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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치 님의 서재입니다.

삼일(三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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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신성치
작품등록일 :
2023.09.22 18:39
최근연재일 :
2023.11.03 2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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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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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수 :
227
글자수 :
344,383

작성
23.10.02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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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0쪽

첫날(10)

DUMMY

생각에 잠긴 벼슬아치 뒤에는 소리를 죽여 걷는 소년이 있었다.

신이는 민영익을 뒤따르기를 멈췄다. 민영익이 데리고 온 사람도 따르는 사람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발길을 돌린 것이었다.

김옥균이 이서방에게 지시받고 행하라는 일이 이것이었다.


김옥균의 하인 이점돌은 붓으로 그린 약도를 신이한테 건네며 여느 때와 다른 심각한 음성으로 말했다.


“경복궁 건춘문 근처 서촌에 민영익 대감의 집이 있어.

신이 넌 일단 그 근처에 몸을 숨기고 있다가 민대감이 나오면 뒤를 밟는 거여.

민대감은 우정국에 오기로 돼 있는데 어디 들렀다 오는지 누굴 데리고 오는지, 혹시 너 말고 누가 민대감 뒤를 쫓아오는지 죄다 살펴야 돼. 알았지?”


어려운 일은 아닐 것 같았다. 신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혼자 곧바로 우정국으로 오는 거면 알릴 필요가 없어. 그냥 그 다음 일 할 데루 가.

어딜 들르거나 누구랑 같이 오면 슬쩍 앞질러서 우정국 앞으로 와.

내가 우정국 앞에서 빗자루라도 들고 오락가락하고 있을 거여.”


“그 다음엔요?”


“하도감으로 가.

하도감 청군 진영이 정면으루 보이는 길에 입춘대길 네 글자가 여적지 붙어 있는 집이 있어. 입춘대길 글자 알어?”


평소 신이의 총기를 인정하는 이서방이었지만, 이날은 확실한 확인이 필요했다.


“쓰지는 못 하지만 보면 알아요.”


“그려. 그러겄지.

입춘대길 옆 비탈진 길을 올라가면 다음다음 집 문이 열려 있을 거여. 그 집으루 가.”


“가서 누구라고 얘기하죠?”


“오늘 밤 거사부터 ‘천’자를 군호로 사용할 거여.

그 집 사람이 물으면 ‘천’자 한 글자만 말하면 동패인 걸 알아볼 거여.

그 집에서 인경 종 치기 전까지 하도감 청군 진영을 내려다 보는 거여. 청군이 움직이면 달려와서 알리고.”


“어디로요?”


“계동에, 경우궁 알지?”


김옥균을 따라서 가 본 적이 있는 곳이었다. 순조 임금의 어머니를 모신 사당이라고 들었다. 제사를 모실 때가 아니면 사람이 살지 않는 빈 집이었다.


“밖에 파수 보는 군사들한텐 얘기해 놓을 테니까 ‘천’자만 잊지 말고 말하면 돼.

무슨 일이냐면 청군에 대해 보고해야 된다고 고균 나으리나 고균 댁 이서방 찾는다고 해.”


민영익이 멀어지는 것을 흘낏 돌아보고 신이는 하도감 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지붕 위에서 노는 것만큼이나 달리기도 자신이 있었다.

금세 종거리까지 달려온 신이는 종루 앞을 지나면서 계향과 유대치 생각이 났다. 태평방에 있는 유대치 집에 들러보고 싶어졌다.


‘대치 선생님······ 아마도 이마에 송글송글 땀이 맺힌 채로 딴 일은 모두 제쳐 놓고, 계향 누이를 굽어보고 계실 거야.’


온 신경을 집중해 환자를 돌보는 것은 신이가 자주 봤던 유대치의 모습이었다.

신이를 처음 만났을 때도 유대치는 상처 입은 이를 돌보고 있었다.

그 중 한 명이 신이 아버지였고, 유대치와 신이의 바람과는 다르게 아버지는 그들 앞에서 숨이 끊겼다.


그날부터 천애고아가 된 신이에게 유대치는 아버지 같고 할아버지 같은 존재가 되었다.


‘아버지······.’


