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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치 님의 서재입니다.

삼일(三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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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신성치
작품등록일 :
2023.09.22 18:39
최근연재일 :
2023.11.03 2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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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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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3
추천수 :
227
글자수 :
344,383

작성
23.10.03 2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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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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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0쪽

첫날(13)

DUMMY

‘계향 누이는 눈을 떴을까? 일어났을까?’


유대치의 집에 들러 잠깐 환자의 차도만 묻고 가도 시간 때문에 일이 어그러지지는 않을 것 같았다.

청군 진영이 있는 하도감으로 가던 신이는 종루를 지나자마자 오른쪽 옆길로 뛰어 들어갔다.


쉬지 않고 달린 신이 앞에 곧 유대치의 집 담장과 지붕이 드러났다.

골목을 돌아 대문을 마주 본 순간 신이는 놀라며 멈춰섰다. 진홍이 유대치 집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누님!”

“신이로구나.”


신이는 대답하지 못했다.

어젯밤에 진홍을 보고 채 하루도 지나지 않았는데 아주 오랜만에 상면하는 것 같았다.

유독 진홍 앞에서는 말문이 막히는 신이였다.


“새벽에 큰 일을 했더구나. 너 아니었으면 정말 흉한 일 당할 뻔했다는 얘길 들었다.”


신이는 뒷머리만 긁적거렸다.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이 화끈거렸다.


“계향 누이······ 차도는 좀······.”

“나도 들어가 봐야 된다.

조금 전까지 소화가 구완했었는데 아직은 사람을 못 알아보고 가끔 신음 끝에 잠꼬대만 한다는구나.”

“예······.”

“오늘은 네가 요긴하게 쓰여서 바쁠 거라 들었는데.”

“예, 지나다가, 갑자기 생각이 나서······.”


진홍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지었다. 그 웃음을 보고 아이쿠, 신이는 큰 한숨을 토할 뻔했다.


“계향인 내가 돌볼 테니 어서 갈 길을 재촉해라. 고균 아저씨가 널 든든하게 여기시더라.”


신이는 허리를 꺾어 꾸벅 인사했다. 그리고 돌아서는데 다시 진홍의 음성이 들렸다.


“신아.”

“예.”

“영웅이 되지 말아라.”


신이는 무슨 얘기인지 알 수 없었다.

진홍은 여전히 미소 짓고 있는데 두 눈은 촉촉이 젖어 있었다.


“다치면 안 돼.”


걱정하는 음성을 들을 때 안타까움과 쓰라림 같은 것이 신이의 몸을 굳게 했다.

그것들은 진홍에게서 나와 신이의 살갗에 닿는 울림이었다. 울컥, 눈물이 솟으려 했다.


신이는 곧장 돌아서서 달리기 시작했다. 땅을 박차는 종아리의 힘줄이 터질 것만 같았다.

발끝부터 손가락 끝까지 기운이 넘쳐서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신이는 서울의 황톳길을 뚫고 달려갔다.


서재필의 집에서 작전 점검을 마치고 김옥균은 우정총국으로 돌아왔다.

마당에서는 군영의 영사들과 외국 공사들의 하인들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하인들의 숫자로 보아 예정했던 참가자들이 거의 참가했을 것이라고 김옥균은 짐작했다.


연회장으로 들어가지 않고 그는 음식 준비로 분주한 주방 문을 열었다.

하녀들이 따뜻한 차를 가지고 나오다가 김옥균을 보고는 고개를 숙였다. 양반 나으리가 주방에 들어오는 것을 보고 당황하는 모습이었다.

김옥균은 버섯을 넣고 수프를 끓이고 있는 요리사를 불렀다.


“이보게. 잠깐 나 좀 보세.”


고개를 돌린 요리사는 놀라면서 김옥균에게 인사했다. 궁중에서 일한 적이 있는 숙수로 김옥균과 안면이 있는 사이였다.


“고균 나으리께서 이곳까지 웬일이십니까?”

“자네가 수고가 많네.”

“원 무슨 말씀을요. 귀한 자리에 서양 음식까지 믿고 맡겨 주셔서 총판 나으리께 감사할 따름입니다.”

