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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적 님의 서재입니다.

세상이 망해도 외톨이는 아웃사이드에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판타지

시적
작품등록일 :
2022.05.11 12:46
최근연재일 :
2022.09.02 16:49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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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483,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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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8.23 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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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쪽

61. 위선자과 선인

DUMMY

섬뜩한 붉은 안광이 잔상을 남기며 어둠을 헤집는다.


-크왕!!-


스휭!


야성의 기운이 날카롭게 서린 발톱이 허공을 찢는 사이, 아래로 몸을 숙인 남자가 머리 위 붉은 이리를 향해 흑색 몽둥이를 휘두른다.


퍽!


정확히 턱에 적중한다. ─털썩.


빛을 잃은 눈의 이리가 뒤로 쓰러진다.


퍽! 퍽! 콰직!


기절한 놈에게 다가가 확인 사살을 날린다. 보통 두개골이 부서지면 일련의 과정이 끝난다. 가끔은 이래도 살아남는 미친 괴물도 있지만 보통은 보옥수, 이놈은 야수다. 굳이 죽여봤자 코인 외엔 얻을 것도 없는 야수... 괜히 암울해지네.


"하아."


차오른 숨을 뱉고 소매로 미지근한 땀을 닦는다. 잠시 쉴 시간도 없다. 다시 땅을 박찬다.


달리고, 싸우고, 달리고, 싸우고.


이러한 루틴을 몇 시간째 반복 중이다. 북쪽 숲 시련부터 여기까지. 크고 작은 인간 무리를 상대로 열 몇 번 습격했고, 때론 방금처럼 습격으로 퍼져나간 소음에 꼬인 야수의 습격을 받기도 했다.


이런 걸 보면 차라리 다 무시하고 달리는 게 더 빠를 듯싶지만, 그래도 행동하는 생존자의 수는 줄일수록 이득이니까 이 악물고 하는 거지.


숲이 혼란스럽다 보니 인간뿐만 아니라 숲의 생명체도 비정상적으로 날뛴다.


원체 영역변동에 민감한 녀석들인데 인간들이 자신의 영역을 마구잡이로 침범하는 것과 더불어 인간들의 영역 자체가 극단적으로 변화했음을 느끼지 않았을 리 없다.


야수는 호기심에, 혹은 자신의 영역을 침입한 침입자들에게 철퇴를 내리기 위해, 괴물은 아지트에 꼭꼭 숨어있던 먹이를 낚아채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과하게 동적인 숲을 급하게 통과하려니 충돌이 적을 수가 없다.


"하아... 빡시구만."


덕분에 숲을 횡단해야 하는 나만 고생이지.


마력을 최소한으로 사용하며 습격과 도주를 반복한다. 마력을 덜 쓰는 만큼 몸으로 직접 움직이니 체력 소모가 크다.


흐르는 땀방울이 땅으로 떨어진다. 거센 바람이 얼굴에 부딪혀 굳이 닦을 필요가 없단 것이 자그마한 위안.


해가 동쪽에 있을 때 숲의 요람을 나섰는데 벌써 중천에 떠 있다.


하긴. 중앙산에서부터 시련까지 최소 거리가 십여 km다.


가뜩이나 긴 거리에 온갖 방해물이 제멋대로 설쳐대니 시간이 끌릴 수밖에.


그래도 얼마 멀리 떨어지지 않은 정면에 중앙산이 보인다. 이제 절반이다. 남쪽 숲을 지나 에메랄드 숲의 미로를 통과해 심처로 돌아가면 끝이다. 이그렌시아에게 만찬 전까지 돌아가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계속 이어가기엔 여러모로 후달린다.


마력도 그렇지만 체력은 꼭 회복해야 하니 중앙산 근처 아무 건물이나 들어가 잠시 휴식을 취하자.


싸움을 잔뜩 벌인 직후라 목격되지 않을수록 효과가 증대되는 「숨어버린 자」는 1단계밖에 받지 못하나 「개인 공간」덕에 혼자 있을 때 피로 회복, 체력, 마력 재생이 되니 구석으로 들어가는 게 제일이다.


