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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가린 님의 서재입니다.

소도외전

웹소설 > 자유연재 > 무협

용가린
작품등록일 :
2018.11.28 15:30
최근연재일 :
2023.05.10 22:33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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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2.27 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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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0쪽

맹인 검객 선우이치<2>

DUMMY

미오야마국은 사방이 넓은 평지로 형성된 나라였다. 한참이나 말을 달려도 조금 전에 본 그 산과 그 평야를 다시 지나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다. 넓은 평야에는 벼를 수확하고 남은 볏짚들이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었다. 광활한 평야 옆에는 큰 저수지가 만들어져 있었는데 한눈에 보아도 농업에 특화된 지역임을 알기에 충분했다. 띄엄띄엄 보이는 인가들에서는 수확한 벼를 집어넣어 가마니를 쌓아놓은 창고들이 보였다. 풍족했다. 그런 백성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탁왕자는 힘이 났다. 뿌듯했다.


탁왕자 일행은 한참을 더 달려 제법 번화한 마을에 도착했다. 저잣거리의 규모는 큰 곳이었는데 물품들을 전시해 놓은 점포들이 형형색색의 장식으로 손님들을 유혹하고 있었다. 사람이나 물품의 유통이 활성화된 곳임을 말해주는 듯한 풍경이었다. 마침 시장기를 느낀 일행들은 가까운 곳에 있는 주루를 찾기 시작했다.

“저기에 주루가 보이는군요.”

길태곤이 멀리 보이는 주루를 가리키며 말했다. 빨간색의 깃발이 보이는 건물이 근처에서 규모가 가장 커보였다. 주루의 입구에 걸어놓은 깃발은 가장자리 부분이 황금색으로 화려하게 채색되어 고급스러운 느낌을 주고 있었다. 깃발의 중앙에는 “여락루(餘樂樓)”라는 주루이름이 멋진 전서체(篆書體)로 씌어져 있었다.

“나그네들이 즐겁게 지내다 가라... 그런 뜻인 것 같습니다. 다른 객잔들에 비해서 크기도 크지만 깨끗한 외관이 무척 마음에 드는군요.”

진혁이 일행의 앞쪽으로 나가며 그곳에 머물 것을 권했다. 일행은 그곳에 여장을 풀었다.

“다른 어느 지역보다 풍요로운 느낌이오. 삶의 여유를 느끼며 산다는 마음이 들어서 편안하오. 오랜만에 느끼는 좋은 감정이구료.”

탁왕자가 여락루에서 저녁식사를 하면서 흐뭇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곳은 주루만 있는 게 아닌듯합니다. 들어올 때 보니 별채도 있더군요. 아마도 외부에서 온 사람들을 위한 유흥시설이 있는듯합니다. 더구나, 언 듯 살펴보니 온천도 있는 것 같더군요.”

탁왕자를 밀착 경호하는 진혁은 항상 새로운 장소에 도착하면 습관적으로 날카로운 눈빛을 날리며 주위 동정을 살폈다. 이곳의 장소들도 예외 없이 그에 의해 분석되고 있었다.

“아, 그래요? 그럼 오늘 식사 후 그동안의 피로도 풀 겸 온천에 한번 가보도록 하십시다.”

기름진 식사와 향긋한 술잔의 향을 음미하며 격의 없이 시간을 보낸 일행은 이윽고 별채로 안내되어 각자의 객실(客室)에서 옷을 갈아입은 다음 온천욕장으로 향했다.


“두 마리의 용이 새겨진 황금색 칼집을 가진 남자가 포함된 두 명의 무사가 나타나면 반드시 주인님께 보고하라는 지시가 왔어요.”

“누구길래 그러는 거래요?”

