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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자신을 사랑하라

영혼의 왕 - 세계의 끝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SF

Lee書靈
작품등록일 :
2016.12.14 02:34
최근연재일 :
2016.12.21 18:38
연재수 :
11 회
조회수 :
1,983
추천수 :
13
글자수 :
63,467

작성
16.12.18 02:29
조회
114
추천
1
글자
8쪽

3장 - 꽃은 시들기 전에 꺾인다(1)

DUMMY

-키르께서는 전능하시고, 전지하시며, 모든 인간을 굽어 보십니다 - 가이우스서 3절 중 발췌


에우로파의 돌진에 의해 완전히 무너진 장벽은 세 달이 지난 지금도 휑한 마역이 보일 정도로 진척이 더뎠다. 석재를 조달하기 까다로운 점과 조달한 석재를 가공하는 것도 문제였지만, 확연히 나태해진 군인들의 태도가 공사의 발목을 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빨리빨리 움직이지 못합니까. 괴물들은 여러분의 사정을 봐 주지 않습니다."

1부대장이자 임시 수비대장이 된 카넬리언은 미적거리는 예비 성인들을 독촉하면서도 한숨을 푹 쉬었다.

슈라인의 기적이 있었던 그 날 이후, 뺀질나게 장벽을 괴롭히던 괴물들은 세 달 동안 그 자취조차 감췄다. 멘티스들과의 전투, 에우로파를 마주한 절망은 그저 지나간 영웅담이 되었을 뿐, 지금은 그저 평화로운 마을이랑 진배없었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지는 법, 그렇기에 괴물들 핑계를 대며 독촉해봤자, 이제 그 경고에 대해 아무도 심각하게 느끼지 않았다. 그녀 자신도 무뎌져 가는 게 느껴지는데 다른 이들은 어떻겠는가.

"젠장, 내일은 비가 와서 어차피 일하지도 못하는데.."

"뭐 어때, 어차피 처들어오지도 않는데, 애들 좀 풀어줘도 되잖아? 부대장이 되었으면 여유를 좀 가지라고. 귀여운 얼굴 상할라."

그녀의 곁에 어느샌가 3부대장 아인핸더가 다가와 있었다. 가느다랗게 떠진 그의 두 눈에는 이미 지금의 게으름이 뚝뚝 묻어나오고 있었다. 이윽고 그는 귀찮음 가득한 어조로, 대충대충 작업하고 있는 예비 성인들에게 말했다.

"야! 대충 정리하고 들어가 쉬어! 어차피 쳐들어 오지도 않는데 뭐하러 그렇게 고생이야."

그의 빈정 가득한 말에 그녀는 눈살을 찌푸리며 외쳤다.

"하늘이 어두워지기 전까지 일한다! 지금 들어가면 나한테 뒤진다!"

그러자 아인핸더의 눈매가 올라가더니 이내 카넬리언의 멱살을 잡고 나직이 말했다.

"큭, 지금 낙하산이 까마득한 선임의 말에 태클걸고 있나 지금? 아서라. 사이러스도 내 아래였는데, 그 한참 밑인 네가 말하는 걸 들을까? 아니면 오랫동안 상관인 나의 명령을 따를까?"

그가 말한 권위 때문일까, 아니면 개판이 된 군기 때문일까, 그것도 아니면 그저 편하고자 하는 인간의 본성 때문일까, 이유는 확실치 않아도 대부분의 예비 성인들은 작업을 마치고 건성 가득한 경례를 한 뒤 장벽에서 멀어져 갔다. 남은 성인들은 카넬리언이 이끄는 1부대 쪽 사람들 뿐이었다.

"뒤지기 싫으면 그만 깝쳐라. 카넬리언 십.부.장."

노려보던 그는 그 말과 함께 그녀를 거칠게 밀쳐내고는 자리를 떠났다.

'에우로파 없는 곳에선 멘티스도 왕이라더니.'

그녀는 고작 세 달 사이에 변해버린 이 곳의 모습에 환멸감을 느꼈다. 그가 죽기 전 비췄던 두 소대장들에 대한 불신이 완전히 이해가 갔다.

첫 2주 간은 모두가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엄숙히 부대를 지켰다. 장벽도 열심히 복구하고, 경계근무도 철저히 서는 모습을 보여줬다. 하지만 한 달이 지나자 최고참인 3부대장이 흔들리기 시작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얼마 뒤에는 그를 따라 2부대장도 근무를 태만히 하기 시작했다. 긴 평화에 익숙치 않은 예비 성인들은, 윗물이 탁해지자 자연스럽게 자신들도 흐려지기 시작했다.

그나마 그녀의 노력에 북동 1부대와 일부 상비군만 그 기세를 무디지 않게 유지하고 있을 뿐, 나머지는 나태해질 대로 나태해져 3달 전 군기가 바싹 들었던 모습은 찾기 힘들어졌다.

지금 장벽 복구도 마찬가지였다. 무너진 장벽의 너비가 엄청나 세 부대가 다 같이 작업해도 모자랄 것을, 구역이 1부대의 것이라고 나머지 부대는 도와주는 시늉만 하고 있는 것이었다.

'대장, 대체 왜 저에게 감당 안되는 짐을 주신 겁니까?'

