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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알아서. 님의 서재입니다.

불멸의 여신과 별을 쫓는 사냥꾼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전쟁·밀리터리

니알아서.
작품등록일 :
2021.05.12 10:14
최근연재일 :
2021.06.22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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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17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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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쪽

이상한 나라의 언샤 16 - 뿌리, 줄기, 가지

DUMMY

7.


루이스가 기절하듯 잠든 후 잠시 시간이 흘렀다.


잠든 아이를 길거리에서 계속 재우고 있을 수는 없었기에, 언샤와 루카는 소년을 여관으로 데려온 뒤 쭉 재웠다.


언샤와 루카는 살수 중 한 명인 나가세나에게 소년이 깨어나면 알려달라고 말한 뒤, 그들은 카페에서 또 홍차를 마시며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을지 대책을 논했다.


일단 소년이 시간을 되돌리며 다른 사람의 미래를 빼앗아온 일에 대해서는 그냥 죄를 묻지 않고 넘어가기로 했다.


고의성도 없었고, 이기심으로 한 행동도 아니었으며, 미래를 빼앗겨온 건 소년 역시 마찬가지였으니.


아이에게 그런 걸 죄로서 묻기엔 그 동기는 너무나 원초적이고 순수했다.


무엇보다 그 모든 일들이 어린아이 혼자서 이겨내기엔 너무나 잔혹한 사건들 뿐이었다는 점도, 저 아이에게 동정심과 온정이 필요하다고 느끼게 했다.


언샤 역시 어릴 때 가족을 잃은 참혹한 경험이 십 년도 넘게 지난 지금도 자신을 괴롭히고 있었으니.


그러한 사건을 한 번 겪어도 그럴 진대 저렇게 어린 소년이 수십 번 넘게 한 사람의 죽음을 경험하고도 미치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였다.


"내가 저 상황에 놓였다면, 저 소년처럼 행동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자신 때문에 죽음을 반복하게 된 소녀가 적어도 과거 속에서만이라도 계속 살 수 있는 상태라면, 모든 도시 사람들을 과거에 가두고 소녀 한 사람을 위해 전 세계를 속이는 거짓말을 계속 반복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소녀가 죽은 게 자신의 잘못이라고 인정하고 수용하며 내일을 맞이할 수 있었을까? 솔직히 난 그렇게 할 자신 없는걸."


언샤는 그렇게 순수하게 감상을 말했다.

하지만 이는 그냥 한탄에 가까운 감정 표현에 불과했으며 솔직히 말해서 이 사태를 어떻게 해결하면 좋을지는 전혀 감이 잡히지 않고 있었다.


루카는 언샤가 말한 감상을 듣고도 홍차를 훌쩍이며 복잡 미묘한 표정을 지을 뿐 딱히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다.

루카 역시 머리가 복잡한 건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두 사람은 어린아이가 하는 짓이니 당연히 얼토당토않는 이유로 시간을 되돌리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실제로 얘기를 들어보니 시간을 되돌리는 것 자체는 납득 가는 이유였기에.


어린아이가 경험이 적고 아는 게 없다 해서 그게 그 존재를 얕잡아볼 이유는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을 뿐이었다.


"근데 있잖아. 루이스는 소녀가 죽음을 반복하게 된 게 자신의 잘못이 확실하다고 아주 단정 지어서 말하던데, 그게 정말 사실이야? 앨리스가 죽은 첫날에는 확실히 갑작스레 화신이 된 루이스가 권능을 전혀 제어하지 못하고 폭주시켜 그런 사건이 일어난 게 맞는 것 같지만. 너무 작위적이지 않아? 앨리스가 정지하고, 마차는 빨리 달려버린다니. 왜 그렇게 상황이 루이스한테 안 좋게만 돌아간 거야?"


계속 문제 해결법을 생각하던 언샤는 문득 생각이 미쳐 그렇게 물었다.


