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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가린 님의 서재입니다.

소도외전

웹소설 > 자유연재 > 무협

용가린
작품등록일 :
2018.11.28 15:30
최근연재일 :
2023.05.10 2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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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1.12 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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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쪽

장팔사모의 사신 지옥장승

DUMMY

소도를 다녀온 날의 저녁식사는 정갈한 나물 반찬 위주로 차려져 있었다. 내일 한준왕을 알현하려면 가볍게 먹고 일찍 침소에 들어야 아침에 일어날 때 가볍게 기상할 수 있으리란 흠차대신의 지시가 식솔들에게 전달되었기 때문이었다.

“하선낭자, 앞으로 어디서 어떻게 지낼지 깊이 생각을 해 보셨는지요?”

흠차대신 경욱이 하선을 지그시 바라보며 물었다. 하선은 잠시 식사를 멈추고 조용하게 얘기를 시작했다. 부끄러운지 양 볼이 조금씩 물들기 시작했다.


“사마철 아저씨를 따라갔으면 합니다. 이곳에서 지내는 것도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제가 지금껏 배운 것도 일천하고 세상 이치도 잘 몰라서 혹시 큰 실수나 하지 않을까 걱정이 큽니다. 그래서 차라리 저를 친딸처럼 보살펴 주시는 사마철 아저씨께 배울 것은 배우고, 익힐 것은 연습하면서 살아보고 싶습니다. 또 혹시라도 아저씨 곁에 있으면서 도와드릴 일이 있다면 제 정성을 다해서 도와드리고 싶습니다.”

주변의 눈치를 보느라 고개도 잘 들지 못했지만 할 말은 다 한 하선을 보면서 사마철이 호방하게 말했다.

“하하, 그래 잘 생각했다. 이제부터 내가 너를 잘 보살펴 주마, 이제부터 내가 네 숙부의 역할을 하도록 하마. 앞으로 나를 숙부님이라고 편하게 부르도록 해라.”

하선이 사마철의 얼굴을 보더니 손으로 입을 가리며 얌전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떡였다. 이윽고 다른 사람들의 얼굴도 잠시 스치듯 둘러보더니 길태곤의 얼굴에 와서는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혔고 그것을 숨기려는 듯 얼굴을 손으로 가렸다.

“하선낭자의 생각에 대하여 백번 수긍하니 그리 하시도록 하시오.”

탁왕자가 웃으며 결론을 내주었다. 흠차대신 경욱도 고개를 끄떡였다.


이미 탁왕자 일행과 우연치 않게 많은 일을 공유하고 함께 동행하면서 이번 일의 중요성에 대해 많은 부분을 공감하고 있는 하선이었다. 또한, 어머님의 부재 이후 천애고아(天涯孤兒)가 된 자신의 상황도 잘 아는 소저였다. 아마도 엄마를 닮아 마음씨며 굳은 대의가 남다른 면모를 보이는 당찬 여자였다. 배운 것이 비록 많지는 않았으나 행실이 단정했고 예쁜 용모를 가진데다 상황 판단도 재빨랐기에 어디를 가도 한 몫은 충분히 할 수 있는 재원이었다. 함께 식사하던 일행들도 일제히 동의의 눈빛을 보내며 소도 입성에 동참하는 것을 응원해주었다. 모두의 얼굴에 미소가 번지는 저녁식사 자리였다.


“왕자님, 급한 전갈이 왔사옵니다.”

저녁식사 후 쉬고 있던 탁왕자에게 흠차대신 경욱이 급한 보고를 했다.

“변한의 변두리 지역에 위치한 악노국의 소도가 습격을 당해 그곳에 있던 천군이 쫓겨나고 천궁을 침입한 자가 그곳을 멋대로 관리하고 있다 합니다. 신성한 소도내의 지역이라 그곳에 파견된 천군 소속 병졸들이 여럿 있었으나 침입자의 강한 무공에 속수무책이었다고 합니다. 그들 외에는 관아에서 보낼 수 있는 병졸들의 여력이 크게 없는지라 현재로서는 악노국 자체적으로는 응징이 불가하다고 하옵니다.”

