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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자신을 사랑하라

영혼의 왕 - 세계의 끝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SF

Lee書靈
작품등록일 :
2016.12.14 02:34
최근연재일 :
2016.12.21 18:38
연재수 :
11 회
조회수 :
1,985
추천수 :
13
글자수 :
63,467

작성
16.12.15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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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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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쪽

2장 - 장벽에서(2)

DUMMY

한 차례의 대공세를 막고 시체 정리 등 주변 정리를 한 뒤, 펜릴은 녹초의 몸을 이끌고 장벽 아래 어떤 곳으로 가기 시작했다. 사실 격렬한 전투로, 그에게 걸을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녀를 기다리게 하는 것은 죽기보다 싫었다. 거의 다리를 질질 끄는 것 같은 느린 걸음으로 가다 보니, 맨바닥에 누워 있는 한 명의 여자가 보였다. 백색의 제의에는 흙먼지가 이미 가득했고, 백금발의 머리카락은 헝클어져 있었다. 그럼에도 가진 고유의 수수한 아름다움은 피로와 먼지 사이에서도 조용히 피어나 있었다.

리튼이 보이자 반가움에 잰걸음으로 가던 그는, 근처에 다가가자 힘을 다했는지 넘어지듯이 쓰러졌다.

"으아.. 죽겠다!"

펜릴이 말하자, 리튼이 반갑다는 듯 손을 한 차례 건성으로 올렸다가 내렸다. 숨소리가 거친 게 그녀도 막 도착한 것 같았다.

"하아.. 하아.. 무슨 맨티스랑 그론들이.. 하아.. 그렇게 많이 몰려들었는지. 오늘은 진짜 하아.. 죽는 줄 알았어."

그녀가 누워서 하늘을 본 채 말했다. 진이 완전히 빠져서인지 친한 친구를 쳐다 보고 말할 여유조차 없는 듯 했다.

"오늘 내가 죽인 그론들만 해도 열 마리야. 하아.. 평소라면 둘에서 셋 정도만 처리하면 끝인데 오늘은 무슨.. 신성력 다 써서 더 이상 나오지도 않더라니까?"

그녀는 다른 쪽에서 그론들을 견제한 모양이었다. 평소에 신심이 깊어서인지 사제 교육을 중점적으로 받은 리튼은 신성력을 다루는 데 성공하였고, 그를 통해 멀리 있는 괴물들을 공격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열 마리까지는 뻥이겠지만.'

열 마리를 처리할 정도면 성인식을 끝낸 뒤, 중앙 교단에서 인정받고 서품을 받은 사제 정도라는 소리다. 아무리 믿음이 굳건해도 이제 신성력을 느낀 지 반 년도 채 안 된 리튼이 그 정도라는 건 말이 안 되었기에 그는 피식하고 숨을 조용히 골랐다. 이 힘든 순간에도 뻥칠 여력은 있나 싶은 생각과 함께.

"나는 아까 멘티스가 성벽에 올라와서 난리도 아니었다. 진짜 죽는 줄 알았어."

"그게 나 뒤늦게 봤어. 그래서 한 방 쏴주려고 했는데, 그 때 팔이 잘려나가더라고. 미안, 일찍 봤으면 좀 도와줬을 텐데."

그녀의 사과에 펜릴은 피식 웃으며 가볍게 손을 들었다 내렸다. 리튼도 피식 웃고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요새 완전 난리통이네. 하.. 나 오늘 비번인데 끌려왔다? 이틀 전에도 이만큼 와 가지고 성력 그때도 다 썼는데."

그건 이틀 전 펜릴도 마찬가지었다. 이것만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많은 수의 괴물들이 몰려왔고, 그에 따라 그 때 비번인 펜릴의 부대가 나와 지랄맞게 괴물들과 사투를 벌였다. 그때도 지금처럼 이 곳에서 뻗은 채, 리튼과 잡담을 나눈 것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우리.. 돌아갈 수 있을까?"

