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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 퀘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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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치기자리
작품등록일 :
2017.10.29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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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2.01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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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18.01.06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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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쪽

2014년, 봄 #6

DUMMY

내 지난 연주들을 들은 교수님이 내린 판단은, 내가 너무 낭만주의와 인상주의 쪽에 취해있다는 거였다.


사실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지적이었다. 그 말이 맞았다. 쇼팽, 브람스부터 라벨이나 드뷔시까지. 내가 요즘 주로 연주하는 건 거의 다 낭만주의나 인상주의의 영향권 안에 있는 곡들이 대부분이었다.


나로서는 어쩔 수 없었다. 리스트 같은 기교파 피아니스트의 곡을 제외하고 나면, 인상주의나 낭만주의 음악가들의 곡들은 내가 손가락만 빨면서 바라만 봐야 했던 곡들이었다. 그들 안에 숨어있는 시상은 내 밋밋한 연주로는 차마 표현해낼 수 없었다.


그 시가 내 손에서 흘러나오고 있는데, 흘러나올 수 있게 됐는데, 다른 곡들에 눈이 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 다 좋은데, 네 브람스는 너무 낭만주의야.


저번에 파가니니를 듣고 교수님이 말해준 거였다. 확실히 문제라면 문제인 부분이었다. 브람스는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음악가기는 했지만, 동시에 고전주의에 대한 고집도 버리지 않은 사람이었으니까.


나는 그런 브람스의 낭만적인 면만을 바라보았다. 표현해냈다. 고전주의적인 요소를 이해하지 못했던 건 아니리라. 그냥 사춘기 소년처럼, 갑자기 찾아온 사랑에 너무 설레였을 뿐이다. 평생 도도하게만 굴던 낭만주의가, 결코 나의 것이 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그 낭만주의가, 볼을 붉히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낭만주의의 살결에 취하고 인상주의의 숨결에 취했다. 그들의 소리 안에 가득 스며든 냄새를 맡을 때, 나는 비로소 내가 달라졌다는 걸 느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그렇게 사랑에 빠진 듯한 연주만을 보여줄 순 없었다. 그건 딱 사춘기 수준의 연주였다.


그래서 교수님은 내게 하이든을 안겨주었다.


모차르트, 베토벤과 더불어 고전주의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그리고 다른 둘에 비해서도 낭만주의와 더 연결 고리가 없는 사람이기도 했다.


솔직히 처음에는 조금 난감했다. 하이든은 평생을 귀족가의 전속으로 활동했던 사람이다. 그리고 당연히 그가 만든 모든 곡들을 귀족들을 위한, 꽤나 우아 떠는 곡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교수님이 선정해준 곡 또한 다를 건 없었다. 하이든의 피아노 소나타 46번. 알레그로 모데라토. 조금 빠르게, 트릴이 군데군데 묻어있는 주 선율을 유지하면서 깔끔하게.


박자감을 조절하는 루바토 같은 기법이 제대로 발달하지도 않은 시대였다. 정직하게, 깔끔하게 연주를 해야 했다.


건반을 두드리고 있다 보니, 묘한 생각이 들었다. 루바토를 활용하지 않다 보니 뭔가가 허전했다. 옛날에는 그런 박자 조절에 처절하다 싶을 정도로 감이 둔한 편이었는데, 지금에 와서는 그걸 활용하는 게 꼭 숨을 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공감각증으로 인해 내가 깨우칠 수 있었던 건 고작 그 정도 박자감이 전부가 아니었다.


손을 움직인다. 건반을 누르는 게 아니라 두드리듯이. 시야의 끄트머리에서는 해머가 쉴 새 없이 현을 때리고 있는 모습이 아른거렸다.


손가락 끝에 실리는 힘 하나하나에 모든 신경을 집중했다. 피아노의 아우터 링에서 쏟아지는 깃털이 어깨 위로 포근히 쌓여갔다. 그 깃털만큼이나 가볍게 건반을 눌렀다. 조금이라도 힘을 더 주면 소리가 돼지 멱 따는 소리처럼 굵어질 테고, 힘을 더 빼버리면 귀에 들리지 않을 정도로 흐릿해질 것이다.


해머의 움직임을 느꼈다. 서스테인 페달을 밟을 때마다, 현의 울림이 미묘하게 꿈틀대는 것을 느꼈다. 프레임 안에 가득찬 소리가 어떻게 꿈틀대는지, 대리석과 통나무의 색깔을 띈 소리들이 화이트 와인의 향을 뿜는 걸 느꼈을 때, 나의 손가락 위에는 점점 더 확신이 실렸다.


