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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자신을 사랑하라

영혼의 왕 - 세계의 끝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SF

Lee書靈
작품등록일 :
2016.12.14 02:34
최근연재일 :
2016.12.21 18:38
연재수 :
11 회
조회수 :
1,982
추천수 :
13
글자수 :
63,467

작성
16.12.19 1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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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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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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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3장 - 꽃은 시들기 전에 꺾인다(4)

DUMMY

바빠진 근무에 정신없이 일주일이 지나가고, 겨우내 여유 시간을 가지게 된 펜릴은 예비 성인들이 자주 이용하는 마을로 내려갔다. 사제 부대가 통합되고 나서 리튼을 예전처럼 자주 볼 수 없었던 그는, 헤어지면서 한 약속대로 펜릴은 깃털같은 기분으로 술집 '에이프릴 주점'에 들어갔다.

"펜릴!"

누군가가 들어온다는 의미의 종소리와, 그를 반갑게 맞이하는 한 여자의 목소리가 동시에 들렸다. 손짓을 하는 쪽을 돌아보니, 리튼이 제의를 입고 앉아 있었다. 벌써 달린 듯 그녀의 눈이 살짝 풀리고 얼굴은 빨개져 있었다.

하지만 그곳에선 반가운 리튼의 얼굴과 함께, 반갑지 않은 한 사람의 얼굴 또한 있었다.

"이 찌질이는 그만 좀 부르면 안돼, 리튼?"

라시안이 그를 삿대질하며 리튼에게 말했다. 한참동안 머리 손질을 안했는지 이제는 그의 머리카락이 눈까지 가려 세계 최고로 음울한 아이가 바로 자신이라는 식의 연출을 하고 있었다.

"그건 내가 할 말인데."

펜릴 또한 으르렁대듯 말했다.

"아 좀, 둘이 친하게 지내면 안 돼? 내 베스트 프렌드 둘이 이렇게 치고박고 싸우면 속상하단 말이야."

둘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걸 아는지, 리튼의 눈매가 반원 모양으로 올라가면서, 라시안과 어깨동무를 하는 척하며 그의 얼굴을 그녀의 어깨로 당겼다. 그녀의 겨드랑이에 얼굴이 들어간 라시안의 얼굴이 순간 붉게 변하더니 공기를 무겁게 하던 적대감이 한 순간에 사라졌다.

"요새 잘 지내? 부대는 어떻고."

그 말에 겨드랑이에 얼굴이 묻혀있던 라시안의 고개가 들리며, 살벌한 눈빛을 펜릴에게 쏘아냈다. 절대 그 말을 해서는 안됐었다는 듯이.

"좋았지.. 좋았어, 어제까지는."

반가움에 밝았던 그녀의 표정이 금새 어두워졌다. 그녀는 라시안을 놓아주고, 백금발을 귀 뒤로 넘기면서 맥주를 들이켰다. 귓볼까지 빨간 것을 보아 그가 오기 전부터 이미 거하게 마신 것 같았다.

"한 잔 더."

마리아란 견습 사제는 글로리아에서의 훈련을 갓 마치고 이번에 새로 배정받은 동갑내기였던 것 같다. 만약 동기나 선임이었으면, 이미 리튼의 수다를 통해 알 수 있었을 테니까.

한 마디로 말해서, 새로 생긴 첫 후임이란 것이었다.

"되게 싹싹하던 아이였다? 얼굴도 예쁜 데다가 말주변도 좋아서.. 그러면서도 착해가지고 처음 온 날엔.. "

그렇게 한창 동안 마리아에 대한 리튼의 장황한 칭찬이 이어졌다. 자질이 뛰어나다는 둥, 자신들이 챙기지 않아도 먼저 다가온다는 둥, 메켄투스님의 총애를 받아 얼마전에 처음으로 그의 축복을 받았다는 둥, 펜릴이 오고 나서 그녀가 혼자 비운 맥주만 세 잔이 될 동안 넋두리를 했다. 구구절절한 칭찬을 끊었다가는 어떤 일이 일어날 지 몰랐기에 펜릴은 감히 끊을 수 없었다.

"그런데 걔가 이번 전투에서 죽었데. 이제 막 서로 정 붙인 아이었는데.. 온지 보름도 안 된 아이였는데.."

긴 평화 뒤의 죽음이라 그런지, 아니면 그녀의 첫 후임이 죽어서 그런건지 리튼의 슬픔은 슈라인 대장이 죽었을 때만큼 커 보였고, 이내 닭똥같은 눈물을 흘리며 술을 들이켰다.