근데 중앙산 일대와 그 근방에서 시커먼 연기가 솟아오른다. 그것도 한두 개가 아니다.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 괴성과 괴음이 일대에 가득하다.


큰 싸움이 일어났나.


저 앞에 커다란 건물이 하나 있다. 5층은 돼 보이는데 습격이라도 받았는지 전투의 흔적이 가득하다.


주변의 건물이 죄다 반파되거나 무너진 것에 비하면 양호한 편.


안으로 들어가기 전, 우선 나무 위로 올라갔다.


5층 건물보다 이 나무가 더 높거든.


나뭇가지와 건물 벽면을 박자고 올라간 나무 꼭대기에서 내려다본 광경은 상상 이상이었다.


"허어."


적어도 이런 규모의 전투는 식량이 완전히 떨어진 이후에나 가능할 줄 알았는데.


중앙산 뿐만 아니라 숲 중앙이라 할 수 있는 일대 전체가 싸움에 휘말렸다. 거의 전쟁이라 불러도 무방하다.


"저쪽은 상인 연합이고. 저쪽은 구민센터 그룹이고. 저쪽은... 구의역 그룹인가."


중앙산 근처에 자리 잡은 대규모 그룹 중 세 곳의 아지트에서 자욱이 연기가 올라온다.


대공원 그룹을 제하고 식량이 남겨진 아홉 대규모 그룹 중 세 곳이 습격받았다.


그에 대한 여파인지 숲 중앙 일대의 꽤 넓은 지역이 통째로 전장이 되었다.


"근데, 어떻게 벌써?"


분명 나는 중소규모 그룹을 부추겼다. 그에 맞춰 논에 물꼬를 트듯 일정한 흐름을 만들었다.


그들에게 각각 습격해야 할 그룹을 알려주었고 숲의 생명체의 움직임 역시 대규모 그룹을 향하도록 조정했다. 생존자들은 살기 위해서라도 괴물을 피해 대규모 그룹이 있는 방향으로 도주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까지가 어제 당일 일으킨 가장 굵은 흐름이라면 약간 혼란이 잦아들었을 지금부터 요 며칠, 생존자의 생존을 보장할 흐름 역시 만들어 두었다.


숲에 숨겨둔 물자라도 얻고 싶다면 대규모 그룹의 근방으로 다가가야 하며 괴물의 영역에서 비껴져 있는 은신처의 위치 역시 그 근방이다.


숲을 감싸는 전체적인 흐름을 대규모 그룹을 향하도록 화폭에 그림을 그렸고, 흐름을 거스르는 자는 물결에 집어삼켜져 매몰될 뿐이었다.


다만, 흐름을 따라 헤엄치려는 이마저 모조리 익사하지 않도록 완급조절에 신경을 썼다.


상대는 중소규모 그룹이다. 개인이나 둘셋부터 많으면 스무 명 정도로 이루어진 그룹들.


나는 이들과 대규모 그룹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하나의 목표당 할당된 중소규모 그룹 수를 제한했다.


단순히 숫자로 판단할 때, 정면으로 부딪히면 비등비등하나 대규모 그룹에서 농성에 들어간다면 어찌 할 방도가 없을 정도. 딱 그 정도가 좋다.


그래야만 저들이 목표를 취하지 못한 채 숲을 방황하게 만들 수 있다.


물론 저들이 내 의도에 따라 순순히 싸움에 나설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숲을 돌아다니다 보면 필시 저들끼리 접촉을 할 테고 습득한 지도와 정보를 공유해 연합을 결성할 것이다. 인간은 무리 짓는 동물이니까.


중소규모 그룹이 모여 또 다른 대규모 그룹을 형성하는 것.


그러나 신생 그룹과 기존 대규모 그룹의 절대적인 차이가 존재하니 그것은 바로 식량이다.


그들은 창고에서 성대하게 캠프파이어를 연 덕에 식량의 양은 지극히 한정되었다. 비자발적이었겠지만 하여튼.


