사 교수와 의대 교수들의 말만 믿고, 오로지 공작님을 빨리 살려야 한다는 일념에 이렇게 명령서도 없이 달려왔습니다.”
“······.”
지라르가 흥분한 그랑세 공작을 다독였다.
“공작님, 그만 노여움을 푸시지요. 모든 것이 저 판사님 말대로 오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입니다. 첫 치료제를 넣는 날 몽페르사 교수라는 분이 제게 정말 화를 많이 냈습니다.
아마도 제가 돌팔이로 보여 고발을 했고, 여기 계신 분들은 그저 공작님께 해가 있을까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출동하지 않았나 합니다. 그냥 없던 일로 하시지요?”
“흠-. 뭐, 지라르 선생이 그렇게 이해를 해주신다면야.”
지라르의 한마디에 언제 그랬냐는 듯이 바로 누그러지는 그랑세 공작.
롱빌 판사와 경관들이 서로 눈빛을 주고받으며 놀라워했다.
“공작부인, 공작님을 모시고 어서 침실로 가십시오. 공작님은 절대 안정을 취하셔야 합니다.”
“네, 알겠습니다.”
공작 부부는 지라르의 지시를 군말 없이 따랐다.
그랑세 공작이 침실로 돌아간 후, 지라르가 롱빌 보좌판사에게 물었다.
“판사님? 그럼 저에 대한 오해가 모두 풀렸다는 말씀이신가요?”
“아, 네. 그렇습니다. 며칠 뒤에 고등법원으로 오셔서 몇 가지 확인만 해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공작님 댁으로 연락을 드릴 테니, 연락받으시면 법원으로 잠깐만 들러주십시오.”
“네, 그러죠.”
◈ 파리 고등법원, 빌라르 판사실.
“그게 사실이야? 그랑세 공작님이 정말 자리에서 일어나셨다고?”
빌라르 판사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턱을 치켜들었다.
“네. 제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두 발로 직접 걸어 나오셨고, 많이 회복하신 상태셨습니다.”
빌라르 판사는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허-. 그럴 리가 있나? 절대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할 거라고 다들 그랬는데. 지난번에 직접 치료했다던 의대 교수도 그랬잖나? 여명이 며칠 남지 않았다고.”
“네. 그래서 저도 멀쩡히 걸어 나오는 공작님 모습에 기절하는 줄 알았습니다.”
난감한 표정의 빌라르 판사.
“그럼 공작님이 수석 법원장님 명의의 체포 명령서를 들고 온 것도 봤겠구먼. 어이구, 이거 큰일 난 거 아니야?”
“그건 아닙니다.”
“자네가 들고 갔잖아?”
“그게 말입니다. 건강해진 그랑세 공작님의 모습을 보니까, 수석 법원장 명의의 체포 명령서가 향후 큰 화근이 될 수 있겠다 싶어서······”
모든 사정을 전해 들은 빌라르 판사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후- 그래, 역시 자네 답구만. 아주 잘 대처했어. 그런 줄도 모르고 그 지라르란 자를 체포해서 데려가기라도 했으면, 수석 법원장님이 아주 큰 곤란을 겪으실 뻔했어. 우리도 마찬가지고 말이야.”
임기가 끝나면 국왕의 국새를 관리하는 ‘국새상서’자리를 노리는 수석 법원장이었다.
‘국새상서’는 ‘대상서’와 함께 오래전부터 파리 고등법원의 수석 법원장이 올라갈 수 있는 가장 영예로운 직책.
이런 시기에 쓸데없는 잡음은 최대한 피해야 한다.
“네. 참 다행입니다. 그런데 판사님···.”
“?”
선뜻 말을 못 하고 망설이는 롱빌 보좌판사.
“뭔데 말을 하다 말아?”
“확실한 건 아니라서 좀 더 알아보고 말씀드리려고 했는데요, 그··· 지라르란 외과의사 말입니다.”
“응. 그자가 왜?”
“아무리 생각해도 그자는 그랑세 공작님의 병이 전염병인 걸 알고서 치료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해서요.”
“뭐? 그게 정말이야?”
원인도 모른 채 점점 늘어나는 환자에 고심하고 있던 빌라르 판사였다.
추세를 보면 전염병이 맞는 것 같은데, 앞으로 이 상황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막막하던 차였다.
그런데 그런 골치 아픈 전염병을 고치고 있었다고 하니, 관심이 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럼 지라르라는 자가 공작님의 병이 전염병이란 걸 이미 파악하고 그 병을 고치기까지 했다는 그런 얘기인 건가?”
