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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룡(旦龍) 님의 서재입니다.

검귀 소일도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단룡(旦龍)
작품등록일 :
2023.05.10 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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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15 2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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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17 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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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사방(4).

DUMMY

장포제철소에 흑암 같은 밤이 도래했다.


석상처럼 굳은 소일도와 양운양은 그때까지도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둘이 조우한 때가 저녁이었으니, 벌써 몇 시진이나 지난 셈이었다.


이변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은 스산한 새벽이 지나, 태양이 중천을 넘어갔다가 다시 저녁놀이 말갛게 저물어 갈 즈음이었다.


일단 먼저 움직인 것은 양운양이었다.


선 채로 굳어버린 양운양의 손가락 끝이 움찔했다.


그 반응을 통해 양운양은 확신했다.


‘얼마 안 남았다. 길어도 일 다경이면 점혈이 풀린다.’


반면에 소일도는 아직까지 미동조차 없었다.


‘불도를 닦는 이들이 가끔 이렇게 묵언무동금식금욕(默言無動禁食禁慾)을 수련한다고는 들었지만......’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눈을 감을 채 고행을 지내는 불자(佛子)들을 보면 그 집념과 인내심에 경외감이 들기 마련이다.


파리가 코에 들어가고 옆에서 대포를 쏴대도 묵묵히 자리를 지키는 것은 흡사 속세의 번뇌를 벗어던진 부처처럼 보일 정도다.


그러나 소일도는 거기에서 한 차원 더 경이로운 수준이었다.


시간이 멈춘 듯했다.


숨을 쉬는 소리조차 거의 들리지 않았고, 흉곽이 부풀지도 않았다.


얼마나 가만히 있었냐 하면, 양운양이 그에게 점혈을 당하지 않았더라면 소일도를 뛰어나게 잘 만든 동상이나, 신선한 시체를 이용한 목내이로 착각했을 정도였다.


과연 저것이 숨을 쉬고 있는 건지도 알 수 없었다.


양운양은 그때 사람이 그저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도 공포심과 경외를 동시에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무조건 도망친다.’


몸의 감각이 서서히 돌아온 양운양이 이번에는 신발 안의 발가락을 꼼지락 움직였다.


도저히 이길 수 없다고 그의 본능이 소리치고 있었다.


‘일단 거리를 벌리고, 도망치다가 안 되면 대화를 시도한다. 저항은 최후의 수단이야.’


양운양은 머릿속으로 점혈이 풀리자마자 도망치는 장면을 그리기 시작했다.


소일도가 다시 맨손으로 금나수를 펼쳐올 경우 어떻게 피할 것인지, 검을 잡고 죽이려 들었을 때의 대응 방법까지도 하나하나 생각해 두었다.


그러다 보니 해는 어느덧 뉘엿하게 기울어 노을빛이 사라져가고 있었다.


‘해가 진다.’


이글거리는 해의 끄트머리만 남았다.


삽시간에 따스했던 공기는 차게 식어가고, 시야는 점차 어두워 갔다.


마침내 햇머리가 전부 사라졌다.


‘지금!’


역시나 먼저 움직인 것은 양운양이었다.


소일도는 아직도 눈을 뜨지 못한 채 가부좌를 틀고 있었고, 어떤 것에도 대응할 수 없는 상태였다.


양운양은 그럼에도 소일도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뛰어올라서 거리를 벌렸다.


허리춤에 걸린 박도를 신속하게 뽑아 전면을 경계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러나 그 판단이 양운양을 죽였다.


소일도가 천천히 몸을 일으킨 것이다.


외공을 닦기 전 옆에 풀어놓았던 잿빛 검집과 그 안에 담긴 검을 집어 들었다.


“확실히 가볍군.”


수련의 성과는 만족스러웠다.


전생에 검귀였을 적에도 이렇게 완벽한 기틀의 신체는 가지지 못했을 것이다.


심지어 흡수되지 못하고 사라지지라 생각했던 약재들의 기운도 촘촘하고 정교해진 신체를 떠나지 못한 채 그대로 내공으로 화했다.


새 발의 피이긴 했으나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완전히 일어난 소일도가 눈을 돌려서 흑사방의 전갈을 보았다.


그 시선은 개구리를 바라보는 뱀의 시선과도 같았다.


눈빛만으로 이 순간 이 자리의 포식자와 피식자가 누구인지 극명해졌다.


“왜 곧장 그 박도로 내 머리를 내려치지 않고 뒷걸음질 친 거지?”


소일도가 질문했다.


“내가 어찌할 상대가 아닌 것 같았소.”

“무공 수위에 대한 이야기인가?”

“그렇소이다.”

