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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C DEF

AFTER Epilogue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Scintill.
작품등록일 :
2016.01.13 15:53
최근연재일 :
2016.02.15 09:15
연재수 :
16 회
조회수 :
12,750
추천수 :
408
글자수 :
83,503

작성
16.02.02 22:01
조회
558
추천
22
글자
13쪽

13. 공주를 깨우는

DUMMY

0048.

관에 누워있던 여인이 허리를 일으켜 자리에 반듯하게 앉아있었다. 고혹적인 황금색 눈동자를 반쯤 뜬 그녀는 잠들어 있을 때보다 배는 아름다워 보였지만, 동시에 1만 배는 더 위험해 보였다. 여인의 눈을 관통하여 뿜어지는 어둠의 기운은 정말이지 만만치 않았다.


“당신은...... 누구지?”


나는 반 발짝 뒤로 물러서며 잘 떨어지지 않는 입으로 간신히 질문했다. 여자의 등 뒤로 수많은 그림자 촉수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저 그림자가 얼마나 강한지는 격벽 틈새로 끌려올 때 충분히 느낀 뒤였다. 아마 저 여자가 원한다면 당장에라도 나를 조각낼 수 있을 것이다.


“딱 보면 모르겠어? 숲 속에 잠자는 공주잖아.”


“여긴 동굴 속이고, 그 잠자는 공주는 스스로 깨어나지 않는단 말이다.”


나는 쓸데없는 말을 하며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도통 빈틈이 보이지 않았다. 내가 조금이라도 물러서려고 할 때마다 촉수는 앞으로 쭉 뻗어 내 근처에서 꿈틀거렸다.


“그럼 백설공주라고 할게. 내 피부도 겨울 눈만큼 희다고 자부하니까.”


장난치고 있는 걸까? 장난이라고 해도 나에겐 웃을 여유가 없었다.


“어쨌든 여기서 ‘왕자님’이 오기까지 수십 년을 기다렸어. 당신은....... 그 긴 기다림을 보상할 만큼 괜찮은 남자인 것 같긴 해. 어쨌든 격벽을 뚫고 들어왔으니.”


그 신비롭고 절대적인 아름다움에 어울리지 않게 낑낑거리며 관을 빠져나온 여자는 천천히 내 쪽으로 다가왔다. 나는 몇 걸음 더 뒤로 물러섰고, 계단 아래로 발을 디뎠다.


“윽, 바닥이 조금 차갑네. 구두 신고 기다릴걸.”


주변을 화사하게 장식한 백합만큼 흰 드레스를 걸친 여인은 흠잡을 데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다만 그 아름다움에 비례한 위압감이 나를 억눌렀다.


“왜 그래? 내가 무서워?”


“.......그래.”


나는 한참을 망설이다 솔직히 대답했다. 나는 저 여자가 너무나 무서웠다.


“무슨 소리야? 이렇게 예쁜데?”


여자는 약간 자존심 상한다는 듯 인상을 쓰며 우아하게 머릿결을 한 차례 쓸어내렸다. 분명 그 모습은 더할 나위 없이 매혹적이었지만, 그 뒤로 넘실거리는 그림자 촉수만 보면 끓어오르던 피도 얼음장처럼 식어버리는 것이다.


“몰라. 일단 이리 와 봐.”


“이런-”


나를 향해 촉수가 무수히 뻗었다. 나는 빠르게 검을 휘둘러 촉수들을 베어냈다. 신검의 기운이 그림자 몇몇을 날렵하게 베어냈으나, 다 막아내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바닥을 서너 번 구르고 여기저기 뛰어다닌 결과, 나는 계단에서 반대편으로 몰리고 말았다.


“그 멋진 갑옷에 화려한 검술이라. 괜찮은데? 한 번 얼마나 강한지 확인해보겠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관찰하던 여자는 별안간 딱 소리가 나도록 손뼉을 쳤다. 잠시 뒤, 천천히 양쪽으로 벌어지는 그녀의 양손 사이로 찬란한 황금빛 광채를 뿜어내는 검이 손잡이부터 쭉쭉 뻗어나왔다.


“내 이름은 펠리아. 직업은 숲 속의 잠자는...... 백설공주.”


“잠깐, 왜 잠자던 공주가 칼을 들고 덤비는 건데?”


“최소한 왕자님 실력은 알아야 하지 않겠어?”