“네, 맞습니다.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그렇습니다.”
“그런데 의대 교수들은 그자가 완전히 돌팔이라고 하지 않았나?”
“네, 저도 그런 줄 알고 들어간 건데, 막상 들어가서 살펴보니 교수들 말과는 아주 달랐습니다. 공작님 댁에 분명 전염병을 막기 위한 여러 가지 방역을 하고 있었고, 가장 중요한 격리와 거리두기도 아주 철저히 지키고 있었습니다. 집안 하인들도 공작님이 나은 모습을 오늘 처음 봤을 정도로 말이죠.”
“그래?”
“그리고 뭔지는 모르겠지만 어떤 약물을 써서 공작님을 극적으로 살린 것도 사실인 것 같았습니다.”
“그럼 그자에게 이 전염병에 대한 치료제가 있다는 말이잖아?”
“네, 그런 것 같습니다.”
롱빌 보좌판사는 지라르를 체포하기 위해 저택 대기실에서 공작의 집사와 실랑이를 벌였다.
그때 집사는 분명 자크 지라르 선생이 구해온 약으로 공작이 상당한 차도를 보이고 있다고 전했었다.
그 말을 들었을 때는 체포를 막아서기 위한 거짓말을 하는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조금 뒤 멀쩡히 걸어 나와 호통을 치는 공작을 보면서 집사의 말이 사실이라는 걸 깨달았다.
롱빌이 전염병 상황판을 쳐다보며 말했다.
“지금 전염병의 상황이 하루가 다르게 나빠지고 있습니다. 이젠 시립병원의 의사들도 점점 전염성이 강해진다고 인정하는 분위기고요.
하지만 누구 하나 나서려는 사람이 없고, 다들 쉬쉬하고 있습니다. 이러다 일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면 우리 고등법원에는 너무 큰 타격이지 않겠습니까?”
구교도와 신교도 간의 내전부터 시작해서 각 지역에서 세금 징수와 관련해 일어나는 시민 반란이 프랑스 내에서 끊이지 않았다. 여기에 연이은 흉작으로 먹을 식량이 모자라 민심은 더욱 흉흉했다.
이런 때에 전염병까지 돌면 민중들이 어떻게 돌변할지 모른다.
그리고 그 책임은 서민들의 삶을 규율하는 고등법원에 그대로 전가될 것이다.
“자넨 뭐 좋은 대책이라도 있나?”
“일단 흑사병처럼 대규모로 퍼지는 형태는 아닌 것 같으니, 이 전염병을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의외로 쉽게 막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턱을 괴고 있던 빌라르 판사가 롱빌 보좌판사를 올려다봤다.
“그래서? 그랑세 공작님 댁에 있는 그 의사를 써먹어 보자는 말인가?”
“맞습니다. 물론 아직 완전히 신뢰하는 건 아닙니다. 다만 직접 만나보니 제가 생각했던 것과는 많이 다르고, 만약 그가 정말 그런 능력이 있다면 적극적으로 이용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입니다. 정말 전염병이라면 시간이 없으니까요.”
빌라르 판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쎄··· 의대 교수들이 다 돌팔이라고 그렇게 한목소리를 내는 사람인데 괜찮겠어? 자네나 나나 의학을 공부했던 것도 아니고 말이야.”
“어차피 전염병은 의대 교수들도 제대로 몰라서 막지 못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일단 지라르의 길드 가입 여부를 확인되는 대로 그 의대 교수들과 자크 지라르를 함께 모이게 해서 정확히 살펴볼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진짜 돌팔이인지 아니면 외과의이지만 실제로 전염병을 막고, 치료해낼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를요.”
몽페르사 교수와 트렘블 학장 등은 이미 고등법원에 자크 지라르에 대한 고발 청원을 넣어 둔 상태였다.
이에 롱빌 보좌판사는 고발 청원인인 교수들과 자크 지라르가 법원에 출석하도록 통지를 보낼 예정이었다.
“그 지라르라는 자와 의대 교수들을 만나게 해서 대처에 적합한 의사인지 가려본다?”
“네. 만약 자크 지라르란 자가 돌팔이가 아니고 이 병을 막을 만한 능력을 확실히 보인다면, 법원장님께 보고하고 전염병 박멸에 그 사람의 힘을 적극적으로 이용해보는 겁니다.”
롱빌 보좌판사의 계획에 빌라르 판사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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