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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C DEF

AFTER Epilogue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Scintill.
작품등록일 :
2016.01.13 15:53
최근연재일 :
2016.02.15 09:15
연재수 :
1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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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42
추천수 :
408
글자수 :
83,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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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2.15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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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16. 목적지

DUMMY

0057.

“말이 없으면 말을 만들면 되잖아요?”


“야, 그게 말처럼 쉽냐......”


마차 앞에 우두커니 멈춰선 우리를 향한 라임의 질타에 나는 힘없이 대꾸했다. 일단 여기까지 거슬러 올라오긴 했지만, 앞으로의 여정이 막막했다. 마차에 말이 없었으니 당연했다.


선택지는 크게 둘이었는데, 하나는 그냥 마차를 버리고 여행할 것, 두 번째는 마차를 힘겹게 이끌고 마을까지 간 다음 말 두 마리를 다시 구하는 것이다. 어느 쪽을 골라도 결코 편한 여정은 아닐 것이다.


“어쩔 수 없죠. 브리톨레커님이 제 손이라도 잡아 준다면 제가 해결해드릴 수도 있어요.”


주저 없이 라임의 손을 양손으로 덥석 잡았다. 다시 저 커다란 짐마차를 끌고 갈 생각에 눈앞이 캄캄했던 탓이다.


“흥, 정말이지 어쩔 수 없군요.”


라임은 못 이기는 척 반대쪽 손을 탁 튕겼고, 갑자기 라임의 몸에서 그림자 촉수가 쭉 뻗어 마차 앞쪽에 어지럽게 뒤엉키기 시작했다. 한참을 흉물스럽게 꿈틀거리던 촉수 다발은 얼마 지나지 않아 하나의 형상을 갖추기 시작했고, 마침내 우람한 검은색 준마가 되어 발을 구르고 있었다.


“끝내주는데?”


감탄을 금할 길이 없었다. 람델이 만들었던 말 도자기와 다르게 저건 진짜 말이었다. 구조야 어떻게 되었건 말처럼 생겼고, 움직일 수도 있었다.


“잠깐만, 당신들! 왜 제 허락도 없이 당당하게 마차 위에 올라타는 거죠?”


“왜? 마차는 원래 우리 건데.”


“당신들 같은 무뢰배가 올라탄다면 마차를 끌어줄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고요!”


“라, 라임..... 그냥 친하게 지내면 좋잖아? 친구 사귄다는 기분으로......”


“저한테 필요한 건 친구가 아니라 브리톨레커 님이라고요!”


듣기만 해도 낯뜨거운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라임의 당당함에 나는 혀를 내둘렀다.






0057.

그래도 결국은 라임의 고집을 꺾을 수 있었다. 조건이라 함은 내 옆자리에 앉겠다는 정도였다. 내 무릎 위에서 쫓겨난 람델만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그래서 어디로 가면 되는 거죠?”


“여기저기. 딱히 목적지는 없어. 남부 숲 여기저기를 뒤져서 어떻게든 여기 있는 재료를 구하는 게 목표야.”


처음에는 라임의 머리카락이라도 하나 뽑으면 모든 게 해결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잠깐 했지만, 셀리의 말에 의하면 불가능했다. 촉매로 사용되는 물질에 따라 룬 친화도가 다르다는 게 셀리의 설명이었는데, 물론 나는 반도 이해하지 못했다.


어쨌든 핵심을 짚자면 라임의 머리카락은 하등 도움이 안 된다는 말이었다. 게다가 이게 악마인지 아닌지 제대로 판별도 안 되는 상황이라 피를 몇 방울 빌리는 것도 보류한 상태였다.


“저 짐덩어리들만 아니라면 참으로 윤택한 여행이었을 텐데.......”


라임이 뒤편을 힐끗 쏘아보며 새침하게 말을 꺼냈다. 나에게는 꽤 부담스러운 상황이었다.


예쁜 여자? 좋다. 아주 좋다. 무조건 좋다. 나도 인간이고, 나도 남자다. 라임 같은 여자가 나 좋다고 달려든다면 신을 향해 1만 번 절하고 눈물을 흘리며 당장 결혼할 것이다. 다만 라임이 ‘인간’일 때의 이야기다.


용사 생활을 조금 해보면 금방 알 수 있는 진리가 하나 있다. 겉모습에 절대 현혹되지 말라는 한마디였다. 실제 인간의 욕심을 역으로 이용하기를 즐기는 마수들은 곧잘 아름다운 외모, 호화스러운 보물 등의 모습을 하고 있다가 인간을 파멸로 이끌기 마련이었다.


그러한 수법에 죽어간 동료를 몇이나 본 나로서는 경계심이 앞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물론 라임의 목적은 그와 조금 다른 것 같았지만, 대륙 최고의 용사를 장난감처럼 가지고 노는 여자라면 조금 많이 무서웠다.


