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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 퀘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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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치기자리
작품등록일 :
2017.10.29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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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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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1.24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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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쪽

2014년, 봄 #23

DUMMY

"오, 다음이 라미네."

"그래? 그럼 정우도 나오겠네?"

"궁금했는데 잘 됐다. 태상 선배가 자랑질을 워낙 하고 다녀서, 대체 얼마나 바뀐 건가 궁금했는데."


조연우가 흥미 가득한 미소를 입에 띄웠다. 그리고 곁에 있던 강주미를 바라보았다.


"라미는 뭐 말 없었어? 한정우 대해서."

"뭐, 그냥 어디서나 들을 그런 말. 한석훈 교수가 배 좀 아플 거라 하더라."

"크. 그 형이 배 아파하는 거 한 번 보고 싶었는데, 잘 됐네."


한석훈의 고고함은 어디에서나 유명했다. 그 고고함을 보통은 존경을 부르긴 했지만, 그만큼 질시 또한 따라붙기도 마련이었다. 설령 그게 유치한 질투가 아니라 해도, 한석훈이 태연함을 잃은 모습을 지켜보고 싶어하는 사람은 많았다. 대충 그런 거였다. 탑스타도 과연 집에서 평범하게 방귀를 뀔까, 하는.


"그나저나 우리가 이걸 반겨도 되나 모르겠네? 우리 애들 작년에 오케 뛰던 거 다 말아먹은 애인데."

"뭐 옛날 일 가지고 쫀쫀하게 굴게?"

"쫀쫀하게 구려는 게 아니라, 어, 음······ 떨떠름하게?"

"교수면 좀 체면 좀 챙겨. 괜히 뒷끝 있게 굴지 말고. 너 그러다 애들한테 꼰대 소리 듣는다?"

"아니, 나처럼 젊은 감성인 교수가 어디 있다고 꼰대야?"


조연우가 투덜거렸다. 둘이 그렇게 투닥거리는 가운데, 곁에 있던 다른 두 교수는 묘한 표정으로 평가지를 바라보았다.


"얘들 하는 거, 비탈리 샤콘느네?"

"인기 있는 곡이긴 하지."

"그만큼 느낌 없기 쉬운 곡이기도 하고."


둘이 조용히 소곤거리는 걸 들은 강주미가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말한대로였다. 비탈리 샤콘느는 그 강렬한 전개 때문에 꽤나 많은 바이올리니스트에게 사랑 받는 편이었고, 심지어 어떤 이들은 이걸 무대 위에서 연주하는 게 꿈인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그들이 늘 좋은 결과를 맞이한다는 건 아니었다. 비탈리 샤콘느는 어려운 곡이다. 기교적인 부분보단, 느낌적인 부분에서 특히. 폭발적으로 뿜어져나오는 그 선율을 감당하지 못한다면, 그 자극적인 멜로디는 오히려 주자를 천박하게 보이게 만들었다.


그럴 수밖에 없다. 혼자서 온갖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세상 모든 무게감을 감당하고 있다는 듯 이 곡을 뿜어내지만, 정작 청자들에게 그 소리가 밋밋하게 들린다면, 그보다 우스운 연주가 또 있겠는가.


'뭐, 라미면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만.'


조카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이라미는 확실히 달랐다. 그녀의 보잉이 만들어내는 소리는 전혀 다른 차원계에서 울리고 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당장 강주미도 스물한 살의 나이 때는 그 소리를 따라가지 못했다.


지금이야 장마루에 조금 가려져, 이 음악원 안에서도 온전한 마스코트 취급은 못 받고 있지만, 이라미가 언젠가 세계를 누비는 솔리스트가 될 거란 건 누가 봐도 기정 사실이었다.


그런 만큼, 굳이 이 연주에서 걱정 포인트를 찾으라고 한다면, 그건 이라미가 아니라 한정우에게 있을 터였다. 반주가 기본만 하면 뭐가 문제겠냐 싶긴 하겠지만, 비탈리 샤콘느에 있어서는 그렇지도 않았다. 비탈리 샤콘느의 반주자는 최대한 자기의 소리를 은밀하게, 은근하게, 그리고 은은하게 바이올린의 뒤로 깔아놔야 했다. 거기에 있나 싶을 정도로 존재감이 없어야 하지만, 그 모든 상황을 통제해야 한다.


과연 한정우가 그게 될까 싶었다. 물론 작년에 그가 반주를 꽤나 훌륭하게 했던 건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비탈리의 샤콘느는 교과서적으로, 그리고 솔리스트의 입맛대로 연주를 한다고 해서 훌륭하게 뽑히는 게 아니었다.


"정우, 이 아이가 과연 라미한테 밀리지 않을 수 있을까?"


조연우가 문득 중얼거렸다. 강주미는 대답하지 않았다. 무대를 보기 전에 이런 말을 아무리 해봤자, 무슨 의미가 있겠나 싶었다.