펜릴의 자신없는 말에 잠깐동안 침묵이 흘렀다. 항상 해맑던 리튼도 순간적으로 그럴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평소에 기껏해야 한 명 정도 중상을 입는 이 경계근무에서 오늘만 해도 다섯이 죽었으니까.

"에이.. 그러기엔 펜릴은 참 강한걸? 검술도 1등이었고. 잘 살아 남을거야."

하지만 이내 미소를 지으며 발랄한 목소리로 펜릴을 위로해 주었다. 아마도 그녀 역시 많이 불안해하는 것 같다. 하지만 그 와중에 저런 위로에, 펜릴은 마음의 안식을 느꼈다.

펜릴이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려는 그 때, 그들이 기다리던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우리 동생들. 오늘도 많이 힘들었지? 너네 고생해서 이 누나가 오늘도 맛있는 거 삥땅쳐왔다."

지쳐서 바닥에 누운 채 헐떡거리는 둘에게, 활을 찬 여자가 방긋 웃으며 말했다. 단발의 진홍빛 머리카락과 활기차게 성큼성큼 걷는 걸음걸이는 마치 그녀의 정열적이고 유쾌한 성격의 발로 같았다. 그녀의 양손에서부터 풍겨오는 달콤한 벌꿀 내음에 쓰러져 있던 리튼과 펜릴이 억지로 상반신을 일으켰다.

"어여 먹고 힘들 내, 강아지들. 그래야 내일도 모레도 구르지."

"언니, 오늘도 고마워요."

리튼이 활짝 웃으며 그녀가 내민 빵과 염소젖을 받았다. 그리곤 펜릴은 신경쓰지 않고 게걸스럽게 빵을 뜯고, 벌컥벌컥 염소젖을 들이마셨다. 그걸 보던 진홍 머리의 여자는 잠깐 멍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리튼의 그런 야만적인 태도를 조용히 지적했다.

"체할라, 천천히 먹어. 그리고 옆에 내 동생도 있는데 좀 조신하게 먹어라. 아무리 배고파도 그렇지."

"후아, 일과가 끝난 뒤 먹는 빵이라 그런지 더 맛있어서 그래요."

궁극의 맛을 접한 듯 황홀한 표정을 짓던 리튼이, 그녀의 지적에 넉살맞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리고 얘한테 잘 보일 필요가 있어요? 어차피 20년 간 볼 꼴 못볼 꼴 서로 다 봤는데. 그렇지?"

"어.. 응.. 어.."

그녀의 천연덕스러운 말에 펜릴은 되려 당황하여 대충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마음 속에 생긴 섭섭함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표정의 미묘한 변화를 눈치채서일까, 음식을 건네준 여자는 둘을 보더니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한탄했다.

"에휴, 그래. 뭐 이런 곳에서 미모나 품위를 챙기라 한 내가 병신이다 병신."

뭐라 혼잣말을 한 뒤, 이윽고 털썩 앉아서 자신이 가져온 빵을 같이 먹기 시작했다. 리튼만큼 아름다운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들고 온 빵처럼 통통한 얼굴이 어디 가면 귀여움을 받을 얼굴이었다. 하지만 펜릴은 그의 누나가 귀여움을 받을 나이도, 위치도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오늘 힘들다 힘들다 했어도 누나는 여유있게 막던데. 아주 활로 연사를 하던데. 대체 그론들을 몇 마리나 쏴 죽인 거야?"

"에이, 너도 여기 7년간 있어봐라. 그러면 눈 감고도 멘티스 정도는 수월하게 막을 거다. 내가 7년간 한 게 괴물들 활 쏴 죽이는 건데 이 정도도 못하겠냐?"

그녀가 여유롭게 말했다. 펜릴의 첫째 누나, 카넬리언 하워드는 성인식 때 우수한 성과와 태도로 직업 군인을 권유받았다. 매 분기마다 소수의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는 최대의 영광에, 그녀는 당연히 선뜻 응했다.

"근데 왜 안 도와줬어? 아까 나 멘티스랑 일대일로 싸울 때. 지원사격은 해 줘도 되는 거 아니였어?"

