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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치 님의 서재입니다.

삼일(三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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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신성치
작품등록일 :
2023.09.22 18:39
최근연재일 :
2023.11.03 2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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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4,3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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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28 2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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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쪽

첫날(5)

DUMMY

집을 나서 걸으면서 김옥균은 운영각을 생각했다.

새벽에 습격당한 계향이 살고 있는 곳, 계향을 닮은 안주인 진홍이 머무는 곳.


유대치가 운영각 얘기를 꺼냈을 때 김옥균은 적잖이 놀랐었다.

의원 신분이지만 백의정승이란 별명을 들으며 어떤 양반보다도 품위를 지켜온 선생님이었기 때문이었다.

조선 사회의 개혁에 열정적이면서 불경에도 밝아 초탈한 승려를 연상케 하는 유대치가 기생집을 소개한 것은 처음이었다.


“선생님께서는 청루(靑樓-기생집) 출입을 꺼리지 않으십니까?”

“계집 마다하는 사내 있다던가? 고균이랑 벗하려면 나도 한량 노릇 좀 해야지.”


농짓거리로 대꾸하며 김옥균의 소매를 잡아 끌었지만, 유대치가 운영각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특별했다.

세도를 누리는 민씨 가문에 빌붙은 벼슬아치가 청나라 장교에게 잘 보이려고 운영각에 데려 온 적이 있었다. 청나라 장교는 운영각의 진홍에게 한 눈에 반했고, 진홍이 단호하게 수청을 거절하자 칼을 뽑고 행패를 부렸다.


한량들도 기생들도 모두 긴장해서 얼어 붙어 있는데, 진홍은 차분히 목을 내밀고 청나라 장교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장교의 동행인에게 똑바로 통역하라면서 또박또박 말했다.

목을 자르기 전에 술값을 치르라고, 목을 자른 다음에는 소금에 절여서 네 침상 곁에 모셔 두고, 청에 귀국할 때 가져 가서 가족 친척에게 소개하라고.

네놈이 욕심 내서 도륙한 조선 여인의 모가지라 말하라고.


장교는 섬뜩한 기운에 겁을 먹어서 칼을 거두고 그길로 내뺐다.

유대치는 약방 손님에게 이야기를 전해 듣고 김옥균보다 먼저 운영각을 출입했었다.



김옥균은 마주 앉은 여인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여인 역시 김옥균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받아냈다.

갸름한 얼굴에 길고 가는 손, 얼핏 보아 창백하지만 여린 것 같지 않은 흰 살결,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가는 입술, 크고 맑은 눈동자엔 불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조선 전통의 미인상은 아니었지만 사람을 끌어들이는 소슬한 향취를 품고 있었다. 김옥균은 여인의 검은 눈 속으로 자신의 한 조각이 빨려드는 것을 느꼈다.


‘빛을 내는 눈동자가 아니라 반짝이면서 빛을 빨아들이는 눈동자 같구나.’


마주 보고 있는 젊은 남녀를 둘러 보고 유대치는 빙그레 웃었다.


“서양에서는 여성을 존중해서 사내를 먼저 소개한다는데 어때, 이 양반 누군지 알려줄까?”


여인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저었다.


“저는 진홍이라 하옵니다. 고균 나으리의 명성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


하하, 명성이란 말이 겸연쩍은 것처럼 김옥균이 짧게 웃었다.


“진홍이라. 참 진자에 붉을 홍자인가?”

“그렇습니다.”

“기명 말고, 집에서 지어준 이름은 뭔가?”


진홍은 대답하지 않았다. 유대치 역시 진홍의 본명을 몰랐다.

호기심 어린 유대치의 눈이 진홍의 눈과 마주쳤다. 진홍은 질문자 김옥균 대신 유대치에게 대꾸를 했다.


“대치장께서 불가와 가까우신 걸 알고 있습니다. 감히 빗대어 아는 체 하자면 불가에서는 승려에게 왜 속세를 버렸는지, 속명과 속세의 업 따위를 묻지 않는다고 합니다.”

“중은 법명만 알면 되고, 기생은 기명만 알면 된다는 얘기구만.”


김옥균이 슬며시 불만을 드러내자 진홍은 살짝 고개를 숙였다. 굳이 상대를 자극하고 싶지는 않지만, 호락호락하게 보이지 않겠다는 자세였다.


“송구합니다. 이 자리에 앉기까지 사연이란 게 아름다울 리 없으니 이해해 주십쇼.”


김옥균은 진홍의 태도에 매력을 느꼈다. 천박하게 도도하거나, 값없이 아양을 떠는 여느 기생들과 달랐다.


“알겠네. 진홍이란 이름만 기억하겠네. 참으로 붉다, 그래 좋은 색깔이네.”


진홍은 낮은 음성으로 천천히 밝혔다. 자기 이름의 붉은 색이 뜻하는 것.


“꽃과······ 불과······ 피의 색입니다.”


김옥균은 술잔을 내려놓았다.

서늘했다. 노숙한 노름꾼이 패를 떠보는 것 같았다.


‘이 여자는 나를 끌어당기고 있다. 깊고 중한 의미로 내 멱살에 갈고리를 걸었다.’


진홍이 숨긴 의미가 무언지 그 순간 알 수는 없었다.

자신이 진홍에게 이끌린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김옥균은 슬며시 입꼬리를 올려 웃음을 보였다.

내로라하는 도박꾼이라고 자부하는 김옥균이었다. 분위기를 바꾸면 이 여자를 떠볼 수 있을까, 그는 너스레를 떨었다.