그러한즉, 현재 두근거리는 심장은 설렘이 아니라 공포에 지배당하고 있다는 말이었다.


“뭐, 시간이 해결해주겠죠.”


의미심장한 눈웃음을 짓는 라임을 힐끗 바라보며, 앞으로의 여행이 분명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이번이 처음도 아니긴 했지만 말이다.






0058.

“이 근방엔 정말 마을이 없었을까?”


“흔적 하나 없어요.”


우리는 다시 망령 마도사를 쓰러뜨렸던 그 자리로 돌아왔다. 역시나 아무것도 없었다.


“이 근방에는 도시 같은 거 생긴 적도 없다고요. 쓸데없는 고생은 그만하고, 저랑 같이 목욕하러 가요.”


라임이 치명적인 눈웃음으로 무장하고는 내 팔에 엉겨붙었다. 그 모습을 본 엑셀이 황급히 라임의 목덜미를 잡아챘다.


“아앗! 이게 무슨 짓이죠? 정말 제정신이 아니군요!”


라임은 깜짝 놀라서는 순식간에 그림자 촉수로 엑셀을 겨누었다. 그러나 이내 자신의 손등을 문지르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서고 말았다.


“흥, 브리톨레커 님한테도 눈이 있다고요. 남자라면 그쪽처럼 못생기고 우락부락한 기사보다야 저 라임처럼 가련한 여자한테 끌리기 마련이죠.”


가련하다는 말에는 전혀 동의할 수 없었다.


“시, 시끄러워! 브리톨레커도 제정신이라면 너 같은 괴물하고 같이 살 생각은 안 할걸?”


“괴물이라니...... 말이 지나치시군요?”


“가련하다는 말보다 지나친 것 같지는 않은데.”


둘 사이의 신경전에 나는 긴장감을 느꼈다. 그러나 그 신경전은 의외의 결과를 맞이했다.


“흑..... 브리톨레커 님의 동료분은 정말 입이 험한 분이군요. 저 상처 받았어요.”


훌쩍거리며 자연스럽게 내 품에 안긴 라임이 약간 과하다 싶을 정도로 내 허리춤을 더듬거렸다. 그 소름을 동반하는 행위에 나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여, 여자들끼리 목욕이라도 하고 오지그래?”


“아뇨. 괜찮아요. 저는 브리톨레커 님과 함께......”


“다녀올게!”


엑셀은 냉큼 라임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앗, 저도 다녀올게요!”


“신도님,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죄를 씻고 오겠습니다.”


꼬마들도 엑셀의 뒤를 졸졸 따라 강가로 가버렸다. 간만에 홀로 남은 나는 짐마차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우울한 표정으로 발밑을 바라봤다.


“어쩌다 내 인생이......”







0059.

힘에는 책임이 따르기 마련이다. 왜 그런지는 몰라도 힘 있다는 자체가 책임이다.


어찌 보면 나는 무책임하다. 힘이 있으면서도 그 책임을 마다하고 이렇게 훌훌 여행을 떠나버렸으니까.


그러나 그 누가 나를 비난하겠는가? 나는 일찍이 그 힘으로 세상을 한 차례 구했다. 그러니 내 책임은 거기서 끝났다고 할 수 있겠다. 그리하여 나에게는 그 어떠한 책임도 남지 않게 되는 것 같았다.


긍정적인 생각은 어째서 전부 빗나가는지, 이번에도 나는 책임을 무겁게 뒤집어썼다. 라임, 혹은 펠리아. 그 두 개의 인격을 가진 끔찍한 마왕급 개체가 내 곁에서 떠나는 순간 대륙은 멸망을 고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심장이 뻐근할 정도로 무서웠다. 식은땀이 또다시 왈칵 솟았다.


“그래도 그렇게 나쁜 녀석은 아닐 거야.......”


쓰린 속을 달래고자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누구 말씀인가요?”


그렇게 중얼거리는 찰나에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가 귓가에 불쑥 말을 걸었다. 화들짝 놀란 나는 자리에서 펄쩍 뛰어 올랐다.


"라, 라임!"


조그마한 수건 한 장으로 치부만 아슬아슬하게 가린 라임이 매혹적인 미소를 짓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다들 목욕 중이에요. 지금이라면 아무도 방해하지 않을 테니......."


책임이 어째 무척이나 막중한 듯했다.


"라, 라임! 먼저 가버리지 말라니까!"


"쳇, 잘도 따라붙는군요."


뒤에서 울리는 엑셀의 목소리에 라임은 질렸다는 표정으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어머, 왜 벌써 나타난 거죠? 기사들은 몸에 물만 바르면 목욕이 끝났다고 하나보네요?"


"시, 시끄러워! 너보단 열심히 씻었..... 브리톨레커! 뭘 멀뚱멀뚱 쳐다보는 거야!"