“모르겠어요. 주인님이 무슨 말을 하면서 그렇게 지시하던데, 하여튼 위에서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야죠 ~, 우리가 알아 뭘 하겠어요. 호호”

온천욕장을 가기 위해 별채 이층에서 일층으로 내려와 멀지 않은 온천욕장 입구를 향해 걸어가던 탁왕자 일행 맞은편에서 걸어오던 여종업원 두 명이 주위를 의식하지 않고 그들끼리 하는 얘기였다. 아마, 두 명이 아닌 세 명의 장정들이 오니 별 의심 없이 주고받는 듯했다. 그러나 좀 전에 말한 칼은 한탁왕자의 칼을 말하는 것임이 분명했다. 지금은 금빛 보자기로 둘러싸여 있지만 틀림없이 그들이 지목한 것은 한탁왕자의 쌍용검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녀들이 사라진 순간, 진혁이 갑자기 되돌아가자는 제안을 했다. 자신들의 얘기가 나오고 있는 이곳에서 무언가 음모가 진행되는 느낌이었다. 일행들은 갑자기 확 떠밀려 오는 긴장으로 인해 신경이 곤두섰다. 탁왕자의 암행 여정은 극비였다. 그런데 그들의 동태를 주시하는 무리가 있다는 것이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뭔가 문제가 있어도 크게 있는 것이었다. 일행은 잠시 멈추고선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뒤돌아가서 대책을 의논하자는 의견에 동조할 참이었다.


그때였다. 맞은편 끝에서 험상궂은 사내 하나가 건들건들 다가왔다.

“오늘 이곳의 영업은 끝났으니 모두들 객실로 되돌아가시오, 이곳 온천욕장의 물을 급수하는 시설이 고장나서 고치고 있소이다. 물 공급이 되지 않으니 온천욕을 할 수 없소이다. 그러니 속히들 돌아가시오.”

말은 경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사내는 안하무인격으로 말했다. 다만, 험악한 표정을 지으며 거칠고 투박한 말을 내뱉고 있었지만 의외로 나지막했고 조심스러웠다. 아마 그의 큰 소리를 누군가 들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만약 그렇다면 자신들의 목적을 이룰 수 없는 어떤 상황이 저 건너편에 있는 것 같았다. 뒤를 돌아보니 탁왕자 일행을 따라오던 몇 명의 다른 무리들도 모두들 그 기세에 눌려 급하게 발길을 돌리는 중이었다.

“우리도 돌아갑시다. 마침 잘 된 듯하오.”

객실로 돌아가기 위해 발길을 돌리면서도 탁왕자 일행은 혼란스러웠다.

돌아서는 길태곤의 눈가로 그들을 제지하고 있는 사내의 칼집이 보였던 것이다. 물을 끌어오는 시설이 고장 나서 고치러 왔다고 말하는 사내가 칼을 차고 있다니... 게다가 풍기는 느낌은 직업적인 무사로 보일 뿐 전혀 허드렛일을 하는 인부의 느낌은 없었다. 객실로 돌아가는 중에도 그들의 행동거지가 의심스러웠다. 그런 의심스런 행동이 탁왕자 일행과 연관이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결국 조금 전의 그 상황이 이곳 여락루의 내부적인 문제로 결론을 내리고 더 이상 고민하지 않기로 했다.


다만, 이곳 여락루의 주인이 탁왕자 일행의 움직임을 어떻게 알고 종업원들에게 비밀스럽게 수소문하고 있는지는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하는 문제였다. 참으로 궁금한 일이었다. 지금껏 비밀스럽게 움직이는 암행 활동은 마한의 극소수 고위 관료들만 아는 것임에도 이곳 변한의 일개 주루에서 그들을 물색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무척이나 놀라운 상황이었다. 하여튼 요지경 같은 주루라는 생각 때문인지 더욱 신경을 곤두세웠다.


“먼저 객실로 들어가시지요. 제가 조금 더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진혁이 탁왕자의 객실을 나서며 탁왕자에게 머리를 숙이며 말했다.

“조심하시오. 뭔가 움직이는 것 같은데, 모양새가 좋지는 않아 보이니..”

탁왕자가 염려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으나 마음은 편치 않았다. 오늘 저녁의 일들은 왠지 을씨년스러웠다. 스산하게 닥쳐올 위기를 예고하는 신호인 것 같기도 했다. 탁왕자 일행의 여정에 처음부터 참여하지 않은 길태곤은 돌아가는 상황을 정확히 알지도 못하면서 무언가 의견을 내는 건 무모할 뿐 아니라 도리도 아닌 듯 했기에 그저 조용히 경청만 할 따름이었다. 현재로선 그저 묵묵히 탁왕자를 경호하는 역할에 충실하는 것이 최선의 방책이라 판단했다.