"아, 그것 말인가. 그건 아스트라의 특징 때문이다. 아스트라는 영혼과 얽매여있으며 감정에 따라 움직이는 것. 그렇기에 그걸 다루지 못하고 폭주하게 된다면, 폭주해버린 아스트라는 무의식적으로 그 주인이 가장 보고 싶어 하지 않는 끔찍한 광경을 실현해내버리기도 하느니라. 강대한 힘을 다루는 대가 같은 게지."


언샤는 그 말을 듣고 참으로 기가 막혔다.

그런 것도 권능이 폭주한 결과라니, 화신의 운명이란 어찌 그리도 얄궃을 수 있는가.


"으, 나는 권능이 폭주하는 일이 없도록 조심해야겠는걸. 근데 또 하나 이상한 점이 있는데, 앨리스가 한 번 죽은 후 시간을 되돌린 후부터는 앨리스를 죽이는 건 전부 루이스가 아닌 다른 사람들이었잖아? 그 사건들까지 정말 권능 때문에 그렇게 된 거 맞아? 그게 정말 루이스 한 명 때문에 그렇게 된 거라고?"


"아, 소녀가 계속 죽음을 반복하는 문제 말이더냐? 그건 시간의 인과율 문제 때문에 생기는 사건이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소녀가 죽음을 반복하게 된 근본적인 원인은 루이스 본인이 시간을 되돌려서 그렇게 된 게 맞노라. 그러나 시간을 되돌린 후에도 소녀가 계속 다른 방법으로 죽게 된 건, 루이스가 아닌 이 우주가 저지른 잘못이로다. 그러니 소년이 자신을 자책하는 것도, 하늘을 탓하는 것도 양쪽 모두 틀리지 않았도다."


여신의 대답은 아주 현학적이며 아리송한 것이었으나, 그럼에도 아주 이해 못 할 정도로 복잡한 것도 아니었다.


"인과율? 성신들이 말하던 연기(緣起) 사상 같은 거던가? 세상 모든 현상 중 독립된 것은 단 하나도 없고, 모든 존재가 인과로 얽혀있으며, 모든 사건엔 반드시 그 원인과 결과가 있다는 거?"


"맞노라. 인과율이란 이 세상의 모든 물리적 법칙을 결정짓는 절대적 권위, 센트럴 도그마 중 하나이며 구체적으로는 '미래에서 일어나는 어떤 물리적 사건도, 과거에 영향을 미칠 수 없다.'라는 전제인 게다. 이 전제가 무너지면 세상의 모든 물리적 법칙이 붕괴하게 되기에, 어찌 보면 지극히 상식적인 전제이기도 하지."


"음, 근데 그건 좀 이상한데? 루이스는 시간을 되돌려서 미래의 사건을 알고 있는 상태로 과거에 개입했잖아? 그럼 이미 그 물리법칙은 무너져 버린 거 아닌가?"


"그것도 맞노라. 그래서 실제로 우리가 이렇게 보란 듯이 물리적 법칙이 붕괴한 장소에 있지 않느냐. 내일이 절대 찾아오지 않고, 성문을 넘어가기만 해도 낮과 밤이 바뀌는데도 화신 이외엔 그 누구도 이변을 눈치채지 못하는 이 기이한 도시가 정상적인 물리적 법칙 하에 있는 걸로 보이느냐?"


"아······."


언샤는 그 말을 듣고서야 루카가 하는 말이 모두 이치에 맞으며, 적어도 이 도시에서 일어나는 사건과는 하나도 모순이 없는 설명임을 깨달았다.


과연 기억 대부분을 잃었어도 여신은 여신이었다.


"어쨌든 앨리스가 시간을 돌린 후 계속해서 다른 원인으로 죽게 된 이유는 아주 단순하도다. 루이스가 화신으로 각성해 시간을 되돌린 것까진 좋은데, 소년은 아스트라를 쓸 수 있게 된 지 얼마 안 됐기에 그 권능이 성신 다누에 비하면 새 발의 피 수준도 안되는 게 문제였노라."


"진짜 신의 권능은 화신과는 비교도 안되는 수준인가 봐?"