“오늘은 내빈들과 중요한 이야기가 많을 것이니 음식을 급하게 올리지 말고 간격을 두고 천천히 내보내게.”

“예.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만찬이 너무 빨리 끝나버리면, 거사 계획이 수포로 돌아갈까 염려한 김옥균의 당부였다.

또 주문할 일이 생기면 사람을 보내겠다고 말하고 김옥균은 주방을 나왔다.


연회장에는 예정된 인원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청나라 영사 진수당, 서기관 담갱요,

일본 서기관 시마무라, 통역 아사야마(淺山),

미국 공사 푸트, 서기관 스커더,

영국 영사 애스톤, 영어 통역 윤치호,

청나라가 외교와 세관 업무로 추천한 독일인 실력자 묄렌도르프,

제거 대상자인 우영사 민영익, 좌영사 이조연, 전영사 한규직,

그리고 외아문 독판 김홍집, 우정국 공사 신낙균, 민병석 등도 자리를 잡고 있었다.


주최자인 홍영식과 금릉위 박영효는 상석에서 손님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또 한 명의 개화당인 서광범은 구석 자리에서 들어오는 이에게 조용히 목례를 했다.

김옥균은 좌중에 인사를 하고 시마무라 서기관과 아사야마 통역관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의례적인 덕담이 오가고 홍영식이 감사 인사와 기념사를 했다. 좌중의 모든 인물이 차분하게 박수로 화답했다.

김옥균은 맞은 편에 앉은 오늘의 제거 대상자 민영익, 한규직, 이조연을 조심스럽게 관찰하고 있었다. 민영익 쪽에서도 김옥균과 박영효 등에게 신경을 쓰고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미국과 영국 외교관들은 청나라에 연결된 세력과 일본에 연결된 세력, 양쪽을 주의 깊게 지켜보고 있었다.

모두가 불편한 미소 속에서 긴장하고 있는 유별난 연회장이었다.


입에서 말을 꺼내는 게 편치 않을 때는 입 안에 음식을 넣는 것이 도움이 되는 법. 수프에 이어 소고기 스테이크가 나오자 좌중의 분위기가 조금 편안해졌다.

미국인과 영국인들은 예상 보다 수준 높은 음식에 만족했고, 동양 삼국의 정객들도 특별한 음식의 풍미에 불만이 없었다.


잠시나마 청국파와 일본파가 미각을 통해 의견 일치를 보았다.

근대의 과학기술 도입이 뒤처져 있지만 조선인의 눈썰미와 손재주는 어느 나라에도 뒤지지 않는다는 것은 공통의 자부심이었다.

대양을 건너 완전히 다른 문명과 식습관을 가진 나라에서 만난 자기네 식 요리에 만족한 백인 외교관이 찬사를 보냈다.


“스테이크의 맛과 육질이 뛰어납니다.”


통역을 통해 찬사를 들은 홍영식은 밝게 웃으면서 설명했다.


“어린 암소를 잡아서 특별히 공을 들인 음식입니다.”


잠시 윤치호의 통역을 기다렸다가 김옥균이 덧붙였다.


“조선에서 소는 농민들에게는 집 다음으로 중요한 재산이고, 농사의 제일 도구입니다.

짐승이지만 귀한 놈들이요. 넓은 목장에서 식용 소를 방목하는 서양과는 경우가 달라요.”


그만큼 이 자리를 중요하게 여기고 있고 정성을 다해 준비했다는 뜻으로 외교관들은 받아들였다. 다시 감사와 찬사의 말들이 오갔고, 근대 우편사업 도입에 대한 축하가 이어졌다.


“금석(홍영식의 호) 공의 노고 덕에 이제 우리도 멀리 떨어진 친지들과 어렵지 않게 소식을 나누게 됐소이다.”

“주소만 알고 약간의 요금만 낼 수 있으면 누구든 자유롭게 서찰을 보낼 수 있다는 것은 진정 쓸모 있는 개화 사업입니다.”


입맛을 돋우기 위한 포도주가 한 순배 돌아가자 대화의 내용도 조금 부드러워졌다.


“문명 개화 사업 덕분에 남녀 사이의 연서도 배달로 오갈 수 있겠소.”