“진홍이, 이름답게 강단이 있구만. 여인의 몸으로 강압하는 대국 군사에게 맞서다니 장한 일일세. 이 집 마당에 태극기라도 걸어줘야겠네.”


김옥균이 칭찬했지만 진홍은 알아듣지 못할 말이 있었다.


“태극기가 무엇입니까?”


2년 전 임오군란으로 피해를 봤다는 일본을 달래고, 개화 추진에 필요한 자원과 정보를 얻기 위해 김옥균을 비롯한 수신사 일행이 일본으로 건너갔었다.

수신사의 대표 박영효는 다른 나라들처럼 국가를 상징할 깃발이 필요하다 생각하고 일본으로 가는 선상에서 태극기를 만들었다.


김옥균은 진홍에게 태극기가 만들어진 경위에 대해 간단히 설명했다.

“일본의 국기인 일장기는 흰 바탕 한가운데 붉은 원이 태양을 상징하고 있지.

하늘 복판에서 세상을 밝히는 태양이라. 거창하지?

하면 우리도 거기 못지 않은 원대한 상징으로 깃발을 만들어야 꿀리지 않을 판인데. 금릉위가 금방 좋은 안을 떠올렸지.”

“태극 문양으로 깃발을 도안했다는 겝니까?”


진홍이 짐작을 말하자, 놀 줄 아는 한량 김옥균은 과장되게 무릎을 치며 감탄했다.


“오호, 이 집 안주인이 기상만 드높은 게 아니라. 총명함으로도 출중한 재원이로구나!”


속 보이는 사내의 칭찬에 진홍이 웃음을 터뜨렸다.

간이 좋지 않아서 술잔으로 입술만 적시던 유대치도 파안대소(破顔大笑)로 장단을 맞췄다.


“이 정도 총기라면 태극이 뜨겁고 단단한 양기와 부드럽고 그윽한 음기를 나타낸 것임은 알고 있겠구만.

서로 다른 음과 양은 꼬리를 물어 이어지고 뒤섞여서 세상 만물을 낳는단 것도 알겠지?”


김옥균은 일부러 고개를 돌려 장난스런 곁눈질로 진홍을 보면서 말했다.


“원래 대장부는 나라를 대표하는 국기를 논하면서도 남녀의 방사에 빗대어 희롱하는 법입니까?”


진홍의 당돌한 시선은 꾸짖음 같았다.

‘오!’ 김옥균은 대단하다는 듯 입을 벌렸다. 유대치가 너그러운 미소를 보이며 끼어들었다.


“금릉위의 도안은 중앙의 태극으로 기운의 근원을 보이고, 네 귀퉁이에는 주역의 사괘를 둘러 천지만물을 표현했으니 참으로 훌륭한 상징물이네.

그리고 음양의 이치를 설명할 때 그 중 쉬운 예가 되는 것이 남녀관계이니 고균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요, 국사를 논함에 진중해야 한다는 이 집 주인의 말도 옳은 소리네.

주인과 객이 용호상박의 호각세를 보이니 이도 참 볼만 한 술자리일세.”


좌장격인 유대치의 중재 아닌 중재로 국기를 주제로 한 대화가 마무리되는 듯 했다. 하지만 곧 진홍의 또랑또랑한 음성이 곧 방 안을 긴장시켰다.


“미련한 제가 듣기에는 태극기의 형상이 소용돌이에 빠진 조선 같습니다.”


무슨 얘기인가, 유대치와 김옥균은 진홍을 주목했다.


“아래 위로 얽혀 도는 음과 양은 물결이 휘몰아치는 소용돌이를 닮았고, 네 귀퉁이의 괘들은 난파해서 빨려 들어가는 뗏목들 같습니다.”

“그것이 조선의 모습이라······.”


유대치는 말을 맺지 못했다. 소용돌이에 휘말리는 뗏목들, 그게 조선이 아니라고 부인할 수 없었다. 진홍의 시선이 김옥균에게로 옮아 갔다.


“고균 나으리께서는 그 소용돌이를 이겨내고 나라를 건지실 요량입니까?”


김옥균을 보는 진홍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입가의 웃음기는 사라져 있었다.

‘이 아이가 나를 시험하는구나, 세상을 뒤흔들 사내가 맞는지 묻고 있구나.’

김옥균은 진홍의 마음을 짐작해 보았다.


‘역시 범상한 기생이 아니었어.’


하지만 놀랐다고 해서 맥없이 턱을 빼고 있을 김옥균이 아니었다. 그는 대답 대신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무렴! 네가 나를 다시 볼 것이다.

청나라, 러시아, 일본과 조선까지 동양 제국(諸國)의 기세가 대충돌하는 곳.

소용돌이치는 동해 바다에서 고래를 잡아 올릴 이가 바로 나. 김옥균임을 네가 곧 볼 것이다.’



진홍과의 첫 만남을 회상한 김옥균은 발걸음을 재촉했다. 머릿속 혼자 생각도 요긴한 것만 해야 하는 날이었다.

잡념을 지우고, 다가오는 바쁘고 중차대한 일에 집중하자고 다짐하면서 그는 홍현 언덕을 내려갔다.


작가의말

‘홍현’은 김옥균 집이 있던 곳의 지명인데, ‘붉은 빛의 흙 언덕’으로 이해하면 됩니다. 


지금의 종로구 북촌로 정독도서관 자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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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첫날(4) 23.09.28 28 5 9쪽
5 첫날(3) 23.09.27 41 10 11쪽
4 첫날(2) 23.09.26 48 7 9쪽
3 첫날 (1) 23.09.25 55 8 8쪽
2 훗날 23.09.23 109 13 7쪽
1 서(序) / 프롤로그(Prologue) +1 23.09.23 136 10 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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