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

피아노 퀘스트

웹소설 > 작가연재 > 현대판타지, 퓨전

양치기자리
작품등록일 :
2017.10.29 18:19
최근연재일 :
2018.02.01 12:00
연재수 :
36 회
조회수 :
386,977
추천수 :
12,376
글자수 :
152,658

작성
18.01.14 12:31
조회
10,126
추천
361
글자
11쪽

2014년, 봄 #14

DUMMY

"그거 다 정우 때문이잖아. 한정우 연주 한 번 제대로 보고 싶다고."

"그럼 다른 애들처럼 연습실이나 레슨실 앞에 대기 타고 있던가. 왜 굳이 남의 실기 평가를 훔쳐보려 해?"

"교수 체면에 그런 건 싫은 거겠지. 선배라고 해도 그러고 싶진 않지 않아?"


최연경의 말에 이태상이 떫은 표정을 지었다. 그들 마음이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불편한 건 불편한 거였다. 피아노과 재산들이 다른 과 교수들 눈에 훤히 다 보이는 게 그리 반갑지는 않았다. 그 때였다. 최연경이 문득 떠올랐다는 듯 입을 열었다.


"맞다. 이사장도 관심이 꽤 있나 보더라. 참관은 안 하지만, 촬영은 해서 보내라던데? 정우 영상."

"······뭐, 이사장이야 관심이 없으면 그게 더 문제겠지."

"아닌 척 하면서 아들 사랑이 꽤 지극한가봐. 아마 석훈 선배만 없었어도 직접 왔을 것 같은데."

"여전히 그 둘은 마주치기만 해도 으르렁거린대냐?"

"글쎄. 애초에 마주치기나 하나 모르겠네. 그나저나, 정우는 어때?"


최연경이 은근슬쩍 질문을 던졌다. 이태상이 그녀를 바라보지도 않고 말했다.


"뭐가."

"얼마나 기대하고 있냐고. 포텐이 좀 되는 것 같아? 피지컬은 옛날부터 알아줬었고, 심상 표현만 할 줄 알면 원이 없겠다고 안타까워하던 애였잖아."

"장마루랑 견줄 수 있겠냐 묻는 거냐?"

"······견줄 수 있어?"

"글쎄다."


이태상이 소파에 몸을 묻었다.


"마루는 천재야. 그나마도 이제 몇 발짝만 더 걸으면, 완성되는 천재. 반면 정우는 아직 걸어야 할 길이 좀 남아있지. 하지만 다 걷고 난 후에는······ 글쎄, 적어도 그 때쯤이면 더 낫고 말고가 무의미한 단계 아닐까."

"생각보다 점수를 좋게 주고 있구나."

"부럽냐?"

"······뭐, 조금은. 석훈 선배가 그 아이를 누구한테 포기했냐에 따라, 선배가 쥔 그 행운, 내 게 될 수도 있었던 거잖아. 어찌 됐든 석훈 선배만 안타깝게 됐네. 안 그래도 요즘 볼 때마다 얼굴이 안 좋던데."


그 말에 이태상은 잠깐 한석훈의 얼굴을 떠올려봤다. 늘 칙칙하던 그 얼굴은, 확실히 요즘따라 더 빛이란 빛은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실기 평가가 끝나고 나면 어떻게 될까.


아들의 성장은, 아버지에게 기쁨이 될까. 후회가 될까.


한정우는 무엇을 원할까.






"······좀 아쉬운데."


건반에서 손을 떼었다. 비창을 처음 선택했을 때, 나는 비창 안에 가득 녹아든 비극이 그 무엇보다 좋은 메세지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유치할지도 모르지만, 아들을 버린 아버지를 질책하기에 이보다 더 괜찮은 곡은 없다 싶었다. 그의 앞에서 화풀이를 하기도 충분했고.


게다가 베토벤의 초기작 특유의 불완전함도 내게 어울린다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보면 좀 내가 비창을 착각한 감이 없잖아 있었다.