대규모 그룹에서도 다른 생존자들이 자신들을 노리는 것을 알게 될 테니 이들도 몇몇 생존자를 흡수해 덩치를 불리거나 혹, 다른 대규모 그룹과 동맹을 맺는다.


그러면 다시 위기감을 느낀 중소규모 생존자 연맹이 모종의 행동에 나서는 것. 여기서 '모종의 행동'은 공격적인 성격을 띨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나의 의도에서 비롯된 상황이란 것도 모른 채 저들은 마치 무대 위 배역처럼 대본에 충실히 반목하고 의심하며 충돌할 터였다.


모두가 합세해 주린 배를 부여잡으며 으쌰으쌰─ 원소의 숲의 추가 강제성을 클리어한다면 어그러질 계획이나 나는 인간의 이기심을 굳건히 신뢰한다.


시간이 조금은 걸릴지라도 결국 기존 파벌과 신생 파벌은 충돌할 수밖에 없다.


충돌하지 않아도 괜찮다. 그럼 과하게 불려진 덩치로 이도 저도 못 한 채 숲을 떠도는 생명체와 부랑자에게 물어뜯겨 쓰러지는 미래만 남는다.


싸워도 좋다. 힘을 기르며 덩치를 불려도 좋다. 어차피 저들은 원소의 숲이란 가혹한 환경 속에서 지치고 흔들리다 부딪히고 쓰러질 터였다.


그런데, 계획이 어그러졌다.


기껏해야 하루나 지난 시점인데 벌써 총공세라니.


이러면 균형이 무너진다.


대규모 생존자 그룹은 덩치가 큰 만큼 행동이나 결단이 느릴 수밖에 없다.


때문에 내 계획이 의도대로 흘러가려면 적어도 대규모 그룹이 행동 방침을 논의하고 결정할 최소한의 시간이 주어졌어야 했다.


어차피 그전까진 농성만 하여도 중소규모 생존자가 대규모 그룹의 방어를 뚫어낼 확률은 극소하고, 그들 역시 다른 생존자와 접촉할 시간이 필요하다. 적어도 3~4일 시간이 끌릴 것은 자명했다.


그러나 지금 상황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중앙산 일대는 전쟁의 불꽃으로 뜨겁게 달아올랐고, 일부는 꽤 심각한 피해를 입은 것처럼 보인다.


현재 진행형으로 열심히 싸워재끼는 세 그룹을 제외한 다른 여섯 개의 대규모 생존자 그룹은 동쪽을 제외한 세 방향에 골고루 퍼져있다.


중앙산 근처에서도 동쪽 숲과 가까운 곳에 위치하던 대공원 그룹이 모든 인원을 총동원해 숲 동쪽에 시련을 찾아 떠나며 동쪽 숲이 비었다. 그러나 이미 동쪽의 시련은 클리어되었고 지금쯤엔 심처로 향하는 길이 닫혔을 것이다. 비교적 조용한 동쪽으로 향한 몇몇 생존자들 중 정보를 가진 이들은 있어야 할 시련이 사라졌음을 알게 될 것이고 이 정보가 숲에 퍼진다면 다른 생존자들 역시 빠르게 시련을 찾아 클리어하려 할 것이다.


그렇다면 묻겠다.


보금자리를 잃은 생존자들이 퍼져있는 숲에서 다른 경쟁 집단까지 존재하는 상황에 선착순이란 시간제한이 생겨났다면 대규모 집단은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최선은 협력이다.


밖을 맴도는 이들 중 랭커나 특수한 이능을 가진, 소위 쓸만한 생존자들을 영입하고 다른 대규모 그룹과 협력해 빠르게 시련을 클리어하는 것.


그러나 아까도 말했듯, 인간의 이기심 때문에 쉽지 않은 결정이다. 기껏 통합 원정에 나섰다가 배신이라도 당한다면 끝이니까.


차선은 추가 강제성을 포기하는 것이다.