그리고, 둘이 들어섰다.


"어서 와요. 라미 학생. 드레스 차림 정말 잘 어울리네요. 예뻐요. 어떤 무대에 서든 관객들을 다 사로잡을 정도야."


오경현이 빙그레 웃으면서 칭찬을 던졌다. 물론 그 칭찬이 순전히 그녀의 이모인 강주미 때문에 나온 거란 걸, 여기서 모를 이는 없었다. 이라미도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차분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꾸벅 숙였다.


"감사합니다."

"오늘 연주할 곡은?"

"비탈리, 샤콘느입니다. 그리고 조금 덧붙이자면, 저는 이게 비탈리의 곡이라 생각하면서 연주할 생각이고······ 반주자는 이걸 다비드의 곡이라 생각하면서 연주할 것입니다."

"······흠, 둘이 서로 다른 해석을 한다고요?"


2중주를 할 때, 연주자가 늘 같은 해석을 갖고 함께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해석을 갖고 연주하는 게 그리 흔한 일이란 것도 아니었다.


교수들은 모두 한정우에게 눈을 두었다. 고집과 독기를 미처 다 씻어내지 못한 얼굴에는, 언뜻 한석훈의 흔적이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조연우가 조용히 질문을 던졌다.


"굳이 다비드의 곡이라 생각하는 이유는 있나?"

"네. 아무래도 그 편이 더 몰입이 되어서요."

"그런 사소한 게 사실 연주의 질을 나누긴 하지. 흠······ 묘하겠네. 비탈리와 다비드가 서로 소유권 분쟁을 하는 걸 지켜보는 느낌이겠어."

"누가 이길지 지켜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한정우의 담담한 답변에 교수들의 눈빛에 이채가 떠올랐다. 그가 무엇을 노리고 있는지 대충 눈에 보였기 때문이었다.


'······우리 라미랑 싸우려 하는구나?'


강주미가 묘한 눈빛으로 한정우를 바라보았다. 이라미는 그동안 그녀와 수업을 할 때마다 한정우에 대한 찬사를 몇 번이고 늘어놓았다. 솔직히 처음에는 오랜 친구에 대한 우정 때문에, 그가 잘 된 게 단순히 기쁜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조금 오버하고 있구나 싶었고.


하지만 최근 음악원 안에 한정우가 변했다는 소문이 쫙 깔린 걸 보면, 어쩌면 이라미가 오버를 한 게 아닐지도 모르겠다 싶었다. 물론 그렇다 해서 이라미가 질 것 같다는 느낌도 들지 않긴 했지만.


"시작하세요. 몰입할 시간은 드릴 테니까, 너무 서두르진 마시고."


이라미가 고개를 끄덕이고서는 눈을 감았다. 심호흡을 몇 번 하고, 한정우를 돌아보았다. 그게 신호였다. 한정우의 손이 건반에 올라갔다.


그리고, G단조의 서주가 조용히 무대를 내리눌렀다.


'······오.'


교수들은 누구 할 것 없이 순간 주먹을 움켜쥐었다. 뭐라 표현 못할 수 있는 색채감이 저 피아노에서 뿜어져나오고 있었다. 이제 막 화음 몇 개를 뽑아냈을 뿐인데, 알 수 없는 무게감이 좌중을 압도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벽을 넘은 피아니스트에게서만 느낄 수 있는 무게감이었다. 그리고 예전의 한정우였다면 절대 표현할 수 없는 무게감이기도 했다. 강주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제법이다 싶었다. 이라미가 예전에, 뒤늦게 피는 꽃이 있냐 물었던 게 이해가 갈 정도로.


그 때였다. 이라미가 바이올린을 턱 밑에 끼었다. 그리고 한정우의 반주 위에 바로 자신의 연주를 덧입히기 시작했다. 학생의 보잉이 뽑아내는 소리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날카롭고 선명한 소리가 귀를 찔렀다. 귀에 묵은 때가, 아니, 세상에 묻어있던 모든 때가 다 찢겨나가는 듯한 소리였다. 피아노의 뭉툭한 소리로는 따라잡을 수 없는 후련함이 거기에 있었다.


하지만 묘했다. 저렇게나 바이올린의 선율이 카랑카랑하게 울리고 있었는데, 조용히 그 밑을 받쳐주는 피아노의 소리에 왜 자꾸 신경이 쓰이는 것일까. 어떻게 저 건반은, 이 절규하는 바이올린에 못지 않은 울음 소리를 토해내는 것인가.


교수들은 어느새 자기들이 이 자리에 교수가 아닌 관객으로서 있다는 걸 발견했다. 선율이 폭발하든, 잔잔하게 내리깔리든, 한정우와 이라미가 만들어내는 화음은 그들로 하여금 숨을 쉴 여유조차 허락해주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은 불현듯 깨달았다.


'······말도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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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2014년, 겨울 #1 +31 17.12.29 16,703 392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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