“음. 그렇다면 네 그 판단이, 유일한 기회를 날렸다. 방금은 흑사방이 나를 죽일 수 있는 단 한순간이었어.”

“......”


고작 몇 초 침묵이 흘렀을 뿐이거늘 금방이라도 바늘을 가져다 대면 터질 듯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소일도가 다음 질문을 던졌다.


“여기에 내가 있다는 건 어떻게 알았지?”

“적어도 이 장포현 안에서 흑사방이 모르는 것은 없소.”


다시 침묵이 시작됐다.


소일도는 고민하고 있었다.


홍풍반점의 주인장이 안내해 준 이 장소에 흑사방의 끄나풀이 들어왔다.


그렇다면 애초에 홍풍반점의 주인장이 흑사방의 일원이거나 끄나풀이었던 걸까?


답은, 아니었다.


그 증거로 흑사방의 전갈이 도착하기까지는 이틀이나 시간이 걸렸고, 그 이틀은 소일도의 목숨을 살린 시간이었다.


긴 침묵 끝에 소일도의 입술이 열렸다.


“그렇다면 지금 네놈의 몸에서 풍기는 혈향은 홍풍반점 주인장의 것이렸다.”


흑도는 배신자를 살려두지 않는다.


정파도 문파를 배반하거나 그만둘 시에는 파문이라 하여 단전을 폐하는 형을 실시하기도 하지만 흑도는 달랐다.


배신자에게 주어지는 미래는 죽음뿐이다.


그것이 물질과 탐욕으로써 뭉친 흑도들의 충심을 유지하는 방법이었기에, 이 법칙은 어겨지는 법이 없었다.


그러니 밀고자인 홍풍반점의 주인장은 필시 죽었을 것이다.


역시나 양운양의 표정이 정곡이라는 듯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양운양은 거짓말을 꾸며내는 대신에 입술을 한번 꽉 깨물고 말했다.


“......적어도 단칼에 목을 쳤소.”

“그렇군.”


그 말을 들은 소일도가 고개를 끄덕이고, 검신을 뽑았다.


“단칼에 보내주마.”


대화는 끝났다.


“하압!”


양운양은 사냥하는 산적처럼 박도를 양손으로 붙잡고 정면으로 뛰쳐나갔다.


동시에 소일도도 검을 종으로 내질렀다.


카앙!


검신과 도신이 십(十)자로 맞부딪히며 양운양의 팔에 찌릿한 충격이 전해졌다.


‘힘 싸움이라면 해볼 만하다!’


그렇게 생각한 양운양이 내공과 함께 팔 힘을 끌어올렸다.


그러나 소일도의 검은 밀리기는커녕 꿈쩍도 하지 않았다.


중검(重劍).


결점이었던 외공이 더해지면서 소일도는 태산처럼 무거운 검의 묘리를 펼칠 수 있게 되었다.


유검, 쾌검에 이은 중검의 묘리.


아직 빈약한 완성도였지만, 흑도의 시정잡배를 상대하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무슨 힘이!’


양운양이 뒤늦게 힘겨루기를 포기하고 신형을 뒤로 물렸다.


소일도는 양운양의 힘이 빠지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밀고 들어갔다.


등매루주를 베었을 때보다 한층 더 빨라진 쾌검의 검끝이 연이어 양운양의 목과 닿으면서 핏물이 터져 나왔다.


약속대로 승부는 단칼에 결정됐다.


양운양의 목이 소일도의 검끝에 관통되며 목뼈가 정확하게 꿰뚫린 것이다.


촤아악!


소일도가 꽂혔던 검을 빼자, 생을 잃은 몸이 금방 이마를 바닥에 쿵 박으며 쓰러졌다.


“공교롭구나.”


소일도는 축 쳐진 시신을 내려다봤다.


양운양이 힘 싸움을 포기하고 뒷걸음질 친 덕분에 둘은 내실 밖으로 나와 있었다.


어디까지 나왔냐면, 장포제철소 장인들의 피가 검게 착색되어 있었던 바닥까지였다.


그 핏자국 위로 새빨간 양운양의 피가 덧씌워지듯 퍼져가고 있었다.


피가 피로써 지워지고 있다.


그 모습이 마치 무림(武林)을 보는 듯했다.


물끄러미 그 광경을 바라보던 소일도가 작게 중얼거렸다.


“역시 단칼에 보내는 게 아니었나.”


생각해보니 홍풍반점의 주인장 또한 단칼에 죽었다고는 하나, 흑사방이 주인장에게 무슨 만행을 저질렀는지 듣지 못하였다.


어쩌면 주인장은 이놈이 단칼에 죽기를 바라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미 죽어버린 시신을 두 번 죽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거기까지 생각한 소일도는 피 묻은 칼을 털코 납검했다.


