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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자신을 사랑하라

영혼의 왕 - 세계의 끝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SF

Lee書靈
작품등록일 :
2016.12.14 02:34
최근연재일 :
2016.12.21 18:38
연재수 :
11 회
조회수 :
1,984
추천수 :
13
글자수 :
63,467

작성
16.12.18 2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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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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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쪽

3장 - 꽃은 시들기 전에 꺾인다(2)

DUMMY

통보가 온 이후 새로 올 수비대장을 위한 준비에 사흘이란 시간은 화살처럼 지나갔다. 그동안 게으름에 진척이 되지 않던 장벽 수리와, 신임 대장을 위해 준비해야 할 서류, 부대 정비 및 취임식 준비 등 글로리아만큼 쌓인 일을 처리하느라 모처럼 북동 수비지역이 분주했다. 펜릴 또한 근 사흘 간 괴물과의 전쟁이 아닌 제식이나 정비, 청소로 인해 정신 없이 바빴다.

그리고 나흗날, 전 북동지역 수비군은 모두 휑하게 뚫려 있는 장벽 앞에서 새로운 수비대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메켄투스란 이름의 고위 사제에 대해 조사하기에는 사흘이란 시간은 너무 짧았기에, 무지에서 오는 긴장감이 사방에 깊게 깔려 있었다.

'단지 장벽 근처에 석재를 쌓아놓기만 하란 명령은 살짝 이상하지만 말이야.'

침이 꼴딱 넘어가는 소리도 들릴 고요함이 얼마나 지났을까, 멀리서 대장이 온다는 신호의 나팔소리가 들리고, 휘황찬란한 제의를 입은 한 사람과 그 뒤를 보좌하는 사람들이 멀리서 보이기 시작했다.

펜릴이 그를 봤을 때 떠오른 것은 딱 '뚱뚱한 사제' 그 자체였다. 얼굴엔 인자한 미소를 띄고 있었으며, 자글자글하면서 처지지 않은 주름은 그의 외모를 노련하면서도 푸근하게 보이도록 하고 있었지만, 신을 누구보다 가까이 모신다는 자존심에서 비롯된 꼿꼿한 허리와 오만한 태도는 쉽게 숨겨지지 않고 있었다. 많은 이들은 그의 선한 얼굴에 마음이 풀어졌지만, 그는 그의 미소와 화려함 간의 괴리감에 살짝 거부감이 들었다.

어느 새 다가온 그는 임시 대장인 카넬리언에게 형식상의 경례를 받고, 말에서 내린 뒤, 두 손을 모으며 말했다.

"키르님께 영광 있기를, 여러분, 오늘부터 이 곳의 지휘를 맡게 된 고위 사제 메켄투스라 합니다."

있던 사람들은 그의 겸손하고 조곤조곤한 어조에 내심 놀랐다. 고위 사제들은 오만하고 권위있기로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정도란 고정관념 때문이었다.

여러분들을 만나게 되어 반갑다느니, 이 곳에 계신 분들이 훌륭하다느니, 앞으로 어떤 비전을 공유할 것이니 같은 형식적인 대사에 사람들이 지루해지려는 찰나, 그가 장벽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나저나 장벽의 상태가 정말 심각하더군요. 키르님의 가호로 악한 권속들이 안 처들어왔길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정말 큰 일이 벌어질 뻔했습니다."

조금씩 풀어지던 장병들의 표정이 일순간에 굳어졌다. 그들이 게으름을 피웠다는 점이 양심에 찔렸기 때문이다. 특히나 3부대장은 찔린 게 많아서인지, 똥마려운 강아지마냥 옴짝달싹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의 표정을 봐서일까, 그가 더욱 짙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책하려는 게 아닙니다. 그만큼 제가 여기로 오기를 잘했단 뜻입니다. 가장 험난하고 위험한 곳에 가야 하는게 키르님의 추종자로서 따를 도리니까요."

사제는 한 손을 들어 숙영지의 인원들을 진정시키며 말했다.