어느 새 리튼의 옆자리에서 펜릴의 옆자리로 온 라시안은, 팔꿈치로 그의 옆구리를 툭 치며 나직이 말했다.

"얘 지금 죽은 지 후임 때문에 너 오기 전에도 네 잔을 연거푸 들이켰어. 병신아. 분위기 파악은 하고 질문 좀 하자. 아니면 먼저 온 나에게 살짝 물어보던가."

이 말을 한 뒤 리튼에게 궁금하다는 듯이 천연덕스럽게 질문을 하는 라시안이었다.

"그런데 사제가 죽기는 정말 힘든데 어쩌다 죽은 거지? 뒤에서 신성탄 쏘고 치료해주고, 도와주는 날로 먹는 애들인데... 물론 리튼 너는 특별히 더하고."

보통 신체 능력이 그렇게 강하지 않은 사제들은 후방에서 신성력으로 마물들의 마력 공격을 견제하고 무효화시키거나, 다친 사람의 상처를 치유해주는 등 지원 역할과 원거리 공격을 맡는다. 그렇기에 숫자가 적은 것 이상으로 사망자가 적은, 비교적 안전한 위치에 있는 병과였다.

"지금 눼가 날로 먹는다 했어?"

하지만 라시안이 의도한데로 앞에보다 뒤에 주목한 리튼이 꼬인 혀로 짐짓 화냈고

"쌔빠지게 능력 써가면서 잡는 나보다는 백 배는 더 날로 먹지."

라시안이 장난스레 대꾸했다. 너무 무거운 분위기를 풀기 위해서였다.

그녀가 비틀거리면서 일어나 라시안에게 딱밤을 먹이려 했으나, 중심을 잃고 도로 쓰러지면서, 자기 꼴이 우스웠는지 웃으며 말했다.

"헤헤, 어굴하시면 믿음이 깊으시던가요. 돌연변이 씨."

"돌연변이가 사제가 된 케이스는 없는데? 어차피 사제 되지 못할 거라 약올리는 것 맞지?"

"능력도 신성력도 없으니 호구 같이 느껴지네."

펜릴이 둘 사이의 대화에 끼며 한숨을 쉬었지만,

"넌 호구 맞아, 병신아."

이내 나온 라시안의 말에 한숨을 쉬던 입마저 다물게 되었다. 그 꼴에 기분이 풀린 것일까, 리튼이 뒤로 넘어갈 듯이 웃었다. 이윽고 라시안이 칭찬하듯 펜릴의 등을 툭툭 친 뒤, 리튼에게 재차 말을 건내려 했다.

그 때, 풋풋해 보이는 소녀가 흰빵 바구니를 그들 있는 데 놓으며 말을 건냈다.

"서비스에요, 언니. 힘내요. 친구 일은 안 됐지만, 언니가 슬퍼하면 저도 슬퍼요."

그 말에 리튼이 고개를 까딱하며 화사하게 말했다.

"고마워요, 에이프릴."

갈색 눈동자와 신비감을 자아내는 푸른색 땋은 머리가 매력적인 에이프릴은 주점을 운영하는 부부의 외동딸이었다. 양뺨 가득한 주근깨에, 약간 나온 입만 아니었다면 어디 가서 미인 소리를 들렸을 법한 외모 때문일까, 그녀를 보기 위해 주점을 애용하는 예비 성인들이 꽤 있을 정도였다. 그런 그녀가 평소 잘 따르던 리튼이 우울해 보이자 그녀를 위해 특별히 서비스를 내온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에이프릴도 이제 성인식을 할 때가 오지 않았나요?"

그녀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만취해서인지 리튼의 미소가 더욱 만개했다.

"네. 이제 다음 눈이 내리는 날에 20살이 되네요."

"와, 뭔가 특별한데? 눈이 내릴 때마다 생일이라니."

펜릴이 감탄하듯 추임새를 넣자 옆에서 라시안이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멍청이, 너 같으면 눈 오는 날에 자기 집 앞 눈 치우느라 바쁜데 남의 생일 챙겨 줄 여유 있겠냐? 생각 좀 하고 살아라, 맹탕처럼 살지 말고."

"이게.."

"그만 좀 해, 라시안. 펜릴도 애지만 그걸 놀리는 너는 더 애같아, 딸꾹."

싸움이 번지려는 것을 리튼이 먼저 나서서 막았다. 취중이라 그럴까, 왠만해선 안 나오는 그녀의 '반'진심이 튀어나와 버렸다.

