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신성치 님의 서재입니다.

삼일(三日)

웹소설 > 일반연재 > 일반소설

완결

신성치
작품등록일 :
2023.09.22 18:39
최근연재일 :
2023.11.03 22:10
연재수 :
69 회
조회수 :
1,146
추천수 :
227
글자수 :
344,383

작성
23.10.04 21:10
조회
11
추천
3
글자
10쪽

첫날(14)

DUMMY

“반상의 구분이 있다고는 하나 아랫사람이라 해도 같은 하늘 같은 임금님 아래 사는 백성으로 너그러이 대하는 것은 조상 대대의 전통 아닌가요?”


김옥균은 부드러운 답변을 찾아서 대화를 무난하게 넘기려 했다.

칼을 뽑기 전에 굳이 혀로 상대를 베겠다고 설쳐서는 안 됐다.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김옥균과 민영익은 주고 받은 말들 뒤에 감춘 뜻을 서로 헤아려 곱씹었다.


‘너희 일본당은 아랫것들을 동등하게 존중하기 때문에, 권력욕을 채우기 위해 그들의 피를 이용하지 않겠다는 건가?’


민영익이 입을 다문 채 속으로 물었다. 김옥균 역시 마음 안에서 답했다.


‘뜻 깊은 일에 목숨 걸 각오를 같이 했다면 양반이 아니더라도 동지다. 결단코 그들의 목숨을 함부로 여기지 않을 것이다.’


짧은 신경전이 지나가자 연회의 참가자들은 곁에 앉은 사람들과 가벼운 사담만을 조금씩 주고 받으면서 식사를 이어갔다.

김옥균은 천천히 고기를 씹으면서 별궁에 방화하는 작전이 순조롭게 이루어질지를 걱정했다.


방화를 맡은 윤경순과 이규완은 별궁 옆 서광범의 집에서 나무토막이 가득 든 자루와 폭약을 들고 왔다.

왕가의 결혼식 등 행사에 쓰이는 별궁은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채 자물쇠가 굳게 잠겨 있었다. 두 사람이 준비해 온 열쇠 꾸러미 중엔 맞는 게 없었다.

담장이 높고 행랑 지붕이 얹혀 있어서 담을 넘기 힘든 건물이었다. 서울 장안에서 완력으로 유명한 윤경순이 차돌을 주워 와서 자물쇠를 부쉈다.


이규완은 나무토막 자루 위에 김옥균의 집 하인이 만든 폭약을 놓고 불을 붙이려고 했다. 일본산 자기황(自起黃, 성냥)이 오래 돼서인지 몇 개를 부러뜨리고야 불이 붙었다.

폭약의 심지에 불을 붙이고 기다렸지만 폭발이 일어나지 않았다. 겁 없는 윤경순이 집어들어 보는 순간 “펑”하는 큰 소리와 함께 폭약이 일부분만 터졌다.


윤경순은 손등과 턱에 화상을 조금 입었다.

하지만 결국 폭약은 불발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전문가가 만든 게 아니어서 화약의 보관과 배합에 문제가 있었다.

이규완은 윤경순을 걱정했지만 윤경순은 재수 없다고 퉤 침을 뱉고는 화상의 고통을 무시해 버렸다.


“괜찮어. 빨리 해치우자구.”


할 수 없이 둘은 나무 자루에 성냥으로 다시 불을 붙였다.

쓸데 없이 소리만 컸던 폭약 때문에 순라군들이 모여들 수 있었다. 툇마루의 장지문 종이에 불이 옮겨 붙는 것을 확인하고 그들은 별궁을 신속히 빠져나왔다.


“불이야!”


두 사람이 별궁을 나와 골목으로 숨어 들었을 때, 고함 소리와 함께 순라군들이 별궁으로 달려왔다.

열린 문으로 뛰어들어온 순라군들은 불 붙은 장지문 옆에 나무토막 자루가 타고 있는 것을 목격했다. 방화의 흔적이 역력했다.