"동생아. 설마 내가 못 봤겠니? 다 좋~은 경험이 될 걸 알아서 그런 거란다. 누나도 너만할 때 그런 경험이 있었으니까."

"퍽이나. 누군 죽다 살아났는데 말이야."

펜릴은 그 말에 속이 상했는지 입을 다물고 조용히 빵만 먹기 시작했다. 뭐, 사실 그가 정말로 어려웠으면 그녀가 바로 지원을 했을 걸 알기에, 그렇게 서운하진 않았지만 말이다.

한편 리튼은 문득 뭐가 궁금해졌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여자를 쳐다보았다.

"카넬리언 언니, 그러고 보니 언니는 그럼 7년간 여태까지 이런 걸 막아 왔던 건가요?"

"음. 악신의 기둥이 발정나서 그런 건지 몰라도, 내가 겪은 7년 중 지난 1달이 제일 빡세다고 확신할 수 있어."

그 말을 하면서 그녀는 장벽을 바라보았다. 아니, 장벽 너머로 어렴풋이 보이는 악신의 불길한 기둥을 본 것이었다. 글로리아와 다르게 검은 마나에 휩싸여 있는 그 기둥은, 볼 때마다 불쾌함을 자아내고 있었다.

교단의 교리에 따르면, 키르가 아슈토리아를 물리친 뒤 글로리아를 세우고 인간들에게 자비를 베푼 것을 보고, 악신은 선신에 대해 무한한 시샘과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리하여 여덟 악마를 낳고, 그들을 시켜 각자 기둥을 세워 인간보다 완벽한 창조물을 빚으라 하였다. 하지만 그들은 악신에게서 나온 그대로 악과 파괴로 가득차 있었기에, 뒤틀리고 거대하고 악의적인 창조물들만 만들어 내었다. 그것을 본 아슈토리아는 키르의 피조물 같이 완벽하게 만들 수 없다면, 그들을 파괴하고 키르의 기둥을 부셔 이 땅을 자신의 땅으로 만들라 명하였다.

그 이후로, 여덟 악마들은 자신의 기둥에서 괴물들의 군세를 계속 만들어 내어 인간들을 공격하였고, 지금까지도 이 공수가 이어지고 있는 것이었다.

"특히 오늘은 더 지랄맞았지. 멘티스랑 그론의 물량 공세라니, 아마 오늘은 기억하기 싫은 날 세 손가락 안에 들었을 거다. 그걸 막고 앉아 있으니, 뭐. 니들도 독하다 독해. 나야 7년간 이 곳에서 뺀질나게 막았으니 이렇게 많이 와도 그러려니 하는데, 너희들은 이제 고작 3개월이잖아? 죽지 않는 것만으로도 키르님께 감사하라고."

"오늘 죽다 살아나서 전혀 아니거든?"

"예비 사제지만 저도 마찬가지네요, 언니."

펜릴은 투덜거렸고, 리튼은 혀를 빼 하고 내밀었다.

"그래도 처음 왔을때보단 많이 발전했잖아? 우리 얼빠진 동생들."

카넬리언이 그런 펜릴과 리튼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사실 성인식 때문에 마을을 떠난 6개월 전만 해도 그는 자신있었다. 아니, 글로리아에서 3개월간 했던 훈련을 끝내고 떠날 때만 해도 펜릴은 성인식 기간을 훌륭하게 치룰 거라고 자신하고 있었다. 수석을 차지하진 못했지만 그래도 상위권에 안착하였고, 검술이 매우 우수하다고 교관에게 칭찬까지 받았다. 교리와 신앙심, 신성력 쪽이 낙제를 면할 정도여서 그렇지, 그 쪽에서 우수한 점수를 받았으면 수석까지도 노려볼 수 있는 점수였기에 이쪽에 오면 무난할 거라 자신하였다.

