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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룡(旦龍) 님의 서재입니다.

검귀 소일도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단룡(旦龍)
작품등록일 :
2023.05.10 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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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15 2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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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4,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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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25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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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칼이나 갈아주시오(2).

DUMMY

왕필의 이야기를 들은 소일도가 인상을 찌푸렸다.


“적가장이 흑사방에게 여인을 받았다?”

“그렇네. 그것도 꽤 많은 숫자를 비밀리에 거래했네.”

“어째서지? 합법적으로 소첩을 들이거나 시비를 들일 방법은 차고 넘쳤을 텐데.”


왕필이 침음하더니 입을 열었다.


“모르나 보군. 적법하게 들여온 시비나 소첩은 막 대하거나 굴려 먹기가 어렵네. 그들은 비록 천민이긴 하지만 신분이 있어서, 억울한 일이 생기면 관에 가서 따지거나 재판을 요청할 수도 있지. 명문 적가장에서는 그러한 추문을 만들고 싶지 않았을 테지. 흔하지는 않아도 왕왕 일어나는 일이네.”


그 말에 소일도의 눈살이 낮아졌다.


결국 적가장이 사들인 여인들을 막 다루기 위해서 흑사방과 거래했다는 말로 들렸기 때문이다.


“팔려간 여인들은 어찌 되었나?”

“그야 모르지. 아무리 하오문의 정보가 넓다고는 해도, 남의 집 안방 사정까지는 알 수 없네.”

“......”


소일도의 인상이 한층 더 구겨졌다.


심히 불쾌한 기색으로 그가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혹시, 그 둘의 거래 안에 소연이라는 이름도 있었나?”

“음.”


왕필이 한쪽으로 미뤄놓았던 서류를 뒤적이다가, 한 장을 꺼내서 내밀었다.


보아하니 노비 거래의 증서였다.


하지만 거기에는 어떤 이름도 없었다. 있는 거라고는 노예의 나이와 성별, 그리고 책정된 값이 전부였다.


“보시다시피, 비공식적인 인신 거래의 정보는 이 정도가 다야. 이것도 그나마 상세한 편이고, 아예 가격과 성별만 적히는 경우도 많네. 애당초 빌미를 남기지 않기 위한 거래라, 이 정도도 하오문이라서 있는 정보네.”

“결국 모른다는 말인가?”

“그렇지.”

“하오문도 만능은 아니군.”

“아니지. 세상에 만능이라는 것은 없네.”


소일도의 비꼼을 대수롭지 않게 웃어넘긴 왕필이 다시 서류를 집어넣었다.


“뭐든 마지막 순간에는 스스로 쟁취해야 하는 법이야. 자네 동생도 결국 본인이 확인해 보는 방법밖에 없는 것처럼.”

“......”


소일도는 잠시 고민하는 듯했다.


그리고 돌연 왕필에게 질문했다.


“혹, 마공(魔功)일 가능성은 없나?”

“뭐?”

“여인들을 많이 사들였다고 했으니, 흡정공의 종류일 수도 있지 않나? 구체적으로는 음기를 탐하는 흡음마공(吸蔭魔功)이나 흡성대법(吸成大法)같은.”


추론을 내놓았는데, 왕필의 반응은 시원찮았다. 마치 그 이름들을 여기서 들을 줄은 몰랐다는 듯했다.


“아무래도 그건 아니지 않겠는가?”

“왜지?”

“그야, 구주천하에서 마인(魔人)들의 씨가 마른 지는 삼백 년도 넘었으니까 말이네. 명제국이 건국되기도 전 원시대 때 마교를 끝으로 마공의 명맥도 끊기지 않았나.”

“......뭐?”


이번에는 소일도가 반문했다.


원래 백치였기 때문에, 소일도는 천마신교니 구파일방이니 하는 무림의 세력들을 전혀 알지 못했다.


지금 그가 말하고 생각하는 것은 모두 검귀의 희미한 기억을 기준으로 했다.


그런데 마공이 사라졌다고?


중원 전체의 무림 문파와 맞붙어도 밀리지 않던 그 천마신교도 사라졌고?


게다가 그게 벌써 삼백 년 전의 일이라니.


그 말은, 적어도 검귀가 삼백 년 이상 과거의 사람이었다는 말이었다.


‘대체 언제였지?’


소일도가 필사적으로 기억을 더듬어 보았지만, 언제나 그렇듯 무엇 하나 명료하게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잠시 생각하던 소일도가 이내 고개를 저어 잡념을 털어냈다.


검귀의 기억은 조금씩이지만 꾸준히 돌아오고 있었으니까, 때가 되면 자연히 떠오를 것이다. 지금은 전생을 떠올리는 것보다 중요한 일이 있었다.


“......마공도 아니라면, 적가장이 여인들을 사들인 이유는 알 만하군.”


왕필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것이 더 없는 긍정의 신호였다.


소일도는 뒤돌아 발걸음을 옮겼다.