이 실로 어이없는 전개에 나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숲 속, 더 들어가 동굴 속에 잠자는 공주가 있는 것도 이해하기 힘든데, 그 공주가 어마어마한 어둠의 존재인 것은 물론 찾아온 왕자인지 기사인지 불쌍한 행인에게 검을 겨누고 있었다.


“나의 황금검을 받아낼 실력이 있다면 기꺼이 내 반쪽으로 인정하겠어.”


이 정도면 거의 강제로 납치하는 수준이었다. 찾아온 건 내 쪽이긴 했지만, 그래도 억울했다.


나는 주저 없이 자세를 바로잡고 게르뮬트를 상대할 때만큼 최대한의 힘을 검에 불어넣었다. 기회가 있다면 지금뿐이다. 녀석이 촉수 대신 검을 사용한다면 빈틈을 노릴 가능성이라도 생긴다.


“선공은 왕자님한테 양보할게.”


검을 느슨하게 내린 채로 싱긋 웃는 여자를 상대로 나는 바닥을 깊게 밟았다. 지난 십수 년간 연마한 검술의 정수가 지금 검신에 담겨 있었다. 초고속으로 튕겨 나간 내 몸은 활처럼 뒤로 당겨졌고, 장전된 검신은 투석기의 바위처럼 묵직하게 사선으로 쏘아졌다.


상대가 검을 들어 막는다고 해도 능히 베어낼 자신이 있었다. 신검의 경지에 도달한 내 검은 강철을 열 겹으로 접어 붙인 방공호도 순간적으로 찢어낼 만큼 큰 힘을 가지고 있었다.


상대가 공격을 막지 않고 피한다면 그때는 그대로 탄력을 살려 뒤로 도주할 생각이었다. 든든한 갑옷을 두르고 있었으니 계단을 조금 구르더라도 어디가 찢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모든 계산과 상념은 순간이었다. 내가 스무 걸음 정도 떨어진 상대를 덮치기까지 단 1초도 필요하지 않았다.


눈앞으로 녹색 기운이 왈칵 솟아오르며 묵직한 파열음을 내뱉었고, 내 눈동자가 경악으로 커지는 것과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은 동시였다.


“어머, 검 실력도 훌륭하네.”


상대는 아무렇지도 않게 검으로 내 공격을 그대로 받아내 자리에 버텨서고 있었다. 단 반 발짝도 밀려나지 않았고, 검을 잡은 반대쪽 손은 여유롭게 허리 위에 올린 그대로였다.


격의 차이였다. 급의 차이였다. 단 한 번의 부딪힘으로 완벽한 수직 관계를 이해할 수 있었다. 이 녀석은 알파 레기온 전원이 있어도 이길 수 없다...... 그런 뼈저린 패배감이 검 손잡이의 울림을 타고 손목, 어깨 목덜미로 진득하게 퍼졌다.


“만족스러워.”


여자는 혀로 입술을 날름 핥고는 아찔한 눈웃음을 선보였다. 그건 여자로서도, 악마로서도 손색이 없는 완벽한 눈웃음이었다.







0049.

“예상외로 얼굴도 말끔하고 젊어.”


내 투구를 벗긴 여자는 내 뺨을 쓰다듬으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손발이 묶인 나는 저항조차 할 수 없었다. 상대가 아무리 아름답다 한들 그림자 촉수로 손발을 단단히 묶어놓고 있었으니 그 공포란 말할 것도 없었다. 저 촉수는 원한다면 당장에라도 내 전신을 수십 조각으로 쪼갤 수 있는 흉기였기 때문이다.


“완벽해! 오랜 세월을 잠으로 허비한 보람이 있어.”


한참 내 몸 여기저기를 더듬거리던 여자는 마침내 환호성을 질렀다. 그리고는 내 목덜미에 손을 깍지끼며 끈적하게 달라붙었다.


“있잖아, 나하고 계약하지 않을래?”


“시, 싫은데.”


나는 최대한 고개를 돌리고는 시선을 피했다. 뭔지는 몰라도 이런 진득한 어둠의 존재가 계약을 요구한다면 영혼을 빼앗는 그 무언가인 게 분명했다.


“이상하네. 당신은 내가 아름답다고 생각하지 않는 거야?”


