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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치 님의 서재입니다.

삼일(三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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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신성치
작품등록일 :
2023.09.22 18:39
최근연재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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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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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9
추천수 :
227
글자수 :
344,383

작성
23.09.25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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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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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글자
8쪽

첫날 (1)

DUMMY

첫날

(1884년 12월 4일 - 음력 10월 17일)


문틈으로 들어오는 찬바람에 뒤척이다가 신이는 눈을 떴다. 아직 동트지 않은 새벽이었다.


잠에서 깨어난 까닭이 아궁이의 땔나무가 부족해서만은 아니었다.

요 며칠 신이는 좀처럼 긴 시간 동안 잠에 빠져 있지를 못했다. 어둠 속에서 눈을 뜨면 가슴 아래서 시린 기운이 올라오는 게 느껴졌다. 몸 안에 샘이 있어서 차가운 물이 솟고 있는 것 같았다.


왜 그런 느낌이 드는지 몰랐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조금 빨라진 맥박은 그의 숨을 조금 더 덥게 했고, 더운 숨 속에는 한 순간 그를 솟구쳐 오르게 할 기운이 숨어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설렘이라 부를 수 있는 그 두근거림 속에는 조금의 두려움도 섞여 있었다.


몸을 젖혀 힘껏 기지개를 켜고 신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람은 어떤 시절엔 해가 떠오르는 것을 기다리지 못하고 방을 박차고 나가고, 제 걸음이 답답해서 급한 일 없이 내달리기도 한다. 대개는 어리거나 젊은 시절에 겪는 일이다.


‘왜 이렇게 가슴이 두근거릴까?’


열일곱 살 소년은 전에 느끼지 못한 설렘의 까닭이 궁금했다.


‘무얼 바라고 있는 거지?’


신이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시원한 바람이 가슴을 흔들 때면 떠오르는 얼굴이 있긴 했다. 하지만 그 사람을 설렘의 까닭으로 삼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 생각했다.


제 속에 나타난 하나의 얼굴을 고개 흔들어 털어버리고, 신이는 방바닥의 이불을 재빠르게 개어서 반닫이 위에 올려 놓았다.

이 아침의 두근거림은 전과는 다른, 어떤 예감인 것만 같았다. 겪어 보지 못한 새로운 날에 자기도 모르게 스스로 바라고 있던 일이 눈 앞에 나타날 것만 같은 예감.


‘어떤 일이 벌어질까? 어떤 사람과 맞닥뜨리게 될까?’


이날은 신이에게도 특별한 날이었다.

입을 굳게 다물고 눈과 귀를 쫑긋 부풀려서 알아낸 것들을 또렷이 전해야 한다고, 김옥균의 측근이 임무를 전했다.


신이를 한 동아리로 받아들인 어른들은 신이의 가벼운 몸과 빠른 발, 거짓 없는 심성을 믿고 있었다. 그리고 소년은 날이 밝은 후 벌어질 범상치 않은 사건들을 설레는 기대감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신이는 버선을 신고 솜옷을 챙겨 입었다.

행랑 방을 나선 신이는 담장 앞에 놓인 사다리를 세웠다. 용마루에 닿을 만큼 훤칠한 대나무 사다리를 탄탄하게 고정시켰다. 그리곤 사다리를 타고 가볍게 기와 지붕 위로 올라갔다.

꼭 올라야 할 이유 같은 건 없었다. 조심스럽게 지붕 위에 발을 얹으면서 신이는 미소를 지었다.


아버지와 같이 도성 안의 지붕들을 고치고 다니던 때를 떠올리면 늘 기분이 좋았다. 초가 지붕을 엮을 때나 기와를 얹을 때나 높은 곳에 올라서서 일하면 신이 났다.


기와를 떨어뜨리지 않고 지붕 위를 걷는 게 신이의 특기였다.

찰진 흙으로 기와가 연결된 곳의 위를 밟고 몸의 중심을 기울여 무게가 기와를 아래로 밀어내지 않도록 하는 것은 경험과 감각에서 비롯된 요령이었다. 그리고 지붕 고치는 일꾼이라고 해서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아직 몸이 가볍고 잡생각이 없어서 그렇다고 말하면서 아버지는 껄껄 웃었다.


이제 먹물 빛깔 어둠은 사라지고 없었다. 뽀얀 안개와 같은 새벽 빛깔이 신이의 시야를 채우고 있었다.

여느 날과 다를 바 없는 미명의 시간이지만 지붕 위의 소년은 들뜬 맘으로 태양을 기다렸다.


‘조금 있으면 흥인문 건너 타락산 위로 일출의 붉은 기운이 퍼지겠지.’


신이는 지붕 위에 턱을 괴고 엎드렸다.

내려다 보이는 집들에서 밥 짓는 연기나 등잔 불빛은 아직 보이지 않았다.


통행이 드문 어둠 속에서 집안이나 거리를 내려다 보는 것을 신이는 종종 즐겼다. 물 길으러 나온 계집아이들, 일찌감치 일터로 가는 일꾼들은 누군가 내려다 본다는 건 생각도 못하고 종종걸음을 옮겼다.

