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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적 님의 서재입니다.

세상이 망해도 외톨이는 아웃사이드에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판타지

시적
작품등록일 :
2022.05.11 12:46
최근연재일 :
2022.09.02 16:49
연재수 :
62 회
조회수 :
11,235
추천수 :
467
글자수 :
483,928

작성
22.06.04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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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
추천
1
글자
19쪽

38.

DUMMY

삐──────!


지겨운 이명이 머리를 어지럽힌다.


흠칫.


잠시 정신을 잃었었나.


다행히 목은 아직 붙어있다.


온몸이 아프다. 망치에 얻어맞은 것 같은 통증이다.


그런데, 겪어본 적 있는 불길한 마력이 몸을 감싸다가 사그라든다.


문득, 일전 이드라의 마력이 나를 감쌌을 때가 떠오른다.


그때는 마력 탈진을 회복시켜주려는 것에서 그친 줄 알았는데, 아직까지 남아 내 목숨을 지켜준 것이다.


이럴 줄 알았던 걸까. 혹은 그녀가 일으킨 일인 걸까.


"그래도 덕분에 살았네."


나는 처박혔던 잔해 구석에서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콰앙! 콰앙!


서걱!


놈이 무분별하게 학살을 자행하고 있는 것이다.


날렵한 갑옷 같던 외골격은 볼품없이 금 가고 깨어져 속살을 드러내고 틈으로 자색 피가 흐른다.


보옥을 일곱 개나 처먹은 것이다. 피해가 없다면 곤란했다. 아니, 사실은 이쯤에서 결판이 났어야 했다. 계산상 앞으로 두 개, 총 아홉 개의 보옥으로 유미래와의 전투로 상처 입은 묵빛 사신을 처리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놈은 아예 부활을 해 버리더니 멀쩡은 커녕 이전보다 더욱 강해진 육체로 나타났다. 그 덕에 이옥 둘을 포함한 일곱 보옥으로도 치명타를 가하지 못했으며 계획상으로 추가 투하될 두 개의 보옥으로도 놈의 처치는 불가능해 보인다.


그러나 성과가 아예 없진 않다.


처음 겪어보는 고통과 분노에 사로잡혀 이성의 끈을 놓아버린 묵빛 사신은 그의 감각에 잡히는 모두를 말살하고 있다.


더 이상 놈에게 높은 지능의 잔혹한 사신 같던 면모는 없다.


미쳐 날뛰는 한 마리의 괴물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나는 살아있지? 놈은 자신의 프라이드를 손상시킨 나를 최우선으로 죽이려 들 텐데... 아?! 설마 놓친 건가?


이성을 잃은 놈의 감각이 코트의 힘으로 숨겨진 나를 찾지 못한 것이다.


-키에에에엑!!!-


"으아아아!"


"죽고싶지않아죽고싶지않...!"


갈 곳 잃은 분노가 일대의 생존자를 유린한다.


무시무시한 기세.


하지만 도리어 기회다.


콰가각!


놈이 무차별적으로 날린 참격이 내 옆을 스쳐 지나간다.


취소.


이대로 도망칠까.


그것도 문제다. 섣부르게 움직였다가 놈의 눈에 띄는 순간 아까보다 위험한 전투가 재개될 거다.


내가 가진 보옥은 유한하다는 걸 잊어선 안 된다. 또한, 보옥을 발동시킬 마력 역시 유한하다는 것을 절대 잊어선 안 된다.


나의 무력은 절대적으로 한정된 자원에서 나오는 것임을....

잔해 뒤에서 코 위만 내밀어 상황을 지켜보던 그때.


"으이이익! 괴, 괴물!"


우연찮게도, 도망치던 생존자 하나가 내 쪽으로 달려온다.


그리고 정말 우연찮게도 그 뒤로 묵빛 사신의 신형이 나타난다.


서걱.


두 쪽으로 갈려 쓰러지는 시체 뒤로 놈과 눈이 마주친다.


-키에에에...!-


"하하... 하아. 그래. 여기까지 왔는데 끝은 봐야지."


놈과 싸우면서 상당히 보옥을 소비했지만, 여분은 많다.