나는 입을 꽉 다물었다. 여기서 죽으면 어떻게 되는 걸까? 마왕 게르뮬트도 해치운 나를 장난감처럼 다루는 녀석이다. 못해도 마왕급. 혹시 내 몸을 그릇으로 봉인을 풀고 세계에 풀려나는 것인가?


세계는 다시 혼란에 빠지고, 다시 한 번 암흑기가 찾아오고 마는 걸까? 만약 그렇게 된다면 이건 모두 내 탓이 아니던가.


“흥, 거절해도 상관없어. 난 당신을 가질 테니까.”


“맙소사, 내 몸을 차지하고 또다시 세계에 암흑기를 가져올 생각이냐?”


“뭐? 이상한 소리를 하네. 나 그렇게 나쁜 사람 아니거든!”


아직도 내 목덜미 뒤로 손을 올리고는 나를 올려다보던 여자는 기분이 상했는지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다 좋은데 저항이 너무 심하네. 이렇게 예쁜 내가 말하는 데도 별로 좋아하지도 않고. 혹시 당신 동성애자야? 그건 좀 곤란한데......”


심각한 표정으로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던 여자는 이내 씩 미소를 지으며 자신만만한 목소리를 냈다.


“뭐, 괜찮아. 그건 그것대로 억지로 하는 재미가 있을 것 같아.”


“이, 이거 놔!”


나를 억지로 바닥에 눕힌 그림자 촉수는 내 전신을 둘둘 감아 꼼짝도 하지 못하게 고정해버렸다.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눈동자를 깜빡이는 것과 말을 내뱉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가만히 있어. 금방 끝나니까. 아주 조오금 아플 수도 있지만 걱정하지 마.”


내 위에 올라탄 여자는 양손으로 내 뺨을 감쌌다. 이게 그 소문으로만 듣던 ‘악마의 키스’라는 걸까? 상대의 영혼을 뺏어간다는 그 악명 높은? 눈앞에 점차 그림자가 드리워졌고,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눈앞이 그림자에 덮여 캄캄해질수록 공포는 극에 달했고, 나는 결국 정신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0049.

“으악!”


나는 비명을 내지르며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내 몸 여기저기를 더듬었다.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검집에는 검도 꽂혀 있었고, 불편한 곳도 없었다.


나는 동굴 바닥에 누워 있었고, 주변에는 흑요석도 대리석도 없었다. 그저 적막하고 조그마한 동굴 내부일 뿐이었다. 내 뒤편에는 방금 건너온 듯한 격벽이 있었다.


“꿈이었구나......”


나는 가슴을 한껏 쓸어내렸다. 촉수에 당겨지는 순간 바닥에 떨어지며 잠깐 기절한 모양이었다. 그 탓에 기괴한 악몽을 꾼 게 분명했다.


그런데 나는 분명 검을 뽑아들고 있지 않았던가?


“아, 일어났네?”


“으어엉!”


나는 내가 듣기에도 꼴사나운 비명을 내지르며 바닥을 구르고 말았다. 재빨리 낙법을 펼치고 일어나보니, 언제 어디서 나타났는지 등 뒤에는 방금 나를 강제로 덮친 그 ‘악마’가 서 있었다.


“왜 그래? 자꾸 그러면 나 속상한데.”


그녀는 실로 섭섭하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나는 바닥에 떨어뜨린 검을 도로 주워 앞으로 겨눌 수밖에 없었다.


“정말 그래도 괜찮겠어? 우린 목숨을 반쪽씩 나눈 사이인데.”


“뭐라고?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지?”


“히히, 공주님을 깨우는 왕자님의 키스가 있었지.”


여인은 몸을 배배 꼬며 수줍은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그럼 방금 그게 꿈이 아니었단 말이야?”


나는 옷소매로 입을 마구 비비며 뒤로 황급히 물러났다. 거의 본능적인 행동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미 맺어진 계약이든 뭐든 마법적인 그것은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그럼!”


내 어깨가 금방 축 처졌다. 그건 동화에 나오는 로맨틱한 키스 따위가 절대 아니었다. 상대를 강제로 묶어놓고 범하는 일종의 성범죄였다. 남녀가 반전되었다는 점만 빼면 처음부터 끝까지 끔찍한 범행이었다.


“맙소사....... 내 영혼은? 설마 여긴 지옥?”


“다 좋은데 정신이 좀 이상한 사람이네.”


여자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0050.