저마다 다른 표정과 걸음걸이들을 구경하는 게 왠지 재미있었다.

더군다나 여기 운영각에 살게 된 뒤에는 사람 구경이 더 재미났다. 신이가 누이 삼은 고운 색시들로 가득한 집이었으니까.


안채에서 인기척이 있었다. 신이는 재빠르게 고개를 돌렸다. 한복 저고리 위에 연분홍 빛 서양 윗도리를 입은 여자가 마루에서 내려서고 있었다.


‘진홍 누이.’


한순간 명치 가운데로 조여들면서 심장이 멈추는 것 같았다. 그리고는 맥박이 급하게 뛰었다.

‘무슨 일일까? 꼭두새벽부터.’

신이 눈에 진홍으로 보이는 여인은 소리나지 않게 살며시 빗장을 풀고 집밖으로 나갔다.


신이는 굳이 마음 먹을 필요도 없다는 듯 여인을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여인이 가는 방향을 따라 지붕 반대 편으로 간 신이는, 역시 소리 내지 않고 미끄러지듯 지붕을 내려서 담장 위에 올라섰다.


잠시 몸을 낮춘 채로 골목길을 돌아가는 여인의 뒷모습이 보였다.

신이는 담장을 타고 옆집 담장으로 건너갔다. 시야에 여인을 놓치지 않으면서 신이는 조용조용 뒤따르기 시작했다.

옆집 담장 끝은 다른 집과 이어져 있지 않았다. 가볍게 담장을 내려서서 계속 여인의 뒤를 밟았다.


‘이 시각에 어디를 가는 걸까? 몰래 만나는 남정네라도 있는 걸까?’


윗도리를 서양 옷으로 차려 입은 여인을 본 순간부터 상기됐던 신이의 볼이 더 뜨겁게 달아올랐다. 쌀쌀한 초겨울 날씨 속에서도 몸이 후끈거리는 것 같았다.


신이가 다방골의 기생집 운영각에 들어온 이래, 운영각의 안주인 진홍이 손님을 접대할 때 말고 따로 남자를 만나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진홍 ‘아씨’였다가 얼마 전부터 진홍 ‘누이’로 부르게 된 여인이 남정네를 찾아 새벽길을 나섰다는 상상이 떠오르자 신이는 호기심과 분노가 섞인 열기에 휩싸였다.


여인이 다방골을 빠져나와 숭례문 쪽 길로 들어섰을 때 신이는 또다른 인기척을 느꼈다.

여인과 서른 걸음쯤 거리를 두고 뒤따르던 신이의 열댓 걸음 앞으로 두 개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옆 골목에서 나타난 건장한 사내 둘이 발소리를 죽여 여인을 뒤쫓고 있었다.


‘저자들은 뭐지, 어디서 튀어나온 거지?’


담벼락에 붙어서 몸을 숨기고 있던 신이는 잰걸음으로 사내들 뒤를 쫓았다.

초가들 사이로 숭례문이 보일 즈음이었다. 앞서가던 여인이 무심코 고개를 돌리는 순간, 한 사내가 달려들어 여인의 목을 감싸고 입을 막았다.

“헉” 숨이 막히는 소리밖에 내지 못하고 여인이 버둥거렸다. 동시에 파박, 신이가 싸움닭처럼 튀어 나갔다.


“뭐, 뭐야. 너희들 뭐하는 거야.”


너무 놀란 탓인가 신이 입에선 우렁찬 기합이나 고함 대신 작고 급한 음성이 새나왔다.

그때 신이에게 뒷모습만 보이며 달리던 사내, 여인을 붙들지 않은 자가 신이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찌릿, 긴장하며 신이의 손끝까지 힘이 들어가는 순간! 뒷모습의 사내가 곧바로 몸을 틀어 돌려차기를 날렸다.

신이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윙, 바람을 가르며 뒤꿈치가 지나가는 순간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사내는 제 뒤편으로 발길질을 하기 전에 목표물을 돌아보지도 않았다.

강자임을 직감하고 움찔하자마자 손날이 날아와 신이의 턱을 강타했다.

헉, 소나무 뿌리에 턱을 찧은 것처럼 통증이 작렬했다. 휘청, 고개가 돌아가는 것과 명치에 무릎이 날아와 꽂히는 것을 신이는 거의 동시에 느꼈다.


머리통이 아래로 향하면서 사내의 얼굴이 거꾸로 보였다. 무언가 누런 것에 싸여 검은 두 눈만 반짝거렸다.

쿵! 단단하게 얼어붙은 땅바닥에 신이의 얼굴이 처박혔다.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삼일’은 일요일을 제외하고 주 6회, 오후 9시 10분에 업로드될 예정입니다. 


이미 초고를 완성한 글이고, 대략 70회 내외로 연재될 것으로 예상합니다. 


즐겁게 감상하시길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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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첫날(2) 23.09.26 48 7 9쪽
» 첫날 (1) 23.09.25 56 8 8쪽
2 훗날 23.09.23 109 13 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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