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나무 하나 없는 황량한 산. 폭설로 인해 거대한 빙산으로 변해 버린 험한 산을 소년 관산이 힘겹게 오르고 있었다.
그는 어디서 났는지 몸에 맞지 않은 옷들로 온몸을 칭칭 동여맨 상태로 끊임없이 산을 오르고 있었다.
" 치사합니다. 놈을 죽일 방법을 알려 달라는 말에는 쌩까면서 왜 제 수명은 가져 가는 겁니까? "
[ 기본 요금이라 생각해라 ]
" 순 도둑놈의 새끼들!! "
이곳까지 오는 동안 몇 차례나 죽을 고비를 넘긴 관산은 그때마다 관천주로 겨우 위기를 모면하고 여기까지 온 것이다.
지금 몸에 걸치고 있는 옷가지들도 관천주가 알려준 곳에 있는 시신들에게서 벗겨낸 것이다. 이 옷들이 아니었음 그는 이곳까지 오지도 못하고 벌써 얼어 죽었을지도 몰랐다.
생명이라는 비싼 댓가를 치루지만 관천주 덕분에 추위를 버틸 옷가지와 줄인 배 그리고 목 마름은 해결할 수 있었다.
하지만 포기할 줄 모르는 마수의 추격으로 인해 관산은 정말 죽을 맛이었다.
" 하아 하아 "
이미 감각까지 사라진 몸. 모든 걸 포기하고 당장이라도 눈 밭에 드러누워 한숨 거나하게 자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결코 이런 곳에서 삶을 포기할 수 없어 그는 걷고 또 걸어야 했다.
" 미친 돌덩이 색기 "
방금 전에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뒤를 돌아본 관산은 저 밑에서 여전히 따라오고 있는 마수의 모습을 확인하고 욕설이 터져 나왔다.
" 징글징글 한 놈 "
[ 흥 내가 보기에 너도 만만치 않아 보인다 ]
" 관천주는 놈이 오르막에서 거의 속도를 내지 못한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을까요? "
[ 나한테 묻지 마라 나에게 저런 것들에 대한 정보는 없으니까 ]
노인은 관천주를 부숴버린다는 관산의 말에 토라졌는지 지금까지 묻는 말에 대답만 하고 있었다.
" 저도 화가 다 풀린 건 아닙니다. 어르신도 관천주의 댓가가 생명력이란 사실을 일부러 숨겼지 않았습니까. "
[ 시끄럽다 배응망덕한 놈 ]
어찌 됐건 관천주의 신비로운 능력 덕분에 자신이 아직까지 마수에게서 도망을 치고 있다는 사실 만은 인정하기에 관산은 먼저 노인에게 사과를 건넸다.
" 아까 했던 말은 취소하겠습니다. "
[ .............흥 ]
진심 어린 사과가 콧방귀로 돌아왔지만 왠지 노인이 조금 누그러졌다는 느낌을 받았고 이후로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 이제 그만 포기할 때도 된 거 같은데 저 녀석도 정말 끈질기구나 "
점점 체력이 바닥나고 있는 상황에 다리도 떨어지지 않고 있었지만 어찌 됐든 앉아서 잡혀 먹힐 수 없던 그는 다시 죽기 살기로 발을 움직였다.
쉽게 끝날 것 같았던 인간과 마수의 추격전은 다시 한동안 계속되었다.
다음날. 밤새 능선을 세 개나 넘은 관산은 어느새 놈과의 거리가 500미터까지 좁혀져 있다는 걸을 알아차렸다.
" 큰일이다. 눈 때문에 도무지 위치를 파악할 수 없으니 이걸 어쩐다? "
밤새 화가 많이 풀렸던지 관천주가 다시 그를 유혹해왔다.
[ 궁금하면 관천주를 던져봐 ]
" 안됩니다 여기까지 오면서 뺏긴 수명이 10년치를 넘어갑니다. 이러다간 마수에게 잡히기 전에 수명이 다해 죽을지도 모릅니다 "
[ 아직 어린 녀석이 그 정도 가지고 뭘 그러느냐 ]
" 모르시는 말씀입니다. 인간들의 수명은 전부 제각각입니다. 제가 타고난 수명이 얼마나 되는지도 모르는데 막 소비하다 5분 후에 급사 할 수도 있는 일입니다. "
[ 하긴 그렇긴 하겠다..인간들의 수명은 다른 종족들보다 훨씬 짧으니까 ]
" 예....그러니 최대한 수명을 아껴야 합니다. "
[ 그래. 알겠다. 네 목숨이니 네가 알아서 하거라 ]
지난 몇 년간의 담군 생활을 바탕으로 대략적인 방향을 잡고는 있지만 벌써 나타나야 할 평안시가 나타나지 않아 관산은 내심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경계 밖을 이렇게 돌아다녔는데도 기형수나 나락들의 습격을 한 번도 받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물론 관산은 그 이유까지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인생사 새옹지마라고 했던가 3급 괴암마수에게 쫓기다 보니 낮은 급수의 마수나 그보다 격이 낮은 기형수 혹은 나락들은 감히 관산에게 침을 흘릴 수 없었던 것이다.