추가 강제성은 말 그대로 추가 강제성. 필수적으로 클리어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아지트를 지키며 농성. 추가 강제성의 기간이 끝날 때까지 버틴다면 최대한의 전력을 온존한 채 당면한 위협을 넘길 수 있다.


그런데 이때, 그룹 간 전쟁으로 중앙이 공백지대가 된다면?


중앙산에도 시련이 있으리라 거의 확실시되는 지금 중앙을 노리던 세 곳의 거대 집단이 멸망했거나 큰 피해를 입었다면, 비등비등한 이들과 경쟁하기보다는 빈자리를 차지하고 싶지 않겠는가? 멀쩡한 경쟁 집단과 싸우는 것 보다는 훨씬 피해도 적을 터이니.


이렇게 된다면 분명 몇몇 집단은 위험을 최소화한 채 가까운 시련을 공략할 수 있게 된다.


이는 절대 내가 원하는 구도가 아니다.


여기서 가장 큰 문제는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전무하다는 것이다.


나는 오로지 개인이니까. 철저히 음지의 인간이니까.


-자네는 한 가지 착각을 하고 있네.


골이 당겨오는 당황을 느낀 나의 뇌리로 한 초월자의 목소리가 스쳐 지나갔다.


쯧.


나는 혀를 찬다.


인정하긴 싫으나 프로메테우스의 말이 맞았다.


인간의 탐욕과 광기를 통제하려 한 것이 실패였을까.


어찌 되었든 나는 실패를 가만 내비두는 종류의 인간은 아니다.


이미 계획도 진행 중이니, 빠르게 모든 시련을 클리어하자.


내일 안에 모든 곳을 클리어한다면, 그리하여 저들의 목표를 잃게 만들면 그만이다.


목표를 잃으면 인간의 무리는 쉬이 와해된다.


결국 저들은 무기력하게도 강제로 진정할 수밖에 없다.


극한의 난이도라는 중앙산 시련에 몇 번 도전하다 포기하고 말게 될 터.


"그래도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할 필요는 있겠지."


아직 의문은 남아있다.


세 곳의 대규모 생존자 집단을 습격한 이들의 정체를 확인해야 한다.


잔존 생존자들이 연합하여 습격한 것일 수도 있으나, 숲 동쪽을 헤집어놓은 게걸아귀 같은 강대한 괴물의 준동이 원인일 수도 있고, 혹은 다른 구역의 집단이 빠르게 방향을 틀어 중앙을 습격했을지도 모른다.


습격자들의 정체를 확인한다면 계획의 허점이 무엇이었는지 파악할 수 있겠지.


나무 위에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는 많은 정보를 얻지 못하니까 직접 움직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 일단은 휴식을 취하자.


나는 아래로 내려와 건물에 착지했다.


건물로 들어가는 문은 닫혀있다.


얼마 전의 얻은 「탐지」 속성의 데이터로 능력을 카피하면 내부를 알 수 있겠으나 그러지 않는다.


그래도 최소한의 안전을 위해 무기에 마력을 흘려 넣으며 문고리를 잡는다.


옥상 문을 열고 몸을 집어넣자 순간 느껴지는 한기. 건물의 어둠 속에서 튀어나온 날카로운 검.


쩌적─!


카강!


동시에 휘둘러진 몽둥이가 검과 부딪혀 얼어붙는 궤적을 깨트린다.


한 발짝 물러나며 몽둥이를 상단에 둔다.


상대는 물러나지 않고 굳건히 서 검을 겨누었다.


"물러서라. 네가 누구든."


나는 푸른 보옥이 박힌 보검을 겨눈 남자를 쳐다보았다.


정현호. 얼음 궤적 보검의 소유자.


어째 유 대위와 강 중위 둘만 있어서 어디서 죽었나 했더니 멀쩡히 살아있었나.


"..."


멀쩡히는 아닌가. 팔 한쪽이 없으니.


어디다 팔아먹었는지, 왼쪽 팔꿈치 아래가 없었다. 지혈 때문에 조여 묶은 옷이 붉다. 겨눈 칼끝도 떨리고.


