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내 유일한 친구였다(2)
중학교 생활은 지옥 같았다. 멈추지 않는 아이들의 괴롭힘도 그랬지만 네가 더 이상 내 친구가 아니라는 깊은 우울이 나를 힘들게 했다. 사실은 5학년 이후의 모든 일들이 다 꿈이어서, 잠에서 깨고 나면 네가 내 짝꿍으로 돌아와 있기를 바랐다. 내 이름을 불러주던 네 목소리가 생생했다. 너에게 갖다 주는 거라고 생각하면 빵 셔틀도 그리 비참하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초등학교 5학년 그 교실에 머물러 있었고, 그것은 네가 없는 현실에 적응할 수 없게 했다.
나는 일부러 학원을 먼 곳으로 다녔다. 나를 괴롭히는 아이들과 마주치기 싫어서였는데, 덕분인지 그곳에서 만난 친구가 있었다.
"이름이 정다운이야? 내 이름보다 예쁘다."
이름 때문에 놀림을 받고 있었는데 그 아이는 예쁘다고 해주었다. 여자와는 처음 대화를 해보는 것이었는데도 불편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남자 아이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다 보니 나를 괴롭히지 않는 여자 아이가 편한 것 같았다.
우리는 제법 빠르게 친해졌다. 함께 학원 숙제도 하고 그 즈음 생긴 휴대폰으로 서로 연락도 했다. 집에 들어가는 길에도 카톡하고 등교 길에도 카톡했다. 다만 반 아이들이 내 휴대폰을 빼앗을까 봐 학교에서는 하지 않았다. 그 아이에게는 내가 왕따라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았다. 창피해서가 아니라, 그 아이마저 나를 떠날까 봐서였다.
"다운아. 너 여자친구 있어?"
"아니."
"그럼 좋아하는 애는 있어?"
"...으응."
"응? 있다고?"
"...응. 있어."
그렇지만 그게 전부였다. 네가 내 친구가 아니라는 슬픔은 여전히 나를 힘들게 했다. 그리고 너를 좋아하는 내 마음까지 전부 다 그대로였다.
"그럼 왜 걔랑 안 사귀어?"
"사귈 수는 없어..."
"왜? 우리가 너무 어려서?"
"아니... 걔는..."
너는 나를 안 좋아하니까.
"다… 다른 앨 좋아할 거야..."
"에이, 그게 뭐야. 너 고백도 안 해봤구나?"
그 아이는 다리를 쭉 펴고 말했다. 교복 치마 아래로 흉터 하나 없는 예쁜 종아리가 보였다. 나도 저런 다리를 가진 여자로 태어났더라면 어땠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 가슴 한 켠이 욱신거렸다. 여자로 태어났다면, 그랬다면, 어쩌면 너랑 사귈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같은 반이야?"
시무룩 고개를 젓자 그 아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다른 반인데 좋아해?"
"...다른 학교야."
"어? 그런데 어떻게 알아? 아아, 초등학교 때 같은 학교였구나?"
"으응..."
"헐. 그런데 아직까지 좋아하는 거야? 짱이다, 너!"
널 좋아하는 건 나에게 당연한 일인데, 그 아이는 마치 내가 대견하다는 듯 내 등을 팡팡 쳤다. 나는 쑥스러워서 그만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아쉽다. 좋아하는 애 없으면 내가 소개시켜 주려고 했는데."
"...소개?"
"응. 내 친구. 사진이라도 한번 볼래?"
"너랑 같은 학교야?"
"아니. 얘도 내 초등학교 때 친군데 중학교는 다른 곳으로 배정됐어."
휴대폰 사진첩을 여는 그 아이를 구경하면서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다들 이렇게 소개를 받아 만나는 거라는 걸 알았다. 너 역시 그럴 거라는 생각을 하면 가슴이 쓰렸다.
"얘야. 귀엽지?"
한 단체사진을 보여주기에 나는 고개를 들이밀었다.
"누구…?"
"얘, 얘. 단발머리."
사진을 확대시키는 그 아이의 손가락을 따라 액정으로 시선을 옮기다가 나는 그만 눈을 크게 떴다.
"자, 잠깐만!"
"어?"
그 아이는 큰 소리를 내는 나에게 놀라 화들짝 손을 거두었다.
"미, 미안. 그런데 잠깐만..."
