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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치 님의 서재입니다.

삼일(三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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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신성치
작품등록일 :
2023.09.22 18:39
최근연재일 :
2023.11.03 2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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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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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7
추천수 :
227
글자수 :
344,383

작성
23.10.03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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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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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0쪽

첫날(12)

DUMMY

여름이 시작할 무렵에 신이는 운영각에 들어갔고, 여름이 끝나갈 때까지 진홍을 가까이서 마주하지 못 했다.


한낮 땡볕만 피하면 제법 시원하다 할 즈음, 오랜만에 유대치가 왔다. 청루 색시들한테는 밤중이나 다름 없는 아침 나절이었다.

대문을 열어 주고 반갑게 맞이하는 신이에게 역시 얼굴 가득 기쁜 웃음을 보인 유대치 뒤에는 말 한 마리와 백인 남자 한 명이 서 있었다.


유대치는 진홍을 부르라 했고, 미국 공사관 서기 스커더와 같이 강변에 바람을 쐬러 간다면서 신이보고도 나갈 채비를 하라고 했다.

지방에서 온 약재를 받아다 주는 장사치가 몸이 아파 못 오게 돼서 양화진 나루터에 직접 갈 요량이었는데 마침 휴일을 맞은 스커더가 유대치를 찾아온 것이었다.


스커더는 발목을 삐었을 때 미 공사관 통역 윤치호의 소개로 유대치의 약방에 와서 침을 맞았었고, 그 후 유대치와 가까워진 다음에 운영각의 진홍과도 가까워졌었다.

굿 모닝 보이, 어쩌고 하며 손을 흔드는 백인에게 신이는 꾸벅 고개를 숙인 다음에 진홍이 있는 안채로 달려갔다.

진홍 아씨 나들이를 따라간다니! 신나서 소리를 지를 뻔했다.


진홍은 한복 저고리 대신 스커더가 선물했던 연분홍 블라우스를 입고 나왔다.

서양 여성복은 구경하기도 힘든 때라 몸에 맞는 옷까지 구하는 것은 무리였다.

진홍의 체구에 비해 꽤 큰 블라우스였다. 하지만 얇은 천이 넉넉하게 하늘거리는 것이 보기 좋았다.


서양옷을 입고 백인과 동행하는 조선 여자, 만인의 주목을 받고 비난을 살 수도 있었지만 진홍은 차분하고 담대했다.

금방 준비를 마친 진홍과 신이, 유대치와 스커더는 양화진 강변을 향해 출발했다. 유대치와 진홍이 번갈아 말을 타고 스커더와 신이는 줄곧 걸어 갔지만 두 사람 다 힘든 줄을 몰랐다.


아는 조선말이 별로 없으면서도 미국인 스커더는 손짓 발짓에 간단한 낱말을 섞어서 명랑하게 의사 소통을 했다. 신이한테도 말을 타 보라고 하며 자신이 견마잡이 하인 흉내를 내기도 했다.

그래 난 내릴게, 진홍이 말에서 내리는 시늉을 할 때 네 사람 모두 크게 웃었다. 대답도 못하고 얼굴은 빨개졌지만 신이도 웃었다.

속이 시원해지는 웃음이었다.


맑은 날이었고, 푸른 강물 위에 황포 돛배들이 유유히 떠 있었다.

양화진은 마포나 서강나루만큼 북적이지 않아 여유가 있고 풍경이 좋아서 바람을 쐬러 나올 만한 곳이었다.


강변의 버드나무에 말을 매어 놓고 유대치는 약재상과 흥정을 시작했다. 호기심 많은 스커더는 흥정하는 유대치 옆에서 이것저것 구경하고 있었다.

아직 어린애 티가 덜 가신 신이는 얕은 물에 발을 담그고 납작한 돌을 집어 물수제비 뜨기를 했다. 여덟 번인가 아홉 번인가 수면 위를 튀는 돌멩이를 진홍도 본다면 좋을 텐데 생각하면서 신이는 돌아섰다.


강변을 따라 잠깐 산책을 하겠다던 진홍이 보이지 않았다. 서쪽 망원정 방향 모랫길에도 동쪽 밤섬 가는 길에도 진홍은 없었다.

서양 옷을 입은 아리따운 기생과 맞닥뜨리면 대부분 순박한 사내놈들은 외려 당황하겠지만 여러 지역 사람이 모이는 나루터에는 거친 사내들도 적지 않았다.


