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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29일생 님의 서재입니다.

잊혀진 자의 이야기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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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29일생
작품등록일 :
2023.01.06 17:04
최근연재일 :
2024.01.05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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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5,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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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16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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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1화 돌아오다 - 5

DUMMY

잠자리를 결정한 후에도 다들 한참을 더 수다를 떤 후에야 뒤늦게 잠이 들었다. 오래간만에 아리엘을 만났으니 당연히 할 이야기도 수두룩했다.


다들 깊은 잠이 들어있을 시각, 파시비엔은 잠꼬대하며 뒤척이기 바빴다. 반면 서지터는 쉽게 잠이 들지 못했다. 이런 곳에 베어와 함께 와 봤더라면 정말 좋았을 거라는 생각을 하며 쏟아지는 별들을 바라보다 침낭에서 몸을 일으켰다.


“흠냐앙, 에리카님. 때리지 마십시오. 아픕니다. 입술로 때려주시면 좋겠습니다아아. 쩝쩝.”


“그놈 참······. 자면서도 더럽게 시끄럽네. 으그극.”


서지터는 기지개를 켰다. 울적한 마음을 달래주려는 듯 소쩍새의 울음소리가 구슬프게 들려왔다. 서지터는 터덜터덜 산책하듯 걸어가며 언덕 위에 느티나무 쪽으로 향했다. 마이론홀드에 있을 때 자주 언덕 위에 올라 고향 쪽을 바라보던 게 떠올랐다.


“와아아, 가까이서 보니 정말 크긴 크다.”


느티나무 앞에 서서 감탄했다. 나무의 둘레는 족히 열 명이 손을 뻗어야 간신히 감쌀 수 있을 거 같았다. 고개를 들어 느티나무를 올려다보았지만, 하늘을 뒤덮을 정도로 잎이 가득 달려있었다.


- 스스스스.


선선한 바람이 서지터의 코끝을 스치고 지나갔다. 마치 느티나무가 인사라도 해주는 거 같았다. 인근 대장 엔트라는 아리엘의 말이 기억나 서지터는 예의 바르게 꾸벅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아리엘 친구인데 잠깐 등 좀 기댈게요.”


느티나무는 아무런 움직임이나 말은 없었다. 만약 느티나무가 서지터의 말에 반응을 보였다면 기겁을 하고 도망갔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고, 서지터는 털썩 앉아 느티나무에 등을 기대어 호수에 비친 달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잔잔한 호수 위로 물고기가 잠시 올라와 동그라미를 그리며 파동이 생겨버렸다. 파동 덕에 물 위의 달이 일그러졌다.


서지터는 갑자기 검은 늑대 동료들이 보고 싶었다. 특히나 베어의 웃음소리와 느릿느릿한 말투가 그리웠다. 가만히 앉아 눈을 감고 죽은 동료들의 얼굴을 하나씩 떠올렸다.


“안자고 느티나무 아저씨 곁에서 뭐 해?”


“어? 아리엘?”


아리엘 목소리가 들려와 눈을 뜨고 고개를 돌렸지만, 그녀는 옆에 없었다.


“위야. 위. 헤헤.”


아리엘은 낮에 만났을 때처럼 나뭇가지 위에 걸터앉아 해맑게 웃고 있었다.


“언제 왔어? 오는 소리 못 들었는데.”


“몰래 왔징!”


- 탁.


아리엘이 아래로 가볍게 뛰어내렸다. 질끈 묶은 긴 금발 머리가 흩날리듯 부드럽게 출렁이더니 다시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느티나무 아저씨가 이상한 애가 귀찮게 한다고 와서 데려가래. 그래서 와 봤어.”


“그래? 난 아무 말도 못 들었는데.”


“헤헤, 농담이야.”


아리엘은 해맑게 웃으며 느티나무에 손을 살짝 댔다. 그리고 정령들과 대화를 나눌 때처럼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아, 정말? 그랬어? 하핫. 응, 맞아. 그래? 신기하네.”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 궁금한 서지터가 말을 꺼냈다.


“뭐라고 하시니?”


“자기한테 깍듯하게 인사하는 인간은 수천 년 동안 통틀어서 두 번째래.”


“그럼 첫 번째는?”


“저기 오두막집 첫 주인. 서지터하고 그 사람하고 많이 닮았대. 검은 머리랑 검은 눈이랑 말투도 비슷하다고 하네.”


“뭐 인간 종족은 엔트 눈에 비슷비슷하게 생겼겠지.”


“맞아. 엔트들 눈에는 다 비슷해. 나야 워낙에 특이한 경우라 쉽게 알아보지만, 그냥 뭉뚱그려 인간, 엘프, 고블린. 그렇게 인식하고 누가 누구인지는 잘 모르니까.”