긍정적으로 생각하자고. 여덟 개밖에 없던 이옥도 아직 여섯 개나 남았고 일옥은 서른 개 이상.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직 나에게는 '타고난 죄악'의 삼옥이 남아있다.


이것으로도 못 끝내면 정말 모든 게 끝이니 분신을 소환해 모든 마력을 끌어모아 삼옥과 자폭시킨다.


"끝장을 보자."


결정했다면 망설임은 지운다.


이전과 비교도 안 되는 속도로 간격을 지우고 날아오는 놈, 도저히 놈을 맞출 자신이 없기에 나는 보옥을 땅바닥으로 던진다.


그러나.


"뭐?!"


본능적으로 깨달은 것일까.


보옥이 땅에 닿기 직전, 순간 가속으로 더욱 빨라진 놈은 보옥의 효과 범위를 뛰어넘어 나에게로 도달했다.


서걱──!


"끄아아아아─!!!"


몸통이 반으로 갈라지는 고통에 온몸을 덮친다.


위기의 순간, 분신을 소환해 앞을 가로막은 덕에 목숨은 건졌지만, 한 번에 파괴되었다.


분신이 파괴되어 육체에 「회광반조」효과가 적용되어 신체 능력이 증가하지만, 가히 파괴적인 고통에 몸을 가누기 어렵다.


"끄브으으으읍....!"


나는 억지로 정신을 다잡는다.


세게 악문 잇몸에서 피가 흐른다.


나는 그에 맞서듯 검은 파편을 휘두른다.


깡!


묵색 낫과 칠흑의 파편이 부딪히며 불똥을 튀긴다.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각성이라도 한 걸까. 검은 파편에 나의 무색투명한 마력이 코팅되듯 휘감긴다.


마력을 두르는 것만으로도 훨씬 강한 타격을 주고 적은 충격을 받는다.


거기에 검은 파편, 애칭 몽둥이는 내 생각 이상으로 뛰어난 무기였다.


-키엑?!-


정체 모를 파편이 묵빛 사신의 낫과 부딪히자 도리어 낫에 흠집이 난다.


엄청난 성능, 그러나 그걸 휘두르는 것이 나이기에 문제였다.


그나마 「가짜 과집중」으로 인지 속도가 빨라진 덕에 놈의 공격에 반응했으나 그런데도 놈의 공격에 반 박자 느리게 대응될 뿐, 반격은 꿈에도 못 꾼다.


캉캉─까캉!!


서로 제자리에서 휘두르는 무기의 격돌에 내 부상만 늘어간다. 고작 네 합, 무기가 부딪칠 때마다 몽둥이를 감싼 마력은 불안정하게 흔들리다 훅, 사라졌다.


순간──


까각!


"으윽?!"


놈이 두 팔을 모아 내리찍은 공격에 파편을 놓쳐버렸다.


체력의 한계였다.


스─팟!


가까스로 몸을 튼 덕에 묵빛 사신의 공격이 머리카락을 스쳐 지나간다.


고작 스친 것뿐인데 코트의 방어력이 무색하게 왼쪽 어깨의 살점이 도려지고 뼈가 깎인다. 어깨에 허연 뼈가 드러난다.


재차 낫을 휘두르는 놈의 손길이 진정 사신처럼 보인다.


"으아아아아아아아!!!"


시냅스를 마비시키는 고통과 덜컥 튀어나오는 두려움 속에서 나는 미친 듯 손을 뻗었다.


어느새 꺼내듯 보옥.


소닉붐(일옥)


파──앙!


놈의 낫과 손에 쥐었던 보옥이 닿는 순간 거대한 충격파를 일으킨다.


사신과 나 모두 튕겨져 날아가며 땅바닥을 구른다.


이번엔 정신을 잃지 않았다.


삐이───


지랄맞은 이명이 또다시 머리를 괴롭힌다.


귀에서 피가 흐른다. 소리가 윙윙거린다.


"허억·····! 하악····!"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일어나야...!


비틀!


억지로 일으키려던 몸이 중심을 잃고 땅에 처박힌다.


소닉붐의 충격파를 고스란히 맞은 오른팔이 완전히 아작났다.


묵빛 사신에게 당한 왼팔도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바닥을 구르며 온몸의 뼈가 금이 간 듯 통증이 인다.