"당신. 그 코트..."


꽤 고통스러운지 식은땀으로 범벅이던 정현호의 눈이 커진다.


그때 이 남자도 나를 봤었지. 그때 가면은 없었으나 코트는 묵빛 사신과 싸울 때도 입고 있었으니.


나는 눈을 돌려 정현호의 뒤, 건물 그림자 너머로 향한다.


"으... 누구야. 언니?"


"쉿! 조용히 있어."


그의 등 뒤엔 아이들이 있었다.


그런데 많다. 시선을 움직여 빠르게 확인한다.


열네 명.


그리고 어리다.


아직 초등학교도 졸업 못했을 아이가 과반수, 심지어 한 명은 갓난애기다. 이쪽으로 무기를 겨누고 있는 세 명도 아직 어린 티를 벗지 못했다.


나는 시선을 돌려 정면을 바라본다. 그곳엔 식은땀을 흘림에도, 부상의 고통과 찌든 피로로 한없이 흐트러짐에도 지켜야 할 것을 반드시 지키겠음을 다짐하는 한 남자가 있었다.


여전한가. 하긴. 이 남자. 그 여자의 그룹원이었지.


나는 조용한 미소를 지었다.


고등학생쯤으로 보이는 여자아이가 침착하고 조용한 목소리로 정현호에게 묻는다. 작게 말하나 다 들린다.


"아는 분이세요?"


"안다고 해야 할지..."


곤란하게 대답하는 정현호, 그 차갑고 날카로운 기세는 수그러들었으나 그는 아직 무기를 내리지 않았다.


정현호의 입장에서 나는 그의 목숨을 구해준 은인에 가깝다. 그럼에도 경계를 멈추지 않는 이유는 급박한 현시점과 더불어 상당히 지저분한 일을 당한 모양이겠지. 나름 강한 축에 드는 저 남자가 팔 한쪽을 아무 이유 없이 날려 먹었을 리 없다.


나는 조용히 그를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한 발짝 물러나며 검 끝에서 완전히 벗어난다. 다시 한 발짝 물러나 옥상으로 나온 뒤 문을 닫았다.


어차피 휴식을 취할 셈이었다. 굳이 싸울 의지도 없는 이를 상대로, 그것도 아이들을 데리고 분투하는 이에게 무기를 겨눌 필요 없다.


맘 같아선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기고 싶다만 주변에 멀쩡한 건물이 없다.


옥상도 그리 안전하진 않지만, 그래도 벽과 구조물을 엄폐물 삼으면 충분하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나는 게 있어 문의 손잡이로 손을 올렸다.


멈칫.


곧바로 돌리려다 말고 노크했다.


똑똑.


벌컥.


저편에서 대답하기도 전에 먼저 문을 열었다.


"뭐, 뭐지?"


당황하는 정현호에게 나는 아공간에서 포션 하나를 꺼냈다.


휙. 던져주고는 다시 문을 닫는다.


그리고 혹시나 문을 다시 열지 못하게 「카피」로 광야차의 마력을 흉내 내 손잡이를 녹여버렸다.


고열의 화염이 손잡이와 그 안의 잠금장치를 녹여 붙인다.


안쪽에서 철컥철컥 거리지만 열릴 리가.


긁적긁적.


습관처럼 목덜미를 긁는다.


쓸데없이 챙겨줬나.


나도 아직 멀었다. 특정한 부류의 인간에게 너무 약하니.


결국 이 사태를 만든 것은 나. 때문에 내가 던져준 포션 한 병은 위선이다.


이정도 혼란조차 이겨내지 못할 인간이라면 앞으로 벌어질 관리자나 초월자의 술수에 휘말려 사그러질 불꽃이 불과하다. 지금과 같은 양상이 앞으로도 이어진다면, 아마 내 생각은 틀리지 않을 거다.


그러나 저 같은 선인이나 무결한 아이가 휘말린 것에 대한 유감은 있다.


