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해실 님의 서재입니다.

I am 엔젤

웹소설 > 일반연재 > 중·단편, 추리

완결

해실
작품등록일 :
2023.12.04 23:07
최근연재일 :
2024.02.19 23:14
연재수 :
71 회
조회수 :
2,602
추천수 :
0
글자수 :
346,831

작성
24.01.17 23:43
조회
38
추천
0
글자
10쪽

그는 딸을 잃어버렸고 나는 유일한 친구를 잃어버렸다.

DUMMY

깊이 묻어두었던 10년 전의 회상을 끝낸 가인이 가만히 고개를 들었다.


어느 새 적막이 공기를 타고 내려와 그녀의 두 발을 묶어버렸다.


적막을 깨지 않으면 마치 취조실 같은 이곳을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았다.


뜻 모를 표정으로 뚫어져라 가인을 응시하고 있는 양경사의 눈빛도 그녀를 꼼짝하지 못하게 했다.


그제야 가인은 자신이 앉아있는 이곳이 경찰서이고 마주앉은 존재가 형사라는 걸 자각했다.


그때였다.


순간 가인의 호흡이 가빠지기 시작했다.


눈앞에 앉아있는 수더분한 인상의 양경사가 어릴 적, 그녀 집에 들이닥쳤던 괴물로 보이기 시작한 거였다.


“하하.. 하하..”

“이가인씨, 이가인씨! 괜찮으십니까?”


식은땀을 흘리며 호흡이 불안정해진 가인에 당황한 양경사가 벌떡 일어섰다.


그러나 그녀 귀에는 아무것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녀 또한 이 상황이 현실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언젠가는 극복해야 하는 그녀 안에 뿌리내린 막연한 공포를 내쫓아야 한다는 것을..


그러기 위해서는 그 거대한 공포와 마주서야만 했다. 하지만 매번 대면하지 못한 채 숨기에 바빴던 그녀였다.


그리고 지금도 그녀는 여전히 숨을 곳을 찾고 있었다.


두 주먹을 꼭 쥔 가인이 눈을 감은 채 양경사에게 말했다.


“하하.. 저.. 여기.. 나가고 싶어요”

“잠시만요”


양경사가 다급히 문을 열었다.


그러자 반쯤 눈이 뜨인 가인의 눈에 출입구가 보였다.


저곳을 나가 경찰서를 벗어나면 그녀는 숨을 수 있었다.


그러자 모든 배경이 사라진 그녀 눈에 오직 열려있는 출입문만이 선명하게 담겨졌다.


곧, 후들거리는 다리에 간신히 힘을 준 가인이 테이블 위에 손을 얹으며 일어섰다.


그런데 그때였다.


어린 시절, 괴물이 잡으러 왔다며 이불 속에서 나오지 못했던 그녀에게 다정히 속삭이던 엄마의 음성이 그녀 귓가에 들려왔다.


“엄마가 널 지킬 거야. 그러니까 숨지 않아도 돼”


처음이었다.

엄마의 목소리가 숨을 곳을 찾는 그녀를 찾아온 건.


순간 가빴던 그녀의 호흡이 정신없던 심장박동의 압박을 풀었다.


“119 불러드릴까요?”


걱정스런 양경사의 목소리에 고개를 저은 가인이 천천히 눈을 뜨고는 자리에 앉았다.


그녀는 문 밖으로 뛰쳐나가 숨지 않았다.


하지만 극복했다는 승리의 느낌은 아니었다. 아직 거대한 공포와 대면하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절체절명의 순간을 넘겼다는 건 그녀 자신에게 있어 엄청난 변화였다.


곧, 종이컵을 들고 온 양경사가 가인 앞에 내밀었다.


“따듯한 물입니다. 조금 마셔보세요”

“감사합니다.”


양손으로 컵을 잡은 가인이 힐끗 양경사를 살폈다.


자신을 바라보는 근심 가득한 눈빛이 그는 더 이상 괴물이 아니었다.


그제야 입이 바짝 말라있었다는 걸 느낀 그녀가 따끈한 물에 목을 축였다.


“죄송해요”

“아닙니다. 오늘은 댁에 가서 쉬시고 다음에 다시 얘기하죠”


일어나려는 양경사를 가인이 막아섰다.


“아닙니다. 이제 괜찮아졌어요.”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네. 괜찮습니다. 과거를 떠올리는 게 저에게는 악몽을 꾸는 것과 똑같아서요..”


괜찮다는 가인에 양경사가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방금 전과 같은 상황이 반복될 수 있기에 그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가인을 예의주시했다.


과거를 떠올리는 게 악몽이라는 그녀의 말을 양경사는 십분 이해할 수 있었다.


이미 공개된 가족사만으로도 가인은 공공연히 ‘비운의 상속녀’라 불리고 있었으니까.