덕분에 지난 이틀 동안 그는 괴암마수만 신경 쓰면 되었지만 이제는 정말 그 괴암마수에게 잡아먹힐 시간이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왜냐하면 지금 오르고 있는 산이 근처에 있는 마지막 산이었기 때문이다.
' 정말 관천주를 다시 굴려야 하나..아직은 아니야 일단은 좀 더 가보자 '
무거운 마음으로 기어이 산 정상에 올라선 관산은 눈앞에 시원하게 펼쳐진 설원의 절경에 깊은 감명이 아닌 깊은 절망감을 느꼈다.
" 호문 약속을 지키지 못할 수도 있겠네요. 그래도 가보는 데까지 가볼 테니 나중에 만나더라도 왜 이렇게 빨리 왔냐고 너무 뭐라 하지는 맙시다. "
아직 품 속에 있는 나이키 운동화를 힘껏 쥔 관산은 결국 다시 관천주를 던져야만 했다.
[ 잘 생각했다. ]
관천주가 움직임을 멈추자 여지없이 수명은 빠져나갔고 그 즉시 관천주에 글자가 나타났다.
[ 도화(道禍) ]
" 길 도(道)에 재앙....화(禍)? 재앙으로 가라? 이건 무슨 뜻일까요? "
[ 글쎄다. 잘 모르겠다. ]
" 도대체 어르신은 아는 게 뭡니까? 이젠 관천주와의 관계가 의심스러워 지기까지 합니다. "
[ 놈 상처 주는 말에 일가견이 있구나 ]
귀중한 수명을 지불하고 받은 글자가 불길한 내용을 담고 있자 관산은 어금니를 깨물었다.
" 혹시 관천주가 이번에도 수명만 빨아 먹는 건 아니겠죠? "
[ 글쎄 .. 더 이상 도저히 방법이 없다면 그럴지도 모르고 ]
" 쳇. "
떨어진 관천주를 주어든 관산은 자신이 어느 순간 관천주에게 너무 의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관천주를 미련없이 주머니 속에 집어넣어 버렸다.
" 얼마나 더 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앉아 죽을 수는 없지 "
마음의 결정을 내린 관산이 미련 없이 산 아래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 시각 시원하게 펼쳐진 평야 너머에서 20대 중 후반으로 보이는 젊은 남자 세 명이 빠른 속도로 평야를 가로질러 오고 있었다.
" 오일이 형님 차 씨 년 놈들이 마수에 쫓겨 물건도 챙기지 못한 체 도망쳐 왔다는 소문이 사실일까요? "
가운데서 달리던 오삼이 오른쪽에 있던 남자를 바라보며 물었다.
" 그런 것 같아. "
" 그거 참 쌤통입니다. 우리가 먼저 선점한 좌표를 중간에 몰래 가로채더니 결국 벌 받은 거지요 아주 그냥 속이다 후련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오이 형님 "
그가 이번에는 왼쪽에 있는 남자에게 묻자 그도 역시 고개를 끄덕여주며 맞장구를 쳐 주었다.
" 왜 아니겠느냐. 거기에 더 해 놈들이 버려둔 물건을 우리가 차지해 버리면 그놈들 당분간 배 아파서 편하게 잠 자긴 틀렸을 것이다 "
" 오이 오삼 아직 속단하긴 이르다. 그런 생각은 물건부터 찾은 후에 해도 늦지 않아. 보아하니 차 씨 남매들도 물건을 찾으려고 다시 길을 나선 모양인데 현재로서는 정확한 위치를 모르는 우리가 불리하다 "
" 아니죠 형님. 좀 전에 죽어가던 마철곡인가 하는 담군에게 대략적인 위치는 알아냈으니 놈들보다 훨씬 빠른 우리가 유리하죠. "
확실히 오 씨 형제는 차 씨 남매들보다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
" 어쨌든 시간이 없다. 잡담은 이쯤하고 속도를 좀 더 올리자 "
" 예 형님 "
" 예 큰 형님 "
오일의 명령에 오이와 오삼도 더욱 속도를 높였다. 그들은 거의 100km에 육박하는 속도로 평야을 달렸고 그들이 지나간 자리에는 눈 발이 흩날리고 있었다.