"그렇다고 보면 된다. 물리적 법칙을 붕괴시키고 세상을 속이며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위업을 이뤄내려면, 이 도시만이 아닌 세상 전체를 속일 필요성이 있으니. 적어도 이 지구 전체의 시간 정도는 되돌려서, 사라진 미래를 기억하고 과거를 변동시킬 수 있을 사람이 최소한이 되도록 만들어야만 했었노라. 그러나 지구 전체의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건 다누 본인 정도뿐이니. 화신일 뿐인 루이스는 그 권능이 약해서 조작할 수 있는 범위가 좁았기에 런던데리를 제외한 지구의 나머지 지역 전체는 여전히 정상적으로 시간이 흘러가게 된 게다."


루카는 그렇게 말하며.

홍차에 우유를 부운 후 숟가락으로 휘저으며 그 우유와 홍차가 서로 섞이지 않고 흰 회오리 형태로 회전하며 흰색과 붉은색으로 분리된 층을 이루는 모습을 보여줬다.


홍차가 세상 전체이며, 우유가 이 도시였다.


즉, 런던데리는 홍차 안에서 계속해서 같은 움직임을 반복하며 회전하는 우유이자 세상과 제대로 섞이지 못하는 이물질과도 같은 장소였다.


"즉, 바깥세상이 얼마나 시간이 흘렀든 간에 이 런던데리라는 도시 내부는 진짜 3월 3일이 맞으며, 이곳은 현실에서 분리된 '과거'라는 이질적인 공간인 게다. 과거이니 죽은 사람이 살아 있더라도 어떤 모순도 없고, 과거이니 이미 일어난 일은 반드시 일어날 수밖에 없지. 미래에서 과거에 간섭하는 건 일반 물리법칙 상으론 불가능하니 말이다."


"잠깐, '일반' 물리법칙 상으로는 불가능하다고? 그럼 일반적이지 않은 방법으로는 미래에서 과거에 간섭하는 게 가능하다는 의미야?"


"그럼 당연하지 않느냐. 멀리 돌아갈 것도 없이, 그대와 나만 해도 일반적이지 않은 존재로다. 그대는 화신이고, 나는 신이지. 즉, 신은 과거에 간섭할 수 있노라. 신이 왜 신이겠느냐? 물리적 법칙을 초월하고 시작도 끝도 없으며, 연기와 인과에서 완전히 초탈한 존재이기에 신인 게다."


"신은 그럴 수 있다고? 하지만 나와 루이스는 신이 아니라 화신이고, 옛날이면 몰라도 온 몸이 조각조각난 지금 네가 진짜 신처럼 대단해 보이지는 않는데."


"아니, 화신 또한 존재 규모와 힘이 약할 뿐 일단 분류상 신은 신이로다. 나 역시 나약해지긴 했으나 신의 특성을 고스란히 갖고 있고. 이는 우리가 아스트라를 지닌 존재이기 때문이니라. 우리를 신으로 존재케 하는 것, 시간과 공간과 차원을 초월한 존재일 수 있도록 만들 수 있는 건 우리 몸속에 있는 아스트라의 특성인 게다."


"아스트라? 권능? 또 그놈의 권능이야? 대체 권능이 뭐길래 그렇게 만능인 건데?"


언샤는 자신이 가진 권능이 그저 파괴력이 일반적인 방식보다 훨씬 강한 힘일 뿐.

무언가 초월적인 존재의 것이라 생각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기에 시간과 공간과 차원이 도대체 그러한 권능과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인지 도저히 감도 잡히지 않았다.


하지만 루카에게는 아스트라의 그러한 특징이 마치 상식처럼 여겨지는 모양이었다.


"아스트라란 건 이 3차원 공간을 구성하는 모든 힘이자, 동시에 한 차원 위에서 이 세상을 내려다볼 수 있도록 만드는, 우주의 법칙 그 자체를 형성하는 힘이다. 그렇기에 아스트라는 세상이 법칙을 무시하고, 새로 쓰는 것조차 가능하게 만들지. 너희 아슬란족의 군자학에서도 우주를 이루는 힘을 '기(氣)', 우주의 원리을 '리(理)'라 하여 우주 전체를 힘과 원리로서 쉽게 설명하고자 하지 않느냐."