먼저 들어온 순라군이 급하게 소리를 질렀다. 뒤따라온 이들이 우물을 찾아 물을 긷기 시작했고 몇몇은 달려나가 주변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불길은 다행히 맹렬하지 않았다. 화재에 대비해 단단하고 불이 잘 안 붙는 목재를 쓴 덕이었다.

윤경순과 이규완은 별궁 근처를 떠나면서 지붕 위로 솟아오르던 연기가 잦아드는 것을 보았다.



우정총국 연회장 안에서는 어색한 만찬이 이어지고 있었다. 청국파와 일본파 대신들 간의 대화는 끊겼고 자기 편들끼리만 간간이 이야기가 오갔다.

김옥균과 박영효와 홍영식의 마음은 안동 별궁에 가 있었다. 불길이 솟아야 할 시간이었지만 소식이 없었다.


김옥균은 초조한 기색을 감추려고 태연한 척 옆 자리의 시마무라와 말을 나누었다.

민영익을 비롯한 청국파의 대신들 중에는 일본어 대화를 알아들을 사람이 없었다. 다들 한문에 능통해 필담으로는 동양 삼국에서 막힘이 없었던 탓에 회화술을 익히는 데 큰 열의가 없었다.

김옥균은 긴장을 누그러뜨리려고 일부러 이날의 군호를 언급했다.


- 시마무라 군, 그대는 하늘(天)을 아는가?


과장된 여유라고 할 수도 있는 질문이었다. 시마무라도 웃으면서 답했다.


- 요로시.


그때 연회장 밖에서 전갈이 들렸다. 홍현 - 김옥균의 집 -에서 연락이 왔다는 얘기였다.

김옥균이 일어나면서 표정이 굳는 것을 민영익은 놓치지 않았다. 급하게 나가는 김옥균을 쫓는 박영효와 홍영식의 시선도 확인했다.


그들의 눈빛 역시 예사롭지 않았다.

잠시 김옥균을 따라 나가볼까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참았다. 섣불리 움직이면 눈치 채고 있다는 것만 드러내고 소득이 없을 것 같았다.

민영익은 김옥균 일파를 감시할 부하를 데려오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그는 일단 박영효와 홍영식을 주시하면서 바깥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로 했다. 별 효과는 기대되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박제경은 낮고 불안한 음성으로 김옥균에게 사태를 전달했다. 별궁 방화는 실패했다.

폭약은 폭발력이 약했고, 폭음을 듣고 달려온 순라군들에게 불은 금방 진압됐다. 방화조는 급히 자리를 떠서 붙잡히지는 않았다.

자객들이 별궁 근처에 계속 매복하고 있기가 어렵다.

오래 고민할 겨를이 없는 급박한 상황이었다. 김옥균은 곧바로 판단하고 지시를 줘야만 했다.


“일단 별궁 곁에 매복할 필요는 없다고 전하게. 눈에 띄지 않을 적절한 곳을 찾도록.”

“예.”

“근처에 불길이 오르기 좋은 다른 곳을 속히 물색하게.

이곳 우정국에서 별궁까지 갈 때와 비슷하게 떨어진 곳이면 좋겠지. 너무 멀지 않게.”

“알겠습니다.”

“자네나 유혁로가 불 붙일 곳을 정한 뒤 자객들에게 속히 알리게.”


박제경은 지시를 듣자마자 급하게 달려갔다. 휴우, 한숨 끝에 태연함을 가장하고 김옥균은 다시 연회장 안으로 들어갔다.

하인들이 스테이크와 찐 감자 요리 접시를 치우고 과일 접시를 올리고 있었다.


‘과일 다음엔 수정과가 나오고 연회는 파장일 것이다. 그 전에 방화와 암살 준비가 끝나야 한다.’


바깥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김옥균의 통제 밖에 있었다. 초조해 한다고 해결될 일은 없었지만 김옥균의 심장은 박동이 빨라졌다.

박영효와 홍영식과 서광범은 사과와 감을 씹으면서 김옥균의 눈치를 살폈다. 우정국 밖에서 불길은 솟지 않고 소식을 들은 김옥균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안심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고 박영효와 홍영식은 짐작했다.