신이는 바쁘게 고개를 움직여 주변을 살폈다. 걸어왔던 길에도 양쪽 강변길에도 진홍은 없었다.

양화진 모래톱 위에는 산이라 하기엔 야트막한 절벽이 솟아 있었다. 누에 모습을 닮아 잠두봉이라 불리는 언덕은 강변 쪽으로는 가파르게 깎인 낭떠러지를 이루고 있었다.

잠두봉 위에 서면 사방으로 탁 트인 경관이 보기 좋았다.


물가에서 나오면서 신이는 낭떠러지 위로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신이는 봤다.

잠두봉 위에서 연분홍 블라우스가 펄럭이고 있었다.

혼자 일찍 피어 여린 진달래가 아직 차가운 봄바람에 흔들리는 모습. 강변의 절벽 위에 서 있는 여인이, 너무 얇아서 약한 꽃잎으로 느껴졌다.

위태롭다, 퍼뜩 불안감이 닥쳐왔다. 신이는 지체 없이 봉우리 위로 달려 올라갔다.


‘잠깐만, 잠깐만, 그대로 있어요. 아씨. 거기 꼼짝 말아요!’


누군가 봤다면 사람인지 산양인지 헷갈려 했을 것이다. 발 밑에서 돌멩이가 굴러 내려가든, 나뭇가지가 팔뚝을 긁든 신경 쓰지 않고 최고의 속도를 내려고 신이는 안간힘을 썼다.

봉우리를 오르느라 보이지 않던 진홍이 다시 시야에 들어왔다. 순식간에 달려 올라왔지만 신이는 제 걸음이 너무 느린 것만 같았다.


진홍은 강 건너편을 보고 절벽 끝에 서서 주문을 외고 있었다. 신이가 진홍을 처음 본 날 갈대발 뒤 그늘 안에서 중얼거리던 주문.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여 기뻐하소서. 천주께서 함께 계시니 여인 중에 축복 되시오며, 태중의 아드님께서도······.”


진홍은 주문 외기를 멈추고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의 눈은 한강 너머 양천 쪽 하늘을 올려다 보고 있었다.

거친 숨을 토하고 땅을 박차 달리면서도 신이의 시선은 진홍의 눈에 고정됐다.

그 눈빛, 꿈을 꾸고 이 세상을 잊어버린 것 같은 눈빛, 절벽 위에서 제가 선 곳을 잊은 눈빛. 그 눈빛은 눈꺼풀에 덮이며 사라졌다.


진홍은 잠시 눈을 감고 서 있다가 어지럼증을 느낀 듯 휘청하고 몸이 기울었다.

악, 외마디 소리를 지른 것은 진홍이 아니라 신이였다.

진홍이 서 있던 곳 아래는 낭떠러지였다. 쓰러진 진홍의 몸이 보이지 않았다.

절벽 아래로 추락한다면 살기를 바랄 수 없었다. 신이는 머리에서 가슴으로 벼락이 꿰뚫고 지나는 충격을 느꼈다. 그리고 벼락 맞은 것처럼 튀어 올랐다.


“아씨! 아씨!”


미친 사람처럼 소리를 치면서 바람을 가르고 달려갔다. 진홍이 있던 곳에서 가까스로 멈춰 서면서 신이는 큰 한숨을 뱉었다.

천만다행이었다.

어린 아이 키만큼 낮아진 곳에 쓰러진 진홍이 보였다. 그녀는 절벽 아래로 떨어진 게 아니었다.

진홍이 서 있던 넓적한 바위 아래는 사람 한둘이 누울 만한 평평한 땅이 있었다. 그 땅에서 더 아래로 떨어졌다면 절벽 밑 강변까지 추락이었다.


신이는 진홍을 안아 일으켰다. 그 순간 그녀는 의식이 없었고 팔다리에 힘이 없었다.

절벽 위쪽으로 끌어 올리는데 진홍의 두 팔이 신이의 등을 감쌌다.

봉긋하고 부드러운 가슴의 감촉이 신이의 가슴에 닿아 느껴졌다. 분내인가 살내음인가 향긋하고 아찔한 기운이 코를 찔렀다.


신이는 몸무게를 잃어버린 것 같았다. 어찌할 줄 모르고 당황했을 때 진홍이 눈을 떴다.

진홍은 아주 잠깐 놀라고 잠깐 한숨을 쉬고는 신이의 품을 빠져나갔다.