'장벽'에 도달한 첫날, 그가 그것을 처음 봤을 때 엄청 높아서 사람 다섯을 쌓아도 그것의 높이만큼 되지 않을 것 같아, 선신 키르가 만든 장벽의 위대함을 느꼈다. 동시에, 대체 어느 정도길래 이 장벽을 두고 자신들을 성인식이란 구실로 이 곳에 불러들였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다음 날, 여덟 다리 달린 거대한 벌레 스피언트가 쏜 끈적끈적한 줄에, 바로 옆에 있던 고향 동료 카를이 끌려갔다. 거대한 턱에 의해 상반신과 하반신이 분리되는 걸 본 그는, 다른 친구가 자신 대신 끌려갔다는 안도감과, 훈련받은 대로 줄을 잘라주지 못해 동료가 죽었다는 죄책감 간의 괴리 때문에 다리가 풀려 그 자리에서 구역질을 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카넬리언이 그를 발견하고 구해주지 않았다면 그 또한 친구의 길을 따라갔으리라.

그 동안 들었던 것과, 글로리아에서 훈련했던 것은 다섯 살때 하던 아이들 놀이에 불과했다. 사소한 실수 한 번에 이제 갓 장벽에 발을 들인 불쌍한 청년들은 아슈토리아가 지배하는 죽음의 권역으로 끌려 갔다. 그 지독한 전장에 압도당한 펜릴은 결국 제 몸 하나 가누지 못했고, 누나에 의해 안전한 곳으로 옮겨졌다.

그 때 누나가 눈이 풀려버린 그의 뺨을 때리며 한 말이, 그의 빠져나갔던 혼을 돌아오게 만들었다.

'검을 좀 못 휘둘러도 살 수 있다. 활을 좀 못 쏴도 살아남을 수 있다. 하지만 이 지옥같은 곳에서 살아남으려면, 절대 이 심장이 약해선 안된다.'

그 살아남아야 한다는 말에 눈이 번쩍 뜨였다. 리튼과의 약속 때문이라도 살아남아야 한다. 아니, 그녀의 곁에 있기 위해서는 일단 살아남아야 한다. 이 아슈토리아가 뿌리는 죽음의 유혹을 뿌리치고, 그 권속들에 맞서면서, 비바람에도 올곧이 서 있는 한 그루의 나무처럼 살아남아야 한다.

그도 몰랐던 말랑했던 마음이 그 이후로 딱딱해졌다. 징그러운 괴물들을 봐도 솟아오르는 구토를 참아가며 맞서 싸웠고, 한 자루 검과 곁에 있는 동료, 그리고 자신의 뛰는 심장을 믿고 싸우기 시작했다.

이후로도 약 이틀마다 처들어오는 마물들, 각양각색의 끔찍한 외모와, 사람 혼자의 힘으로 막기에 버거운 절대적인 능력을 갖춘 그것들은 여덟 악마들이 얼마나 사악한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하늘 위에서 불을 내뿜는 독수리 파이로호크, 팔이 6개에 등에 날개가 달린 사람형태의 괴물 아수라, 장벽만큼 커다란 소 에우로파까지, 괴물들은 상식을 파괴할 정도로 다양했다. 적어도 일주일에 한번은 장벽을 넘어 목숨을 위협하는 괴물과 싸움으로서 그의 극한을 시험하고 있었다. 만약 아슈토리아가 이곳을 보고 있다면, 자신들의 권속에 맞서 몸부림치는 것을 보며 희열을 느낄 것이라 생각될 정도로.

그래도 그는 살아남았고, 결국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 간혹 사망자는 나왔지만, 그래도 적어도 그와 리튼, 라시안은 아니었다. 오늘처럼 버티고 싸우다 보면, 이제 완연한 성인이 되어 다시 돌아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물론, 최근 한달 간은 엄청난 괴물들의 물량공세에 그런 자신감이 점차 사라져 갔다. 하지만 그는 아까 리튼의 반응이 생각났다.

'잘 살아 남을거야.'