마찬가지로 수건으로 몸을 겨우 가리고 있던 엑셀이 나를 향해 꽥 소리를 질렀다. 나는 황급히 몸을 뒤로 돌렸다. 정말이지 루인을 꼭 데리고 왔어야 했다.






0060.

"가진 것을 모두 내놓으면 목숨만은 살려주겠다!"


역시나 산 속에는 산적이 있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사람이 없는 곳에도 산적이 있을 줄은 정말 몰랐다.


"저기요, 그냥 가세요."


나는 심드렁하게 산적의 말을 받았다.


"젊은 놈이 허세만 부리는군. 여자와 식량을 놔두고 간다면 네 녀석의 목숨 하나 정도는 생각해보지."


"너희 놔두고 가도 돼? 나 잠깐 사냥 좀 하고 올게."


"응. 빨리 다녀와."





0061.

"가차없네."


"범법자는 사람이 아니잖아."


사냥을 마치고 돌아오자 셀리와 람델이 내 뒤에 숨었다. 라임은 구석에서 뭔가 하고 있었고, 엑셀은 피 묻은 검을 닦고 있었다. 이런 점에서는 끔찍할 정도로 신념이 강한 엑셀이었다.


"라임이 바닥에 깔끔하게 묻어줬어. 거름이 되어 그나마 처음으로 세상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게 되었으니 산적들도 기쁘겠지?"


엑셀은 진심을 말하는 듯했다. 다른 때는 그냥 순진하고 착한 여자 같은데, 또 이럴 때는 라임 못지 않게 무서운 게 엑셀이었다. 그녀에게 범법자란 도살장에 끌려온 가축 이하의 존재였다.


"저 언니 무서워요......"


"걱정하지 마. 너희가 범죄를 저지르지나 않는다면 공격하지 않을 거야."


"저기요..... 예전에 물류 창고에서 양파 같은 거 슬쩍했는데 괜찮을까요?"


"세상에나! 엑셀에게 들키지 않기만을 기도해! 저기 바닥에 묻힌 산적들처럼 되고 싶지 않다면 말이지......"


"히이익!"


기겁한 셀리의 얼굴이 하늘에 뜬 구름만큼 하얗게 질렸다.


"우락부락한 여자 기사, 당신에게도 꽤 괜찮은 점이 있군요?"


시체를 바닥에 묻어버리고 돌아온 라임이 나름 흡족한 얼굴로 말했다.


"브리톨레커 님에게서 200단위 떨어진 거리에 있다면 분명히 괜찮은 여자일 텐데 말이에요."


"흥."


겉으로는 쌀쌀해 보여도 이 한바탕 잔혹한 해프닝 사이로 둘 사이에 모종의 유대가 생긴 것 같은 느낌이었다.


"산적들이야 지은 죗값을 치렀다고 생각하고 잊어버리자."


나도 범죄자는 답이 없다고 생각한다. 특히 산적 같은 무장 강도는 더더욱 그렇다. 남의 노력을 힘으로 갈취하며 사는 쓰레기들이다. 사람을 죽이는 건 내키지 않지만, 필요성은 인식하고 있었다. 여전히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셀리와 람델의 어깨를 토닥이고는 화제를 바꿨다.


"산적도 살려면 남의 것을 훔쳐야 하잖아. 그런데 남부로 여행오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거든. 아니지, 그냥 없다고 봐도 될 정도야. 그런데 여기에 산적 무리가 있다는 건 앞뒤가 안 맞아."


"내 생각도 그래."


"나한테 지도를 만들어준 괴짜 양반의 지식이 얕긴 해도 아예 모르고 한 소리는 아닌 것 같아. 아마 거리를 너무 짧게 계산했겠지. 조금만 더 가보면 분명히 마을이 나타날 거야. 어쩌면 사람들도 아직 살고 있겠고. 산적이 돌아다닐 정도니까."


산적들 덕분에 다음 목적지가 정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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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15. 둘로 나뉜 +6 16.02.09 1,016 19 11쪽
14 14. 삼각 전투 +8 16.02.03 546 21 13쪽
13 13. 공주를 깨우는 +11 16.02.02 558 22 13쪽
12 12. 잠자는 동굴 속의 +12 16.01.31 563 19 12쪽
11 11. 인력거 +8 16.01.30 536 20 12쪽
10 10. 마른하늘의 +17 16.01.27 514 16 12쪽
9 09. 길 가는 일행 +14 16.01.24 1,051 20 10쪽
8 08. 부화뇌동 +6 16.01.21 653 23 11쪽
7 07. 대륙에서 쫓아온 +5 16.01.19 602 28 13쪽
6 06. 땅 속에서 나타난 +8 16.01.17 897 33 13쪽
5 05. 출발 +7 16.01.16 796 31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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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03. 다락방 꼬마 +14 16.01.14 1,114 32 13쪽
2 02. AFTER Epilogue +19 16.01.13 1,176 37 14쪽
1 01. 에필로그 : 마지막 전장 +8 16.01.13 1,150 29 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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