"그리고 고위 사제인 제가 여기로 온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저 무너진 장벽 때문이기도 하죠."

이윽고 그는 가슴 안쪽 주머니에서 무엇인가를 꺼내쥐고, 두 손을 포개면서 장벽을 향해 무릎을 꿇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모든 것은 키르님의 뜻대로 이루어지리니, 당신의 기적이 다시 이 땅을 수호하게 하소서."

무릎 꿇은 그의 온 몸에서 신성력이 아지랑이처럼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정해진 방향 없이 퍼져나가던 신성력이 인간을 굽이치며 지나가 장벽에 다다르자, 벽이 화답하듯이 우우웅 하는 공명음을 내기 시작했다. 그 음성을 들은 펜릴은 마치 장벽의 혼이 있다면 그것이 메켄투스와 이 자리의 모든 사람들에게 고마워하는 걸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이윽고 장벽이 화답하듯이 빛을 내뿜어, 온 석재를 향해 신성력의 가지를 뻗어나갔다. 모든 돌들이 기운을 받자, 돌들이 생명을 부여받은 듯 공중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정방형으로 반듯하게 깎아놓은 석재, 손질되지 않은 바위, 주변을 굴러 다니던 돌멩이까지, 장벽은 자신에게 새롭게 부여된 신성력의 뿌리로 돌이란 돌은 뭐든지 집어들었다.

이윽고 뻗어나간 신성력을 장벽이 회수했다. 그에 따라 돌들도 장벽 쪽으로 빨려들어갔고, 장벽은 이지가 있는 듯 모은 돌들로 스스로 수리를 시작했다. 가공된 석재들은 가공된 석재들끼리 쌓이고 일정하지 않은 모양의 석재들은 최대한 틈없이 맞추고 있었다. 더욱 놀라운 건, 석재들이 살아있는 생명처럼 자신의 모양을 변형하여 그 틈을 메우고 있었다. 펜릴은 그 장면을 보면서 장벽이 혹시 살아있는 존재가 아닐까 하는 의구심마저 들 정도였다.

이윽고 장벽에서 나오는 빛이 사라지자 에우로파들에게 무너지기 전 말끔한 성벽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석재의 양이 부족해서였을까, 장벽의 보수는 완벽하지 않았다. 수비군 모두가 원활하게 마역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예전만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대여섯 명이 지나갈 수 있을 정도의 공간은 아직 메워지지 않았고, 중간중간 미세한 빈틈이 보이기도 하였다.

기적에 대한 놀라움과, 자신들의 게으름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이라는 자책감과, 그로 인해 질책을 받게 될 거란 불안감이 섞인 복합적인 감정이 군영 전체에 흘렀다.

"괜찮습니다, 어린 파수꾼들이여. 이게 다 키르님의 뜻일 테니까요. 그리고 저의 신성력이 부족한 것도 있죠."

겸양한 그의 태도에 안도의 한숨과 존경의 눈빛이 곳곳에서 나왔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에 대해 무장이 해제될 때즈음,

"제가 여러분을 오래 붙잡아 둔 것 같습니다. 키르님께 영광 있기를. 다들 오늘은 들어가 푹 쉬시기 바랍니다. 저는 이만, 볼 일이 많아서 먼저 들어가보겠습니다."

"영광!"

그 말에 장병들은 충성심과 해방감이 반반 섞인 우렁찬 경례를 한 뒤, 감사와 환영의 박수를 쳐 그를 배웅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앞으로 좋은 부대가 될 것이란 기대와 함께 숙영지로 돌아갔다. 몇 명의 사람들을 제외하고.


신임 수비대장 메켄투스에게 공관을 위임한 뒤 카넬리언은 앞으로 자신이 있어야 할 1부대장실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녀는 공관에서 있었던 대화에 머리가 복잡했다.


"자네가 임시 수비대장이었다고 들었네. 맞나?"

메켄투스는 서류를 뒤적거리며 말했다. 그에게 수비대장의 직함을 넘긴 이상 카넬리언은 이제 1부대장이 되었기에, 앉아있는 그 앞에 서서 대답했다.