문득 고개를 들어 대장을 원망하는 카넬리언이었지만, 이미 하늘로 돌아간 그를 추억해봤자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이후 하늘이 어둑어둑해질 때까지 석재를 쌓아놓다가 숙영지로 돌아가던 그녀는, 때마침 그녀를 마중나오던 펜릴을 만났다. 아까 아인헨더와의 실랑이를 봐서인지 펜릴의 눈망울에 슬픔이 입혀져 있었다.

"누나, 괜찮아? 또 빌어먹을 아인헨더가 지랄간섭을 한 거 다 봤어."

자신의 부하들 앞에서 멱살을 잡힌 게 떠오르면서 살짝 부끄러워지기도 했지만, 그래도 걱정 가득한 목소리에 그녀의 피로가 녹는 듯했다.

"됐어. 대장님이 맡기고 간 일이니까, 그 정도는 감수해야지. 그래도 걱정해줘서 고맙다 이 귀염둥이."

그녀보다 그의 키가 머리 하나정도 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손을 뻗어 동생의 금색 머리카락을 슥슥 하고 만졌다. 그러자 그가 장난 반, 진심 반으로 뒤로 물러나며 신경질을 냈다.

"아, 쫌! 머리 좀 그만 만져! 내가 아직도 꼬맹이로 보여?"

"킥, 누나가 보기엔 아직도 어린이야, 어린이."

"에효. 어쨌든."

펜릴은 낙담하듯이 자신의 턱을 궤며 말을 이어갔다.

"중요한 소식도 있어서 왔어. 누나가 여기 있던 사이 전령이 왔었다고, 비서관 형이 가는 길에 이것 좀 전하라 했는데?"

이윽고 그는 주머니에서 한 통의 편지를 꺼내 카넬리언에게 건넸다. 밀봉시킨 빨간 인장과, 편지 겉봉지에 쓰여진 케이아스 총사령관의 성함과 싸인은 이 편지가 중앙에서 온 것임을 보여주고 있었다. 조심히 뜯어서 읽어보던 카넬리언은 순간 얼굴이 찌그러졌다가 이내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이제야 오는구나."

"누가 오길래? 설마 새 사령관?"

펜릴의 물음에 그녀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후우, 고생 많았어. 누나. 이제 좀 마음고생 덜 하겠다."

지난 몇 달 간 부담스러운 임시 수비대장을 하면서, 그녀의 정신적 피로는 숨기려 해도 조금씩 드러나고 있었다. 시도때도 없이 한숨을 쉬거나, 아니면 다크서클이 뺨까지 내려왔는데도 억지로 괜찮다 하는 그녀의 태도에 보는 펜릴이 안타까울 정도였다.

"아니다 욘석아. 내가 너처럼 물렁한 앤줄 알아?"

하지만 그녀는 오히려 웃으며 가볍게 펜릴의 등짝을 쳤다. 펜릴은 힘든 상황에서도 자신들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는 누나의 어른스러움에 고마웠고, 그래서 새삼스레 그녀에게 짐을 안기고 간 슈라인 대장이 살짝 미워졌다.

"일단 고맙고, 들어가 봐. 만약 며칠 내로 오신다면 취임식 준비랑 부대 정비 등 할 게 많으니까 난 공관에서 일 좀 더 볼게. 피곤할 텐데 먼저 들어가 봐."

"알았어. 누나도 무리하진 말고."

펜릴은 손을 흔든 뒤 그녀에게서 멀어져 갔다. 하지만 그녀는 편지를 다시 읽으며, 차후 수비대장으로 올 사람의 이름과 신분을 다시 확인한 뒤 습관적으로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고위 사제라.. 요새 좋은 사람을 손꼽기 힘들다는데.."

직업 군인을 하면서 이미 사제들의 자만심에는 질릴 대로 질린 그녀였기에, 오만함과 깐깐함의 극치를 달리는 고위 사제가 수비대장으로 오면 얼마나 부대가 뒤집어질지 걱정이 되었다. 어둑해진 하늘이 마치 이 부대의 미래일 것만 같은 불안한 예감을 가진 채, 그녀 또한 일을 처리하기 위해 슈라인의 온기가 떠나지 않은 공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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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정말 천천히 글쓰게 되었습니다. +1 16.12.14 162 0 -
11 3장 - 꽃은 시들지 않고 꺾인다(6) +1 16.12.21 191 1 17쪽
10 3장 - 꽃은 시들기 전에 꺾인다(5) +1 16.12.20 103 1 11쪽
9 3장 - 꽃은 시들기 전에 꺾인다(4) 16.12.19 125 1 10쪽
8 2장 - 꽃은 시들기 전에 꺾인다(3) 16.12.18 164 1 9쪽
7 3장 - 꽃은 시들기 전에 꺾인다(2) 16.12.18 124 1 9쪽
» 3장 - 꽃은 시들기 전에 꺾인다(1) 16.12.18 115 1 8쪽
5 2장 - 장벽에서(3) 16.12.16 131 1 24쪽
4 2장 - 장벽에서(2) +1 16.12.15 134 1 19쪽
3 2장 - 장벽에서(1) +1 16.12.14 190 1 18쪽
2 1장 - 약속 +1 16.12.14 339 3 12쪽
1 서장 - 세계의 끝 16.12.14 366 1 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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