“그런 상황이라면, 변한 지역의 정예병들 중에서 무술이 뛰어난 병사들을 선별하여 평복을 입혀 소도로 보내 적정하게 응징하면 되지 않습니까?”

탁왕자는 소도 제도를 시행한 초기인지라 규모가 작은 소국들의 소도에서 몇 차례 유사한 사건이 발생한 사례가 있었음을 상기했다. 흠차대신 역시 자신보다 훨씬 많이 알고 있을 터인데 새삼스럽게 이 사건의 처리 의견을 자신에게 물어보는 흠차대신을 의아하게 바라보며 반문했다.


“다른 때 같으면 제가 그냥 왕자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처리하도록 하였겠지만 이번 건은 조금 특별한 듯하여 의향을 여쭙고자 보고를 드리는 것입니다. 악노국 소도를 장악한 자의 무공이 보통 고강한 게 아니라고 하옵니다. 해서, 왕자님께서 그를 직접 보시고 실력을 확인하신 후, 그를 이번 일에 함께 동참하게 하실지를 판단했으면 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그 말에 탁왕자는 비로소 관심을 보이며 정좌한 후 진지하게 듣고자 했다.

“제가 들은 바로는 그가 단지 소도에 침입했다고 해서 죄가 되는 것도 아닌 것이고, 천군과 싸웠다는 얘기 역시 정확히 전달되지 않은 것으로 볼 때 그 원인과 과정에 무슨 오해가 있을 수도 있다고 판단합니다. 예를 들어... 혹여, 천군이 문제가 있던 사람이라면 다르게 생각해야 할 것 같아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천궁을 접수한 자가 혹시 우리와 뜻을 함께할 수 있는 대의를 가슴에 품은 고수일지도 모른다는 소견이 들어서 드리는 말씀이오니 이점 참작하여 주시옵소서. 일개 잡졸이나 도적 같은 놈이라면 상대도 하지 말고 돌아오시옵소서,”

흠차대신 경욱은 말을 다 한 후 탁왕자가 생각을 할 시간을 주고자 돌아서서 나가려 했다. 피곤한 왕자를 배려하려는 의도였다.


“아, 그래요? 듣던 중 반가운 소리입니다. 천하에 우리가 미처 생각지도 못하는 실력을 가진 고수들이 있기나 한 건지 조차 회의적이었던 내게 세상엔 듣도 보도 못한 고수가 얼마든지 있음을 깨우쳐준 여행을 다녀온 건 행복한 기억입니다. 어쩌면 이번 여행의 말미를 장식하는, 준비되지 않았던 마지막 인물일지도 모르겠군요. 제게 추가로 주시는 선물로 생각하고 한 번 더 떠나 볼까요. 하하하”

탁왕자는 호탕하게 웃으며 불쑥 일어나서 옷을 주섬주섬 챙기기 시작했다.

“모든 사람들을 다 데려갈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길대협, 사마대협, 조대협만 같이 가도록 하면 될 것 같습니다. 흠차대신께서는 남아 계신 분들과 소도에 가서 해야 할 일들에 대해 충분히 검토하고 계셨으면 합니다. 특히, 부천군이 될 아라방과 제천의식(祭天儀式)에 대해 많은 준비를 하도록 했으면 합니다. 그는 천문현상과 역사의 흐름에 대해 누구보다 박식한 사람이니 그의 의견을 경청해 주십시오.”

“그리 조치하도록 하겠습니다. 내일 있을 왕궁의 알현도 연기하도록 해 놓겠습니다.”

흠차대신 경욱은 빠르게 방문을 나와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변한의 악노국은 출중하게 높은 산은 없었으나 여러 군데 장엄한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쳐진 듯 조화롭게 버티고 있는 곳이었다.

그 산들 사이로 평화롭게 흐르는 강줄기가 몇 갈래로 굽이치는 경관은 이국적일 만큼 빼어난 풍광이었다.