그녀도 그간 몰려오는 괴물들에 피로했을 것이고, 꽤 많은 사람들이 죽었음에 흔들렸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에게는 강한 모습을 보이며 되려 칭찬을 해 주었다.

아직도 그의 모든 것은, 찬란한 들꽃처럼 환하고 굳건했다.

리튼을 보며 그는, 카넬리언의 말대로 심장이 약해선 안 된다는 말을 다시 상기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어쨌든 수고했다 동생들. 난 전후 처리해야 될 게 많아서 이만 먼저 가볼게."

카넬리언이 빵을 순식간에 다 먹은 뒤 일어나자, 리튼은 무엇이 생각났는지 황급히 그녀에게 말했다.

"언니! 그러고 보니 꿀빵 더 있어요?"

"아직도 배고파?"

펜릴의 걱정스런 물음에 리튼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니, 오늘 같이 수고한 라시안도 챙겨줘야지. 이 자리엔 없지만, 친구잖아?"

그는 그녀가 왜 그런 땅딸보에, 독불장군에, 독심 가득한 그런 돌연변이를 가까이 하는 건지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모두에게 친절한 성격 덕분에, 그녀는 마을에서 홀로 떨어져 다니던 자신에게도 친절할 수 있었고, 그녀가 모두에게 보여주는 화사하고 밝은 미소를 펜릴에게도 보여 줌으로서, 그녀가 그의 모든 것이 된 거라는 생각은 들었다.

그래도 서운함은 어쩔 수 없는 것일까, 펜릴의 눈매가 살짝 올라갔다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다행히 리튼은 눈치를 채지 못했는지, 카넬리언을 돌아보며 말했다.

"어쨌든 남은 꿀빵 더 있어요?"

"어... 오늘은 이게 끝인데.."

"힝..."

카넬리언의 당황한 목소리에 리튼은 울상을 지었다. 그런 리튼의 선심을 키르님이 알아줬을까, 그 때 뒤에서 중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네가 원하는 꿀빵은 내게 없지만, 이건 어떻겠나? 클라우스."

짤랑거리는 소리와 함께 자그마한 가죽주머니가 그녀 옆에 떨어졌다. 펼치지 않아도 그 안에 동전이 들어가 있다는 건, 이 자리의 누구라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건, 그 동전을 준 사람의 신분이었다.

"영광! 리튼 클라우스, 슈라인 대장님을 뵙습니다!"

"영광! 펜릴 하워드!"

아직 예비 성인의 신분인 둘이 장벽 북동부 수비대장을 보고도 계속 누워 있다면 그것은 엄청난 결례이기에, 지친 몸임에도 벌떡 일어나, 가슴에 주먹을 대는 경례 자세를 취했다. 그들의 앞에는 다부진 몸매에, 뺨에 긴 흉터가 있는 중년 남성이 서 있었다. 얼굴에 근엄함보다는 인자함이, 깐깐함보다는 부드러움이 가득하여 마을의 아저씨 같은 인상을 주고 있었다. 하지만 그 밑에는 베테랑의 카리스마가 있어, 아직 이 장벽의 밑바닥 신분인 둘을 긴장케 하긴 충분했다.

한편 카넬리언은 간단히 경례한 뒤 슈라인이란 이름의 대장에게 물었다.

"영광! 대장님, 식사 시간인데 급한 일 있으십니까?"

"아아, 그냥 사망자 때문에 기분도 좀 그렇고, 예비 성인애들 오늘 고생 많이 해서 밥이 안 넘어가, 돌아 다니면서 애들 좀 독려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펜릴 앞에 한 발 다가서며 그녀에게 물었다.

"흠.. 자네가 그리 챙기던 동생이 이 청년인가?"

"네, 그렇습니다. 글로리아 훈련장에서 검술 최우수를 받은 아이입니다."

"오늘 성벽 위에 올라온 멘티스를 홀로 물리쳤다는 이야기는 들었네. 까다로웠을 텐데, 고생이 많았어."

"아닙니다!"