"거기서 갑자기 군자학이 나온다고?"


"그래. 세상 모든 이론과 학문은 모두 진리의 파편 정도는 포함하고 있으니. 알 실라 방식대로 말하면, 아스트라라는 단어의 정확한 번역은 우주의 힘인 기의 본질을 표현하는 단어인 태허(太虛)라고 할 수 있느니라. 즉 아스트라는 우주 전체에서 가장 본질적인 힘이며, 이 우주 자체를 무가 아닌 유로서 존재하도록 하는 힘인 게지."


"아니, 나는 군자학 같은 거 잘 모르는데요. 그렇게 군자학이랑 엮어서 설명하는 건 마키한테나 가서 하라고."


언샤는 황제가 된 이후 이기론이니 태허론이니 하는 얘기를 책에서 읽거나 신하들에게 들은 적이 제법 많긴 했으나.

솔직히 태자방에 갇혀 평생에 걸쳐서 여러 민담이나 동화책만 강제로 읽고 제대로 공부 한 번 못 해본 입장에서는 그런 복잡하고 뜬구름 잡는 이론 따위를 잘 알고 있을 수가 없었다.


"어휴. 과거를 통과할 정도로 공부에 전념했다면 너희 알 실라의 가장 밑바닥 말단 관리들조차 군자학에서 논하는 모든 개념을 자신의 몸의 일부인 듯 속속들이 이해하고 있을 지경인데, 너는 그 모든 관리를 다스리는 황제씩이나 되어서 도대체 아는 게 뭐냐? 입에 수저를 잘 물고 태어난 것 외엔 정말 내세울 게 없는 놈이로구나. 네가 과거에 응시했다면 필시 시험관이 문장을 읽어보지도 않고 이 불쏘시개는 뭐냐고 불태웠을 게 분명하도다."


"시끄러워, 공부를 해볼 기회 자체가 없었던 걸 어떻게 하라고. 누가 알아? 내가 공부를 했으면 우리 형보다 더 천재였을 지도 모르지."


"흥, 물에 빠뜨리면 주둥이만 물 위로 떠오를 놈이로고. 각설하고, 아무튼 중요한 건 아스트라는 체내의 영혼과 얽혀 있다는 사실이란다. 그리고 영혼이란 무엇인가 하면, 그건 기억과 자아가 합쳐진 게지. 루이스가 시간을 아무리 되돌려도 우리의 기억이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 남아있는 건 아스트라가 어떤 차원과 시간선에서도 불변하는 전 우주의 기준점이기 때문이로다. 즉, 아스트라에 영혼과 기억을 담으면 어떤 상황에서도 자아가 변질하지 않고 연속성을 유지할 수 있게 된다. 그러니 루이스가 화신이 되기 전 시점의 과거로 돌아가도 루이스는 계속 화신이며 루이스가 시간을 되돌려도 우리는 계속 신이자 화신인 게다."


"아, 몰라. 그만 좀 아는 척해. 그놈의 아스트라 얘기는 난 도저히 머리가 아파서 이해 못 하겠으니, 그냥 앨리스가 죽음을 반복하게 된 이유나 좀 말해보라고."


이 얘기는 루카가 전에 마법이 없다면서 해준 설명과, 루이스를 추적하면서 해줬던 설명의 연장선상이긴 했으나.

복잡한 이론 설명 때문에 머리가 복잡해진 언샤는 그냥 이해하기를 포기하였다.


"아이고 답답해라. 뭐, 아스트라의 원리 같은 거야 네가 권능을 계속 연마하다 보면 알아서 스스로 깨닫게 될 테니, 내가 백 번을 말해주어도 소용이 없을 것이고. 중요한 건 루이스가 이미 화신인 상태가 된 상태에서 시간을 되돌렸기에 오후 9시가 되어도 루이스의 권능이 폭주하는 일이 없게 된 것이다. 그래서 앨리스의 죽음의 원인이 사라져버렸지."