강줄기를 따라 흰 모래사장과 울창한 송림이 절경을 이루는 강변에서는 가끔씩 얼굴을 내미는 나룻배가 그림자를 내릴 때가 되면 그야말로 한 폭의 그림이 되는 곳이었다.

바다와 맞닿은 강의 폭이 넓어서 예로부터 개설되어 많은 장사치들이 붐비는 포구는 백여 척의 고깃배들이 정박할 정도로 컸다. 자연히 문물의 교류도 많아서 많은 사람들의 생활수준이 높았고 물자를 교역하는 외국인도 가끔씩 눈에 보였다. 외지인들도 제법 있었는데 색목인들이 주를 이루었지만 간혹 ¹ 곤륜노(崑崙奴)로 보이는 사람들도 드문드문 왕래하고 있었다.


소도는 악노국에서 가장 높은 백소산의 북쪽 준봉(峻峯)으로 가는 진입로를 경계로 설정되어 있었다. 천궁은 백소산의 정상인 금오봉으로 가는 중턱에 제법 큰 규모로 세워져 있었는데 소도의 경계로 멀었고 그만큼 소도의 면적이 넓다는 반증이었다.

넓은 관로가 개설된 출입로 주변으로 군데군데 인가가 있었는데 대부분 장사치들의 가게였다. 신성한 제사를 지내는 소도 옆에 있기에는 너무 세속적인 풍경이었다.

일상의 경계를 끊고 제사를 지내는 신성한 제단으로서의 소도라기보다는 세속과 연결되는 끈 같은 느낌이 드는 곳이었다.

삼한에 설치된 대부분의 소도를 출입하는 사람들은 통상 세파에 시달려 소도에서의 새 삶을 살기 위해 속세에서의 모든 인연을 끊고 자발적으로 들어가는 특별한 경우 외에는 대부분 큰 죄를 지은 죄인이 처벌을 면하거나 혹은 자신의 결백을 인정받지 못한 현재의 억울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하여 부득이 도망하여 새로운 삶을 살기를 원하는 곳이었다. 대부분 깊은 산중에 소재하는 경우가 그것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 악노국의 소도는 크기와 위치만을 놓고 본다면 지극히 이례적인 곳에 기형적으로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


-그곳의 천군이 백성들에 의해 선출된 것은 맞습니다만, 그것이 자발적인 백성들의 의사에 의한 투표의 결과가 아니고 천군으로 선출된 자의 강압에 의하여 이루어졌다는 소문이 많이 돌고 있다고 하옵니다. 또한 천군의 가족과 친인척들이 대거 천궁에서 일을 보는데 중요 요직을 독점하고서 소도 내에서 여러 혜택들을 독점하고 있다고 하옵니다. 그 사례로 소도에 들어오는 자들에 대하여는 죄인인지의 여부를 묻지도 않고 무조건 소도에 소속된 노예로 삼아 농사 등 잡일에 부역토록 하고 있으며, 제사를 지내는데 소요되는 비용이나 물자 등을 나라에서 공급받으면 꼭 필요한 양만 남기고 나머지는 마을에 있는 그의 집안에 비축한 후 이를 저잣거리에 되팔아 막대한 재산을 비축하고 있다 합니다. 그 결과 그의 집안에 돈을 빌린 자들이 강제로 농지를 빼앗긴 경우가 허다한 것은 물론이고 그의 눈에 잘못 보여 낭패를 본 사람도 부지기수라고 합니다. 이 점 감안하여 살펴보셔야 할 것입니다.

흠차대신 경욱 배상-


이곳에 도착하기 전 탁왕자에게 보내져 온 흠차대신 경욱의 전갈이었다. 그는 자신이 보낸 간자들에 의해 제공된 여러 정보들을 취합하여 이번 사건이 이곳 악노국 천군의 부정에서 시작된 것으로 짐작하고 있었다.