"끄흐으으윽으아아아아!!!"


텅 빈 공간에 비명이 메아리친다.


도저히 온몸을 짜내어 악을 쓰지 않으면 해일처럼 들이닥치는 고통에 매몰될 것 같기에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른다.


모든 고통을 성대로 내보내려는 듯 악을 쓰며 몸부림쳐보지만, 움직이지 않는다.


목을 타고 울컥 피와 장기가 터져 나오지만, 그것을 깨달을 새 없이 비명이 쏟아진다.


그러다가─ 뚝. 비명이 끊어진다.


성대는 사막의 우물처럼 말라붙었고, 반대로 내 옷은 온몸에서 번지는 피에 축축하게 젖었다.


하아·····. 여기까진가.


도저히 움직이지 않는 육체를 원망스럽게 힘을 주며 꿈틀대지만 이미 내 육체는 한계였다.


마력도 거의 다 바닥났는지 신체에 덧씌우려 해도 꼼짝하지 않는다.


몇 분이나 지났을까.


나는 바닥에 처박힌 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런데, 놈이 공격해오지 않는다.


고개도 돌아가지 않아 확인할 수 없지만, 아마도 놈도 한계에 다다른 것이다.


그렇다면 더더욱, 가만히 있을 수 없다.


이번이 정말 마지막이다.


나는 한계까지 마력을 짜내어 최후의 분신을 만들었다.


정신도 한계에 다다랐지만, 비틀비틀 분신을 조종해 놈에게 접근시킨다.


-키에....에....-


역시, 예상대로 묵빛사신도 꼴이 말이 아니었다.


깨지고 금가 피가 새어 나오던 외골격은 완전히 부서져 버렸고, 으스러진 흉부의 보옥도 금이 가 불길한 묵색 마력이 사고 난 자동차의 기름처럼 새어 나오며 투구 같은 머리도 거미줄 같은 금이 가 있다.


나보다도 소닉붐의 충격에 제대로 당한 모양인지, 한쪽 팔은 낫이 완전히 깨져 외팔이가 돼버렸고, 다른 팔은 날아갈 때 잘못 부딪혔는지 꺾여선 안 되는 각도로 꺾여있었다.


그러나, 놈은 살아있었다. 점점 살아나고 있었다.


놈의 심장부에 박힌 보옥에서 새어 나온 묵빛 마력이 넘실거리며 신체를 수복하고 있던 것이다.


정말 혐오스러울 정도로 질긴 생명력이 아닐 수 없었다.


끝내자. 지금 끝내지 못한다면, 이놈을 죽일 가능성은 영영 사라져버린다.


그런데 그때, 분신의 뒤에서 누군가가 다가왔다.


툭, 분신이 그의 어깨에 부딪혀 쓰러진다.


고개를 들어보니 해진 양복을 입은 중년 남성이었다.


남자는 자신의 것이 아닌 것으로 보이는 피를 뒤집어쓰고 있었는데, 한참을 도망친 듯 숨은 거칠었고 패닉에 빠져 얼굴이 질려있었다.


그는 자신이 도망쳐 온 방향과 죽어가는 묵빛 사신을 번갈아 보더니 눈을 번뜩이며 비명 같은 고함을 지른다.


"난, 난! 왕이라고! 왕!! 으아아아아아아!!!!"


정신 나간 목소리로 헛소리를 지껄인다.


동시에 반투명한 마력이 사방으로 뻗친다.


그러자 어디 있었는지 모를 괴물들이 튀어나왔다.


그런데, 튀어나온 괴물들은 어딘가 정상이 아니었다.


하나같이 풀려 흐리멍텅한 눈을 하고 있었으며, 격렬한 전투를 치른 것처럼 큰 부상을 입고 있었다.


"빌어먹을 년! 사지를 찢어 죽인다. 개 같은...! 내 부하들을...! 어떻게, 왜!! 반 시체가 되어서까지 나를 방해하는 거냐고오!! 으아아!!!"


누군가에 대한 증오를 쏟아내던 남자는 숨을 몰아쉬며 핏발 선 눈으로 거미를 노려보았다.


벌건 눈에 광기 어린 탐욕이 일었다.