한동안 엄청난 속도로 설원의 평야를 가로지르던 오일이 뭔가를 발견하고 걸음을 멈췄다.
" 멈춰! "
그는 황급히 동생들을 멈춰 세우고 안력을 집중해 전방을 주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그의 눈에 어린 소년 한 명이 웬 마수에게 쫓기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 괴암마수? "
오일은 단번에 마수의 정체를 알아보았고 그때 오이와 오삼이 오일의 옆으로 다가왔다.
" 큰형님 혹시 또 다른 생존자일까요? "
" 괴암마수에게 쫓기고 있는 걸 보니 그럴 확률이 높아 보이긴 하다 만 벌써 이틀이나 지났는데 아직까지 잡히지 않고 도망을 치고 있다니 좀 놀랍구나 "
" 에이 설마 그러기야 하겠어요? 평지라면 시속 40km를 넘게 달리는 괴암마수에게 어린 소년이 무슨 수로 지금까지 안 잡히고 버텨요. 아마 무사히 빠져 나왔는데 이곳에서 재수 없이 따라 접혔거나 다른 괴암마수에게 쫓기고 있는 거겠죠 "
" 하긴.. 그렇게 생각하는 게 타당하긴 하겠다. "
" 그건 그렇고 저 소년 구해요 말아요? 괴암마수와 싸우지 않고 소년만 빼내는 일이라면 식은 죽 먹기인데 "
" 생존자라면 물건들이 있는 위치를 알고 있을 확률이 높으니 우선 구하기는 해야 겠지 "
오일의 결정에 오삼이 아닌 오이가 앞으로 나섰다. 삼 형제 중 그의 속도가 가장 빠르기 때문이다.
" 제가 가서 구해 올게요 "
" 그래.. 노파심에서 말하지만 절대 10미터 안에서 괴암마수의 붉은 눈을 직시하면 안 된다. "
"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럼 "
오이가 별 걱정을 다 한다는 표정을 지으며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그 시각 오 씨 형제를 아직 발견하지 못한 관산은 괴암마수와의 거리를 고작 10m 남겨 놓은 상태로 필사적으로 달리고 있었다.
괴암마수가 마음만 먹는다면 단번에 자신을 따라잡을 수 있다는 걸 알았지만 놈은 그 간의 고생을 보상 받으려는 속셈인지 일부러 아슬아슬하게 거리를 유지한 체 뒤를 따르고 있었다.
[ 살려줄까? ]
놈은 관산의 뒤를 쫓으면서 자꾸만 말을 걸어오며 그를 놀리고 있었다.
[ 살려 달라고 빌어봐 그럼 살려 줄게 ]
" 시끄러워! 너 같은 거에 그런 말을 할 바에야 동네 똥개를 형님으로 모시겠다 "
[ 우히히히. ]
관산의 속도가 떨어진다 싶으면 놈은 방금처럼 섬뜩한 소리를 내어 그를 소름 돋게 만들곤 했는데 관산은 절망 속에서 실날 같은 희망을 놓지 않고 달리고 있었다.
" 내가.. 내가 만약 ..살아난다면...반드시 돌아와 오늘의 이 빚 백 배 천 배로 갚아 주마!!! "
[ 우키키키 너에게 내일이 있을까? ]
관산의 악에 받친 절규가 즐거운지 놈은 또다시 기괴한 소리를 토해냈고 그 순간 관산은 직감적으로 놈이 추격을 끝내려고 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 어린 아이가 맛있어. 난 어린아이 고기를 가장 좋아해 ]
비록 이 세계에서 태어나 짧은 생을 살았지만 죽을 때 만큼은 당당하게 죽고 싶었던 관산은 달리기를 멈추고 놈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런데 그때 정체불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무슨 생각인지는 알겠다만 그러지 않는 게 좋아.. 놈의 적멸안(赤滅眼)은 생각보다 더 고통스럽다. 각성자들도 쉽게 상대할 수 없는 기술이거든 "
괴암마수를 향해 돌아서던 관산은 목소리의 경고에 화들짝 놀라 그대로 몸을 멈춰 새웠고 그 순간 누군가 자신의 목덜미를 낚아 채는 걸 느꼈다.
" 엇! "
몸이 붕 떠오른다 생각하자마자 관산은 엄청난 속도로 괴암마수에게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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