그런 가운데 10년 전 친구가 실종되는 사건까지 있었으니 모르긴 몰라도 이가인의 20대는 만신창이었을 터였다.


가인이 흘러내린 머리를 쓸어 올렸다.


좀처럼 감정이 없어보였던 얼굴에 뭔가 마음을 단단히 먹은 단호한 눈빛이 양경사 눈에 띄었다.


“이 사진 속 인문은 이가인씨 친구, 나수현 부친 나재희씨가 맞습니다.”

“10년 전 저를 보던 눈빛은 아니지만 인상이 참 좋으시네요”


가인이 사진 속 나재희와 눈을 마주쳤다.


그녀를 찾아와 당장이라도 목을 조일 듯한 10년 전 그때의 눈빛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마주할 수 없던 눈빛이었다. 그러나 더 이상 그녀도 피하지 않기도 했다.


나재희는 딸을 잃어버렸고 가인은 속을 터놓았던 유일한 친구를 잃어버렸다.


“그럼 이분은 누구신가요?”


곧 두 번째 사진으로 시선을 옮긴 가인이 물었다.


인상만으로는 꽤나 굴곡진 인생을 살아온 듯한 고집 센 노인의 얼굴이었다.


“두 번째 사진은 나재희씨. 64세. 과천에 거주하며 사업가였지만 현재는 일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순간 놀란 가인의 두 눈이 양경사를 향했다.


64세라는 나이에 비해 십년은 더 늙어 보이는 깊은 주름과 광대가 돌출된 마른 얼굴, 게다가 하얗게 내려앉은 흰 머리가 도무지 그 나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가 놀란 건 나이에 비해 늙어 보이는 얼굴 때문이 아니었다.


“지금, 나재희씨라고 하셨나요?”

“네. 두 사진은 같은 인물입니다. 사진을 찍은 시기는 10년 정도 차이가 있지만요”


두 번째 사진을 들고 있던 가인의 손이 파르르 떨리며 그만 사진을 놓치고 말았다.


몸 속 깊은 곳에서부터 솟구치는 소름이 그녀를 꼼짝하지 못하게 했다.


“이 사진을.. 왜 저한테 보여주시는 거죠?”

“두 번째 사진은 익명의 제보자로부터 받은 사진입니다.”

“익명의 제보자가 이 사진을 보냈다고요?”

“네. 저희가 퀵으로 받은 봉투 안에는 이 사진과 함께 cctv속 검은 모자를 쓴 남자를 추적하라는 쪽지가 들어있었습니다.”


굳이 부연설명이 필요하지 않은 정황이었다.


가인 집에 몰래 침입해 끔찍한 가상 살인을 저지른 괴한이 cctv속 검은 모자, 즉 나재희라는 의미였다.


그러나 두 사진 속 인물이 같은 사람이라고 하기에는 납득이 되지 않을 만큼 상이했다.


10년 전 푸근했던 풍채는 어느 새 깡마른 독거노인처럼 되어있었고, 새치 하나 없던 검은 머리는 세월의 풍파를 한 번에 맞은 듯 흰 눈이 덮여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달라진 건 그의 얼굴이었다.


바다를 품은 미소와 선하기 그지없었던 눈매는 어느새 독사의 눈빛과 삐뚤어진 입꼬리로 바뀌어 있었다.


게다가 흰 머리만큼이나 얼굴을 점령한 불규칙한 주름들은 사나워진 그의 인상을 더욱 고집스럽게 만들었다.


“그러니까, 이분이 제 집을 그렇게 만든 괴한이란 말씀이신가요?”

“아직 그건 단정할 수 없습니다. 이가인씨 가택에 침입했다거나 그곳에서 나왔다는 증거가 없거든요”

“그런데도 익명의 제보자는 그분을 범인으로 지목했다는 건가요?”

“제보자가 어떤 사건과 연관 지어 나재희씨를 지목한 건 아닙니다. 검은 모자 신분을 확인한 후 저희 측에서 조사한 결과, 이가인씨와 관련 있는 인물이라는 걸 알아낸 거죠”


단정할 수 없는 경찰의 입장을 가인도 이해했다.


그러나 두 사람 가운데 어느 누구도 나재희가 범인이라는 걸 부정하지 않았다.


딸이 실종된 10년이라는 시간동안 가인에 대한 그의 의심은 확신이 됐고, 확신은 결국 실행으로 옮겨졌다.


순간 무표정했던 가인이 허탈한 웃음을 보였다.


막상 범인의 정체를 알고 나니 더 엉켜버린 실타래 때문이었다.


딸이 사라졌으니 누구에게든 그 책임을 묻고자 하는 마음은 가인 또한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 동생 이서인이 실종되었을 때 그녀가 스스로에게 책임을 물었던 것처럼.


하지만 그 대상이 자신이 되었다는 사실은 그녀를 슬프고 비참하게 만들었다.