베토벤이 말하는 비극은 사람의 비극이 아니다. 그것은 음악적인 비극이다. 적어도 내가 느끼기에는 그랬다. 인상주의가 사람의 내면을 표현하는 것에 중점을 뒀다면, 베토벤의 고전주의는 음악의 내면을 표현하고 있다.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라, 음악의 목소리를 내주고 있다.


비창을 완벽히 소화해내려면, 나의 목소리를 포기해야 된다. 본능적으로 깨달은 사실이었다.


뭔가 싫었다. 어쩌면 최근 낭만주의나 인상주의에 너무 찌들어버린 것일지도 몰랐다. 나의 목소리를 숨김 없이 내지르는 것에 너무 취해버린 것일지도. 하지만 이제 와서 곡을 바꿀 수도 없었다.


그리고 그 때였다. 세상이 잿빛으로 물들었다. 화들짝 놀라서 고개를 돌려보니, 현관 쪽에서 버져 음이 재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문을 열었을 때, 거기엔 낯익은 얼굴이 있었다. 힐끔 손목시계를 봤다가, 말했다.


"왜 이렇게 일찍 왔어."

"미안. 교통이 생각보다 뻥뻥 뚫렸네. 연습 중이었어?"

"······잠깐 쉬고 있었어. 들어와."


이라미를 안으로 들였다. 고급스러운 바이올린 가방 하나를 어깨에 맨 채, 이라미가 집으로 들어왔다. 그 와중에도 감탄하는 건 잊지 않았다.


"여전히 깨끗하네. 대단하다. 대단해."

"마실 건 알아서 갖다 마셔라."

"아, 손님한테 이렇게 까칠하게 굴 거야?"

"약속 시간 다섯 시였어. 그 때까지 너 내 손님 아니야.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가만히 있어. 연습 얘기도 꺼내지 말고."


이라미는 툴툴거리면서도 냉장고에서 다이어트 콜라를 하나 꺼내들었다. 나는 피아노 앞에 앉아 가만히 악보를 들여다봤다. 곧 귓가에서 베이지색 목소리가 묘한 향을 품고 맴돌았다.


"비창이라······ 잘 되어가?"

"그러면 지금 이렇게 보고만 있겠냐."

"고전주의 곡들은 대체로 어렵지. 그건 인정해."


이라미의 목소리는 조금 거들먹거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그녀의 주 분야는 고전주의에 있었으니까. 그녀는 교과서적인 연주를 선호했다. 원작자의 의도를 조금도 빼놓지 않고 완벽히 표현해냈을 때, 주자의 해석과는 관계 없이 그 연주의 수준은 정점에 오를 수밖에 없다는 게 그녀의 지론이었다.


그리고 그 사상은 고전주의와 꽤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 깔끔한 보잉과, 소름 끼칠 정도로 섬세한 운지. 그 모든 게 함께했을 때, 그녀의 연주는 듣는 사람을 18세기 고전주의의 한복판에 던져놓았다.


"······조언, 있냐?"

"나한테 조언을 찾는 거야?"

"네 고전주의는 알아주잖아."

"흠, 글쎄. 일단 좀 쳐봐. 1악장 정도만."


그 말에 망설이지 않고 건반 위에 손을 올렸다. C단조 특유의 음울한 분위기가 느릿한 전개를 따라 울리기 시작했다. 공기 속에 녹아든 소리가 무겁게 사방을 짓누르고 있다. 쇼팽의 프렐류드 4번을 칠 때와 비슷한 기분이다. 질식하는 듯한 기분. 하지만 조금 다른 질식이다. 뭐라고 해야 될까. 좀 더 남성적인 질식이라고 표현해야 될까.


쇼팽의 질식이 세상에 의해 목이 졸려지는 느낌이라면, 베토벤의 이 비창은 나의 손으로 다른 누군가의 목을 조르는 듯한 기분이다. 뭐라 표현 못할 폭력성이 베토벤의 젊음 속에 가득 녹아내려있었다.