천군이 집에서 부리는 권솔들이나 소도에 배치한 무사들의 수가 제법 많았음을 감안한다면 애초부터 외부의 힘에 의해 소도를 빼앗기는 일은 생길수가 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악노국의 신지로부터 파견 받은 경비 군졸들도 있으니 그 수를 합하면 가히 백여 명은 족히 넘을 것이었다. 거느리는 무사들이나 군졸들 모두 젊고 한가닥하는 무공을 가진 장정들이었을 텐데 불과 한 명의 침입자에게 무릎을 꿇었다는 게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대부분의 경비요원들이 항거불능의 상태에 있지 않았다면 결론은 한 가지뿐이었다. 침입자가 이들 모두의 위력을 상쇄할 정도로 절정의 무공을 펼친 고수일 경우라야만 이해가 되는 상황이었다. 흠차대신이 급하게 탁왕자를 찾았던 이유이기도 했고, 또 한 명의 절정 고수를 찾았다는 확신이었다.


“우리 마을 소도의 천군이 글쎄, 분에 넘치는 욕심을 부리다가 결국엔 그 죄갚음을 하는 모양이구려.”

“마을 사람들을 윽박질러 천군으로 선출되더니 무슨 왕이라도 된 양 사람들을 괴롭히더니 잘 되었구먼, 이번 기회에 진짜 천군 역할을 잘할 사람을 새로운 천군으로 뽑아야 하지 않는가 말이야.”

“천군을 쫓아낸 그 양반이 무공이 그리 대단하다면서요?”

“생김새도 특이하지만 자기 일도 아닌데 다른 사람의 억울한 일에 저리도 성의를 가지고 일을 봐준다는 것이 어찌 생각해보면 요즘 같이 자기 한 몸 건사하기 바쁜 시대에 참으로 보기 어려운 장면 같구려, 그 양반이야말로 진정한 협객 아닌가 생각하오... 자자, 심각한 얘기는 이쯤까지 하고 한 잔씩 하면서 즐거운 얘기나 하십시다.”


탁왕자 일행은 마을의 객잔 옆좌석에서 나누는 얘기를 들으며 식사를 하고 있었다. 과연 흠차대신의 예상에서 어긋나지 않는 현실이 그들의 입을 통해서 전개되고 있었다.

“생김새가 특이하다니 누군지 더 궁금하군, 흠... 빨리 보고 싶네. 허허.”

조동일이 계면쩍게 웃었다. 손님이 많아서 늦게 나온 음식들로 해서 식사 자리가 길어지자 그는 옆좌석에서 대화하던 일행에게 넌지시 물었다.

“듣자하니 천군을 쫓아낸 협객의 무술 실력이 대단한가 봅니다?”

갑작스레 처음 본 사람에게 질문을 받자 그들은 일순 당황해했다. 그러나 말하는 사람이 나이도 제법 들어 보이는 데다 덩치도 작고 병장기도 보이지 않아 무장한 것 같지도 않은 것을 보고는 안심하는 듯했다. 아마, 길태곤이나 사마철이 물어보았으면 많이 당황했을 것이다.

“이곳의 천군은 소도는 물론이고 마을까지 영향력을 행사하는 무뢰한이었어요. 이 마을에 있는 자신의 집 주변 논밭을 헐값에 계속 사들이는 과정에서 한 사람이 대대로 살아온 집과 논밭을 포기할 수 없다고 하자 수하들을 시켜 논밭을 강제로 빼앗았지요. 그래서 참다못한 그 사람이 관아에 이를 신고하면서 억울함을 호소했지요. 그것을 안 천군은 즉시 소도로 들어가 나오지 않았지요. 그래서 그 일이 일단락되는가 싶었는데, 어느 비바람 치던 날 밤에 힘 꽤나 쓴다는 아랫것들을 시켜서 그 집을 풍비박산 내어 버렸습니다. 그때 그 집에서 어른들은 다 맞아죽고 그 어미가 이불안에 숨겨놓아 홀로 살아남은 사내아이가 사흘 밤낮을 아무것도 먹지 않고 울기만 했다고 합니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들 이 일을 누가 시켰는지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정작 앞장서서 사건을 해결하려고 나서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모두들 천군의 후환이 두려웠던 것이지요.”

