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맘세하루 님의 서재입니다.

내 일상


[내 일상] 2. (수필) : 홀로 바둑을 두며

 

 

                홀로 바둑을 두며

 

 

                                                                                                        세하루

 

바둑에는 급수가 있다. 9급부터 시작하여 한 급씩 올라가며 5급이면 남들한테 바둑 좀 둡니다. 하고 말할 수 있는 수준이다. 3급 정도면 1급인 사람과 두 점만 접고 두면 되니까 누구하고라도 대국할 수 있는 꽤 잘 두는 편에 속한다.

웬만한 직장에는 기우회 같은 바둑 동호인 모임이 있어 매년 두서너 번쯤의 대국시합이 있다. 휴일 날 아침부터 기원에 모여 급수 별로 상급, 중급, 하급으로 나누어 대진표를 짜고 토너먼트로 진행한다. 그 동안 갈고 닦은 실력을 점검해 볼 수 있고 자신의 급수를 상대적으로 평가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라서 모두들 진지한 모습으로 대국에 임한다. 대국 시간을 프로 기사들처럼 체크할 수 없으니까 자칫 장고 파 상대를 만나면 한판 승부를 내는데 한 시간을 훌쩍 넘기는 건 다반사이다.

패자부활전도 있어서 결승전에라도 오르려면 점심을 배달 자장면으로 때우고 머리에 쥐가 날 정도로 혼전을 치르고서 해질녘에야 부상으로 바둑판이나 바둑알을 받아 들게 된다. 얼핏 보면 두뇌싸움 같지만 체력과 인내심의 대결이라 볼 수도 있으니 단순한 취미나 잡기를 넘어선 그 무엇이 내포되어 있다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우승과 준우승을 하면 한 급이 올라가는데 대부분 처음 급수를 신청할 때 실제 급수보다 한 두 급 정도 낮추므로 보통은 짠 급수들이라서 자신의 수준을 가늠해 보기가 쉽지는 않다.

어릴 적에 집에 바둑판이 있었다. 바둑돌을 담는 용기는 나무를 깎아 만든 것으로 모양새가 그럴 싸 했는데 정작 바둑알은 영 볼품 없는 것이었다. 검은 돌은 어느 해변가 몽돌 밭에서 주워온 건지 납작한 게 매끈거리는 감촉은 좋고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워 바둑판에 놓을 때 내는 둔탁한 소리도 듣기가 괜찮았다. 하지만 하얀 돌은 조개 껍질을 갈아서 엄지손톱 크기 정도로 만든 것인데 크기도 고르지 않거니와 너무 얇아서 바둑판 위에 둘 때 톡톡 거리는 것이 착석 하는 손맛을 경감시켜 버린다.

4학년때 아버지가 처음으로 바둑 두는 법을 가르쳐 주셨다. 선이 가로세로 19줄 그어져 서로 만나는 교차점이 361개 이다. 두 명이 마주앉아 번갈아 두는 거니까 한 사람이 180번 이내로 둘 수 있겠다. 4각형의 바둑판에 각자의 돌로 경계선을 만들어 집을 짓고 지어놓은 집의 수가 많으면 이기는 것이다.

사이 좋게 반씩 나누어 살면 좋으련만 집 수가 홀수 이니 누군가는 한 집이 모자라서 질 수 밖에 없다. 너 죽고 나 사는 게 시합이니까 한 집이라도 더 지으려면 부지런히 울타리를 치거나, 상대편 담장을 침범해 치열한 접전을 벌려서 무너뜨릴 수 밖에 별 도리가 없다.

인생살이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한정된 땅덩어리를 한 평이라도 더 차지하려고 아옹다옹 다투고 바둥거리며 필사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너무나 바둑과 흡사하다.

바둑은 먼저 말뚝 박는 사람이 유리하니까 하급자나 나이 어린 사람이 흑을 잡고 먼저 둔다. 세상살이도 먼저 태어난 연장자가 기득권을 가지고 이미 많은 땅을 차지하고 있어 유리하다. 불리한 후발 주자는 밤낮없이 청춘을 다 바쳐 열심히 일하며 한 뼘씩 땅을 불려 나갈 수 밖에 달리 방법이 없다.

자칫 다급한 마음에 무모한 반칙을 범하다가는 제대로 살아보지도 못하고 시간 종료 전에 시합장을 떠나야 할지도 모른다.

바둑 두는 것이 직업인 프로 기사들의 대국에서는 먼저 두는 사람이 다섯 집 반 정도의 덤을 핸디캡으로 가지고 집 수에서 공제하게 된다. 선착의 유리함을 상쇄하고 비기는 경우도 방지하는 묘책인데 예전엔 네 집 반이던 것이 최근에는 여섯 집 반까지 늘어난 대국전도 있다. 그만큼 먼저 시작하는 사람이 훨씬 유리하다는 분석이리라.

인생에서 선착자인 선배의 덤은 핸디캡이 아니라 인센티브로 주어져 있으니 바둑 시합과는 정 반대의 아이러니가 아닐까?

한 수만 물리면 안될까요?

사활이 걸린 전투를 서로가 가진 계략을 총 동원해서 치르다가 병사의 포석이 잘못됐다고 다시 두겠다는 염치없는 소리다. 한번 둔 돌은 거둘 수 없다는 일수불퇴 의 기본 룰도 모르느냐며 고집하다가도, 한두 번은 웃으며 물려주는 것이 지인들 사이의 대국에서는 흔한 인심이다. 행여 지더라도 새로 한판 더 두어서 자웅을 겨루면 되니까 다음 판 전투에서 승리하면 되리라는 기대감에서 우러난 여유로운 심리의 소치일 것이다.