잠시 후, 진혁은 주루 입구의 계산대를 스치듯 지나가며 밖으로 나왔다.

계산대에는 주인으로 보이는 대머리의 거구가 울룩불룩한 체구에 어울리지 않는 고급스러운 복장을 하고선 오가는 손님들을 주시하고 있었는데 대머리의 중앙에 한 땀한 땀 땋은듯한 한 가닥의 굵은 머리카락이 소꼬리처럼 늘어져 있었다. 그의 인상은 얼핏 평범해 보이는 것 같기도 했지만 가끔씩 손님들을 향하는 눈빛이 무척이나 매서웠다. 스치듯 주루에 들어올 때는 전혀 의식하지 못했던 눈길이었다.

어쩌면 장사꾼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언 듯 스쳤다. 강호의 고수가 어떤 이유로 인해 정체를 숨기고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데... 기다리는 사람들이 자신들인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진혁은 주인의 시야를 빠르게 스치며 지나쳐 나왔다.

밖으로 나온 진혁은 천천히 사람들로 북적이는 저잣거리를 향해 걸음을 옮기며 걸어갔다. 그가 묵는 여락루에서도 점점 멀어져 갔다. 어느 정도 발걸음을 옮긴 진혁은 가끔씩 뒤돌아서서 자신이 조금 전까지 머물렀던 주루 여락루를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허기 때문에 지쳐서 보이지 않던 건물의 모습이 아직은 밝은 달빛아래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그곳은 주변의 다른 주루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새 건물인데다 다른 주루들에 비해 지나치게 규모가 컸다. 얼핏 보기에도 이곳을 지나치는 돈 있는 나그네들의 발길을 잡기에 매우 적합한 모양새였다. 그런데다 그 위치가 표나지 않게 혼잡한 저잣거리와는 약간 등을 지고 있었다. 주루의 입구 또한 저잣거리와는 반대편에 있어 주루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밖에서 볼 수 없도록 의도적으로 배치한 듯하였다.

“하아~ 무언가 일이 일어나고 있기는 한 것 같은데...”

진혁은 머리끝이 쭈뼛 서는 것을 느끼며 한기를 느꼈다.

문득 주변을 둘러보니 깊어가는 저녁의 저잣거리는 썰물 빠져나가듯 인파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군데군데 천천히 하루를 마감하는 몇 군데의 점포들이 파장분위기를 내면서 마지막 등잔불을 끄고 있었다. 조금만 있으면 하릴없이 은은한 초승달의 가늘고 앙상한 달빛만이 멀리서부터 흘러내릴 것이다. 이제 그만 주루로 가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웬 놈이냐, 정체를 밝혀라!”

검은 복면을 한 괴한 몇 명이 조용히 그의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어느 틈엔가 저잣거리의 초입(初入)까지 와버린 뒤였다. 주루와는 제법 거리가 멀어져 있었다. 늦은 밤은 아니었지만 주변에는 행인들 그림자조차 없었다. 물건을 사고파는 행인이나 나그네가 아니라면 이 시각에 나다닐 사람들은 없는 상황이었다. 사방은 고요했고 주변의 기류는 처연(凄然)했다.

‘뜬금없게도... 갑자기 복면인 이라니...’

진혁은 탁왕자 일행의 활동과 관련한 어떤 움직임이 바로 주변에서 가동되고 있다는 것을 직감으로 확신했다.

“너희들이야 말로 누구냐, 복면을 한 것으로 보아하니 과히 좋은 작자들은 아닌 듯한데... 속히 정체를 밝혀라”

겉으로는 강인하게 말했으나 진혁은 모골이 송연해지고 있었다.

‘이렇듯 소리 없이 다가온 그들의 인기척을 내가 느끼지도 못했을 정도라면 분명 고수들임이 분명하다... 아니다, 아니다... 내가 너무 골똘히 생각하다 보니 그들의 인기척을 느끼지 못했을 뿐이리라.’

진혁은 순간적으로 여러 갈래의 혼란과 갈등에 빠졌다. 고수라면 당연히 목숨을 걸어야 할 문제에 직면할 것이다. 더구나 상대는 여러 명이었는데 거기에 더하여 저 보이지 않는 암흑의 뒤편에 그들의 일당이 없다는 보장도 힘든 상황이었다. 절대절명(絶對絶命)의 상황이었다. 위기일발(危機一髮)의 섬전(閃電)이 식은땀을 흘리는 진혁의 등골을 날카롭게 스쳤다.