제법 말하는 것을 좋아하는 듯 그는 손짓, 발짓까지 섞으며 일사천리로 얘기를 이어갔다. 사람을 당기는 힘이 있는 이야기꾼이었다.


“그즈음, 우리 마을을 지나던 어떤 검객이 그 아이가 우는 것을 보고 딱하게 여겨 객잔으로 데려와 밥을 먹이고 달랬습니다. 조심스럽게 사정 얘기를 해준 주인장에게 그 아이네 집의 억울한 사연을 들은 그 검객은 사내아이를 주인에게 맡기며 키워주도록 부탁을 했지요. 그리고 아이네 집의 복수를 위해 소도로 가서 점령을 해버렸지요. 천군은 물론 천군의 가솔들과 그에게 녹을 받던 무사들 모두 그 협객에게 죽임을 당하거나 불구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호되게 당한 살아남은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져 도망가기 바빴다고 합니다. 이후 그 사내아이의 억울한 사연을 전해 들은 관아에서 천군의 재산을 몰수하여 그로 인해 피해를 본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합니다. 그 사내아이는 지금 이 객잔에서 맡아 기르는 것으로 알고 있소이다. 아마, 조금 더 크면 점소이부터 시작해서 이곳 객잔의 새로운 주인이 될테지, 흠. 허허”

당초, 긴장하며 얘기를 시작하던 그는 얘기를 할수록 흥이 나는지 장황하게 설명하며 얘기를 이끌어 나갔다.


“그 협객의 눈은 정말 특이했습니다. 이리처럼 눈이 옆면에 붙어 있어서 고개를 돌리지 않고서도 사방을 살필 수 있었으며, 몸을 움직이지 않고도 머리만 돌린 상태로 뒤쪽을 다 볼 수 있었습니다. 정말 특이한 용모였습니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는 조금 무섭거나 신기하게 보일수도 있을 겁니다.”

이야기를 하던 그 사람은 묻지도 않은 말까지 계속하며 설명을 이어갔다.

“재미있는 얘기 정말 잘 들었습니다... 그런데, 혹 그 협객이 무슨 무기를 사용하는지는 보셨는지요?”

조동일이 탁왕자를 비롯한 일행의 식사가 마무리되자 급하게 물었다.

“장팔사모라고 하더군요, 뱀이 입을 벌린 것 같이 구불구불한 모양을 한 일장 팔척 정도 길이의 긴 창이라고 들었습니다, 저도 한번 보았는데 길기는 정말 길더군요. 그런데 중요한 건 싸우는 것을 본 적이 없다는 것이지요. 그 긴 창을 들고 싸우는 것을 정말 보고 싶었는데... 어쨌거나, 소도 안에서 엄청난 인원의 무사들과 크게 싸워 이겼다는 소문만 온 마을에 퍼져있습죠~"

“재미있고 흥미로운 얘기 잘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조동일이 묻지도 않은 말까지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바람에 옆 식탁에서 식사를 하던 일행들도 이곳 마을에서 지금껏 있었던 일들을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조동일이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을 잘 알아본 덕분이었다. 조동일은 일어나 정중하게 포권하며 감사의 인사를 대신했다. 지금까지의 얘기를 경청하던 탁왕자는 그 무사에 대한 관심이 더욱 높아졌다. 그 의협심을 나라를 위해 봉사하는 충성심으로 바꿀 수만 있다면 왕자에게도 그 협객에게도 그것보다 값진 일이 없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어디서 오셨습니까?”

악노국 소도의 입구를 지키는 십여 명의 병졸 중 대장으로 보이는 자가 정중히 물었다. 대부분 죄를 지어 쫓겨 오거나 먹고 살기가 힘들어 소도에 의탁(依託)하기 위해 오는 초라한 백성들만 보아온 터였다. 그때는 그들이 병졸들에게 한없이 약한 존재여서 우월적 위치에서 내려다보며 상대를 했었다.