신이 아버지는 아들 하나 딸린 홀아비 노비였다가, 면천된 후 한양의 지붕 잘 고치는 일꾼이었고, 임오군란 전 해에는 훈련도감의 구식 군인이 되었다.

신이는 아버지가 종살이하던 시절은 어릴 적이라 잘 기억을 못했다. 다만 면천되었을 때 아버지가 많이 기뻐했다는 것은 기억했다.


한성부로 올라와서 기와든 초가든 지붕을 만들고 고치는 일에 인정을 받아 끼니 걱정을 안 하게 되었는데도, 훈련도감 병졸 자리가 생기자 아버지는 주저 없이 나섰다.

그리고 면천됐을 때 못지 않게 군인이 된 것에 기뻐했다.

나라를 지키는 쓸모 있는 백성이 된 것이 뿌듯했고 신이 났다.


한데 그가 들어간 곳은 곳간이 빈 나라에서 대접 못 받는 구식 군대였다.

열 달 넘게 급료가 나오지 않다가 한 달치 급료로 모래와 겨가 절반인 쌀을 받자 군인들은 흥분했다.

관에서 문제를 해결해 주긴커녕 주동자를 체포해 초주검을 만들자 폭발한 군인들이 떼지어 몰려 나왔고 그 속에 신이 아버지도 있었다.

그 역시 분노한 군인 중 한 명이었지만 군중이 영돈녕부사 이최응을 죽이는 장면을 목격하고는 돌아섰다.


신이 아버지는 남에게 해꼬지할 꿈도 못 꾸는 순한 성품이었다.

외적을 막아내는 싸움은 각오했었지만 동족을 해치는 것은 지켜보기도 버거웠다.

신이 아버지가 병졸 옷을 벗어버리고 이태원 집에 돌아와 있을 때 청나라 군이 개입해서 군란은 평정이 됐다.


왕비가 환궁하고 군란 이전으로 세상이 돌아갔나 보다, 여기고들 있을 때였다.

신이를 심부름 보내고 신이 아버지는 역시 구식 군인이었던 옆집 별이 아범과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함성 소리 말발굽 소리와 함께 비명이 들려왔다. 집 앞 공터에 새까맣게 청나라 군사들이 몰려와 있었다.


그들은 군란에 참가했던 구식 군인들을 색출하고 있었다. 말 탄 청나라 장교 곁에 청나라 말을 하는 조선인 몇이서 손가락질로 용의자들을 찍어냈다.

검은 두루마기를 입고 목덜미에 화상 자국이 있는 조선인이 키 큰 갈색 말 위에서 별이 아범을 가리켰다.


별이 아범이 엉겁결에 달아나자 일곱 살 먹은 계집애 별이가 울음을 터뜨렸고 신이 아버지는 별이를 안고 뒤따라 도망쳤다.

지붕을 고쳐 준 집에서 쌀 한 말을 받아서 어깨에 얹고 돌아오던 신이는 황급히 골목으로 뛰어드는 별이 아범을 봤다.

그리고 별이를 안은 아버지에게 뭐라 말을 하려던 순간, 뒤따르던 청군의 칼이 원을 그렸다. 등이 대각선으로 베어진 아버지가 쓰러졌다.


쓰러진 아버지 옆구리를 청군은 다시 찔렀다.

뿜어져 나온 피가 곁에 주저 앉은 별이의 얼굴과 청군의 가슴팍까지 튀었다.

신이는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오금에 힘이 빠져 넘어질 것 같았지만 억지로 힘을 내서 아버지 앞으로 갔다.


청군의 무리는 다른 남정네들을 쫓으면서 닥치는 대로 칼을 휘두르고 있었다.

아버지 옆구리는 피가 흥건했고 깊이 파인 상처 속에 창자 같은 내장이 보일 지경이었다.

신이는 저고리를 벗어서 아버지 허리에 묶은 다음 들쳐 업었다.


여기저기서 피가 튀고 비명소리가 난무하고 있었다.

겁은 나지 않았다. 이 끔찍한 장면이 낯선 그림을 보는 것만 같았다.

어디로 가야할까, 의원은 어디 있었더라, 정신이 제대로 차려지지 않았다.