“이 지역을 지나가는 나그네일 뿐이오, 같이 동행하던 친구가 저녁을 먹은 후 갑자기 없어져서 찾으러 다니고 있을 뿐이오.”

“어디서 왔느냐?”

“마한에서 왔소이다만...”

순간, 진혁은 그들의 눈빛이 어둠속에서 빛나는 것을 느꼈다. 아차, 싶었다.

“나는 진한사람인데 이곳 변한 지역에서 많은 인건비를 주면서 사람을 구한다는 얘기를 듣고 마한에 있는 친한 친구와 함께 오는 중이었소이다.”

말을 뱉은 직후, 한탁왕자 일행을 수소문한다는 얘기와 왠지 일맥상통(一脈相通)한다는 느낌이 강했기에 일단 부인해야 할듯해서 지어낸 거짓말이었다.

“네 이름과 친구 이름은 무엇이냐?”

그들은 세심하게 확인하고 있었다.

“내 이름은 준학이고 친구의 이름은 선우익 이외다.”

“지금 어디에 머물고 있느냐?”

“여락루라는 주루에 머물고 있소이다.”

“일행은 몇 명이냐?”

“세 명이외다.”

두 명만 아니면 된다는 마음이 들었기에 편하게 대답했다. 아까 여락루의 여급들에게 들은 얘기를 상기했기 때문이었다. 더 이상의 질문은 없었다.

다만, 그들은 어떤 명령을 기다리는 듯했고 서로가 긴장을 유지한 체 무거운 중압감의 시간만 무심히 흘렀다. 진혁은 긴장하며 그들의 다음 행동을 주시했다. 어떤 결정이든 내려지겠지만 일각이 여삼추였다. 괴로웠다.


“지금부터 내 말에 거짓을 고하면 그에 상응한 벌을 내릴 것이다.”

어두운 곳에서도 식별할 수 있을 정도인 반백의 중년 사내가 암흑속에서 불쑥 튀어 나왔다. 그가 싸늘한 표정을 지으며 퀴퀴한 음색으로 천천히 말을 하자 복면인들이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아마도 그는 이들 복면인들을 이끄는 자인 듯했다.

“첫째, 네 놈의 복장이나 행색을 보면 단지 일감을 구하기 위해 다른 지역을 돌아다닐 정도의 구차함은 없다고 판단된다. 더구나 네가 차고 있는 그 칼로 볼 때 너는 막일을 할 놈은 절대 아니다. 자, 무슨 용무로 이곳으로 왔는지를 소상하게 말해라.”

의기양양하게 자신의 관찰 결과를 통보하는 사내는 확신에 찬 음성으로 다그치고 있었다.

“둘째, 우리가 이곳을 지킨 지 족히 세 시진은 되었으나 개미 새끼 한 마리 오고 간적 없으니 네가 일행을 찾는다는 말도 어느 정도 지어낸 말인 듯하다. 왜 거짓말을 하느냐? 거짓이 아니라면 지체 없이 내가 느낀 이 궁금증을 해명해보도록 하라.”

그 말이 신호라도 된 진혁의 양쪽 주변에 있던 복면인들이 일제히 검을 빼들어 진혁의 주변을 에워싸기 시작했다. 여차하면 떼거지로 달려들 것처럼,

“내 당신네들의 질문에 일일이 대답해야할 이유를 모르겠지만 왠지 당신들과 엮기는 것 같아 기분이 참으로 좋지 않소이다... 또한, 내가 뭐라고 얘기하든 당신들은 멋대로 판단할 것으로 보이니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 않소이다.”

단호하게 할 말을 한 진혁은 결심한 듯 서서히 허리에 차고 있는 검으로 손을 가져갔다. 어차피 죽든 살든 결딴을 내려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이기는 것은 애당초 어불성설(語不成說)이었다. 최소한 이 순간을 모면하기 위해 도망갈 기회를 얻는다면 그것이 최선의 결과일 터였다. 탁왕자에게 어서 이 상황을 알려야 한다는 긴박함과 살아 돌아가기 위한 기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간절함으로 일순간 진혁의 주변에서 싸한 기운이 차올랐다.