"그래...! 저 괴물을 길들이기만 하면 빌어처먹을 군인 년도, 개 같은 애새끼도 모두 깔아뭉갤 수 있다고. 모두 발가벗겨 바닥을 기게 해 주마...!! 난 다 가질 거야... 으흐흐!"


길들여? 이능... 괴물을 조종하는 것인가?


아. 저 남자가 장 사장인가.


자세히 보니 중년 남자의 손등에 음울한 빛을 내는 보옥이 박혀 있다.


색을 보니 이옥.


무려 이옥을 사용해 진화한 인간이다.


"흐흐하하하하하!!!"


장 사장이 손을 뻗자 괴물들을 조종하던 마력이 빠져나오며 거대한 말뚝의 형태를 이룬다.


마력을 빼앗긴 괴물들은 실 끊어진 인형처럼 쓰러진다.


"응큼한 것! 나한테 잡히기만 하면...! 거미 새끼든 계집년이든 다 내 아래 깔리는 거야!"


푹!


무색의 말뚝이 정신을 못 차리던 묵빛 사신의 심장부, 묵빛 마력이 넘실거리는 보옥에 박혀 들어간다.


-키에에에에에엑───!!!-


비명 같은 괴성이 쇼핑몰을 뒤흔들지만, 장 사장은 오히려 거미를 향해 한 발짝 다가간다.


남자의 손에 잡히는 불투명한 마력이 거미의 머리에 닿는다.


"나의 것이 되어라!!"


거미는 거부하듯 머리를 털지만, 마력을 거부하지 못하고 있었다.


고작 이옥의 진화자가 삼옥수도 뛰어넘는 괴물을 지배할 수 있을 리가 없지만, 마력에 저항하기엔 묵빛 사신의 상태가 좋지 않다.


이대로면, 저 미친 괴물이 미친 인간의 손에 들어갈지도 모른다.


나는 잘 돌아가지 않는 머리로 생각하길 그만둔다.


분신을 해제, 분신의 옆에 딸려 보내었던 아공간 오브에서 최후의 최후까지 아끼던 보옥을 꺼낸다.


또다시 분신이 파괴되면 도저히 내 정신이 버티지 못할 것 같아, 이번엔 분신이 해제되는 순간을 딱 맞춰 분신에 깃든 잔여 마력을 보옥에 박아넣는다.


[타고난 죄악의 보옥 - 심연에 도사린 괴물(Lurking Monster In Abyss)(삼옥)]


툭.


사라진 분신이 떨어트린 보옥에 떼구르르 굴러 장 사장의 발에 닿았다.


"흐흐흐, 어? 이건 뭐야."


광인의 미소를 흘리던 장 사장이 고개를 숙인 순간.


쩡─!


보옥이 깨어진다.


"뭐야 이건...!"


찰박.


주춤, 무심코 뒷걸음질 친 장 사장의 발에 이물감이 느껴진다.


마치, 물속에 있는 것 같은 감촉, 물속에 있는 감각.


눈을 감았다 뜬 찰나, 온 세상이 물이었다.


아니, 물 같은 어둠이었다.


상하좌우 어디를 봐도 칠흑 같은 어둠에 휩싸인, 깊은 심해에 홀로 떨어진 감각.


어딘가로 이동된 것도, 공간이 뒤바뀐 것도 아니었다.


공간이 감당할 수 없는 짙은 마력에 잠식된 것이다.


질척질척한 어둠 속, 몸을 터뜨릴 듯 짓누르는 수압에 숨도 못 쉬고 굳어버린 그때.


허공에 두 개의 빛이 떠올랐다.


일정한 간격으로 아래를 굽이 살피듯 떠 있는 두 빛, 나는 그것이 무언가의 안광임을 깨달았다.


"끄아아아아아! 뭐! 뭐야!! 사, 살려어어어 꾸르르르릅─!"


장 사장이 난리 치는 소리가 들리지만, 곧 밀고 들어온 마력에 질식해버린다.


형용할 수 없이 거대한 '심연에 도사린 괴물'은 가장 무심한 눈으로 자신의 아래를 응시했다.


콰득!


무언가가 부서지는 소리, 칠흑의 마력으로 만들어진 이빨이 저항하지 못하는 묵빛 사신과 장 사장을 집어삼킨다.


