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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 퀘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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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치기자리
작품등록일 :
2017.10.29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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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2.01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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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1.29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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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2014년, 봄 #28

DUMMY

서원승 교수님께는 결국 바로 대답을 드리지 못했다.


내게 보여주신 그 분의 기대를 생각하면, 그 자리에서 바로 작곡을 부전공하겠다 말하는 편이 좀 더 멋있는 일일지도 몰랐다. 사실 마음 같아서는 이미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인 후였다.


하지만 그래서 더더욱 바로 대답할 수가 없었다. 이런 일을 마음 가지고만 정할 순 없는 거였으니까.


'작곡이라.'


작곡에 소질이 있다는 말은, 사실 어릴 적부터 들어온 말이었다. 하지만 그래서 일부러 본격적으로 공부하지는 않은 분야기도 했다. 만약, 작곡에 두각을 드러내 인정 받기 시작한다면, 내게 도망칠 곳이 생긴다면, 피아노에 더이상 필사적으로 매달리지 못하는 게 아닐까, 두려웠으니까.


이제는 사실 그렇게 신경 쓸 필요가 없는 문제긴 했다. 내가 작곡에 대해 가지고 있는 자질이 어느 정도일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피아노로도 더이상 그것에 밀리지 않을 자신은 있었으니까. 이제 내 피아노는 예전과 다르다. 더이상 도망칠 필요는 없다.


그런 면에서, 왠지 따로 생각을 해봐도 여전히 서원승 교수님이 주신 제안에 대한 대답은 예스가 되지 않을까 싶었다. 굳이 따로 개인 시간까지 내어가며 지원해주시겠다는 분이다. 거절할 이유보다는 승낙할 이유가 훨씬 더 많았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집에 돌아올 때였다. 집 앞에 주차되어있는 차가 문득 눈에 띄었다. 검은색 벤틀리 한 대가 그곳에 있었다. 엄마 차였다.


'······올 때도 되긴 했지.'


아마 지금쯤 엄마 귀에 소문이 들어가도 백 번은 들어갔을 거다. 솔직히 왜 여태 아무 말도 없나 싶었다.


집 안에 들어가니, 이라미가 늘 누워있던 소파 위에 엄마가 앉아있는 게 보였다. 그녀가 핸드폰에 시선을 둔 채 고개조차 올리지 않으며 물었다.


"왔니?"

"······오랜만에 아들 보면서, 얼굴 한 번 안 보려고 하네."

"아는 얼굴인데 뭐. 집 깨끗하더라. 더러우면 집에 가정부라도 하나 붙여주려 했는데."

"필요 없어요. 오히려 불편해."

"뭐 너처럼 깔끔하게 살면, 아줌마가 뭘 치워도 더러워 보이긴 하겠지."


그 말을 끝으로 잠시 대화가 끊겼다. 원래 이런 사람이었다. 사랑이 없다, 라고 표현하기는 조금 애매할지 모르겠지만, 그녀는 옛날부터 내게 별다른 관여는 안 하려고 하는 타입이었다. 헬리콥터 엄마들이 자기 자식들 인생을 한 숟가락이라도 더 통제하려고 난리칠 때, 그녀는 완전한 방목형 엄마가 되었다.


어쩌면 그 덕분에 내가 차라리 마음 편하게 자란 것일지도 모른다. 만약 내 상황에 엄마가 전형적인 강남 아줌마처럼 굴기라도 했다면, 글쎄, 아마 지금쯤 음악원이 아니라 정신병원에 있었을지도 모르지.


"그래서 무슨 일이에요. 여기까지."

"뭐, 그냥 오랜만에 칭찬이나 한마디 해줄까 싶어서. 많이 노력했나 보더라. 요즘 좋은 이야기가 많이 들려."

"······노력이야 언제나 했죠."

"그래. 언제나 했지. 근데 언제나 했던 노력인데, 이번에는 대체 뭐가 달랐기에 갑자기 이렇게 평판이 살아났을까?"


그녀가 그제서야 폰에서 눈을 떼고 나를 바라보았다. 뭐라 대답을 할까. 사실 공감각증을 설명하지 않으면, 어떤 설명도 거짓말이 될 텐데. 그런 생각을 하던 찰나에, 그녀가 어깨를 으쓱이며 입을 열었다.


"뭐, 굳이 말해줄 필욘 없다. 중요한 건 결국 네가 그 긴 슬럼프를 극복했다는 거니까. 축하해."

"너무 쿨하게 구는 거 아니에요? 그래도 아들 일인데."