난세에는 선인과 아이가 가장 먼저 죽는다.


...아마 나는 저런 이들보단 오래 살겠지.


나는 구석으로 가 털썩 주저앉았다. 눈은 감지 않았다. 그저 시끄러운 숲속의 소음을 클래식 삼아 휴식을 즐긴다.


솔직히 조금 많이 불편한 휴식이었다.




정현호는 가면을 쓴 남자가 건네준 포션을 들어 멍하니 쳐다봤다.


상세 정보를 확인하니 그저 어이가 없다.


4단계 생명력 포션. 심지어 포션의 효과가 100% 증가한 아이템이란다.


4단계면 상인에게서도 구할 수 없는 아이템이다. 듣기론 숲의 상인에게서나 구할 수 있다던가. 그러나 그것은 자연던전인 원소의 숲 안에서만 효과가 있는 특수 아이템이다. 대체 어떻게 얻은 것인지 짐작할 수 없는 귀한 아이템을 얼굴 한번 본 사람에게 선뜻 넘기다니. 거기에 포션 효과 증대는 이능의 효과인가? 아니면 아이템?


거참 모르겠네.


"대체 뭐 하는 사람인지."


시선을 돌려 자기 팔을 쳐다봤다.


"쓰라는 거겠지?"


과묵한 건지, 말을 못하는 건지, 저 사내는 여전히 말 한마디 않았다.


그럼에도 현호는 남자의 조용한 친절이 고마웠다.


아이들을 지키려다 이옥수의 능력에 잘려 나간 팔에선 아직도 피가 뚝뚝 흐르고 있었다.


평상시에도 베스트 컨디션일 때에나 싸워봄 직한, 그럼에도 승부를 장담할 수 없을 이옥수를 연이은 전투로 지친 상태로 싸웠다. 이 정도면 나름 선방한 셈이지. 미쳐 이옥수의 숨통은 끊지 못했지만 살아남은 게 다행이었다.


포션은 이미 다 사용해 지혈제로 응급처치밖에 하지 못했다. 다른 상처도 아니고 절단이니 지혈제로 완전히 지혈될 리도 만무했고 이 건물에 도착하기 전까지 계속 싸웠기 때문에 신경 쓸 틈도 없었다.


"아직 죽으란 법은 없군."


피를 꽤 많이 흘려 정신까지 몽롱했다. 적을 만나도 제대로 싸울 수나 있을지 의심 가는 상황에 남자가 준 포션은 축복과도 같았다.


현호는 곧바로 뚜껑을 열어 절반은 먹고 절반은 상처 부위에 뿌렸다.


그러자 얼마 안 되어 피가 멎고 살아 자라나기 시작했다. 재생 포션이 아니라 잘렸던 팔이 다시 자라나진 않지만, 애초에 재생 포션 자체가 구하기 극히 어려운 희귀 아이템이다. 그냥 부상을 치료한 것만으로도 족하다.


"아저씨. 여기 문이 안 열려요."


아이들 중 가장 나이가 많은 가은이가 옥상 문을 가리켰다.


"아마 밖에서 잠궜나보다. 신경 쓰지 마렴."


자상한 현호의 말에 조금은 겁먹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괜찮겠죠?"


"괜찮아. 저 아저씨는 적이 아니야. 그냥... 그냥 낯가림이 심할 뿐이란다. 그 아저씨가 보이니?"


그러자 가은이 주변을 둘러본다.


그녀는 「망원 투시」의 이능을 가졌다. 멀리까지 볼 수 있으며 일부 사물을 투시할 수 있는 가은의 이능은 그녀를 포함한 아이들을 살려낸 일등공신이었다.


"으응... 잘 모르겠어요. 있는 것 같긴 한데..."


"그럼 됐다. 아마 밖에 있을 거야. 우리가 무서워 할까 봐 밖에 있는 모양이지."


"그래요?"


현호는 다정하게 말했다.


"그래. 분명 그 아저씨도 잠시 쉬고 있을 거야. 그러니 우리도 일단 제대로 쉬자. 그래야 아저씨들 올 때까지 버틸 수 있어."