다행히도 안광의 주인은 실체를 드러내지 않았다.


정체불명의 생명체를 소환하기엔 마력이 모자랐던 것이었다.


나는 안도했다.


그와 동시에 소름이 돋음을 느낀다.


이전, 삭풍의 보옥 때처럼 멋모르고 분신에 모든 마력을 때려 박아 자폭시켰다면, 저 인지를 벗어난 괴물이 이 땅에 도래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니, 분명 그랬을 거다.


새삼 삼옥의 위험성이 피부로 와닿는다.


그러나, 안심하긴 이른 것이었을까?


안광이 휙, 움직여 나를 향했다.


순간 나는 죽음을 직감했다.


"하하... 사신을 처먹어놓고도 아직 모자라단 거냐..."


칠흑의 이빨이 떨어져 내린다.


피할 여력은 없다.


나는 눈을 감았다.








찰나.








공간을 잠식한 어둠이 갈라지더니 본 적 있는 강철 창이 내리꽂히며 심연의 괴물과 나의 사이를 갈라놓았다.


그와 동시에 강철창을 때리는 괴물의 이빨.


캉!


청명한 공명음이 퍼진다.


무시무시한 이빨은 유려한 강철 창에 맥없이 막혀버렸다.


번─쩍!


아테나의 손짓에 어둠이 걷힌다.


허공에 떠 있던 안광도 사라지고 쇼핑몰은 본래의 공간을 되찾는다.


"...미친."


저렇게 가뿐하게 내쫒다니.


초월자의 진정한 무기라는 권역은 펼치지도 않았다.


아니, 신력이나 마력을 발휘하긴 한 것인지조차 깨닫지 못했다.


저게 고위 초월자의 위용인가.


[또 당신입니까. 꼴이 말이 아니군요.]


아테나는 어이없다는 듯 말을 잇는다.


[게다가 심연의 괴물이라니... 다른 차원의 존재가 본다면 광인 중 최고의 광인으로 칭송할 일을 벌이셨습니다.]


별 대답할 힘도 없으니 나는 침묵했다.


고개나 절레 젓는다. 그러나 미약해 젓기보다는 떠는 것처럼 보인다.


도움이나 달란 뜻이다. 어차피 지금 상황에서 나는 손 하나 까딱 못한다. 몸은 망가질 대로 망가졌지 마력도 없고 정신적으로도 최악이니 아공간에서 체력 포션 꺼내는 간단한 일조차 불가능하다.


그걸 어떻게 알아들었는지 아테나는 한숨을 폭 쉬고는 투박한 은색 구체에 대고 말했다.


[아테나입니다. 강화체의 출현은 확실해 보입니다만, 상황은 이미 정리되었습니다. 예. 비공식 랭킹 2위가 해결한 듯 보입니다.]


-뭐? 어떻게? 그 비실하고 심약한 유사 무능력자가 삼옥 강화체를 어떻게 잡아?-


누군진 모르지만 말이 좀 심하네.


엿이라도 날리고 싶지만 몸이 안 움직인다.


구체 너머에서 들려오는 장난스럽게 느껴지는 가벼운 목소리는 말했다.


-쓰읍. 어떤 새낀지 잡히기만 해봐. 감히 내가 관장하는 게임에 강화체 같은 쓰레기를 던져놔? 아무래도 경고가 부족했던 모양이군. 빌어먹을 늙은이들. 암튼, 해결됐으면 올라와. 올라올 때 샘플하고 생존자 피해 현황 집계하는 거 잊지 말고. 보상은 네 재량으로 해.-


[알겠습니다.]


뚝.


통화가 끊어지고, 아테나는 내 앞에 내려앉았다.


[왜인지는 몰라도 당신은 연달아 사건에 휘말리는군요.]


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말할 힘도 없다.


다만, 약간의 휴식으로 차오른 마력으로 스킬「붙여넣기」로 바닥에 글자를 새겼다.


-그래. 초월자가 벌인 사건에 말이지.-


[범인이 초월자란 증거는 어디에도 없습니다만?]


