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견마지로의 만려일작(萬慮一作)

낙조십일영

웹소설 > 작가연재 > 대체역사, 일반소설

완결

견마지로
작품등록일 :
2022.05.11 10:12
최근연재일 :
2022.08.29 10:35
연재수 :
121 회
조회수 :
51,259
추천수 :
2,441
글자수 :
749,279

작성
22.05.11 10:22
조회
1,813
추천
67
글자
12쪽

음력 사월 열 하루 (1)

DUMMY

메마른 봄가뭄은 해가 바뀌고도 백일이 넘도록 지속되었다. 겨울이 가고 날이 밤보다 길어졌지만 여전히 땅은 서늘하면서도 퍽퍽하였다.

성문이 열리고 들어서는 사람도 여느 해보다 훨씬 줄어든 것 같았다. 사람들은 모두 바깥을 돌아다니면서도 헝겊으로 입을 감싸고 흙바람이 불어오면 행여 티끌이 눈에라도 들어갈세라 죽립을 깊게 눌러쓰고 바깥을 돌아다녔다.

사내가 회빈문을 통해 성도 안으로 들어선 것은 사시(巳時: 09:00~11:00)가 거의 다 된 시점이었다. 그 때까지도 세찬 흙바람이 좌우로 갈라져 몰아치는데, 죽립대신 검은 발립에 군청색 첩리를 두른 사내는 누런 말 위에 오른 채 천천히 성벽 안으로 들어섰다. 사내는 과묵했고, 통부를 파수에게 보여주고 천천히 서쪽으로 말머리를 돌리는 와중에도 용건만을 짧게 말했을 뿐이었다.

사내를 태운 말이 멈춘 곳은 창령방 서쪽에서 슬쩍 번화가로 나가는 언덕배기 앞에 자리한 자그만 초가였다.

초가는 작은 마당에 꽉 들어차는 넓은 평상이 하나 놓여 있었다. 얼핏 보기에는 탁주를 만들어 내 파는 곳 같기도 하고 일반 어염같기도 한 기묘한 곳이었는데 사내는 불문곡직 마당 안으로 들어서더니만 말을 되는대로 기둥에 얽어 매고는 성큼 발을 옮겼다.

안에서 인기척을 듣고 부엌에서 얼굴을 빠끔히 내민 아낙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처마 안으로 들어서는 발립 사내를 쳐다보았다. 황토 바람 사이로 허깨비처럼 들어온 사내는 말없이 장승처럼 우뚝 서 있었다.

“뉘시오?”

살짝 말랐지만 수더분하니 생긴 여인네를 보던 사내는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다.

“오경출 천호의 소개로 온 사람이외다. 숙박(宿泊)이 가능하다 들었소만.”

발립을 벗어 마루에 내려놓은 사내는 슬쩍 머리를 빗어 흙먼지를 닦아내렸다.

뻣뻣하게 자라 땅을 향해 그대로 뻗어내린 수염 위로 날카로운 눈매와 눈매만큼이나 매섭게 내리뻗은 콧날이 여인의 눈 앞에 드러났다. 한참동안 사내를 반신반의하는 눈매로 쳐다보던 여인은 그제야 손바닥을 찰싹 치더니만 사내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오군관 말씀이오? 성도에서 나간 지가 벌써 이년은 넘었을 거예요! 그 이가 여기를 말해줬다고요?”

“지금 파평(현 파주)에 있소이다. 나와 같이 있었소.”

한 눈에 봐도 알아챌 법한 무관의 말투와 행동거지였다. 여인은 사내가 말 안장위에서 짊어지고 내린 긴 꾸러미가 뭔지 안 봐도 알 것 같다는 표정이었다. 여인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흙을 터는 사내를 보며 부엌에서 천천히 나와 허리에 양손을 얹었다.

“그 놈이 군관 나리를 제집에서 머물라고 했다고요? 아니, 내 집이 무슨······”

“숙박이 가하지 못하면 나가겠소.”