십 분 남짓, 박제경과 유혁로는 별궁 근처에 불을 지를 만한 곳을 찾으려고 동분서주했다. 하지만 이미 안동 별궁의 방화 사건 때문에 바짝 긴장한 순라군과 야경꾼들이 수상한 자를 찾으려고 이곳저곳을 뒤지고 있었다.

까딱 잘못해서 불을 지르다가 금세 발각된다면 거사를 망치고, 공연한 싸움으로 순라군들만 해칠 수 있었다.


감시를 피해 몸을 숨기기 바쁜 암살조들은 박제경과 유혁로를 보면 빨리 새 작전명령을 내려 달라고 청했다.

어쩔 수 없었다. 박제경은 암살조들의 위치를 파악해서 이동시킬 준비를 하기로 하고, 이번엔 유혁로가 우정총국을 향해 내달렸다.


“고균 나으리, 댁에서 또 전갈이 왔습니다.”


김옥균이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자 장내의 분위기도 다시 싸늘해졌다.

박영효와 홍영식은 굳은 표정을 감추지 못했고, 민영익은 미간을 찌푸리고 김옥균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급하게 달려온 유혁로는 가쁜 숨을 미처 진정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김옥균은 연회장 정문이 보이지 않는 건물 옆쪽으로 말없이 유혁로를 이끌었다.


“고균, 계획을 바꿔야 하겠습니다. 별궁 근처는 경비가 삼엄해져서 방화가 어렵고, 자객들은 마땅히 대기할 만한 곳이 없습니다.”


목소리를 낮추고 유혁로가 다급하게 말했다.


“별궁 근처를 고집할 필요는 없네. 무기를 숨긴 장사들 간에 연락이 끊기지 않도록 하고, 방화가 가능하면 건물을 가리지 말게.”


“이대로 있다간 영사들을 다 놓칠 것 같다고 아우성들입니다.

불을 질러도 순라군이 먼저 오거나 시간이 늦어져 일을 그르칠 수 있습니다.

고균, 자객들은 곧바로 우정국으로 치고 들어오길 바랍니다. 그래야 해치울 수 있습니다.”


완벽한 계획과 빈틈없는 실행은 현실에서는 드문 경우란 걸 김옥균도 알았다. 위험한 작전일수록 예상 못할 변수가 많다는 것을 머릿속으로는 알았다.

하지만 개화당이든 민씨 척족이든 정변을 실행해 본 이는 없었고, 정변을 실제처럼 예행 연습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김옥균이 빠른 결정을 위해 생각을 굴리는 짧은 시간 동안에도 유혁로의 두 눈에는 조바심이 가득했다.


“아니야. 여긴 안 되네. 자칫 외교관들이 다치기라도 하면 우린 여러 나라의 공적이 되네.

이렇게 하세. 별궁과 우정국 사이···, 우정국 쪽으로 좀 더 치우쳐도 되네. 인적이 적은 곳에 초가들도 많네.”


입을 굳게 다문 유혁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김옥균이 정리한 명령을 말했다.


“신속히 우정국 쪽으로 다가와 초가 골목에 매복을 하고 방화. 이후에 현장에 접근하는 영사들을 처리한다.”


말을 마치자마자 김옥균이 유혁로를 밀어내듯 어깨를 두드렸다. 유혁로는 곧바로 달리기 시작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삼일(三日)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12 첫날(10) 23.10.02 20 4 10쪽
11 첫날(9) 23.09.30 25 5 9쪽
10 첫날(8) 23.09.30 21 6 10쪽
9 첫날(7) 23.09.29 22 6 11쪽
8 첫날(6) 23.09.29 21 6 9쪽
7 첫날(5) 23.09.28 32 6 9쪽
6 첫날(4) 23.09.28 30 5 9쪽
5 첫날(3) 23.09.27 41 10 11쪽
4 첫날(2) 23.09.26 48 7 9쪽
3 첫날 (1) 23.09.25 57 8 8쪽
2 훗날 23.09.23 109 13 7쪽
1 서(序) / 프롤로그(Prologue) +1 23.09.23 138 10 4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