비록 가상이긴 했지만 10년 전 예고대로 나재희는 나름대로의 범인을 찾아 처리했다.


어디선가 잘 살고 있을 수현이 마법처럼 갑자기 나타나지 않는 이상, 10년 간 엉켜버린 실타래는 풀 수 없을 터였다. 영원히.


그런 가운데 그녀 머릿속에 궁금할 수밖에 없는 한 인물이 떠올랐다.



익명의 제보자



“그 익명의 제보자는 혹시 찾아보셨나요?”

“안 그래도 백방으로 알아봤지만 신분을 알리고 싶지 않은 듯 여지를 남기지 않았습니다.”

“퀵배달 기사님도 모른다고 하시던가요?”

“배달기사 역시 공원 벤치에서 퀵비와 물건을 받았답니다.”

“혹시, 형사님 앞으로 도착한 서류였습니까?”

“네. 제 이름으로 왔습니다. 그래서 이가인씨 사건과 관련이 있다는 촉이 있었죠. 제가 담당하고 있다는 걸 제보자는 이미 알고 있던 거니까요”


완벽하게 스스로를 숨긴 이를 찾아낸다는 건 가인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추적이 용이한 경찰이 찾지 못한 인물이라면 더더욱.


하지만 누군가가 자신을 돕고 있다는 생각에 그녀는 불안하지 않았다.


“일단 정황만으로 나재희씨를 소환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 저희 측에서 나씨를 예의주시할 예정입니다.”


분명 가인에게는 안심이 될 만한 희소식이었다.


그런데 가인이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그러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네? 왜 그러시죠?”

“아시겠지만 제게도 어릴 적 잃어버린 동생이 있어요. 그래서 그분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의외의 반응이라는 듯 양경사가 멈칫했다.


25년 전 당시, 수사기록이 기자들에게 유출되진 않았지만 이가인 동생 이서인은 누나인 가인의 부주의로 인해 잃어버린 것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그리고 10년 전 실종된 나수현 또한 마지막을 함께 했던 상대가 그녀였다.


물론 두 사람의 사건을 연관 지을 필요는 없었다.


결이 완전히 다른 실종사건이었으니까.


그러나 나재희를 이해할 수 있다는 가인의 말이 그녀를 차갑게만 보던 양경사를 당황하게 했다.


그의 눈에 평생을 자책하며 살아가고 있는 이가인이 보인 거였다.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I am 엔젤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45화 부터 50화까지 내용이 전면 수정되었습니다. 24.01.24 39 0 -
71 욕망의 끝 24.02.19 16 0 15쪽
70 네 스스로 그걸 증명해 24.02.18 19 0 13쪽
69 악어의 눈물?! 24.02.17 26 0 12쪽
68 진실은 나만 알고 있거든 24.02.15 31 0 11쪽
67 I’m 엔젤 24.02.14 19 0 11쪽
66 그녀 없는 그녀이야기 ② 24.02.13 38 0 10쪽
65 그녀 없는 그녀이야기 ① 24.02.13 59 0 11쪽
64 죽음의 기운 24.02.09 38 0 12쪽
63 두렵다기보다 화가 날 것 같아 24.02.08 21 0 12쪽
62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생이네. 24.02.06 40 0 11쪽
61 거드리지 말았어야 할 상대를 건드린 기분이야 24.02.05 26 0 13쪽
60 제가 알고 싶은 건 약점이 아니라 진실입니다. 24.02.04 56 0 11쪽
59 모든 게, 완벽해 24.02.03 66 0 11쪽
58 3분 48초 24.02.02 34 0 10쪽
57 난 진실이 필요하거든 24.01.31 24 0 12쪽
56 억울하고 화가나 미칠 것 같지? 24.01.30 42 0 11쪽
55 그는 내일이 없어보였다. 24.01.29 41 0 11쪽
54 각자의 길에 들어서다. 24.01.28 34 0 11쪽
53 목격자 24.01.27 36 0 11쪽
52 이미 늦었어 24.01.26 24 0 10쪽
51 그녀는 그 집에 사는 유령이었다. 24.01.25 38 0 13쪽
50 가능한 영원히.. 24.01.23 26 0 10쪽
49 그건 극복하는 게 아니야. 받아들이는 거지 24.01.22 58 0 13쪽
48 정말 신이 있다고 믿나요? 24.01.21 35 0 11쪽
47 마음이 앞서면 일을 그르칩니다. 24.01.20 36 0 10쪽
46 오해 그리고 낙인 24.01.19 40 0 11쪽
45 그곳은 천국이었다. 24.01.18 36 0 10쪽
» 그는 딸을 잃어버렸고 나는 유일한 친구를 잃어버렸다. 24.01.17 39 0 10쪽
43 온 세상 불행이 마치 나만 공격한 것 같았지 24.01.16 37 0 11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