“지금 어디 가나.”

“적가장.”

“이 흉측한 마차는 어쩌고.”

“가지시게. 말이 딸렸으니 돈은 될 거요.”


왕필은 바람구멍이 많은 마차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시신도 운반했고, 영 귀신들린 것 같아서 받기 꺼려지긴 했지만, 말마따나 돈은 될 거였다.


시선을 돌려 이번에는 걸음을 멈추지 않는 소일도를 보며, 왕필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멈추시게. 조금 부추겼다고 거길 홀라당 쳐들어갈 심산인가? 죽으려고?”


소일도가 잠시 걸음을 멈추고 무심한 눈으로 왕필을 바라봤다.


“죽지 않을 생각이오.”

“어련하실까. 강호의 열혈 초출들 중에서 자기가 죽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네. 하지만 열에 아홉이 죽어.”


왕필은 냉정하게 말했다.


“자네 실력이 뛰어나긴 한 듯하지만, 혼자서 적가장을 상대로는 어림도 없네.”


왕필의 평가는 틀리지 않았다.


아무리 소일도의 성장이 빨랐다고는 하지만, 기껏해야 그가 무공을 익힌 지는 달포도 지나지 않았다.


내공과 외공도 꾸준히 쌓긴 했지만, 명문 정도인 적가장에서 평생을 수련한 이들의 입장에서 보면 하잘것없을 것이었다.


결국 검귀의 감각과 본능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확실하고 안전한 일만 하고 살 거라면 애초에 검을 잡지도 않았소.”

“......말도 안 되는.”


왕필이 설득하듯 말했다.


“우린 그것을 불확실이 아니라 불가능이라고 부르네. 자네가 단신으로 적가장에 쳐들어가서 이길 가능성은 적은 게 아니라 아예 없어.”


단언할 수 있었지만, 아무리 단호하게 말해도 이미 결정을 내린 소일도를 꺾을 수는 없었다.


“세상에 절대라는 건 없소, 지부장.”


소일도는 이미 불가능을 겪었다.


아무것도 몰랐던 백치가 하루아침에 전생의 기억을 되찾았고, 검귀의 깨달음과 감각을 몸에 공유하게 됐다.


쇳가루가 날리는 철방에서 죽었어야 했을 그는, 자객에게서 살아남고 혼자서 흑사방주를 죽였다.


그 누가 이것을 가능하다고 말하겠는가?


소일도는 불가능을 믿지 않았다.


“......그리고, 나름대로 믿는 구석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오.”

“그게 뭔가?”

“말해줘도 못 믿을 거요.”


싸우는 도중에 전생의 기억이 깨어난다고는, 복건성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붙잡고 물어도 믿지 못할 거였다.


하지만 소일도만은 직감했다.


지금이 바로 철연수개검의 첫 번째 단계를 정복할 때였고, 그 도박에 모든 것을 걸어보기로 했다.


“......허.”


왕필은 하마터면 웃을 뻔했다.


자신이 사람 하나는 제대로 건졌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강호에서는 안전하게 살고자 함이, 되려 위험한 일에 나서는 것보다 위험하다.


당장의 위험을 감내하고 성장하지 않으면 시간이 지나서 강한 포식자들에게 잡아먹히는 것은 그야말로 시간문제였기 때문이다.


특히, 소속도 없는 그같은 낭인이라면 두말할 것도 없는 얘기였다.


그런데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소일도는 스스로 위험에 뛰어들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싹수가 노랗게 잘 익었구나.’


보통 식물은 싹이 노랗게 변하면 죽는다.


하지만 극한의 환경에서 싹이 노랗다는 말은, 곧 웃자라서 길게 뻗어질 거라는 말과 다르지 않았다.


강호는 척박한 땅이다.


일단 뿌리를 내렸으면 최대한 길게 뻗기라도 해야 한다.


그것이 식물이 열악한 땅에서 급속하게 웃자라는 이유이며, 즉 그들의 생존법이다.


왕필이 보기에, 이 젊은 사내는 본능적으로 자신이 생존하는 길을 찾아가고 있었다.


마치 삶의 의지를 불태워서 길고 높게 자라는 식물처럼.


‘그러나 웃자란 식물은 대개 뿌리가 짧아 썩기 마련이지.’


왕필은 손으로 입을 가려 끝끝내 튀어나온 미소를 숨겼다.


‘궁금하구나. 뿌리까지 단단히 내려 크게 자라는 거목이 될지, 아니면 이대로 말라비틀어져 썩어버릴지.’


만약 뿌리 깊은 거목으로 자라게 된다면, 왕필이 약간의 정보를 내어주는 것으로 작성한 이 한 장의 계약서는 그야말로 엄청난 가치를 지니게 될 것이다.


......소일도의 경우에는 좀 과한 감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그날을 고대하며, 왕필은 미소를 지우고 머리를 벅벅 긁었다.


“젠장, 말렸군. 이리 돌아와보게.”