라시안은 순간 벙찐 표정을 한 뒤, 펜릴의 편을 드는 그녀가 맘에 안 들어서인지 대꾸하지 않고 이내 궁시렁거리며 몸을 옆으로 돌려버렸다.

쟨 펜릴만 있으면 저런다니까, 라고 아무도 들리지 않게 혼잣말한 리튼은 귓볼을 살짝 만지작거리며 에이프릴과 대화를 이어나갔다.

"무섭지 않아요? 아무래도 싸우는 걸 보시기도 하고.."

"그래도 가까이서 보니까 다들 용감하시고 훌륭하셨는데요. 그런 분들 곁에서 싸울 수 있다니 기쁘고 설레요. 많은 사람들도 응원해 주셨는데요."

그러다 뭐가 생각났는지 에이프릴이 가볍게 박수를 치며 말했다.

"맞다, 그리고 메켄투스 사제님도 축복도 내려주시기로 했어요. 이제 곧 성인식이라니까 몸도 건강하게 하고 앞길에 행운이 있길 빌어주신다고 내일 찾아뵈라고 하셨어요. 많은 사람들이 챙겨주니 너무 감사하죠."

"어머, 잘 됐네요."

리튼이 일어나 그녀의 두 손을 잡고 기뻐했다.

"장벽에서 그 기적을 보여 주신 대장님이면 좋은 기회가 될 거에요. 부럽다 부러워. 나도 축복 좀 받고 싶다아."

리튼은 기쁨과 부러움에 손을 과하게 흔들더니 이내 '어어어'하는 소리와 함께 취기에 중심을 잡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그녀와 비교적 가깝게 앉아있던 펜릴이 급하게 일어나 뒤로 넘어가려던 그녀의 허리를 잡고 부축했다. 엉겁결에 그와 그녀의 얼굴이 한 뼘 가량만큼 가까워졌고, 그 묘한 분위기에 주변의 시선이 집중되었으며, 웅성거리던 소리가 한 층 줄어들었다. 에이프릴은 뭔가 기대를 하는 눈초리로 한 발짝 뒤로 물러나 입을 두 손으로 가렸다.

연애담에서 나올 법한 로맨틱한 자세에 취기오른 분위기, 그리고 신병들의 풋풋함은 다들 뭔가를 원하는 모양이었지만 헤롱거리며 실실 웃는 리튼의 얼굴에 펜릴은 그저 걱정만이 들 뿐이었다.

'내 주제에 뽀뽀는 무슨.'

물론 솔직히 말하면 그는 리튼을 사랑한다. 보석처럼 아름다운 이 소녀를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녀는 사제가 될 몸이고, 자신은 마을로 돌아가 농사나 지을 몸이었다. 그런 그녀의 옆자리에 그라는 왜소한 존재는 너무 과분했다. 글로리아처럼 영광스럽고 빛처럼 찬란한 그녀를 사랑할 사람은, 자신보다 훨씬 더 위대하고 좋은 사람이어야 했다. 그는 그저 동네 친구, 리튼이 문득 떠올릴 추억으로 남기만 해도 만족스럽다 생각했으니까.

"리튼, 많이 취했다. 가자."

이내 자세를 고쳐잡은 그는 리튼의 팔을 어깨에 메고 술집을 나갔다. 홀로 술집에 남겨진 더벅머리 남자애가 한 '저 고자새끼' 라는 말을 듣지 못한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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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정말 천천히 글쓰게 되었습니다. +1 16.12.14 162 0 -
11 3장 - 꽃은 시들지 않고 꺾인다(6) +1 16.12.21 191 1 17쪽
10 3장 - 꽃은 시들기 전에 꺾인다(5) +1 16.12.20 103 1 11쪽
» 3장 - 꽃은 시들기 전에 꺾인다(4) 16.12.19 125 1 10쪽
8 2장 - 꽃은 시들기 전에 꺾인다(3) 16.12.18 164 1 9쪽
7 3장 - 꽃은 시들기 전에 꺾인다(2) 16.12.18 124 1 9쪽
6 3장 - 꽃은 시들기 전에 꺾인다(1) 16.12.18 114 1 8쪽
5 2장 - 장벽에서(3) 16.12.16 131 1 24쪽
4 2장 - 장벽에서(2) +1 16.12.15 134 1 19쪽
3 2장 - 장벽에서(1) +1 16.12.14 190 1 18쪽
2 1장 - 약속 +1 16.12.14 339 3 12쪽
1 서장 - 세계의 끝 16.12.14 366 1 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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