대장이 어깨를 툭툭 치며 칭찬하자, 펜릴은 무한한 자신감과 보람을 느꼈다. 오늘 하루 겪었던 고생이 한 순간에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 옆에 있는 아가씨는 이 청년의 애인인가?"

그 말에 리튼은 당황하며 말했다.

"아.. 아닙니다! 그냥 동네 친구일 뿐입니다!"

너무나 격렬히 거부해서일까, 슈라인 대장은 껄껄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장난 좀 쳐 봤는데 싱겁기는. 어쨌든 지나가다 들었는데, 친구를 챙기는 마음씨가 곱고, 전우애가 두터워서 보기 좋네. 거기에 멘티스를 홀로 처리한 사람까지 있으니 포상을 안 할 수 있겠나. 본 대장이 그에 따라 주는 선물이니, 아랫마을에서 맛있는 거라도 사먹게. 그리고 하워드 십부장, 자네에게 마침 부탁할 일이 있으니, 좀 따라 오게나."

"네, 알겠습니다."

그 말을 남기고 대장은 '쉬어'라는 말과 함께 그들에게서 떠났다. 카넬리언마저 보이지 않게 되자, 긴장감이 풀어진 두 청년은 다리 또한 풀렸는지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후아. 심장 떨어질 뻔했네. 대장님을 여기서 뵙게 되다니."

리튼이 먼저 정신을 차렸는지 둘이 사라져 간 자리를 보며 말했다. 반면 펜릴의 두 눈은 아직도 초점이 잡혀 있지 않았다.

"역시 소문대로 좋으신 분이야. 고작 예비 성인인 우리한테 이렇게 돈도 주시고."

떨어져 있던 가죽주머니를 리튼이 집으며 말했다. 무게가 묵직한 것이, 돈이 제법 들어있는 것 같았다.

"다섯, 여섯, 일곱... 어.. 이 정도면 마을에서 맛있는 고기반찬 먹을 수 있겠는데?"

그녀가 동전을 세면서 감탄했다. 하지만 리튼의 환한 표정과 달리, 펜릴은 아직도 멍하니 하늘만 바라 볼 뿐이었다.

"야아아, 펜릴. 왜 그래? 삐졌어?"

리튼이 펜릴 앞으로 다가갔다. 펜릴의 두 눈에 리튼의 얼굴이 거울처럼 비춰졌다.

"저기요, 아저씨?"

"내가, 애인이 아니래. 나쁜 여자. 나빴어."


그 말에 리튼이 가볍게 펜릴의 머리에 꿀밤을 먹이자, 그제야 그의 초점이 잡혔다.

"바보. 거기서 그렇게 말하기도 힘든 거 알면서. 진짜였어도 아니라고 했겠다."

리튼이 혀를 내밀며 약올렸다. 그러자 약 오른 펜릴이 그녀의 꿀밤에 화답하듯 이마에 딱밤을 쳤다. 꺄악 하는 소리와 함께 리튼의 두 손이 자신의 이마에 포개졌다.

"지금 나 때렸어?"

"지가 먼저 때려놓고!"

"뭐? 너 오늘 가만 안 둬!"

그렇게 둘이서 호감 가득한 드잡이질을 시작했다. 서로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 사랑싸움의 모습, 서로 맞고 때리면서도 들려오는 유쾌한 웃음소리는 영락없이 순수한 두 소년소녀의 세계 그 자체였다.

펜릴은 생각했다. 설령 그가 그녀의 곁에서 평생 지켜줄 순 없다 하더라도, 이렇게 같이 웃고 장난하고 친구로서 지내는 것만 해도, 그에겐 충분하다고. 충분하다고. 충분할 거라고.


작가의말

솔로는 사랑 싸움을 쓰는 게 괴롭습니다.

12/21 추가 - 아니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는데 이 장면을 또 복붙해야 한다니...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1

  • 작성자
    Personacon 지드
    작성일
    16.12.26 11:14
    No. 1

    고백도 못했다더니.. 애인사이이긴 한가봐요. ㅋㅋ 리튼이 먼저 고백했나..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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