“뭐가 더 남았나?”

“계약서에 먹도 안 말랐네. 이대로 보내면 영 공칠 것이 빤한데, 가서 죽을 땐 죽더라도 최선을 다해봐야지.”


왕필이 그렇게 말하며 손짓했다.


고개를 갸웃한 소일도가 다시 걸음을 돌려서 왕필의 집무실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하오문도들이 왕필의 집무실을 지키듯 둘러싸고 하오문의 현판이 걸린 대문마저 굳게 잠가버렸다.


“지금부터 하는 말은 극비밀(極祕謐)이야.”


왕필이 엄숙하게 목소리를 깔며 서류 뭉치를 뒤적이기 시작했다.


그리곤 금방 양피지 같은 것을 찾아냈다. 펼쳐보니, 웬 건물을 위에서 바라본 듯한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적가장의 구조도일세.”


그것이 그림의 정체였다.


“최근 적가장주가 적가장을 복건제일가로 만들겠다면서 시끄럽게 굴어서 말이야. 혹시 몰라서 어렵게 확보해놓은 걸세.”


시끄럽게 군다는 것은, 곧 적가장에서 하고 있는 무사 채용 시험을 말하는 거였다.


듣자 하니, 적가장은 현재 예비 시험을 치르러 온 무림인들로 득시글거리는 모양.


오가는 사람들이 시장 바닥보다 많다고 하니, 공교롭게도 의심을 사지 않고 현판을 넘으려면 최적인 때였다.


왕필의 손가락이 그림에서 널찍한 공간을 가리켰다.


“이곳에서 현재 무사 시험이 치러지고 있네. 그리고 위에 보이는 전각이 일차 시험의 통과자들이 있는 곳, 그 위쪽이 이차 통과자들이 머무르는 곳이지. 점차 장주가 기거하는 내전각에 가까워지는 구조야.”


소일도가 구조도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장주를 잡으려면 한눈팔지 않고 무조건 안쪽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말이었다.


“가장 손쉬운 방법은 자네가 무사 시험을 치르는 것이지. 막무가내로 쳐들어가려고 하면 적가장의 위사들을 모두 상대해야 하지만, 시험을 통과하면 당연하게 안쪽으로 들어갈 수 있으니까.”


왕필의 손가락이 가장 위쪽에 있는 거대한 전각에 크게 동그라미를 그렸다.


적가장주전이었다.


“적가장주인 적광의 무위는 나로서도 예측이 안 되네. 폐관을 깨고 강해졌다는데, 얼마 정도인지 알 수가 없어. 하지만 줄 수 있는 정보는 몇 가지 있지.”

“뭔가?”

“하나, 적가장은 검가 중에서도 기다란 장검(長劍)을 쓰기로 유명하네. 당연히 장주인 적광도 항상 장검을 패용하고. 둘, 적가장을 지금의 위치까지 있게 한 적가검법은 환검(幻劍)에 치중된 검이야.”


미혹할 환(幻)을 써서, 환검.


위협적인 공격처럼 보이지만 실체가 없는 허초(虛楚)에 홀리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는 검의 종류였다.


“......”

“......”

“흠, 끝이네. 더 이상은 나도 도움이 될 만한 정보가 없어서.”


설명이 끝나자 갑자기 어색한 침묵이 찾아왔다.


“뭐 더 해줄 수 있는 건 없는데.”


그러자 소일도가 검집에서 검을 뽑았다.


그리고 그 검을 왕필에게 건넸다.


“이가 좀 나갔는데, 칼이나 갈아주시오.”


검수가 자신의 병기를 남의 손에 맡긴다.


왕필은 이것이 더 없는 신뢰의 표시이며, 소일도 나름의 감사라는 것을 깨달았다.


대화를 시작하고 처음으로 그의 얼굴에 순수한 미소가 번졌다. 사실,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오랜만에 지어보는 표정이었다.


“아예 새걸로 바꿔줄 수도 있는데.”

“그건 됐소. 아버지 유품이라.”

“그래, 조금만 기다리면 내가 새것처럼 갈아주지.”


* * *


잠시 뒤, 왕필은 검을 갈아주었다.


소일도는 날이 선 검을 집어넣더니, 왔던 것처럼 인사 한 마디도 없이 하오문을 빠져나갔다.


혼자 남은 왕필이 중얼거렸다.


“끙, 아무리 생각해도 불나방 같은데.”


머리로는 알고 있다.


이번 거래는 영 공쳤다는 것을.


몇 번을 계산해도, 소일도가 적가장을 적으로 돌리고 살아남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왠지 모를 기대감이 남는 것은 어째서일까.


왕필은 괜스레 소일도가 향하고 있을 적가장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물론 눈에 보이는 것은 벽밖에 없었다.


“으음.”


이내 왕필은 다시 서류를 분류하는 작업에 몰두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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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적가장(4). +1 23.05.29 765 14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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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칼이나 갈아주시오(1). +3 23.05.24 894 19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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