나는 차분히 앉아 눈앞의 악마, 펠리아의 설명을 끝까지 들었다. 내가 차분하게 앉아있을 수 있었던 이유는 단순히 그림자 촉수에 꽁꽁 묶여버렸기 때문이다.


그녀의 설명에 의하면 자신은 일종의 마법적인 존재이며, 누군가와 모종의 계약을 맺지 않는다면 이 동굴을 나갈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외에도 잡다한 설명이 줄줄이 늘어졌지만, 나로서는 이해하기도 기억하기도 힘든 것들이었다.


핵심만 말하자면 어쨌든 펠리아의 직업이 숲 속의 잠자는 공주랑 비슷했다는 것이다.


“그러한즉, 나는 긴 세월 동안 나를 ‘소유’할 자격이 있는 남자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말이지.”


펠리아는 뒤에서 나를 껴안은 채 귓가에 달콤한 숨을 훅훅 불어댔다.


“남자가 아니라 여자가 왔으면 어쩔 거였어?”


“아주 조오금 아쉽지만 일단 죽이고 다시 기다렸겠지?”


등골에 오한이 쭉쭉 퍼졌다. 만약 내가 아니라 엑셀이 벽을 부쉈다면 손쓸 틈도 없이 싸늘한 시체가 되었을 것이다.


내가 안도와 전율을 동시에 느끼는 순간, 뒤편의 석벽에서 불길한 파열음이 옅게 울렸다.


“설마......”


“밖에 다른 사람이 더 있어?”


“브리톨!”


이내 벽면이 우르르 무너지며 한 명의 여인이 황급히 안쪽으로 굴러들어왔다. 어두운 회색 머리칼이 두말할 것도 없는 엑셀이었다.


“엑셀?”


“브리톨!”


내가 살아있는 걸 본 엑셀의 얼굴은 금방 환해졌고, 그 속도보다 열 배는 빠르게 다시 어두워졌다. 그럴만했다. 이상한 벽 속으로 빨려 들어간 내가 그림자 촉수에 꽁꽁 묶여서는 이상한 여자와 부둥켜안고 있었으니 표정이 식을 만도 했다.


“이건..... 이건 음모야!”


“어째서! 어째서 이런 동굴에서까지 여자를 줍는 거야!”


“기다려! 난 줍지 않았어!”


내 외침 뒤로 잠시 침묵이 흘렀다. 먼저 침묵을 깨뜨린 건 나도 엑셀도 아닌 펠리아였다.


“뭐야, 애인이야?”


존재만으로도 무서운 펠리아가 실로 무서운 표정을 지었다. 그야말로 공간을 얼려버릴 것만 같은 두려움이었다.


“큰일이네. 살려둘 수 없겠어.”


“잠깐, 엑셀은 내 애인이 아니야.”


나는 식은땀을 왈칵 쏟아내며 다급히 말했다.


“그렇다면?”


“나와 괴수 토벌에 함께 나갔던 전우야.”


“그래?”


잠시 고민하던 펠리아는 수줍은 미소를 입가에 걸었다.


“그래도 여자는 적을수록 좋잖아.”


내 생각에, 아니 객관적으로 생각하기에 펠리아는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작가의말

정신병자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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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16. 목적지 +11 16.02.15 682 23 11쪽
15 15. 둘로 나뉜 +6 16.02.09 1,016 19 11쪽
14 14. 삼각 전투 +8 16.02.03 546 21 13쪽
» 13. 공주를 깨우는 +11 16.02.02 559 22 13쪽
12 12. 잠자는 동굴 속의 +12 16.01.31 563 19 12쪽
11 11. 인력거 +8 16.01.30 536 20 12쪽
10 10. 마른하늘의 +17 16.01.27 515 16 12쪽
9 09. 길 가는 일행 +14 16.01.24 1,052 20 10쪽
8 08. 부화뇌동 +6 16.01.21 654 23 11쪽
7 07. 대륙에서 쫓아온 +5 16.01.19 603 28 13쪽
6 06. 땅 속에서 나타난 +8 16.01.17 897 33 13쪽
5 05. 출발 +7 16.01.16 796 31 11쪽
4 04. 기묘한 만남 +12 16.01.15 887 35 13쪽
3 03. 다락방 꼬마 +14 16.01.14 1,115 32 13쪽
2 02. AFTER Epilogue +19 16.01.13 1,177 37 14쪽
1 01. 에필로그 : 마지막 전장 +8 16.01.13 1,151 29 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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