김옥균이 젊은이들에게 우정국이 미칠 영향을 전망하자, 미국 공사도 통역을 통해 우편배달의 밝은 효과를 확인해 줬다.


“서양에서는 청춘 남녀들이 우정국을 통해 자주 편지를 주고받는다고 합니다.”

“양갓집 규수가 부모 허락 없이 총각과 필담을 나눈다?”


윤치호가 스커더 서기관에게 물은 후 대답을 전달했다.


“그렇다고 하는군요. 대개는 큰 허물로 보지 않는다고 합니다.”

청년이든 중년이든 연회장 안의 벼슬아치들은 모두 기혼자였다. 자신이 총각이라면 서양 젊은이들처럼 연서를 주고받을 수 있을까, 비슷한 상상들을 했다.


“이런, 소년 시절에 그런 개명한 세상에 못 살아 봐서 안타깝군.”

“우정국 덕에 연서들이 활개 치면 젊은 손님이 끊겨서 장안 기생들이 탄식하겠소이다.”


우정국 덕에 젊은이들이 연서쯤 주고받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민영익은 개화당을 자칭하는 일본당들이 민심을 얻어 권력에 접근하려는 속내가 보이는 것 같아 언짢았다.

그들은 분명히 변란의 음모를 숨기고 있었다. 그러면서 개화의 밝은 면만 내세우는 행태가 불편했다.


“정말 자유롭게 서찰이 오가면 좋은 일이라고들 생각하시오?”


가시가 담긴 민영익의 말에 달그락 거리던 포크와 나이프 소리들이 멈췄다.


“요즘 세태가 상한이나 천예들은 모두 자유롭기를 원한다고 믿는 것 같던데······

고균은 정말로 그들이 자유를 원한다고 보시오?”


사실 자유에 대한 견해가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김옥균은 민영익이 개화당의 계획을 어디까지 짐작하고 자기를 떠보려는 것인지가 궁금했다.


“누구든 제 마음대로 제 할 일을 정하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 아니겠소?”


양반의 신분 같은 데 연연하지 않아도 잘난 너희는 대접받을 수 있다는 거냐고 쏘아붙이고 싶었다.

민영익은 전략적인 탐색전에 짜증이 났다. ‘그냥 김옥균을 향한 신경질을 내뱉어 버리면 시원할 텐데······’


“고균께서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유를 원한다고 생각하시오? 상것들한테 알아서 하라면 좋아할 것 같소?”

“허허, 운미공이 답답한 아랫사람들 때문에 속을 많이 끓으셨나 보오. 사리 분별을 할 줄 아는 이에게 참으로 자유로운 권리를 준다면 누군들 기뻐하지 않겠소?”


너희들이 진짜 자유와 권리를 백성에게 준 게 아니기 때문에, 잘못하면 혼찌검이 날 것이 두려우니까 백성들이 시키는 대로만 움직이려는 게 아니냐. 김옥균이 하고 싶은 말은 이런 것이었다.

개화당의 번듯한 말들을 믿지 않는 민영익 역시 속으로 좀 더 독한 질문을 하고 있었다.


‘사리 분별을 할 줄 아는 이라고?

어디까지가 제대로 된 분별인지는 누가 정하지? 자칭 개화당 말을 하인들이 듣지 않는다면 그 자유도 인정해 줄 건가?’


“그렇다면 고균을 비롯해 이른바 개화당은 상것들의 뜻을 존중해서, 본인이 양반이지만 상것들을 멋대로 부리지 않을 작정인 게요?”


민영익의 질문 수위가 조금 높아졌다.

좌중의 시선들이 민영익에게 머물렀다가 김옥균에게로 옮겨갔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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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첫날(5) 23.09.28 32 6 9쪽
6 첫날(4) 23.09.28 29 5 9쪽
5 첫날(3) 23.09.27 41 10 11쪽
4 첫날(2) 23.09.26 48 7 9쪽
3 첫날 (1) 23.09.25 57 8 8쪽
2 훗날 23.09.23 109 13 7쪽
1 서(序) / 프롤로그(Prologue) +1 23.09.23 138 10 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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