"원인이 사라졌다고? 하지만 방금 전에 말한 인과율이나 연기사상에 따르면 세상에 원인이 없는 결과는 있을 수 없다며?"


"그렇도다. 원인은 없는데. 결과는 남아버린 것이다. 앨리스가 죽는다는 건 런던데리의 과거에서 이미 확정된 과거의 사건이며 인간이나 한낱 화신 따위가 미래에서 개입해서 바꿀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런데 어줍짢게 신의 권능을 일부만 갖고 있는 화신인 루이스가 이 도시의 물리적 법칙을 붕괴시켰기에, 죽음의 원인만이 그냥 사라져버렸지. 그러니 앨리스의 죽음은 매우 부자연스러운, 세상의 순리에서 벗어나 붕 떠버린 사건이 되어버린 게다."


"아니, 원인이 없으면 결과도 사라지는 게 정상 아냐? 왜 루이스가 폭주하는 사건이 사라졌는데 앨리스의 죽음은 그대로 남는 거야?"


"그건, 한 사람의 죽음이란 건 그냥 없었던 일로 만들기엔 너무나 지대한 영향력을 가진 대사건이기 때문이다. 사람이란 존재는 단순히 한 명의 개인이 아니다. 인간은 사회를 형성하고 타인과 교감을 나누며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는 무아(無我)의 존재지. 나비의 날갯짓이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날 거대한 폭풍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말을 아느냐?"


"나비 효과? 들어본 적은 있지."


"그래. 한낱 나비가 그럴 수 있을 진대. 한 사람의 죽음이란 건 도대체 얼마나 큰 파장과 변화를 일으키겠느냐. 하물며 그게 지대한 영향력을 가진 인간인 리들 공작의 딸이 빈민가 꼬마에게 살해당하는 사건이라면야. 그 영향과 변화가 얼마나 거대할지는 세상 모든 미래를 예측해낼 수 있다는 저 라플라스의 악마가 되살아나도 감히 단언할 수 없을 게다. 런던과 데리의 깊은 감정골, 가난한 자와 부유한 자의 갈등. 그게 한 소녀의 죽음으로 기폭제가 되어 어떤 거대한 투쟁으로 이어지게 될지. 누가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느냐?"


"글쎄, 단언은 못하겠지만. 그게 시작점이 되어 거대한 전쟁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없다고는 못하겠지. 대체로 내전이나 반란이란 건 사회 전체에 쌓이고 쌓인 부정적 감정이 어느 계기로 한 번에 폭발해서 생기는 것이니깐."


"그렇도다. 그리고 이 우주에게 있어서도, 소녀의 죽음이란 거대한 사건인 게다. 그 결과를 없었던 것으로 만들면 그 결과로 인해 생겨난 수많은 사건들, 변화들 역시 없었던 게 된다. 우주 입장에선 기껏 자신이 준비해둔 모든 각본이 화신 하나 때문에 모두 망가져 버리기 때문이다. 소녀가 죽으면 그럴 필요가 없는데. 소녀가 죽지 않으면 모든 미래의 가능성이 사라지게 되어버리지."


"굳이 변화해야 하는 거야? 그냥 평온하고 평화로운 상태가 유지되면 안 되는 건가?"


"인간은 그걸 원할지 몰라도 우주는 원하지 않는다. 우주는 끝없는 변화를 추구하는 존재거든. 이는 우주 입장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상태는 모든 엔트로피가 가장 최대점에 이르는, 모든 질서가 사라진 무질서의 상태이기 때문이로다. 우주는 모든 존재가 완벽한 혼돈에 빠지기를 원하는 존재다. 그런데 그러한 우주가 평화가 지속되며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 걸 좋아할 것 같으냐?"