그러나 한 번뿐인 인생에서는 당 키나 한 말인가? 웬만큼 수양을 닦고 무소유의 철학 나부랭이에 심취한 사람이 아니고서야 어림 반 푼도 없는 소리다.

내가 죽어 줄 테니 너나 잘 사세요. 할 사람이 어디에 있기나 하겠는가 말이다.

하물며 친 인척간, 형제간, 심지어 부모 자식간에도 재산 문제로 다툼을 하는 경우가 다반사인 요즘의 세태에서야!

학창 시절에 6급이었는데 수 십 년이 지난 지금은 조금 늘어서 3급이나 될까 싶다. 수 십 년이라고 해도 대국을 한 것은 서너 배도 안될 것이고 바둑 책을 보고 혼자서 묘수풀이를 하거나 바둑 채널을 통해 조금씩 향상된 결과일 뿐이니까.

몇 년 전만해도 초등학교 때 기원에 다녀서 급수가 확실한 아들놈과 몇 달에 한번쯤은 대국을 즐겼다. 처음엔 내가 흑을 쥐고도 졌는데 아들이 직장생활을 시작한 몇 년 뒤부터 바뀌어서 백을 쥐고도 이기는 회수가 많아졌다. 내가 실력이 늘어서라기 보다는 아들이 바둑판 대국이 아닌, 실제 인생살이 대국 장에서 치열한 전투를 치르느라 한가한 신선놀음에 빠질 여유가 없어서 일 게다. 회사 다니며 객지에서 자취생활 하다가 어쩌다 휴일에 집에 들러 아침 늦잠을 즐기는 아들에게 바둑 한판 둘래? 하는 말도 선뜻 꺼내기가 망설여진다.

요즘엔 괜찮은 바둑 프로그램을 다운받아서 컴퓨터로 혼자서 대국을 즐긴다. 6급부터 5단까지 분류되어 상대와 자기 급수를 선택할 수 있고, 덤과 접바둑도 정할 수 있어 잘 설계된 프로그램 같다. 두다가 중간 계가도 물으면 답해주고, 컴퓨터는 2초도 안되어 다음 수를 착점 하는데 나는 한참 동안 다른 볼일 보고와도 묵묵히 기다려 주는 것이 제일 마음에 든다. 잘못 두어 물려달라 하면 몇 수라도 물려주고 영 불리하다 싶어 새 판을 요구하면 얼마든지 응해준다.

가끔씩 웃기는 일도 생긴다. 내가 유리하다 싶어 신나게 두고 있는데 화면에 갑자기 영문글자가 떠서 깜박거린다.

당신이 이겼습니다. 동의 하십니까? 하는 문자를 보고는 컴퓨터의 돌을 던지는 항복 선언에 불계승의 통쾌감까지 맛보게 된다.

40년 가까운 사회생활도 접고 친구들과의 교우도 소원해져 집안에 박혀서 무료한 시간을 보내다가 과묵한 친구하나 생긴 셈인데 벌써 1년이 되어간다.

세상에 태어나 가족과 친인척 외에 친구와 동료, 지인을 만들고 안면을 넓히며 살다가, 다시 한 명씩 멀어져 가고 결국엔 혼자가 되는 게 인생사가 아니던가.

별다른 탈없이 만나고 헤어지기만 해도 그나마 다행한 친분이고 감사한 일일 테고!

한마디 말도 없이 눈으로 바둑알만 쳐다보다가 마우스를 클릭하는 손짓 만으로 대화를 나누는 컴퓨터이지만 어느새 수십 년을 함께한 친구들보다 지금은 내게 더 필요하고 친근한 벗이 되어 버렸다.

컴퓨터를 끄고 고개를 들면, 그래도 친구들이 그리워 지는 건 무슨 미련스러운 심사 이던가?

                               

                                                                                                              2015년 3월



댓글 4

  • 001. Lv.36 말로링

    16.09.05 13:06

    저도 어렸을적에 바둑을 배웠었는데요 ㅎㅎ
    가끔 인터넷 바둑을 두면 재밌기도 하고 머리를 많이 쓰게 되니 아프기도 합니다.

  • 002. Personacon 고스테일

    16.09.07 02:57

    바둑.. 규칙은 간단한듯 하는건 어려워 보이는 것이었답니다. 둘줄은 모르지만 어릴적에 나무로된 바둑판에 바둑돌이 든 용기를 본 기억은 선하게 남아있어요. 그때 장기판도 함께 봤었더랬죠. 바둑판과 장기판 특유의 나무냄새가 기억속에서 다시 맡아지는 것만 같습니다. 이가 빠진(?) 바둑돌이나 빛바랜 장기알들도.. 신기하게도 아직까지 각인되어 있는것만 같아요.

    그리고 바둑을 컨셉으로 사회생활을 표현한..? 드라마로도 만들어진 만화를 책으로 봤었는데 이것저것 느껴지는 느낌이 새로웠었답니다. 맘세하루님의 수필을 읽으면서도 바둑을 두면서 상대와 자신 사이에서, 그리고 바둑판에서 위에서 재현되는 것들이 인생사와 기묘하게 얽히는 면이 있지 않나 싶기도 하답니다..!

  • 003. Lv.49 난정(蘭亭)

    16.10.01 11:52

    혼자 두는 바둑........ 저도 배워보고 싶네요^^*

  • 004. Lv.1 [탈퇴계정]

    16.10.29 00:22

    아...ㅊㅓ연한.....싸한 아름다움이 느껴집니다.
    환절기 조심하세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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