여인은 도끼눈을 뜨고 사내의 옆모습을 쏘아보았다. 흙바람은 아직도 세차게 몰아치는데 사내는 여인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묵묵부답으로 처마 아래에서 조용히 먼지를 털었다. 그 때 슬쩍 방의 여닫이문이 열리더니만 예닐곱살 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가 고개를 내밀고 사내를 쳐다보았다. 아이는 사내의 눈을 피하지 아니하였고 사내 역시 빤히 아이를 쳐다보더니 여인에게 한 것처럼 슬쩍 고개를 숙여 보였다.

“방을 얻으러 왔다.”

사내의 말투는 부박했지만 아이를 집주인 대하듯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말없이 쳐다보던 여인은 허리에 얹은 손을 천천히 풀었다.

“방은 있어요. 얼마나 계실 건데요.”

“안 되면 열흘, 일이 진행되면 더 오래 있을 수도 있고.”

사내는 품 안에서 뭔가를 꺼내 슬쩍 툇마루 위에 올려놓았다. 새하얗게 번쩍이는 것을 본 아이가 화들짝 놀라 어미를 바라보는데, 여인은 가타부타 말없이 사내 쪽으로 다가오더니만 마루에 놓은 쇄은(碎銀)을 슬쩍 잡아 품 안으로 넣었다.

“열흘까지는 묵으셔도 돼요. 건넌방은 늘 비어있으니까.”

사내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어미의 말이 떨어진 뒤 슬쩍 사내의 얼굴을 이리저리 살피던 아이가 호기심 가득한 말투로 사내에게 말을 걸었다.

“군관님은 뭐 하러 개경에 오셨어요?”

“혹여 이상한 일이 있으면 관에 발고할 거예요.”

아이와 어미의 목소리가 거의 동시에 사내의 귓속에 들어왔다. 사내는 고개를 천천히 돌리더니만 아이의 눈동자를 보며 짧게 말하였다. 사내의 입술이 슬쩍 위로 들린 것 같다고 여긴 것은 아이의 착각이었을지도 몰랐다.

“이방과 장군의 저택이 어디냐. 내 그곳에 볼일이 있어 왔느니.”

모자의 눈동자가 서로를 바라보더니 이내 다시 사내의 얼굴을 향하였다. 바람은 조금씩 세가 꺾이는 중이었다.


----------


창령방 중리 한복판에 놓인 거대한 솟을대문 안쪽은 작은 궁궐과 다름없었다. 선대의 제왕들이 모두 솔선수범하여 검약을 부르짖었지만 개경의 공경들은 자신의 누각과 담을 높이고 대문을 크게 하여 자신의 위신을 밖에 드러냄을 거리끼지 않음이 작금의 상례였다.

이 거택 역시 다른 고관대작들의 집과 다를 바가 없었다 거택의 중문을 열고 들어서자 그 안에 펼쳐진 장원의 규모는 작은 절과 맞먹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 곳에는 수많은 사내들이 모여 앉아 있었는데, 하나같이 허리에 짧은 칼을 차고 머리를 천으로 질끈 묶은 것이 지금이라도 영만 내리면 문을 박차고 성내로 쏟아져 나갈 기세였다. 바람은 이미 그친 지 오래였고, 사내는 흙냄새 가득한 마당과 처마 아래 제비들처럼 줄지어 앉아있는 사내들을 보며 주랑을 통해 저택을 가로질렀다.

사내는 중문 안에서 자신을 인도한 사내가 검은 복색을 두른 한 사내에게 자신의 소개장을 건네는 것을 묵묵하게 지켜보았다. 검은 첩리(帖裏)의 사내는 손에 쥔 소개장과 들어온 발립 사내를 연이어 바라보더니 가타부타 말없이 그에게 손짓하였다.

“따라오시게.”

발립 사내는 검은 첩리의 뒤를 따랐다. 두 사내는 바람이 몰고 온 매캐한 기운이 감도는 마당의 한 가운데로 걸어들어갔다.