아리엘은 서지터 곁으로 와 잔뜩 웅크린 채 옆구리로 파고들었다. 예전엔 품에 쏙 안겼지만, 이제는 많이 커버려 서지터가 어깨동무를 해주어야 했다.


“좋다! 서지터 포근한 냄새 오래간만이야. 다들 무사히 돌아와서 너무 좋아.”


“우리도 다 기분 좋아. 아리엘이 예전보다 더 밝아졌으니까.”


“나도 뭐 엘프는 엘프니까. 숲에 있으면 자연스럽게 기분이 좋아질 수밖에 없어. 그런데 오늘은 더 기분 좋아. 아까 레일라의 이야기를 들으니까 정말 많이 위험했을 텐데 살아 돌아와서 고마워.”


“히히. 만약 죽었으면 너 펑펑 울었겠지? 안 울리려고 어떻게 해서든 살아남았지.”


아리엘은 고개를 들어 서지터를 올려다보았다.


“정말루?”


“솔직히 여러 이유 중 하나. 죽은 내 동료가 반드시 살아남으라고 했거든. 정말 좋은 사람이야. 죽으면 안 되는 사람인데······.”


베어가 생각나자 서지터는 코끝이 찡해졌다. 누구보다 가까웠던 그가 처참하게 서서히 죽어가던 모습을 절대 잊을 수가 없었다. 서지터의 마음을 느꼈는지 아리엘이 서지터의 팔을 다독여주었다.


“괜찮아.”


“가네다 마을에서 만난 카이스터가 검술이나 육체적으로 날 성장시킨 스승이고 든든한 형이었다면, 베어는 내가 정신적으로 기댈 수 있는 형이었어. 행운이지. 그렇게 좋은 사람이 날 항상 챙겨줬으니까. 그래서 처음 늑대가 돼서도 대원들이 인정 안 할 때 겨우 버틸 수 있었던 건 베어 덕분이었거든. 항상 나부터 챙겨주고 걱정해주던 사람이었으니까.”


“멋진 분이네.”


“베어는 에로크나 대륙에서 온 유색인이야. 베어는 별명 같은 거고, 진짜 그곳에서 쓰는 본명은 박지웅이라는 이름이래. 항상 나한테 지터라고 불렀어. 거기에선 성을 앞에 붙인다고 그러더라고. 베어의 말에 의하면 서는 성이고, 지터는 이름이라면서 멋대로 그렇게 불렀지.”


“지터? 헤헤, 그렇구나. 나도 그렇게 부를래. 더 정감 있고 좋은 거 같아.”


“그렇게 해. 지터라고 불러주면 나야 좋지. 아리엘은 어때? 안 좋은 기억은 이제 좀 괜찮아졌어?”


처음부터 다시 만나면 물어보고 싶었던 것이었다. 다들 서로 눈치를 보며 괜한 걸 물어 안 좋은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건 아닌가 싶었지만, 누구보다 같은 아픈 상처를 겪은 서지터였기에 편하게 물어볼 수 있었다.


“우움, 글쎄? 솔직히 잘 모르겠어. 또 그런 상황에 닥치면 어떻게 될지 나도 궁금해. 그런데 옛날에는 그때 일 생각하면 온몸에 소름이 돋고 숨도 막히고 막 심장도 쿵쾅거렸거든. 그런데 2년 동안 너희 기다리면서 가끔 안 좋았던 기억 떠올라도 조금 나아진 거 같아. 아! 그때 그런 일이 있었지. 안 좋은 기억이었어. 하지만 난 이제 좋은 친구들이 있으니까 괜찮아. 이렇게 된 거 같아. 이 정도면 이제 나 극복한 거 맞지?”


“다행이다. 그런 거 같네? 기특하다. 우리 아리엘.”


서지터는 아리엘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작고 여렸던 아이가 육체적으로 성장했지만, 정신적으로도 많이 성장한 거 같았다. 2년이라는 시간 동안 홀로 외롭게 지내기는 했어도 끔찍했던 트라우마를 극복한 그녀가 기특했다.


“지터는? 이제 그때 일 잊었어?”


“아니······. 아직도 가끔 악몽 꿀 때가 있어. 예전에 비하면 악몽 꾸는 횟수가 많이 줄었지만 그래도 종종 똑같은 꿈을 꿔. 용병단에서 몸을 많이 혹사한 이유도 악몽 꾸지 않으려고 그랬던 건데 그게 내 맘대로 잘 안 되더라. 그래도 다음 날까지 힘들고 그러지는 않아. 악몽 꾸고 깬 그 순간만 힘들 뿐이지.”


“그렇구나. 지터는 누구보다 강하니까 이겨낼 거야.”