하지만 그 우울했던 도입부가 지나간 후에는 분위기가 극적으로 반전된다. 재능 뒤에 숨겨진 베토벤의 자신감과 오만함이 흘러넘치는 느낌이다. 그리고 그 때였다. 막 손가락에 흥이 묻으려는 순간, 이라미가 손을 들었다.


"거기까지."

"······어땠어."

"뭐, 잘 쳤지. 적당히 베토벤스럽고, 적당히 한정우스럽고······ 또 한 교수님 냄새도 나고. 교수님 연주 좀 카피했지?"


그 짧은 연주로 많은 걸 봤다 싶었다. 조금 질린 표정으로 이라미가 바이올린 케이스를 열었다. 그녀가 활털에 천천히 송진을 먹였다. 사각거리는 소리가 마치 삐져나온 가시처럼 활털 여기저기에서 솟구쳤다. 이라미의 표정은 평소와는 달리 꽤 진지했다. 꼭 의식이라도 치르는 것처럼.


그녀가 입을 연 건 송진을 다 칠한 후였다.


"들어봐."


그리고 바로 비창의 주 선율을 연주해내기 시작했다. 갈색으로 그을린 손가락이 현을 짚을 때마다, 마찬가지로 아름다운 갈색을 띄고 있는 바이올린의 몸체에서 소리가 꿈틀거리는 게 눈에 보였다.


경이적인 순간이었다. 바이올린과 같은 현악기는 주자의 테크닉이 가장 선명하게 보이는 악기 중 하나였다. 보잉이 조금만 서툴러도 소리에는 금방 잡음이 끼고, 현을 조금만 잘못 짚어도 소리는 쉽사리 망가진다.


하지만 이라미의 연주는 완벽 그 자체였다. 무엇보다 소름 돋는 건, 그녀가 방금 전까지 내가 연주하던 1악장을 그대로 표현해내고 있다는 거였다. 나의 박자와 세기를 전부 흉내내면서.


연주는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이해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이라미의 연주를 듣는 동안 느낄 수밖에 없었다. 내 연주에서 뭐가 결여되어있었는지.


"······너무 극단적이네."


짧은 시간, 이라미의 소리는 너무 극적으로만 울렸다. 숨을 들이마시지도 않고 내쉬기만 했다. 바이올린의 날카로운 소리는 내가 갖고 있던 단점을 더욱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나의 연주에는 차분함이 없었다. 젊은 피아니스트가 대체로 그렇다지만, 너무 흥분해 있었고, 너무 목말라 있었다. 어쩌면 아버지에게 한 방 먹이겠다는 그 생각에 잡아먹혀 있던 걸지도 몰랐다.


이라미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전히 베이지색이고, 여전히 상큼한 향이 나는, 그 목소리로. 자비 없이 현실을 짚어내었다.


"어린애 같은 연주는 그만둬. 그런 식으로는 아무리 완벽한 연주를 해내도, 나중에 그 기억이 부끄러울걸?"

"······그렇겠지."

"한석훈 교수님 때문에 그래?"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지 않아도 이미 답을 알고 있을 테니까. 그녀가 내 볼을 꼬집었다. 어처구니가 없어 가만히 바라보자, 이라미는 쯧쯧 혀를 찼다.


"어리광 부릴 나이는 지났잖아. 이렇게 나를 봐달라고 애원하는 듯한 연주를 해봤자, 나중에 너만 쪽팔릴 것도 알 테고. 정직하게 부딪혀버려. 너답게. 누군가의 아들이 아니라, 그냥 한 명의 피아니스트로. 그게 낫지 않나?"


너무 정론이라서 반박할 말이 없었다. 나는 악보를 다시 바라보았다. 베토벤을 너무 내 마음대로 이용만 하고 있던 게 아닌가,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슬쩍 이라미를 바라보았다.


"······다시 한 번 들어줄 수 있어?"

"어머, 우리 위대하신 반주자님께서 부탁하시는데, 여부가 있겠어요?"