그러나 지금 눈앞에는 고급스러운 말을 타고 온 고관대작 집안의 출신의 기품이 흐르는 젊은이와 그를 호위하는 무사들로 보이는 강인한 사내들의 출현에 병졸들은 다분히 긴장하면서 경계하듯 말했다. 대장으로 보이는 인물이 위압감을 짐짓 숨기기 위해 최대한의 예의를 차려서 응대하는 것이었다.

“천군을 만나러 왔네. 가서 전하게.”

사마철이 위엄있게 말했다.

“어느 분의 행차라고 말씀드릴까요?”

눈치가 매우 빠른듯한 병졸 하나가 급히 튀어나오며 굽실거리면서 물었다.

“참마야차가 손님들을 모시고 왔다고 전하게.”

조동일이 불쑥 말했다. 일행들은 갑작스런 그의 말에 깜짝 놀라며 그를 쳐다보았다.


“옛날 강호에서 활동할 때 제가 알던 살수 중에 아까 객점에서 전해 들은 외모와 꼭 맞아 떨어지는 외모를 가진 후배가 있었습니다. 이름은 오래되어 정확한지 모르겠지만, 아마 지옥장승이라 불렀던 것 같습니다. 본 이름은 지장승(池長丞)이었는데 주로 한밤에 이루어진 그의 활동 모습이 지옥에서 온 사악한 귀신같이 무섭다고 사람들이 지옥장승이라 불렀다고 하더군요. 별호는 낭고상협(狼顧相俠)이라고 했지요. 그 외모가 특이하여 금방 눈에 띄는 데다 예로부터 배신할 자의 대표적인 관상으로 알려지다 보니 본의 아니게 어릴 때부터 배척을 받으며 컸다고 하더군요. 그래서인지 오랫동안 은둔생활을 했었지요. 그나마 저를 포함한 강호인 몇 명과는 교류를 했었는데 보기완 달리 신의가 두텁고 불의에 대해서는 추호의 용납을 하지 않는 불같은 성격의 소유자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저는 사람을 관상으로 판단하는 요즘의 세태가 너무 사리에 맞지 않다고 생각합니다만...”

당시에는 관상으로 사람을 평가하는게 일반적이었다. 그 사람의 역량이나 성향을 알수 없었기 때문이었는데 일단 크고 강인한 외모를 높이 쳐주는 반면 조금이라도 특이하면 여러 가지 단서를 달아 비하하는 경향이 많았다. 지옥장승도 그런 상황으로 인해 사람들과 거리를 두는 삶을 살 수 밖에 없었던 것을 조동일은 안타까워했다.

“사람들에게 외면당하는데 익숙해지다 보니 남의 불행을 꼭 자기 일처럼 챙겨주는 습관이 생겨서 때때로 곤란한 일을 겪는 걸 본 적도 있습니다. 의협심을 발휘한다고 한 때는 저도 그를 도와서 여러 가지 불의를 참지 못하고 함께 해결한 적도 있지요. 무슨 일 때문에 그 친구가 대륙을 떠나 이곳 악노국까지 왔는지 모르겠지만, 힘든 일을 겪은 어린 애를 보고 그 옛날 보았던 의협심이 폭발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행히 이곳에서 천군을 쫓아낸 자가 그 아우가 맞는다면 잘 설득해서 같이 동행하면 될 듯합니다.”

“무공은 어느 정도의 경지라고 보면 되겠습니까?”

탁왕자가 그를 보기 위해 온 목적에 가장 부합하는 질문 하나를 툭 던졌다.

“같이 어울리던 그때, 강호에서 돌던 소문으로는... 흠, 제가 조금 나은 것 같았는데 지금은 알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그가 계속 현역으로 활동을 했다면 상당한 경지에 올라 있을 겁니다. 천군 편에 섰던 많은 무사와 장정들을 일거에 제압한 것만 봐도... 어쩌면 지금의 나보다는 훨씬 높은 무공의 경지일 수도...”

조동일이 웃으며 말은 했지만 그의 얼굴에는 그 옛날 강호에서 같이 활동하던 그 시절을 회상하는지 감회에 젖어든 듯 아련한 표정이었다.