"네."


가은이도 아이들 사이로 터벅터벅 걸어가 등을 기대었다.


이 아이들은 현호와 아무런 연고가 없는 아이들이다.


따지자면 적대세력의 아이들에 가깝다.


쇼핑몰로 들어가기 전, 군자역 그룹의 간부였던 현호는 본래 대공원 그룹과 사사건건 부딪치고 했으니 지금 그는 적이었던 이들의 아이들을 돌보는 중이었다. 대공원 그룹의 아이들인 이들을.


으득.


저도 모르게 이를 악문 현호는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혹시 아이들이 들었을까. 그러나 아이들은 모두 긴장이 풀렸는지 벽에 기대어 눈을 감고 있었다. 고요한 숨소리. 잠에 든 것이다.


아이들은 죄가 없다.


현호는 대공원 그룹이 싫었다. 엮겨웠다. 똑같은 사람들을 노예로 부리다 괴물의 먹이로 던져주었던 그들의 행태를 기억하기에 겉으로도 그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유현석의 반란으로 완전히 변화했다 하더라도 그는 대공원 그룹을 신뢰할 수 없었다.


심지어 그들이 인간을 던져주던 괴물이 바로 쇼핑몰로 망명하기 전 본래 정현호가 몸담고 있던 군자역을 멸망시킨 장본인 게걸아귀였으니 도저히 그들과 함께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수백의 인간이 그들이 키운 괴물의 이빨에 갈가리 찢겨 땅 아래 묻혔다. 군자역 그룹은 특히나 싸움에 취약한 약자들. 노인과 여자, 아이를 보호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날 죽은 대부분은 제대로 싸우지 못하던 약자였다.


그 모든 약자들이 그들의 역겨운 합리화와 타협의 결과물에 허망하게 목숨을 잃었다.


하여 대공원 그룹은 정현호의 영원한 적이다.


그러나. 아이들은 죄가 없다.


그렇기에, 현호는 이 숲에서만이라도 잠시 대공원 그룹에 망명하고자 했던 유미래 대위와 강태현 대위와 떨어져 아이들을 맡는 역할을 자처했다.


숲을 횡단하는 위험한 일에 아이들을 데리고 갈 수도 없는 노릇이기에 몇몇 아이의 보호자와 함께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아지트에 남았다.


그리고 어젯밤. 사건이 일어났다.


숲의 혼란과 함께 비어있는 아지트로 생존자들이 쳐들어온 것이다.


공포와 분노로 잔뜩 흥분한 이들. 식량을 내놓으라고 소리치는 무리에 충분히 맞서 싸울 수 있었으나 현호와 보호자들은 피신을 택했다.


최우선은 아이들의 안전이었으니 분전보다는 보전을 선택한 것이다.


미끼 역할을 할 대부분의 식량을 남겨둔 채 최소한의 물자를 챙겨 아이들과 함께 도망쳤다.


다행히도 대부분의 습격자는 튼튼한 아지트와 식량을 차지하자 문을 걸어 잠궜다.


도망치며 들은 소리로 판단할 때, 분배 문제로 저들끼리 시비가 붙은 모양. 계획대로였다.


소수의 몇몇은 우리가 들고나온 식량조차 탐낸 모양인지 문을 박차고 나와 우릴 추격했지만 근방의 숲은 이미 익숙하다. 아이들을 보내고 숨어있다가 기습으로 단번에 처리했다.


다만, 아이들을 먼저 보내었던 것은 그리 좋은 판단은 아니었다. 혼란과 혼돈이 휘몰아치는 숲, 그 속에 떨어진 아이들을 노리고 숲의 생명체가 떼 지어 달려들었다.


추격자를 처리하고 돌아왔을 때엔 이미 늦었었다.


아이들이라고 마냥 나약하지 않다. 가은이처럼 유틸적인 부분에서 제 한몫을 충분히 해내는 아이도, 혹 아직은 미약하나 어떻게든 전투 능력을 기르며 싸우는 방식을 익혀나가는 아이도 있다.