"집착하다가 징그럽다는 소리 듣는 건, 한석훈한테 들은 걸로 족해. 두 번은 없다."

"······뭐, 덕분에 징그럽진 않은데."

"징그러우면 안 되지. 이렇게 집도 마련해줘, 평생 아무리 망해도 먹고 살 보장도 해줘. 네 입에 물린 수저, 이 세상 사람들 대부분이 부러워할 그런 수저야."

"아, 네."


떨떠름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녀가 피식 웃으면서 다리를 꼬았다.


"그냥 반포 음악회 졸업하면 적당히 송화 악기에 자리나 마련해줄 생각이었는데, 피아니스트 되면 앞으로 얼굴 보고 살기 더 힘들겠네."

"한국에 있다고 얼굴 자주 볼 거였으면, 우리가 오늘 이렇게 몇 달만에 만나진 않았겠죠."

"하긴, 그것도 그렇네. 너무 매정한 엄마인가?"

"얼굴 안 본다고 매정한가요. 매일 봐도 매정하게 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못 보던 사이에 말솜씨도 늘었네."


다시 또 침묵이 찾아왔다. 이번에는 굳이 그 침묵과 싸우려 하지 않았다. 그녀와 함께 있을 때 대화가 끊기는 건 사실 꽤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우리 둘 다 굳이 할 말이 없는데도, 어떻게든 말할 거리를 만들려 노력하는 타입은 아니었으니까.


그래서일까. 엄마가 다시 입을 열게 됐을 때, 그녀가 꺼낸 말은 여러모로 꽤 얼척 없는 말이었다.


"라미랑 사귄다며?"

"······대체 어디서 그런 못된 소문을 들은 거에요?"

"아냐? 무대에서 서로 아주 끈적끈적한 눈빛을 날렸다던데."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인 눈빛이면 몰라도, 끈적끈적은······."

"하긴, 너랑 라미가 사귈 리가 없지. 옛날부터 서로 만나기만 하면 투닥거렸는데."


그렇게 다시 침묵이 찾아오나 싶었다. 곧 그녀가 묘한 목소리로 혼잣말을 보탰다.


"······하긴, 어쩌면 그 정도 가지고 투닥거린다 말하는 게 웃길지도 모르겠네. 나랑 그 인간이랑 싸운 거 생각하면······."

"······."

"혹시 원망하고 있어? 우리 둘 이혼한 거."

"굳이 원망할 것까지 있나요. 두 분 인생인데."

"······정말 그걸로 괜찮아?"

"이렇게 말하면 매정할지도 모르지만, 솔직히 둘이 이혼할 때, 왜 이제야 하나 싶었어요. 둘은 같이 있을 때 말고, 떨어져있을 때 오히려 행복한 거 같았으니까. 서로 같이 있는 모습 보면, 그냥 둘 다 숙제하는 것 같았고."

"되게 못나보였겠네."

"뭐, 세상에 못나진 않은 사람이 얼마나 있나."

"다수를 말하는 건 의미가 없지. 나는 소수가 되기 위해 살았는데. 예쁘고, 멋있고, 도도한 인생."


그래. 엄마도 아마 엄마가 바라던 인생이 있었겠지. 저 철없고 자기중심적인 언행 뒤에는, 사실 그녀 나름의 고민과 생각이 쌓여있으리라. 하지만 결국 그녀도,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렇듯, 자기가 원하던 것처럼 반짝거리기만 하는 인생을 꾸미는 것에는 실패했다. 그녀가 태어날 때부터 물고 있던 금수저도, 결국 그녀를 성공한 인생을 안겨주지는 못했다.


"나는 아빠보다 높이 날 거에요."

"힘들걸?"

"······굳이 그걸 그렇게 말해야 돼요? 아무리 그래도, 이혼한 남편보다는 아들을 더 응원해야 되는 거 아닌가?"

"응원이고 뭐고, 네 아빠는······ 음, 멋있었어. 대단했고. 그러니까 날 꼬셨지."

"꼬신 게 아니라 엄마가 알아서 넘어간 걸로 아는데."

"하여튼! 한석훈이란 이름, 그렇게 쉽게 입에 담긴 힘들 거야. 차라리 세계적인 피아니스트가 되겠다 말하는 편이 더 그럴 듯하게 들리겠다."


이럴 때 보면, 정말 이 사람이 그렇게까지 아버지한테 소리를 지르던 사람이 맞나 싶다. 이혼을 했는데도, 그녀는 여전히 그에 대한 환상을 마음 속에 품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이혼을 했기에 여전히 그에 대한 환상을 갖고 있을 수 있는 걸지도.