그때 멀리서 누군가 급하게 뛰쳐나오는 무사가 보였다. 천군에게 보고하러 간 병졸은 그의 뒤에서 한참이나 늦게 뛰어오고 있었다. 숨을 헐떡이는 병졸의 모습과 달리 여유롭게 뛰어오는 그 무사의 얼굴에서부터 벌써 무공의 차이가 확연히 드러나고 있었다.

“형님!”

“아우님!”

멀리서부터 그를 알아보고 어느새 말에서 뛰어내려 달려가던 조동일과 그 무사는 힘껏 포옹하며 그간의 안부를 묻고 있었다. 조동일의 예측이 맞았던 것이다. 그는 천군이 도망간 천궁에 남아서 부당하게 피해를 본 백성들의 피해품을 되돌려주기 위해 천군이 빼앗아 창고에 쌓아놓은 물품들을 조사하고 있었다. 천군이 없는 상황이라 그는 부득이 천군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었다.


당초, 관아에서는 소도를 침범한 죄를 물으려 하였으나 마을 사람들이 대거 몰려와서 천군의 악행을 비난했고 마을을 대신해 응징해준 협객을 처벌하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겠다는 뜻을 강력하게 전달했다. 이에 따라 제정(祭政)을 분리하고자 한 소도제도의 당초 취지를 살려 금번 사태의 마무리를 마을에서 자체적으로 처리하고 새로운 천군을 뽑는 것으로 합의된 상태였다.


마무리는 많이 복잡해진 상태였다. 한 사람의 일족에 의해 지배되던 곳이었던지라 그들이 있던 공간에 부재의 여백이 생기니 처음부터 새로 시작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소도는 혼란에 빠진 채 정신없이 마무리 일들이 진행되고 있었다. 위선자였던 천군이 없는 그곳은 더 이상 본연의 모습을 가진 소도가 아니었다. 빨리 그 혼란을 수습해야 했다.

마을은 마을대로 새로운 천군을 뽑기 위한 절차가 진행되고 있었으므로 소도의 마무리 업무는 오롯이 지옥장승의 몫이었다. 지옥장승은 천군의 부재 이후 새로운 천군이 선출되기까지만 역할을 다하고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도 조동일과 비슷한 이유로 반도를 떠나 대륙의 강호를 무대로 활약한 살수였다. 출신지는 부여였으나 어릴 때부터 조선에서 살아 반도 국가의 백성들 삶을 잘 이해하는 무사였다. 그는 조동일의 강호 은퇴 이후 몇 안되는 지인들도 연이어 은퇴를 하자 강호의 생활을 청산했다.

은퇴는 했으나 딱히 정해진 다음 목적지는 없없다. 그저 세월을 유랑하며 수양이나 닦으며 견문을 넓히며 떠도는 중이었다. 오랜 살수 생활로 늘 주변을 경계하며 은둔자의 길을 걸으며 살아온 많은 세월들이 그로 하여금 삶의 의욕을 저하시킨 터였기에 새로운 활기를 몸속에 충전시킬 휴식이 필요한 시기였다.

삶의 목적을 어느 순간 상실한 중년에 접어든 강호인이 여행을 하며 삶에 대한 새로운 의욕을 불러일으키고 싶은 순간에 오랜 인연의 강호계 선배 조동일이 찾아온 것이었다.

비슷한 연대에 같은 공간에서 동종업계에 종사하며 오래토록 공통된 좋은 추억과 암울한 기억들을 공유한 두 사람의 강호 한담(江湖 閑談)은 제법 길었고 그것을 듣는 사람 역시 귀가 즐거웠다. 특히나, 천하 제일의 검이 되고 싶은 길태곤은 겨루고 싶은 고수들로 가득한 이상향처럼 들렸고, 고향을 떠나온 사마철에게는 향수를 자극하는 그리운 노래같았다.