진홍이 제 몸에서 떨어져 나가는 순간, 신이의 온몸이 강경하게 긴장했다. 모든 근육이 터지기 직전까지 힘을 받아서 잠두봉 벼랑 위에 또 하나의 바위가 솟은 것 같았다.


“왜··· 그러셨어요?”


딴 곳을 보면서 어색하게 묻는 질문에 진홍은 답이 없었다. 그녀의 눈은 강 건너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 주문이 뭐였죠?”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여 기뻐하소서. 천주께서 함께 계시니 여인 중에 축복 되시오며,”


진홍은 외우기를 멈추고 고개를 저었다.


“어릴 적에 들었던 거라 똑바로 외지 못한단다.”


이제는 시선을 신이에게로 돌리고 진홍은 말을 이었다.


“여기 잠두봉을 절두산이라고도 부른다. 알고 있지? 사람 목을 잘라내는 산. 절두산에 있던 사람들이 이 주문을 많이들 외웠지.”

“천주학······ 주문이겠네요.”


진홍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 종문서를 어진 주인 양반이 없애 주셨답니다. 그 양반은 아니었지만 그 양반 집안 사람 태반이 천주학쟁이로 벌을 받았대요.”


진홍은 뭐라 대꾸가 없었다.


“그래서 아버지는 생전에 천주학 믿는 사람들을 좋게 생각했어요. 그리고···”


신이는 말을 쉽게 잇지 못했다. 두 눈을 동그랗게 키워서 진홍은 궁금증을 표시했다.


“사람은 땅에서 살아야 된다고······ 아버지가 그랬어요. 땅을 딛고 있어야 한다고요.

지붕 고치다가 쉬면서 제가 하늘을 올려다 보고 있을 때요.”


신이는 진홍이 걱정돼서 뭔가 좋은 말을 건네고 싶었다. 아버지가 했던 말이 떠올랐는데 그게 적당한 건지, 어리석은 오지랖이 아닌지 자신이 없었다.


“좋은 분이시구나. 그런데 여긴 하늘이란다.”

“네?”

“저기 강 위를 나는 새들은 우리보다 아래에 있지? 그래도 하늘을 난다고 하지?”


신이는 끄덕끄덕 동의를 표했다. 진홍은 자신의 양 팔을 벌려 휘둘렀다.


“이 허공을 하늘이라고 하지?”

“예.”

“땅에 있는 건 발바닥뿐이야. 우리는 전부 하늘 속에 있어. 하늘 아래 있는 게 아냐.”


듣고 보니 그럴 듯했다. 하지만 무슨 의미가 있는 얘긴지는 알 수 없었다.

진홍이 바위를 딛고 올라가서 낭떠러지 반대편으로 걷기 시작했다. 두 걸음쯤 거리를 두고 신이도 따라갔다.


“신아.”


돌아보지 않은 채 걸어가면서 진홍이 뒤따르는 신이를 불렀다.


“예.”

“고균 나으리를 아저씨라 부르기로 했다면서?”

“예.”

“나랑 운영각 아이들을 누이로 불러라. 네가 사내동생이라면 참 좋을 것 같구나.”


예, 신이는 모기 소리만 하게 대답했다.

앞서 가는 진홍의 조금 큰 블라우스가 바람에 흔들렸다. 가느다란 팔목위로 바람에 부푼 연분홍 소매가 오후 햇살에 빛나고, 새까만 뒷머리에 꽂은 비녀가 반짝거렸다.


신이는 어지러웠다. 눈 앞에 가득 아지랑이가 피어올랐고, 아지랑이들 곳곳에서 유성처럼 은빛이 미끄러져 내렸다.

세상이 달리 뵈는 게 빈혈증에 걸린 증상과는 다르리라 신이는 짐작했다.


소년을 둘러싸고 모락모락 솟는 기운은 그를 쓰러뜨리는 게 아니라 구름처럼 띄워 올릴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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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첫날(5) 23.09.28 32 6 9쪽
6 첫날(4) 23.09.28 29 5 9쪽
5 첫날(3) 23.09.27 41 10 11쪽
4 첫날(2) 23.09.26 48 7 9쪽
3 첫날 (1) 23.09.25 57 8 8쪽
2 훗날 23.09.23 109 13 7쪽
1 서(序) / 프롤로그(Prologue) +1 23.09.23 137 10 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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