“나도 아리엘처럼 언젠간 이겨내겠지? 그런데 요새는 가끔 우울해지는 게 트리스미스 전투에서 죽은 늑대들 생각이 많이 나. 살아남은 게 미안하기도 하고. 아마 지금껏 살면서 그때가 가장 힘들고 처절하게 버티던 순간이었던 거 같아. 1주일 동안 제대로 먹지도 못하면서 계속 전투를 벌였고, 그 사이 대원들도 한둘씩 죽어 나갈 때가 자꾸 생각나. 베어가 마지막 순간에 남긴 유언도 나더러 힘들어하지 말라 했는데······.”


“걱정하지 마! 이제 나도 있으니까 힘들어하지 않아도 돼.”


아리엘이 주먹을 불끈 쥐며 기운 내라고 하자, 서지터는 편안한 미소를 지어주었다.


“그래, 든든해. 우리 검은 늑대 대장님이 돌아온 뒤에 그런 얘기를 해주더라. 죽은 사람들은 가슴에 묻고, 잊지 말고 기억해주면 된다고. 산 사람은 계속 살아가야 하는 거래. 그러면 죽어간 동료들도 고마워할 거라고. 잘 살아가면 그게 먼저 죽은 동료들에게 진 빚을 갚는 거라고 하셨어.”


“멋진 분이다.”


“그때 라피앤즈에서 내가 뻗은 다음에 자기랑 같이 가자고 했던 분이야.”


“좋은 인연이네.”


“그렇지. 좋은 인연들이었지.”


과거형으로 말하며 기분이 울적해져 더는 말을 이어나가질 못했다. 둘은 그 말을 끝으로 한동안 말없이 달빛이 비친 호수를 바라보았다. 다시 위험한 여행길을 나서기에 앞서 그동안 잠시 끊어졌던 자신들의 인연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다.


베어가 서지터에게 든든한 정신적인 버팀목이 되어 준 사람이라면, 서지터는 아리엘에게 마찬가지의 역할을 해주는 사람이었다. 장난치듯 말하긴 했지만 처음 아리엘을 인정해주고 친구로 받아준 사람이 서지터였다. 이제는 아리엘에겐 전부나 마찬가지인 친구들이었다.


“있잖아.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이제는 항상 너희랑 같이 지내고 싶어. 이제 다시는 전쟁터에 가지 않을 거지?”


“같은 인간들을 죽이는 게 싫어서 거기에 갔던 거야. 이기적일지는 몰라도 몬스터들을 상대로 실력을 쌓고 싶었으니까. 이젠 용병으로서 실력도 많이 좋아졌고, 굳이 전쟁터를 찾아 헤맬 필요는 없을 거 같아. 이제부터 할 일이 위험하기도 하고 사람을 많이 죽여야 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해야 할 일은 해야겠지? 레일라 빚도 다 갚고 길드도 다시 일으키고 나면 조용하게 살고 싶기도 하고.”


“미안하지만 레일라 일이 빨리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헤헤.”


아리엘은 호바누스 숲에서 지내며 오래도록 친구들과 함께 하는 상상을 해왔다. 레일라의 길드 재건과 복수가 끝나고 나면 각자 원하는 길을 갈지도 몰랐다. 새도우문 길드가 다시 세워지면 레일라는 보나 마나 길드 내에서 중책을 맡을 것이고, 한스는 다시 한번 궁정 마법사에 도전할 생각이었다. 무엇보다 왕국 소속의 마법사들은 안정적인 지원을 받으며 마법연구를 할 수 있다. 가족들의 생계도 책임져야 하니 한스에겐 가장 좋은 진로 선택이다.


카데스도 역시 딱히 언제라고 정해놓지는 않았지만 나름의 출세욕이 있었고, 파시비엔도 팔라고스 전쟁을 겪으며 아그나달린 신전의 부패를 막기 위해 한평생 바치기로 한 상태였다.


서지터만이 언제나 그랬듯 구체적인 계획 따위는 없었고 단순히 평범하게 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이런 친구들과 죽을 때까지 함께할 수는 없겠지만 아리엘은 최대한 많은 추억을 쌓고 싶었다.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여섯이서 오래오래 함께하자.”


“웅! 좋아.”


호수에 드리운 달빛이 서서히 구름에 자취를 감추었다. 이들의 앞날은 예정된 것도 없었고 불투명했지만 여섯이 함께라면 어떤 시련도 이겨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많은 피드백과 충고, 오타 지적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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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1화 돌아오다 - 8 23.01.19 64 3 14쪽
7 1화 돌아오다 - 7 23.01.18 86 3 13쪽
6 1화 돌아오다 - 6 23.01.17 101 3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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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1화 돌아오다 - 4 23.01.12 116 4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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