많은 클래식 팬들은 고전주의를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는 편이다. 특히 클래식에 입문한 사람들 중에서 고전주의의 팬을 찾는 건 매우 힘들었다. 낭만주의나 인상주의는 소리의 흐름 자체가 하나의 메세지를 담고 있지만, 고전주의는 소리의 메세지보다는 소리 그 자체가 가진 아름다움에 집중하는 편이었으니까. 그 정형적인 소리로부터 재미를 찾는 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떤 면에서는 나의 옛날 연주를 닮아있다고 해도 좋았다. 물론 고전주의의 색채감이 건조하다면, 나의 옛 연주는 아예 색채감이 없었던 것인 만큼 이런 비교는 고전주의에 대한 모욕일지도 모르지만······.


하지만 그래서 되려 고전주의를 이해할 수 있는 감도 있었다. 하이든의 소리가 정형적인 건, 그의 재능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그저 시대가 그에게 발상의 전환을 허락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 제한적인 정보 속에서도, 그가 나열한 음들은 하나하나가 아름답다. 쇼팽의 음악이 아름답게 조각된 대리석을 보는 듯하다면, 하이든의 연주는 그냥 그 자체로 아름다운 바위 절벽을 보는 것만 같다.


그래. 나는 낭만주의에 취해있었다. 하지만 그 말이 내가 고전주의의 맛을 여전히 표현할 수 없다는 건 아니었다. 그저 낭만주의에 있어 나의 변화가 조금 더 두드러졌을 뿐이지, 고전주의의 앞에서도 내 연주는 그렇게 초라해지지 않았다.


하이든의 소리 속에서 깔깔 웃고 있는 우아함을 바라보았다. 이태상 교수님 대신, 나의 주변을 감싼 채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을 귀족들을 느꼈다. 하이든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들의 화려함을 칭송하는 듯한 이 소리 속에서, 대단하신 귀족님들이 제게 준 이 자리에 그저 감사하고 있었을까. 이 정도로 아름다운 소리를 만들어낼 수 있는 사람이?


모르겠다. 만약 그렇더라면 지금 나의 연주는 진짜 하이든의 목적과는 꽤 차이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 연주를 듣고 있는 사람들이 모두 넋을 잃기를 바랐다. 사소한 잡담은 물론, 잡생각마저도 멎어버리기를 바랐다. 그들에게 전율과 감동 외에 그 무엇도 허락하고 싶지 않았다. 이 자리의 주인은 오로지 나여야만 했다.


소리 하나하나가 나의 그 열망에 달궈지고 있었다. 피아노가 몸을 떠는 게 느껴졌다. 열정으로, 야망으로. 나도 그녀와 함께 떨었다. 내 떨림을 조금도 남기지 않고 온전히 그녀의 위로 쏟아내었다.


느껴진다. 하이든의 소리 위로, 나의 목소리가 덧입혀지는 게.


이 연주가, 오롯이 나의 것이 되어가는 게.






"교수님, 정우 이야기 들었어요?"


장마루는 한석훈의 레슨실에 들어서자마자 설렘 가득한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그의 교수는 언제나와 같이 피로가 가득 쌓인 얼굴을 하고서는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이야기."

"정우 연주가 옛날하고는 확실히 달라졌대요. 저도 아직 들어보지는 못했는데······ 브람스의 파가니니를 완전 낭만 그 자체로 연주했다던데요? 들은 사람들이 소름 돋을 정도였다던데."

"······."


한석훈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장마루는 그제서야 제가 괜한 말을 꺼냈나 걱정하기 시작했다. 생각해보면 한석훈에게 한정우는 역린 같은 존재였으니까. 자기 손으로 포기한 아들 이야기가, 어떤 이야기라 한들 반가울 리 없었다. 한석훈이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발전을 했다면······ 그걸로 좋은 거겠지. 하지만······."


한석훈을 말을 흐렸다. 하지만 그 이후에 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는 뻔했다. 그는 소문을 믿지 않았다. 하긴, 평생 동안 가망이 보이지 않던 아들이 한순간에 변했다는 소문을 바로 믿는 것도 조금 이상할지 몰랐다.


어색한 분위기 속에 레슨을 하려던 도중이었다. 하이든의 피아노 소나타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 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장마루의 표정이 묘해졌다. 한석훈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약속이나 한듯이 레슨실 밖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 하이든, 뭔가 심상치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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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2014년, 봄 #5 +26 18.01.05 11,600 377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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