오고 가는 술잔 속에 깃들인 인생의 애환들 속에서 허무감을 이야기하는 지옥장승에게 민족 정기를 지키기 위한 또 다른 소도에로의 입성에 동참하자는 조동일의 제의는 지옥장승에게 보약처럼 달콤한 것이었다. 간만에 삶의 이유를 돌아보는 기분에 충만해진 그였다.

즉시 합류를 결정한 그는 최대한 빨리하던 일을 마무리하고 탁왕자와 함께 출발하기로 하였다. 탁왕자 일행도 그를 도와 피해를 본 백성들의 이름과 물품들을 정리하고 이를 근거로 현물과 대조하여 확인하는 등 함께 진행하였기에 사흘 정도쯤 지나서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 수 있었다.

마을에서는 아무런 일도 없었던 듯 다음번 천군의 선출 작업이 진행되었다.


모든 사태를 수습하고 지옥장승과 함께 돌아오는 길은 함께할 동지들이 마침내 모두 모였다는 것에 대해 후련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무거운 긴장감이 감돌았다. 탁왕자의 움직임은 <천경보전>을 찾기에 혈안이 된 무리들에게는 좋은 표적이 될 수 있었기에 왕자의 행동거지는 늘 조심스러워야 했으며, 그 동선은 항상 비밀을 유지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지금은 특히 더 조심해야 하는 시점이었다. 어쩌면 지금부터야 말로 진정한 힘과 힘, 머리와 머리의 충돌이 벌어질 것이다. 그 대결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² 육참골단(肉斬骨斷)의 각오로 임해야 함을 알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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¹ 한나라 때 이후 남양(태평양의 적도를 경계로 하여 그 남북에 걸친 지역의 통칭)에서 건너온 흑인을 이르는 말

² 자신의 살을 베어내주고 상대의 뼈를 끊는다는 뜻, 스스로 작은 희생을 감당함으로 더 큰 이익을 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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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도외전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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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협력 체제의 구축 19.01.17 188 4 5쪽
48 방도를 모색하다 19.01.16 175 4 12쪽
47 위만, 진시황을 꿈꾸다. 19.01.14 220 4 15쪽
46 소도파수대의 탄생 19.01.14 211 4 13쪽
» 장팔사모의 사신 지옥장승 19.01.12 200 4 25쪽
44 소도, 드러나다. 19.01.10 228 4 18쪽
43 환담 <2> +2 19.01.08 213 4 11쪽
42 환담 <1> 19.01.08 193 4 10쪽
41 연검의 여신 아랑비아 19.01.08 209 4 4쪽
40 귀환 19.01.08 222 4 9쪽
39 언월도의 달인 조동일<4> +2 19.01.06 326 4 24쪽
38 언월도의 달인 조동일<3> 19.01.03 236 4 10쪽
37 언월도의 달인 조동일<2> 19.01.03 243 4 12쪽
36 언월도의 달인 조동일<1> 19.01.02 260 4 15쪽
35 천하제일권 사마철<4> 19.01.01 266 4 11쪽
34 천하제일권 사마철<3> 18.12.31 255 4 18쪽
33 천하제일권 사마철<2> 18.12.29 260 4 22쪽
32 천하제일권 사마철<1> 18.12.28 293 4 11쪽
31 맹인 검객 선우이치<3> 18.12.27 302 4 18쪽
30 맹인 검객 선우이치<2> 18.12.27 273 4 20쪽
29 맹인 검객 선우이치<1> 18.12.26 280 4 13쪽
28 삼한제일검 길태곤 <3> 18.12.21 316 4 25쪽
27 삼한제일검 길태곤 <2> 18.12.20 317 4 21쪽
26 삼한제일검 길태곤 <1> +2 18.12.19 331 4 15쪽
25 신궁 아라방<5> 18.12.18 306 4 12쪽
24 신궁 아라방 <4> 18.12.17 309 4 13쪽
23 신궁 아라방 <3> 18.12.14 368 4 21쪽
22 신궁 아라방 <2> 18.12.14 376 4 12쪽
21 신궁 아라방 <1> 18.12.13 409 4 9쪽
20 검증의 요건 18.12.13 393 4 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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