복면인들이 일거에 달려들기 전에 어느 방향이던 정해서 그쪽으로 도망을 가야하는데 어느 쪽이 약한지는 오리무중이었다. 그래도 어느 쪽으로든 먼저 공격을 하는 것이 최선이었고 그 결과는 오로지 하늘만이 알 것이었다. 진혁은 마음의 각오를 하고 출수를 했다. 그가 검을 들고 막 공격할 그때였다.


“지금 내 친구를 앞에 두고 무엇들 하는 짓거리들이냐!”

벼락같은 고함 속에 분노가 섞인 그렁그렁한 음성이 복면인들을 흔들며 날아들었다. 길태곤이었다. 진혁의 귀루(歸樓)가 늦어지자 혹시나 하여 그를 찾아 나선 것이었다. 탁왕자의 부탁도 있었기에 그는 벌써부터 이곳저곳을 두루 찾아다닌 듯 얼굴이 조금 피곤해 보였다. 길태곤이 가까스로 진혁을 찾았을 때는 막 싸움이 시작되기 전이었기에 급히 끼어든 것이었다. 길태곤은 급히 출상술을 사용하여 황급하게 진혁에게로 날아들었다. 목숨이 촌극을 다투던 경황 중에 길태곤이 등장하자 진혁은 언제 그랬냐는 듯 안도하면서 당당하게 고함쳤다.

“보아라, 나의 친구가 여기 왔지 않느냐, 내 이쯤에서 조용히 끝내고 싶으니 길을 물려라. 이유 없이 너희들에게 헛된 개죽음을 선물하고 싶지 않다.”

길태곤은 자신이 적당히 꾸며낸 얘기를 사실로 만드는 증인이 될 수 있기에 진혁의 기는 한결 살아나고 있었다. 반백의 중년인은 길태곤의 등장에 순간 혼란스러워했다. 길태곤은 한 눈에 봐도 강호인이 분명한데다 그가 가진 칼집과 강인한 첫인상으로 보아 어쩌면 극강의 고수일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스치는 듯했다.

‘저런 자라면 많은 임금을 받는 일자리를 찾을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렇다면 앞에 선 저 의심스러운 무사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지 않을까... 하, 한탁왕자 일행이 아니라면 굳이 희생을 감수하며 싸울 일은 없다. 정확하지 않은 정황으로 쓸데없이 전력을 낭비할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흠,’

순간적으로 여러 상황을 고민한 반백인은 천천히 말을 했다.

“흠, 좋다. 아직 네 놈에 대한 의문이 다 풀린 건 아니나 네 친구가 왔으니 네 말을 그대로 믿어주마. 여봐라, 칼을 거두고 보내 주어라.”

그러자, 복면인들은 칼을 거두고는 재빨리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이곳에서 계속 지켰다고 했는데 도대체 누구를 지킨다는 것이오?”

진혁이 돌아서 가려는 반백의 중년인을 향해 급하게 물었다.

“그건 말해 줄 수 없다. 너희들은 너희들의 길이나 지체 없이 가거라.”

귀찮다는 듯 훈계조의 대답을 하고 반백인이 몸을 암흑속으로 밀어 넣으려는 순간 길태곤이 도발적으로 말했다.

“어이, 거기 반쯤 백발머리, 네 맘대로 가면 아니되지! 빨리 와서 내 친구 말에 대답하고 가도록해라, 속히 말하지 않으면 정말 혼날거야, 나는 순한 이 친구와 다르거든!”

무심히 떠나려던 반백의 중년인은 큰 체구에 긴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길태곤의 갑작스런 반말에 기분이 상했는지 잠시 멈춰선 다음 길태곤을 강하게 노려보았다. 그는 안광(眼光)을 날카롭게 솟아내었다. 찬찬하게 그의 눈에 담긴 길태곤의 모습 중에서 문득 가슴에 있는 문신도 몇 조각 보였는데 큰 체구에 어울리렸는데 그것으로 인해 더욱 강인해 보였다. 더구나 강한 외기를 뿜어내는 자신들을 대하면서도 아랑곳하지않고 강하게 대응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보통내기는 아닌 것 분명했다. 어쩌면 자신들의 실력으론 감당하지 못할 극강의 고수일 것 같다는 생각이 스물스물 올라왔다. 빨리 피하지 않는다면 문제가 생길수도 있을 것 같았다. 자존심 때문에 그 생각을 노출할 수도 없었다.

