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의 무대인 발해, 잃어버린 발해에 대하여 통탄 하면서 글을 남긴 유득공 님의 발해고를 올려서 독자제현께 다시 한 번 발해를 되새기고자 합니다.
발해고(渤海考) 유득공 원저
머리말
고려가 발해사를 짓지 않았으니 고려의 국력이 떨치지 못하였음을 알 수 있다. 옛날에 고 씨가 북쪽에 거주하여 고구려라 하였고, 부여 씨가 서남쪽에 거주하여 백제라 하였으며, 박, 석, 김 씨가 동남쪽에 거주하여 신라라 하였다. 이것이 삼국으로 마땅히 <삼국사>가 있어야 했는데 고려가 이를 편찬하였으니 옳은 일이다.
부여 씨가 망하고 고 씨가 망하자 김 씨가 그 남쪽을 영유하였고, 대 씨가 그 북쪽을 영유하여 발해라 하였다. 이것이 남북국이라 부르는 것으로 마땅히 <남북국사>가 있어야 했음에도 고려가 이를 편찬하지 않은 것은 잘못된 일이다.
무릇 대 씨는 누구인가? 고구려 사람이다. 그가 소유한 땅은 누구의 땅인가? 바로 고구려 땅으로 동쪽과 서쪽과 북쪽을 개척하여 이보다 더 넓혔던 것이다.
김 씨가 망하고 대 씨가 망한 후에 왕 씨가 이를 통합하여 고려라 하였는데 그 남쪽으로 김 씨의 땅을 온전히 소유하게 되었지만, 그 북쪽으로는 대 씨의 땅을 모두 소유하지 못하여 그 나머지가 여진족에 들어가기도 하고 거란족에 들어가기도 하였다.
이때에 고려를 위하여 계획을 세우는 사람이 급히 <발해사>를 써서 이를 가지고 “왜 우리 발해 땅을 돌려주지 않는가? 발해 땅은 바로 고구려 땅이다.”라고 여진족을 꾸짖은 뒤 장군 한 명을 보내어 그 땅을 거두어 오게 하였다면 토문강 북쪽의 땅을 소유할 수 있었을 것이다.
또 이를 가지고 “왜 우리 발해 땅을 돌려주지 않는가? 발해 땅은 고구려 땅이다.”라고 거란족을 꾸짖은 뒤에 장군 한 명을 보내어 그 땅을 거두어 오게 하였다면 압록강 서쪽의 땅을 소유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끝내 <발해사>를 쓰지 않아서 토문강 북쪽과 압록강 서쪽이 누구의 땅인지 알지 못하게 되어 여진족을 꾸짖으려 해도 할 말이 없고, 거란족을 꾸짖으려 해도 할 말이 없게 되었다. 고려가 마침내 약한 나라가 된 것은 발해 땅을 얻지 못하였기 때문이니 크게 한탄할 일이다.
누가 “발해는 요나라에 멸망하였으니 고려가 무슨 수로 그 역사를 쓰겠는가?”라고 말할지 모르나 그렇지는 않다.
발해는 중국 제도를 본받았으니 반드시 사관을 두었을 것이다. 또 발해 수도인 홀한성이 격파되어 고려로 도망해온 사람들이 세자 이하 십여만 명이나 되니 사관이 없으면 반드시 역사서라도 있었을 것이고, 사관이 없고 역사서가 없다고 할지라도 세자에게 물어보았다면 역대 발해왕의 사적을 알 수 있었을 것이며, 은계종에게 물어보았다면 발해의 예법을 알 수 있었을 것이고, 십만여 명에게 물어보았다면 모르는 것이 없었을 것이다.
장건장은 당나라 사람이었으면서도 오히려 <발해국기>를 지었는데 고려 사람이 어찌 홀로 발해 역사를 지을 수 없었단 말인가?
아! 문헌이 흩어진 지 수백 년이 지난 뒤에 역사서를 지으려 해도 자료를 얻을 수 없구나! 내가 규장각의 관료로 있으면서 궁중의 비서를 많이 읽었으므로 발해 역사를 편찬하여 왕, 신하, 지리, 관청과 관칙, 의식, 복장, 국어, 국서 등 국가에 관해 고찰하는 아홉 목록의 글을 지었다. 이를 세가, 전, 지로 삼고 고(考)라 부른 것은 아직 역사서로서 완성하지 못하여 정식 역사서로 감히 자처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갑신년(1784) 윤삼월 이십오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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