"아니, 대체 왜 혼란 같은 걸 좋아하는 건데? 아니 우주에게 호불호가 존재한다고? 그렇게 얘기하니까 꼭 우주가 살아있는 생명체라도 되는 것 같잖아······"


"맞노라. 우주는 하나의 거대한 단일 생명체이니라. 단지 그 규모 자체가 초월적으로 거대할 뿐, 우주의 존재 방식은 생명체와 하나도 다를 게 없지 않으냐. 무로부터 태어나 찰나뿐인 유를 향유하다가 다시 무로 돌아가는 존재. 수많은 복잡한 내부 기관을 품고 있으나 결국은 그 모두를 잃게 될 운명인 존재. 결국은 죽음에 먹혀 무로 돌아갈 존재."


"우주에게도 죽음이 존재한다고?


"그래. 우주는 불멸의 존재가 아니다. 그렇기에 우주는 그 유한한 삶을 낭비하지 않을 변혁을 원한다. 그러므로 우주는 최대한의 혼란을 유지하기 위해 소녀의 죽음 자체를 없었던 일로 하기보다는 그 원인을, '핑계'를 만들어내 계속된 변화를 추구할 수밖에 없게 되었고. 일반적 물리 법칙인 시간을 뒤틀 수 있는 권능을 가진 루이스가 계속해서 앨리스의 과거를 조금씩 조작했기에. 그러한 '핑계'가 계속해서 바뀐 것이로다. 그래서 앨리스는 매번 다른 이유로 죽게 된 게다. 그게 가장 무질서하니까."


언샤는 돌고 돌아 이제서야 논리적으로, 이성적으로 그게 무슨 얘기인지 이해할 수가 있었다.


루이스가 사건의 원인을 지워버리자 무질서의 존재인 우주는 어떻게든 변화를 일으키기 위해 남아 있는 결과만을 이용하기로 마음 먹은 것이다.


우주 입장에서는 생명의 존재 자체가, 사회를 이루고 규칙을 만들고 그걸 지키는 인간의 존재 자체가 무질서를 원하는 자신의 본성을 거스르는 것이었으니.


인간은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가장 자연스러운 상태에서 벗어나 있는 존재였으며.


평화와 평온, 태평성대를 추구하며 여행하고 있는 언샤와 루카 행동은 그러한 우주의 무질서와 가장 대척되어 있기에 이루는 것 자체가 불가능에 가까운 위업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언샤의 이성은 그렇게 모든 전모를 이해했다.

하지만 언샤의 감성은 그 이야기를 이해하질 못했다.


아니, 이해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게 도대체가 무슨 말도 안 되는 개 짖는 소리인가?


"아니, 자연의 법칙이라며! 절대적 권위라며! 근데 '핑계'는 뭐야? 뭐가 그리 엉성해? 대자연의 순리가 그렇게 엉터리일 수가 있는 거냐고?"


언샤는 그렇게 따졌지만, 루카는 어느샌가 우유와 하나로 섞인 홍차에 입김을 불어 식혀 마시고는 한숨을 푹 내쉬고 나서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할 뿐이었다.



"언샤여, 그게 이 우주의 법칙이로다. 엉성하지도 않고 부자연스럽지도 않다. 그게 자연스러운 게다. 애초에 상식이니, 자연스러우니, 그런 건 모두 인간이 만들어낸 족쇄이며 선입견일 뿐. 자연은 인간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는 존재다. 인간 따위가 정의할 수 있는 게 아닌 게다."


"······."


"미시의 세계에서 입자는 관측되기 전까지는 중첩된 상태로 존재하며, 세상의 모든 사건은 단 하나로 결정되어 있는 게 아니며 언제나 수많은 가능성 중 하나가 확률적으로 결정되게 되어있다. 그걸 바꿔 미래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건 오로지 현재의 평범한 관측과 선택, 혹은 신의 권능인 아스트라뿐이고. 인간이 그걸 이해할 수 없는 건 당연한 일이다. 우주의 오묘한 법칙을 이해할 수 있다고 감히 말하는 자가 있다면, 그 자는 그냥 사기꾼이거나 혹은 진짜 신이겠지."