“어린놈이 무례하구나, 내 시간이 많으면 버릇을 고쳐주고 싶다만 급한 일이 있어 오늘은 그냥 가니 고마운 줄 알아라.”

그렇게 얘기하고는 길태곤의 눈치를 보았다. 길태곤은 그 말에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여전히 반백인을 정면에서 응시하며 진지한 표정으로 진혁의 물음에 대한 답변을 기다리고 있었다. 여차하면 일전을 불사하겠다는 의지로 판단한 반백인은 기분은 좋지 않았지만 즉각 짧고 나지막한 대답을 뱉은 후 몸을 날려 곧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우리는 한탁왕자 일행을 기다리고 있다. 대답이 되었으면 가겠다. 너희들도 이제 그만 가도록 해라.”

진혁의 물음에 답을 했기에 진지하게 서있던 길태곤으로서는 더 이상 그를 추궁하거나 쫓을 명분은 없었다. 사실 애초부터 그럴 의향도 없던 길태곤이었다. 반백인과 복면인들은 진짜 탁왕자 일행인줄 몰랐겠지만 알았다 하더라도 이미 길태곤의 존재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기에 뜻을 이룰 수 없었을 것이다. 진혁은 의심하던 바에 대한 확신을 얻게 되자 더욱 정신을 가다듬었다.


‘왕자를 기다린다... 흠.’

진혁이 걱정했던 바가 현실로 나타났다.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둘러 주루로 향했다. 마음이 바쁜 만큼이나 발걸음도 빨라져 어둠속에서 그들의 모습은 순식간에 보이지 않았다. 탁왕자가 머물고 있는 객실을 찾은 그들은 왕자에게 별 일이 없음을 확인하고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들에게 아직 정체를 들키지 않은 것은 확실해 보였다. 한탁왕자도 진혁에 대한 걱정이 깊어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고 있었다.

“우리를 노리는 자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더구나 그 숫자도 엄청나게 많은듯합니다. 이곳 주루가 그들의 본거지중 한 곳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진혁은 자신이 나가서 보고, 듣고, 느낀 점을 얘기하며 그 이유도 설명했다.

“흠, 더욱 조심해야 할 것 같군요. 그래, 지금부터 어찌하면 좋겠소?”

탁왕자가 진혁을 바라보며 물었다.

길태곤은 두사람의 대화를 신중하게 들으며 어떤 말들이 오갈지를 기다렸다. 탁왕자와 진혁이 진행해왔던 여러 일들의 역사를 모르는 상황이므로 복잡한 일을 굳이 복기해가며 알고 싶지도 않은 데다 돌아가는 상황도 모르면서 이것저것 두서 없이 관여하는 것은 바보 같은 짓거리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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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언월도의 달인 조동일<3> 19.01.03 236 4 10쪽
37 언월도의 달인 조동일<2> 19.01.03 243 4 12쪽
36 언월도의 달인 조동일<1> 19.01.02 260 4 15쪽
35 천하제일권 사마철<4> 19.01.01 266 4 11쪽
34 천하제일권 사마철<3> 18.12.31 255 4 18쪽
33 천하제일권 사마철<2> 18.12.29 260 4 22쪽
32 천하제일권 사마철<1> 18.12.28 293 4 11쪽
31 맹인 검객 선우이치<3> 18.12.27 302 4 18쪽
» 맹인 검객 선우이치<2> 18.12.27 274 4 20쪽
29 맹인 검객 선우이치<1> 18.12.26 280 4 13쪽
28 삼한제일검 길태곤 <3> 18.12.21 316 4 25쪽
27 삼한제일검 길태곤 <2> 18.12.20 317 4 21쪽
26 삼한제일검 길태곤 <1> +2 18.12.19 331 4 15쪽
25 신궁 아라방<5> 18.12.18 306 4 12쪽
24 신궁 아라방 <4> 18.12.17 309 4 13쪽
23 신궁 아라방 <3> 18.12.14 368 4 21쪽
22 신궁 아라방 <2> 18.12.14 376 4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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