검은 첩리의 사내는 발립사내를 마당 한 가운데 세워 놓더니만 손짓으로 처마 밑에서 흙바람을 피하던 사내 둘을 손짓하여 불렀다. 두 사람 다 어깨가 벌어지고 기골이 장대한 것이 분명 칼밥으로 먹고 사는 사내였다.

첩리 사내는 발립 사내에게 슬쩍 다가서더니만 어느새 손에 쥐고 있던 목검을 발립 사내에게 건넸다.

“대충 어찌 돌아가는 지는 짐작하고 있으렷다?”

“실력을 보자는 말은 추천서에 없었소만.”

“여기서야 당연한 일 아닌가. 자네도 알고 왔을 테고.”

검은 첩리의 말은 짧고 명확했으며, 한 치도 양보할 수 없다는 단호함이 보였다.

발립사내가 고개를 짧게 끄덕이자 검은 첩리는 자신의 뒤에 서 있던 두 사내에게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뒷걸음치기 시작했다. 어느 새 넓은 마당에는 세 사람이 삼각형을 이루며 서 있었다.

“모두 손에 정(情)을 두어라. 인명이 상하면 아니된다.”

검은 첩리사내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두 명의 장한이 칼을 어깨위로 올리고 발립 사내의 양 옆에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발립 사내는 목검을 한 손으로 들고 왼손으로 천천히 발립을 벗어 목 뒤로 넘겼다. 사내의 서늘한 눈빛이 좌우의 사내들을 노려보았다.

두 사람 모두 어깨 위에 칼을 바로 세우고 허리를 살짝 숙인 채 좌우의 무릎을 굽혀 고양이처럼 걸어오고 있었다. 실전을 뛰어본 사내들의 움직임이었다.

발립 사내 역시 한손으로 칼을 쥐고는 천천히 옆으로 몸을 돌렸다. 두 명의 사내가 전진해 들어오더니 거의 동시에 걸음을 멈추었다. 발립 사내의 몸은 멈추지 않은 채 사선으로 움직이면서 좌측의 사내를 향해 몸을 좁혀 들었다.

순간, 왼쪽의 장한과 발립사내가 맞붙으며 공간을 좁혔다. 나무와 나무가 맞부딪히는 소리가 연거푸 울렸다. 서너 번, 아니면 대여섯번. 사람들이 오간 궤적과 소리를 셈하기 전에 이미 좌측의 장한은 무릎을 꿇고 목검을 바닥에 꽂았다.

검은 발립 사내는 순식간에 다리를 움직여 남아있는 장한의 몸을 향해 칼을 세웠다. 울대를 향해 정확하게 날아가는 발립사내의 목검이 장한의 목검에 튕겨나갔다. 그와 함께 인상을 찌푸리던 장한의 칼이 칼을 튕겨낸 기세 그대로 한바퀴를 손아귀에서 돌더니만 그대로 발립사내의 얼굴을 강타하였다. 하지만 발립사내의 얼굴은 그 자리에 있지 않았다.

발립사내의 몸이 마치 먹이를 잡는 사마귀처럼 그대로 아래로 바싹 붙더니만 불안정한 자세에서 그대로 허공을 향해 목검을 뿌렸다. 나무와 나무가 맞부딪히는 소리 대신 나무와 살갗이 부딪히는 소리가 마당에 울려퍼졌다. 슬쩍 첩리사내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어느새 풀썩 뒤로 쓰러지는 장한의 몸을 탄 발립사내가 쓰러진 사람의 가슴팍에 무릎을 얹고 있었다.

“그만!”

발립 사내가 다시 몸을 일으켰다. 먼저 일격을 당하고 무릎을 꿇었던 사내가 갈빗대를 어루만지며 천천히 일어섰다. 한편 마지막에 일격을 맞은 사내는 눈을 껌벅이면서도 여전히 마당에 누워 있었다. 첩리사내가 누운 사내를 살펴보더니만 목검을 돌려주는 발립사내를 보고 입맛을 다셨다.