이번 이론 역시 언샤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루카는 과학이나 생물학 얘기를 깊게 하다 보면, 가끔씩 어떤 책에서도 등장하지 않는 기이한 관념들을 끌고 나와 그러한 사실을 모르는 현대인들이 이상한 것이라고, 고대엔 이 모든 게 상식이었다고 말하곤 하는 여신이었으니.


"그래. 그럼 그 우주의 오묘한 법칙을 다 이해하고 계신 잘난 여신님. 그럼 이것도 알아?"


언샤는 도저히 이해가 가질 않는 소리만 계속하는 이 여신에게 짜증이 나게 되어 일부러 무리한 질문을 하는 걸로 나름대로 그 여신의 권위에 도전하며 시비를 걸었다.


"그래, 기억이 잘려나가 대답해 줄 수 없는 게 아니면 다 대답해 줄 수 있으니 한 번 물어보거라."


하지만 여신은 그게 무례하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시비를 거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지 전혀 개의치 않아 하며 대답할 뿐이었다.


"저 소년과 소녀를 구할 방법. 루이스와 앨리스를 구할 방법을 알아? 평범한 인간인 나는 어떻게 하면 될지 전혀 감도 안 잡히는데."


"아, 물론 구할 방법쯤 당연히 알고 있노라. 네겐 절대 불가능하지만 내겐 아주 쉬운 방법이지."


"아, 그러셔? 그럼 뜸들이지 말고 빨리 말해보라고."


루카는 그 말을 듣고는 언샤에게 닥종이 뭉치를 꺼내라고 시키더니, 종이에 그림을 그리며 다른 방식으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자, 이성과 논리로만 얘기했더니 언샤 그대의 감성이 받아들이지 못하는 거 같으니.


그리고 소녀를 구하기 위해서는 먼저 반드시 소녀가 처한 상황을 이해할 필요가 있으니.


조금 감성적인 철학론을 섞어 지금 상황을 설명해 주도록 할까.


아, 이런. 그러고 보니 오늘은 아직 골동품점에서 만년필을 사지 않았던가.


그게 있으면 그리기 편할 텐데 이 빌어먹을 붓으로 그리자니 도저히 예쁘게 못 그리겠으니. 그림이 좀 엉성해도 이해해 주길 바라마.


자, 저 우주, 즉 드넓은 숲의 얘기는 집어치우도록 하자꾸나.

숲 대신 이 나무 하나만 보는 게다.


내가 그린 나무가 보이느냐?

음, 내가 봐도 아주 엉터리긴 하구나.


어쨌든 뿌리와 줄기와 가지는 있으니, 뭐. 이것도 나무인 게지.


이렇게 못생긴 나무가 어딘가에 있다고 치도록 하자꾸나.


한 사람의 운명, 한 사람의 삶이라는 건 내가 그린 이 한 그루의 나무와도 같다.


과거는 뿌리.

현재는 줄기.

미래는 가지.


그렇기에 한 인간의 삶을 변화시키는 건 한 그루의 나무에 개입하는 것과 같도다.


먼저, 미래를 바꾸는 건 가지를 치는 행위와 같은 것이다.


가지치기는 아주 쉬우며.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지.

그렇기에 과거에 개입하는 이례적 상황이 아니고서야, 미래를 바꾸는 건 아주 쉽다.


지금 자신의 행동을 바꾸는 것만으로도, 선택을 하나 하는 것만으로도 미래는 바뀌니까.



반면, 현재를 바꾸는 건 나무의 굳건한 줄기를 베는 것과 같은 것.

도끼와 같은 강력한 도구가 없으면 나무줄기를 베는 건 쉽지 않다.

그렇기에 대체로 현재를 바꾸는 건 죽음과도 같은 거대한 사건이지.


미래는 현재의 선택에 따라 가지가 되어 수십만 갈래로 분기하지만.

예상치 못한 사건이 일어나 선택조차 할 수 없는 죽음을 맞이하게 되면, 나무는 나무꾼의 도끼에 베여 쓰러진 것 같은 상태가 되어, 현재인 나무줄기 역시 사라지는 게다.


현재인 줄기가 사라지면.