"왜? 여기에 아는 애라도 있어?"
놀랍게도 그 사진 속엔 네가 있었다. 이제는 절대, 영영 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네가.
"어어... 어..."
"누구? 이 남자애?"
너는 내가 모르는 교복을 입고 그 아이의 친구 옆에 서있었다.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로 미소를 띤 얼굴로. 나는 그만 가슴이 벅차올라 입술을 깨물었다.
"네 친구야?"
"...으응..."
"와, 짱이다! 나 얘 괜찮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
"이름이 뭔데? 내 친구랑 같은 반인가 봐. 이거 수련회 갔을 때 찍은 거래."
"......"
"나 얘 소개시켜주라. 여친 있어?"
"이, 있어."
나도 모르게 나간 대답에 그 아이는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아휴, 우리 학교엔 왜 이렇게 괜찮은 애 하나 없는지 몰라."
"......"
"암튼 내 친구 어때? 소개시켜줄까?"
"...여기 학교 어디야?"
"여기? 윤문중학교잖아. 친구라면서 그것도 몰라?"
"아아...깜빡해서..."
"그런데 왜 대답 안 해? 내 친구 괜찮지 않아?"
"어어..."
"자, 수업 시작하자."
달칵, 교실 문이 열리고 선생님이 들어오셨다. 나는 덕분에 대답을 회피할 수 있었지만 마음은 계속 찜찜했다. 윤문중학교. 윤문중학교. 같은 반 문성현.
"저기, 수현아."
"어?"
어깨를 톡톡 두드리자 그 아이가 돌아보았다.
"그 사진... 나한테도 보내주면 안돼?"
"왜?"
"보려고... 네 친구..."
"오올. 생각 있는 거야? 알았어."
그렇게 받은 사진을 나는 집에 가서도 밤새 들여다 보았다. 이렇게 만나다니, 어쩌면 운명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첫 친구, 그리고 내 첫사랑. 그날은 5학년 때의 추억을 마음껏 떠올리다 행복하게 잠이 들었다.
그리고 다음날, 그 아이에게 늦을 것 같다는 연락을 해놓고 나는 종례도 듣지 않고 윤문중학교로 찾아갔다.
"어어..."
교문 앞에 도착하자마자 쏟아지는 인파에 당황했지만 너를 놓칠까 봐 두 눈을 크게 떴다.
"다른 학교 애가 왜 여기에 있니? 학교 안 갔어?"
"가, 갔다 왔어요. 친구 기다리는 거예요."
그러다 윤문중학교 선생님에게 잡혀 하마터면 돌려 보내질 뻔했지만 나는 꿋꿋하게 교문을 지켰다.
"어어...!"
한참 후, 혹시 뒷문으로 나간 건 아닐까 걱정이 들던 참에 너를 만났다.
"서, 성현...아!"
너는 여전히 인기가 많은지, 친구 여럿과 웃으며 교문을 나서고 있었다. 새로운 교복과 짧아진 머리는 너에게 무척 잘 어울렸다. 나는 그 동안 꿈에서만 그리던 너를 다시 본다는 감격에 가슴이 울컥하였다.
너의 이름을 외치자 나를 보지 못하고 지나치던 네가 친구들과 함께 나를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나는 그 순간 심장이 너무 크게 뛰어 입 밖으로 쏟아질 것 같았다.
"어어..."
그러니까 내 진심이. 너를 그리워했던 내 마음이 전부 마치 거센 폭포처럼 네 앞으로.
"...날 부른 게 아닌가."
너는 얼어붙은 채 너를 보고 서있는 나를 한참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네 이름 불렀잖아."
네 친구가 말했지만 너는 이마를 긁적거렸다.
"그런데 난 누군지 모르겠는데. 동명이인인가 봐."
너는 그렇게 나에게서 시선을 돌리고 친구들과 교문을 빠져나갔다. 그래도 낯이 익기는 한지 나를 몇 번은 돌아보았다.
"아...우욱...흑..."
눈물이 흘렀다. 턱을 타고 내려가 뚝뚝 떨어졌다. 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비척비척 교문을 벗어났다. 그리고 버스를 타고 가는 길, 많이 울었다. 차라리 보러 오지 않을 걸 그랬다. 네가 내 친구였다고 믿고 살 걸 그랬다. 그날은 너무 슬퍼 학원에도 나가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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