“손에 정을 두라 하였을텐데?”

“정을 둔 것이오.”

칼을 받아든 첩리사내의 냉랭한 눈이 여전히 한기를 내몰고 있는 발립사내의 눈을 마주보았다.

“전장에서 배운 칼이로군.”

발립 사내가 쓰다달다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첩리사내는 더 물어볼 것이 없다는 듯 앞장서서 마당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발립사내는 다시 발립을 고쳐 쓰고 검은 첩리의 뒤를 따라 다시 중문을 건너갔다. 사내는 넓은 장원의 문지방을 딛고 또 문을 건너서 처마와 돌담이 뼈와 내장처럼 이어진 깊숙한 그늘 속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

“내 생각보다 훨씬 일찍 찾아왔구먼.”

작은 별채에 좌정하고 앉아있던 장한은 손에 들린 소개장을 읽자마자 고개를 끄덕이며 조금 전 검결을 끝낸 사내에게 자리를 권하였다.

어깨가 태산같이 벌어지고 수염이 풍성하게 귀밑까지 올라간 곰 같은 사내의 얼굴에는 바둑돌같이 시커먼 눈동자와 그 아래 눈동자만큼이나 커다란 사마귀가 붙어 있었다. 비록 유자들이 쓰는 문라건을 뒤집어쓰고 있지만 사내의 모습에서는 문사의 문자향보다는 무인의 피냄새가 더욱 짙게 배어나왔다.

“대정(隊正) 견태고라······본관은 황간이고···..파평에서 왔다고”

“그렇사옵니다.”

곰 같은 사내의 옆에는 검은 첩리를 입고 역시나 두건을 쓰고 있는 남자가 시립한 채로 견태고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짐작컨데 이 곰 같은 사내의 별장(別將)이라도 되는 듯싶었다.

“내가 솜씨 좋은 사람을 추천해 달라고 은밀하게 대여섯군데 첩지를 돌렸는데 자네 이름이 세 군데에서 동시에 올라왔네. 그런데 그곳이 각각 다른 곳이더군.”

“거처를 많이 옮겨다녔습니다.”

“황보림 절제사를 아시는가?”

“소싯적 막하에서 몇 번 모신 적이 있습니다.”

“칼부림이 대단하고 기사(騎射)의 기예도 출중하다 들었네.”

사내는 문라건의 거한이 하는 말을 잠자코 듣고 있었다. 문라건의 사내는 그를 가만히 보더니만 뭔가를 잊었다는 듯 씩하니 웃음을 지어보였다. 조금 전 까지만 해도 죄인을 심문하던 나찰같던 냉엄한 표정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친근한 장형 같은 얼굴이 드러났다.

“이거 미안하게 되었네! 일에 집중하다 보니 아무리 공사 간이라지만 내 소개를 잊었구먼! 난······”

“알고 있사옵니다. 이방과 영감. 소인은 이미 영감을 뵌 적이 있습니다.”

사내의 말투는 덤덤하기 그지없었다.

“소인, 상경하는 길에 판밀직사사로 영전하셨다는 소식도 들었사옵니다.”

문라건의 사내가 눈을 껌벅이더니 견태고라 불린 사내를 바라보았다.

“자네, 나를 알고 있었는가? 날 본 적이 있는가?”

“소관, 전장에서 장군을 뵌 적이 있습니다.”

장군이라는 말에 문라건을 쓴 사내의 눈썹이 슬쩍 올라가며 새삼스레 사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나를? 자네가?”

“소관, 황산(黃山)에서 장군과 문하시중 대감 덕에 구명(求命)한 적이 있습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1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낙조십일영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3 음력 사월 열 하루 (2) +3 22.05.11 1,337 59 16쪽
» 음력 사월 열 하루 (1) +1 22.05.11 1,814 67 12쪽
1 공양왕 사년 음력 사월 엿새 +8 22.05.11 3,870 95 15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