-묵빛사신 같은 미친 걸 만든 미친 인간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뜻이지? 그게 더 문젠데. 그리고, 내 앞에서 뻔히 통화해놓고 잡아떼는 건 어디서 배워먹은 코미디냐?-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약 그렇다면 그건 규칙을 위반한 게 아닐 텐데요.]


-그랬으면 네가 여기 온 게 규칙 위반이겠지.-


[비꼬는 실력은 여전하군요.]


-비꼴 상황이 없었으면 하는 게 내 평생소원이다.-


하. 또 이놈의 말장난. 지겹기만 한 언어의 저글링을 즐기기라도 하는지 아테나는 만날 때마다 내 말꼬리를 잡고 늘어진다.


진이 다 빠진 나는 딱 두 글자만 적었다.


-침대.-


그에 아테나는 기가 차 말했다.


[이 상황에 침대라니. 엉뚱한 게 참 당신답군요.]


딴지 걸면서도 공간을 열어 침대를 던져 준다.


킹사이즈에 빵빵한 양털로 푹신해 보이는 하얀 침대.


저번 생각이 나서 요구해 본 건데 진짜로 내어줄 줄은 몰랐다.


내 몸이 허공에 떠오른다.


마력적 작용인가.


폭신한 침대에 천천히─


폭!


"끄응브읍─!"


빌어먹을 초월자! 침대에 내 몸을 내동댕이쳤다!


안 그래도 온몸이 으스러졌는데. 으으으아!


조용히 몸부림치는 내 위로 포션이 부어진다.


몸이 한결 나아짐을 느낀다.


[우선 잠시 쉬고 계십시오. 다른 분들부터 해결하고 나서 다시 오겠습니다.]


잔해 구석에서 세 명의 생존자가 다가온다.


결국 살아남았나. 음. 치명상이었던 한 명은 죽었구만.


나는 눈짓으로 그들을 살피고는 관심을 껐다.


상황이 이렇게 돼버리면 저들과 엮일 이유 따윈 없다.


저들로부터 얻을 것도 없고.


아테나는 눈치 좋게 내 앞을 가로막으며 그들에게 다가간다.


음. 침대가 좋구먼.


그보다 침대는 왜 가지고 다니는 거지?


뚱한 표정으로 아테나를 쳐다보고 있는데 귓가로 아테나의 목소리가 들린다.


[예전에 선물 받은 것입니다. 제가 가진 아공간은 소차원이라 불러도 될 정도로 넓으니 굳이 안 가지고 다닐 이유가 없습니다.]


의식하고 있었나.


그딴 건 모르겠고. 나는 푹신한 침대에 비비적대며 편안한 자세를 취했다.


키야. 죽이네.


곧장 잠이 몰려올 것 같은 편안함이다.


몸만 뉘었을 뿐인데 온몸의 피로가 싹 날아가며 마력이 충만해지는 게 곧바로 체감된다.


초월자는 가구도 좋은 걸 쓰는구나.


아까 어깨너머로 듣기론 보상을 준다는 것 같은데 이걸 달라고 할까.


이런 내 생각을 눈치챘는지 아테나는 딱 잘라 말했다.


[아끼는 겁니다.]


까비.


나는 아테나에서 시선을 떼며 팔로 눈을 덮었다.


슬 고통이 사그라들자 정신이 몽롱하다.


피로가 과하게 쌓이긴 했나.


마지막으로 신경 쓰이는 건 새끼 늑대인데...


녀석은 어디론가 가버렸다.


애처롭게 울어대던 녀석에 피식, 웃음이 난다.


"그래. 역시 난 혼자가 좋아."


혼자가 알맞지.


잠깐이라도 녀석과 함께하려 했던 생각을 반성하며, 녀석이 잘 살아남기를 기원해주자.


눈이 감긴다.


졸음이 몰려온다.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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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41. 22.06.09 87 1 15쪽
40 40. 이상한 인간 22.06.08 93 2 14쪽
39 39. 언제나와 같다 22.06.05 104 2 21쪽
» 38. +2 22.06.04 107 1 19쪽
37 37. 22.06.03 100 1 21쪽
36 36. 밖으로 +2 22.06.02 104 0 13쪽
35 35. 파멸 22.06.01 106 4 14쪽
34 34. 학살에 맞서는 이들 22.05.31 112 2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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