엄마가 몸을 일으켰다.


"가게요?"

"얼굴 봤으니 됐지. 대충 잘 살고 있다는 것도 알겠고."

"멀리 안 나갈게요."

"하여튼 매정한 녀석."


그녀가 피식 웃으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리고 조용히 말을 보탰다.


"위로 오르는 것도 좋지만, 가끔 지치면 찾아와. 위로 정도는 해줄 테니까."

"······지금 라임 맞춘 거에요?"

"간다."


오랜만에 만난 아들인데도 망설임은 없었다. 그녀는 그 흔한 포옹 한 번 없이 집을 나섰다. 조용해진 집을 돌아보며, 나는 새삼 그녀가 내게 연주 한 번 부탁하지 않았단 걸 깨달았다. 뭐가 어떻게 변했나, 조금 궁금했을 법도 한데.


아마도 음악회에서 보면 된다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리라. 내가 음악회에 못 나가게 될 경우는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는 걸까.


음······.


오디션에서 떨어지면 안 될 이유가, 하나 늘어버렸다.






"정말? 그렇게 좋았어?"

"내가 언제 없는 말 지어내는 거 봤어?"

"허······ 그럼 이번에 한정우 또 협주곡 오를지도 모르겠네."


오보에과 김주영이 큰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피아노 협주곡은 보통 음악회마다 두 개 정도씩 하는 편이었다. 1군 오케스트라와 2군 오케스트라 각각 하나씩. 물론 오케스트라의 이름이 실제로 1군, 2군이지는 않았다. 다들 나름대로 화려한 이름이 뭔가 붙어있었지만, 1군의 단원들은 누구도 굳이 그 이름을 부르려 하지 않았다.


"1군으로 올지도 몰라."

"에이, 설마. 장마루가 있는데?"

"그건 모르는 거지."

"그 정도로 괜찮았다는 거야?"


김주영이 차마 짐작이 안 간다는 듯 이라미를 바라보자, 주변에서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다른 단원들도 이라미의 입을 바라보았다. 이라미는 묘한 미소를 입에 머금은 채 입을 열었다.


"난 최고랑만 일해. 몰라?"

"재수는 없는데, 납득은 되네."

"근데 한정우가 오케 자리 맡으면, 피아노과는 2년 연속 장마루랑 한정우가 협주곡 자리 독점하는 건데······ 다른 애들이 가만히 있을까?"


둘의 대화에 갑작스럽게 끼어든 목소리가 있었다. 팀파니 4학년 조유찬이었다. 이라미가 어깨를 으쓱였다.


"저희가 마르크스 신도들도 아니고, 여기서까지 평등을 구현할 필요는 없잖아요? 경쟁은 당연한 거죠. 못 이기면 뒤로 밀려야 하고."

"그래도 작년의 일 때문에 쉽진 않을 것 같은데. 특히 그 김성욱 교수님은······."


조유찬이 말을 흐렸지만, 그 자리에 있던 이들은 그가 무슨 말을 덧붙이고 싶었는지 다들 예상할 수 있었다. 김성욱의 성격은 유명했다. 당장 그들에게도, 조금만 연주가 마음에 안 든다 싶으면 온갖 욕설을 쏟아부었으니까. 다행히 인신 모독까지 가는 편은 아니긴 했지만, 그 욕쟁이 할머니 뺨치는 욕설 세례를 마주하고 있다 보면, 대략 정신이 혼미해지기 쉬웠다.


그런 그가, 작년에 졸도로 무대를 진행조차 못하게 만든 한정우를 곱게 보고 있을 리가 없었다. 꼬투리를 잡을지 안 잡을지까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절대 사근사근한 태도로 그의 무대를 접하진 않을 게 뻔했다.


"별로 걱정 안 해도 돼요."


하지만 이라미는 그렇게 말했다. 왜 그렇냐 묻는 눈빛들을 마주하며, 그녀는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옛 앙금 때문에 쓰고 싶지 않을 정도의 연주라면, 우리가 이렇게 걱정해줄 가치도 없는 거고, 만약 그 앙금을 이겨낼 정도의 연주라면, 마찬가지로 걱정해줄 필요가 없고."

"너는 어느 쪽이라고 생각하는데?"

"내가 방금 말했잖아요."


이라미가 활에 송진을 칠했다. 삭삭거리는 소리 너머로, 그녀의 목소리가 덧입혀졌다.


"1군으로 올지도 모른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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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2014년, 봄 #24 +32 18.01.25 7,877 341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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