당연히 줄기 위에 달린 가지, 미래도 모두 사라지게 된다.


이러한 죽음으로 인해 현재와 미래가 모두 사라지는 건 미래를 바꾸는 것에 비해 상당히 힘든 일이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로다.


살인 따위 지금 이 순간에도 세상 어딘가에서 매일 같이 일어나고 있으니.



마지막으로 과거는 현재와 미래를 있도록 하는 토대이자 뿌리로다.


수많은 인생의 경험과 무수한 선택이 가장 단단한 뿌리가 되어, 한 사람의 존재를 이루며 줄기인 현재와 가지인 미래로 이어진다.


그렇기에 과거를 바꾸는 건 가장 힘든 일이다. 그건 나무의 뿌리를 모두 뽑는 행위이기에.


과거를 바꿔 현재를 다시 쓰고 미래를 바꾸는 건 한 인간의 운명 그 자체를 존재 뒤바꾸는 일이기 때문이다.


나무를 뿌리까지 뽑아내어 과거를 바꾸는 것, 그건 신이 아니고서야 불가능한 행위지.



그리고 앨리스 같은 경우 다행히 그 과거의 뿌리까지 뽑혀나가진 않았으나.


죽음이란 도끼에 줄기가 잘려나가 현재와 미래를 잃고, 과거인 뿌리와 줄기 밑동만이 남아버린 존재라고 생각하면 된다.


나무가 베어진 순간 이미 그 죽음은 확정되어 더는 그 밑동에서 새로운 줄기가, 가지가 자라날 일도 없는 게 정상이다.


어떤 희망도 없는 게 지극히 당연한 게다.

소녀의 죽음은 이미 확정된 과거의 사실이니, 그 또한 소녀의 뿌리나 마찬가지이니.


줄기와 가지를 모두 잃은 뿌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썩어서 사라져버리고 마는 게 숙명인 게다.


하지만, 소년이 시간을 뒤튼 덕에, 그 어설픈 권능으로 물리적 법칙을 뒤틀어둔 덕에, 소녀의 뿌리가 썩지 않도록 보존해둔 덕에.


아주 조금 희망이 생겼노라.


언샤여.

그대는 봄에 잘린 나무 밑동을 본 적이 있느냐.


인간들을 위해 열매를 바치고, 가지를 바치며, 결국 그 줄기까지 아낌없이 내주고 결국 밑동만이 남은 나무를 봄에 본 적이 있느냐.


그 나무 밑동 위에 앉아 휴식하며.

모든 생명이 움트는 봄날의 햇살 아래에서 이 세상에 얼마나 아름다우며, 모든 생명을 만들어내는 자연의 기적이 얼마나 감탄스런 것인지 감격해본 경험이 있느냐?


그곳에서, 작지만 커다란 기적을 본 적이 있느냐?


나무꾼에게 모든 것을 내어주고 죽었다고 생각한 나무 밑동에서.

새로운 작은 줄기와 가지가 솟아나 죽은 줄 알았던 나무가 하나의 생명으로서 다시 부활하는 기적을 본 적이 있느냐?


나는 있노라.


그러니 그대에게도, 내가 본 그러한 기적을 보여주도록 하마.


마침 오늘 3월 3일은 불꽃으로부터 부활하는 축일인 라 발타너, 즉 부활절이니.

신이 일으킨 기적, 신에 의한 부활이 일어나기에 이보다 더 좋은 날은 없겠지.

그러니 내 신자와 아이들을 위해. 내가 직접 기적이란 무언지 보여주도록 하마.


루카는 그렇게 말하고는, 다 마셨기에 찌꺼기만이 남은 홍차 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이 소녀의 확정된 죽음을 바꿔 보이겠노라고.

신의 기적이란 뭔지 직접 보여주겠다고 선언하며.

여신답게 아주 자신만만하게.




언제나 독자 여러분들이 즐겁게 읽으실 수 있는 소설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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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한 나라의 언샤 16 - 뿌리, 줄기, 가지 21.06.17 15 0 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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