아버지를 업고 본능적으로 살육의 현장에서 멀어지고만 있었다. 그 때, 어느 집 사립문 안에서 노파가 급하게 손짓을 했다.

들어오라고, 의원이 있다고, 외치는 것 같았다.


유대치는 이태원 사는 환자를 돌보고 돌아가던 길에 살육의 현장을 목격했다.

한 노파가 칼을 맞은 아들을 붙들고 우는 것을 보고 급하게 지혈을 하는 중이었다.

어깨를 찔린 노파의 아들은 생명에 지장이 없어 보였다.


유대치는 평상에 눕혀진 신이 아버지를 돌보기 시작했다.

신이는 아버지와 유대치를 보면서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유대치는 필사적으로 피를 멎게 해 보려고 애썼지만 상처가 너무 깊었다. 자신의 약방에서 모든 도구와 약재를 동원한다 하더라도 살리기 어려운 상태였다.


아버지는 감았던 눈을 뜨고 신이를 올려다 보고 있었다.

아버지······ 아버지······ 소리를 지르고 싶었는데 신이 입 밖으로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아버지의 눈자위가 파르르 경련을 했다.

신이는 아버지의 떨림이 자기에게 옮겨 오는 강렬한 느낌을 받았다.


‘괜찮아야 돼, 괜찮아야 돼.’


그것은 아버지가 괜찮기를 바라는 신이의 마음이 아니었다. 자신이 죽더라도 아들만은 위태롭지 않기를 걱정하는 아버지의 마음이었다.

신이는 제 몸 속으로 스며드는 울림이 아버지에게서 온 것임을 알았다. 그 떨림의 전달에는 어떤 설명도 필요 없었다.


그 다음에 신이를 올려다 보는 아버지의 굳은 눈매가 누그러졌다.

신이는 입을 벌린 채 아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 아버지의 두 눈을 응시했다.


아버지는 무언가 평온한 장면을 상상하고 있었다. 여전히 옆구리와 등에서 피가 번져 나오는, 참혹한 순간이었다.

한데 신이는 푸근하고 환한 기분이 와 닿는 것을 느꼈다. 그것 역시 바로 그 순간 아버지의 감정이었다.


따뜻한 덕담이나 축복의 예언처럼 아버지는 아들의 밝은 앞날을 떠올리고 있었다.

마지막 순간 누군가는 두려움 대신 저 세상의 밝은 빛을 본다지만, 이 사내는 꺼져가는 생명을 자식에 대한 낙관으로 채우고 있었다.

신이가 아버지에게 받아들인 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아들의 삶이 안온하기를 바라는 단단한 희망이었다.


‘아버지! 아버지!’


신이는 눈을 감는 아버지를 보고 눈물을 뚝뚝 떨구면서도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아비 잃은 아들을 돌아보다가 유대치는 미소 짓는 소년에게 놀랐다.

다시 고개를 돌려 보니 눈을 감고 절명한 소년의 아버지도 똑같이 닮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비가 끝까지 바란 환한 마음을 아들이 똑같이 느꼈구나. 이 아이는······ 피비린내 속에서 마음이 열렸구나.’


작가의말

하도감은 지금의  DDP(동대문 디자인 플라자) 근처로, 군사를 훈련시키고 군대가 주둔하던 곳입니다. 


오늘도 9시 15분에 한 편이 더 올라옵니다. 

앞으로 계속 하루에 두 편, 한 주에 열두 편을 올릴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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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날(10) 23.10.02 18 4 10쪽
11 첫날(9) 23.09.30 23 5 9쪽
10 첫날(8) 23.09.30 19 6 10쪽
9 첫날(7) 23.09.29 22 6 11쪽
8 첫날(6) 23.09.29 21 6 9쪽
7 첫날(5) 23.09.28 30 6 9쪽
6 첫날(4) 23.09.28 28 5 9쪽
5 첫날(3) 23.09.27 41 10 11쪽
4 첫날(2) 23.09.26 48 7 9쪽
3 첫날 (1) 23.09.25 55 8 8쪽
2 훗날 23.09.23 109 13 7쪽
1 서(序) / 프롤로그(Prologue) +1 23.09.23 136 10 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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