"네,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전임 수비대장의 징표를 가지고 있나?"

"중앙에도 보고드린 바와 같이, 저는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마물과의 전투 중에 소실된 것 같습니다."

"흠.. 그럴 리가 없는데. 그걸 건드릴 리가 없는데."

그는 서류에서 눈을 떼고 그녀의 두 눈을 응시하며 말했다. 의구심 가득한 눈빛에 그녀는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알았네. 나중에 다른 일로 부를 터이니 오늘은 일단 들어가게나."


'들키는 줄 알았네.'

그녀의 말은 반만 맞았다. 전임 수비대장의 징표는 그녀가 갖고 있지 않았다. 다만 아직도 펜릴이 가지고 있을 뿐.

그녀는 슈라인 전 대장에게서 임시 수비대장이란 직함을 받으면서, 몇 가지 부탁 또한 받았다.


'개인적인 부탁이 두 가지 있는데..'

'말씀하십시요. 얼마든지 제가 들어드리겠습니다.'

'우선 첫째, 만약 내가 마물들에게 죽는다면 내 시체는 화장해주게. 무리한 부탁인 거 아네. 매장을 하거나 글로리아에서 성대한 장례식을 해야 하니. 하지만 난 내 시체를 남기고 싶지 않네.'

'당신의 죽음에 대한 모욕입니다. 제가 그걸 어떻게 따릅니까?'

'그래도 부탁하네. 첫 번째 부탁이 어렵다면, 두 번째 부탁이라도 들어주게. 내가 죽고 나면 내 징표는 숨겨주게. 그리고 만약 신임 수비대장이 징표를 요구하면, 그를 꼭 경계하게. 이게 내 부탁이네.'


그녀는 결국 첫 번째 약속은 지킬 수 없었다. 화장을 시키기 전, 먼저 중앙 교단에서 온 사람이 슈라인의 시신을 거둬 갔다. 하지만 펜릴이 징표를 확보해놓은 덕분에, 그것만큼은 넘기지 않을 수 있어 두 번째 약속은 지킬 수 있었다.

하지만 메켄투스의 요구를 거부하고 온 지금, 카넬리언은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녀의 안목엔 그가 나쁜 사람이 아닌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토록 자연스럽게 겸양의 말을 하고, 혼자서 장벽을 고치는 기적을 실현한 모범적인 고위 사제를 믿지 말라는 건, 교단 전체를 믿지 말라는 것과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교단을 신뢰하는 이상으로 자신의 군생활을 이끌어준 슈라인을 믿었기에 카넬리언의 생각은 복잡해져만 갔고, 머리를 긁으며 고민을 해도 답이 서지 않던 그녀는 결국 판단을 유보하기로 했다.

'지켜보면 알겠지. 아직 첫날인데.'

하지만 때로는 알게 되었을 때는 이미 늦었다는 사실을, 그녀는 그 때는 모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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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3장 - 꽃은 시들지 않고 꺾인다(6) +1 16.12.21 191 1 17쪽
10 3장 - 꽃은 시들기 전에 꺾인다(5) +1 16.12.20 103 1 11쪽
9 3장 - 꽃은 시들기 전에 꺾인다(4) 16.12.19 125 1 10쪽
8 2장 - 꽃은 시들기 전에 꺾인다(3) 16.12.18 164 1 9쪽
» 3장 - 꽃은 시들기 전에 꺾인다(2) 16.12.18 125 1 9쪽
6 3장 - 꽃은 시들기 전에 꺾인다(1) 16.12.18 115 1 8쪽
5 2장 - 장벽에서(3) 16.12.16 131 1 24쪽
4 2장 - 장벽에서(2) +1 16.12.15 134 1 19쪽
3 2장 - 장벽에서(1) +1 16.12.14 190 1 18쪽
2 1장 - 약속 +1 16.12.14 339 3 12쪽
1 서장 - 세계의 끝 16.12.14 366 1 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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