그러나 아이는 아이. 몽둥이 몇 번 휘둘러본 것으로 전부인, 신체적으로도 정서적으로도 아직 연약한 이들이기에 한계가 명확했기 때문에 사상자는 필연적이었다.


현호가 자리를 비운 시간은 정말 잠깐이었으나, 그 잠깐의 지연으로 둘이나 되는 아이가 명운을 달리했고, 세 명이 크게 다쳤다. 가장 앞에서 싸우던 어른들도 넷이나 사망했다.


비전투 이능을 지닌 가은이 다음으로 나이가 많던 두 아이가 그보다 더 어린아이들을 위해 기꺼이 희생했고, 나머지는 최소 중상이었다. 전시를 방불케 하는 상황에서 중상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또한, 어른의 죽음은 치명적이었다. 현호를 포함해 성인은 고작 여섯 뿐이었다.


이젠 윤 씨와 자신 둘밖에 남지 않았다.


숲에 아침이 찾아올 때까지 열 명이나 되는 아이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그리고 해가 밝자, 숲의 북쪽으로부터 부랑자들이 밀려 내려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 서른이 넘었던 아이들은 절반도 남지 않았고, 처음 습격 때 다리를 다쳤던 윤 씨는 코인을 탐하는 살인마들의 이목을 끌며 미끼를 자처하며 어른은 이제 외팔이가 된 정현호뿐이었다.


정현호는 슬펐다. 고작 슬펐다는 단어로 표현하기 부족했다. 비통하고 비참했다.


너무 어린아이들이 허망하게 목숨을 잃었고, 보호자를 자처했던, 아이들의 가족과 그룹의 어른들 역시 인간의 욕망에 잡아먹혀 버렸다.


그가 더 강했다면, 고작 이런 무기 따위에 연연하는 게 아닌, 유 대위처럼 강대한 힘을 가졌다면 이런 일을 겪지 않을 수 있었을까?


끝없는 의문의 형태로 떠다니는 자조와 후회 속에서 정현호는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강해지기로.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누구보다 강해지기로.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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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망해도 외톨이는 아웃사이드에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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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62. 22.09.02 34 0 21쪽
» 61. 위선자과 선인 22.08.23 30 0 24쪽
60 60. 22.08.17 33 0 19쪽
59 59. 22.08.08 42 0 22쪽
58 58. 나는 너완 다르다 22.07.30 51 1 21쪽
57 57. 22.07.26 50 1 19쪽
56 56. 조우 22.07.23 48 0 18쪽
55 55. 고민은 짧아야 한다 22.07.20 42 0 13쪽
54 54. 22.07.15 53 1 11쪽
53 53. 짱돌이나 맞아라 22.07.11 57 1 26쪽
52 52. 22.07.06 57 1 14쪽
51 51. 대공원 그룹의 사정 22.07.02 65 1 17쪽
50 50. 22.06.30 63 1 21쪽
49 49. 22.06.27 65 0 13쪽
48 48. 장사꾼 올렉 +2 22.06.25 69 2 18쪽
47 47. 숲의 생태 22.06.24 65 1 13쪽
46 46. 야차 22.06.24 71 1 20쪽
45 45. +3 22.06.20 76 2 18쪽
44 44. 원소의 숲 22.06.16 83 0 12쪽
43 43. 22.06.16 76 0 18쪽
42 42. 세계의 아이 22.06.13 87 2 11쪽
41 41. 22.06.09 87 1 15쪽
40 40. 이상한 인간 22.06.08 94 2 14쪽
39 39. 언제나와 같다 22.06.05 105 2 21쪽
38 38. +2 22.06.04 107 1 19쪽
37 37. 22.06.03 100 1 21쪽
36 36. 밖으로 +2 22.06.02 104 0 13쪽
35 35. 파멸 22.06.01 107 4 14쪽
34 34. 학살에 맞서는 이들 22.05.31 112 2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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