놀리는 듯한 목소리에 굳이 발끈하기보다는, 건반 위에 손을 올리는 걸 택했다.


아버지한테 보여주고 싶다. 당신의 아들이 이렇게 성장했다는 걸. 하지만 이라미의 말대로라면, 나는 그 자리에서 한석훈의 아들로 있어서는 안 됐다. 한정우로서, 한 명의 피아니스트로서.


······어렵다. 차라리 베토벤 본인이 되어서 연주를 하라는 게 더 쉬운 주문처럼 느껴질 정도다. 하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다시 건반을 눌렀다. 내 마음 속 가득한 애증을 외면하고, 오로지 베토벤만을 바라보았다. 그래. 오로지 그의 고독과 자신감과 야망에 눈을 두었다.


그 날,


처음으로 베토벤을 마주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비로소, 준비가 끝났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21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피아노 퀘스트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피아노 퀘스트 연재를 무기한 중단합니다. +112 18.02.03 12,974 0 -
36 2014년, 봄 #31 +18 18.02.01 7,500 274 12쪽
35 2014년, 봄 #30 +17 18.01.31 6,600 250 12쪽
34 2014년, 봄 #29 +12 18.01.30 6,606 269 11쪽
33 2014년, 봄 #28 +11 18.01.29 6,916 275 12쪽
32 2014년, 봄 #27 +27 18.01.28 7,357 311 13쪽
31 2014년, 봄 #26 +12 18.01.27 7,966 278 12쪽
30 2014년, 봄 #25 +25 18.01.26 7,668 274 8쪽
29 2014년, 봄 #24 +32 18.01.25 7,876 341 8쪽
28 2014년, 봄 #23 +45 18.01.24 7,965 340 8쪽
27 2014년, 봄 #22 +19 18.01.23 8,237 309 9쪽
26 2014년, 봄 #21 +26 18.01.22 8,451 315 11쪽
25 2014년, 봄 #20 +25 18.01.21 9,423 321 11쪽
24 2014년, 봄 #19 +30 18.01.19 9,915 338 8쪽
23 2014년, 봄 #18 +29 18.01.18 9,896 365 11쪽
22 2014년, 봄 #17 +34 18.01.17 10,101 422 8쪽
21 2014년, 봄 #16 +39 18.01.16 10,087 408 10쪽
20 2014년, 봄 #15 +36 18.01.15 10,077 364 9쪽
» 2014년, 봄 #14 +21 18.01.14 10,127 361 11쪽
18 2014년, 봄 #13 +20 18.01.13 10,216 345 9쪽
17 2014년, 봄 #12 +25 18.01.12 10,442 384 9쪽
16 2014년, 봄 #11 +26 18.01.11 10,480 355 9쪽
15 2014년, 봄 #10 +24 18.01.10 10,583 367 9쪽
14 2014년, 봄 #9 +13 18.01.09 10,767 337 8쪽
13 2014년, 봄 #8 +18 18.01.08 11,096 351 8쪽
12 2014년, 봄 #7 +14 18.01.07 11,311 377 11쪽
11 2014년, 봄 #6 +15 18.01.06 11,412 356 8쪽
10 2014년, 봄 #5 +26 18.01.05 11,599 377 11쪽
9 2014년, 봄 #4 +20 18.01.04 11,707 391 10쪽
8 2014년, 봄 #3 +15 18.01.03 12,133 352 9쪽
7 2014년, 봄 #2 +18 18.01.02 12,152 359 9쪽
6 2014년, 봄 #1 +22 18.01.01 12,883 357 10쪽
5 2014년, 겨울 #3 +28 17.12.31 14,275 381 11쪽
4 2014년, 겨울 #2 +30 17.12.30 14,851 431 9쪽
3 2014년, 겨울 #1 +31 17.12.29 16,703 392 11쪽
2 Intro #2 +45 17.12.28 20,081 398 8쪽
1 Intro #1 +21 17.12.28 20,644 251 1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