“......이놈을 내 멋대로 단칼에 보낸 것은 흑사방을 완전히 무너뜨리는 것으로 갈음하겠소, 주인장.”


조용히 읊조린 소일도가 쓰러진 시신을 밟고 넘어갔다.


흑사방 본단으로 가는 발걸음이었다.


* * *


“전갈이 돌아오지 않았다라.”


흑사방주가 의자 팔걸이를 손끝으로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간부회의에 모인 흑사방의 스무 명 간부들은 그 신경질적인 목소리에 숨을 죽였다. 각각의 앞에 술잔이 놓여 있었지만 누구도 잔에 손을 대려하지 않았다.


그 정도로 분위기는 심각했다.


“등매루 루주가 웬 놈에게 죽었나 했더니 기루 자체가 무너지고, 자객을 보냈더니 열에 아홉이 죽어서 돌아왔고. 심지어 하나는팔이 잘려서 돌아왔군.”


한 구석에서 듣고 있던 외팔이 자객 홍기가 움찔하더니 부들부들 떨었다.


생환하긴 했지만 아홉의 동료를 잃고 돌아온 그는 흑사방에서의 입지가 사라지다시피 했는데, 그 와중 방주의 입으로 한번 더 꾸짖음을 당하니 여간 자존심이 상한 것이다.


“방주님 허나 그놈은 정말......!”

“닥쳐라, 외팔병신. 너부터 죽고 싶은가?”

“......”


억울함을 토로하려던 홍기는 입을 닫는 수밖에 없었다.


패자는 입을 열지 않는 법이다.


흑사방주는 재차 팔걸이를 톡톡 두드렸다.


“감히 그렇게 한껏 본 방을 욕보여 놓고서는, 설상가상으로 이번에는 대화하라고 보낸 전갈마저 돌아오지 않는군. 총관.”

“예.”


총관이라 불린 노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소일도라는 놈 하나에게 본 방의 전력이 얼마나 당한 거지?”

“추정치는 스물이 넘습니다. 허나, 주요 전력인 간부들은 이렇게 모여 있으니 크게 손실이 난 것은 아닙니다.”

“큰 손실은 아니다라.”

“속하가 판단하기로는 그렇습니다.”

“허, 자객 아홉에 쓸만한 루주 하나, 전갈마저 잃어 걸레짝이 된 방의 명성은 큰 손실이 아니던가?”

“......”

“대답해보라.”

“죄송합니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으음.”


톡 톡 톡 톡.


손가락이 쉬지 않고 팔걸이를 두드렸다.


심기가 상당히 불편한 듯했다.


톡 톡 톡 톡 톡 톡 톡 탁!


근엄한 얼굴로 소음을 자아내던 흑사방주가 갑자기 번뜩 일어났다.


우두머리가 일어나자 흑사방의 간부들도 동시에 좌석을 박차고 우뚝 섰다.


“하! 상상 이상이로군!”

“......?”

“생각보다 더 재미있는 놈이었어.”


급격하게 변하는 흑사방주의 태도에 간부들은 서로 눈치만 봤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어주 마뜩찮게 앉아서 인상을 팍 쓰고 있지 않았던가?


한데 지금 흑사방주의 입꼬리는 슬쩍 올라가고 즐거운 듯 상기되어 있었다.


사태를 더 이상 방관할 수 없던 총관이 한 발짝 나서서 총대를 맸다.


“방주님, 이번에는 간부 둘이나 셋을 동시에 보내겠습니다. 대화 없이, 즉각 처분을 명하심이 어떠신지. 어차피 방의 수하로 들어올 인물은 아니라 사료됩니다.”


공손하게 허리 숙여 읍하며 상고한 총관이었지만, 돌아온 것은 경멸이 서린 흑사방주의 눈빛이었다.


“총관의 눈은 옹이구멍인가?”

“예?”


총관은 자신이 무슨 실수를 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뭐가 됐든 서둘러 수습해야 한다는 사실만은 알았다.


“제가 어리석었습니다. 최소 여섯을 보내겠습니다. 자객 열을 한 번에 상대한 적이니 손실 없이 잡으려면 그 정도가 알맞은듯합니다.”


총관이 더욱 깍듯하게 보수적인 의견을 제시했지만, 흑사방주의 화는 누그러들긴커녕 한층 더 냉담해졌다.


“내 오늘 총관에게 실망을 많이 하는군.”


도저히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대체 무엇이 마음에 들지 않는단 말인가?


설마 트집을 잡아서 토사구팽(兎死狗烹)이라도 하려는 것이던가?


“여, 열. 아니 열둘을......”


간부들의 표정도 점차 굳어졌다.


총관이 바들바들 떨며 마지막 의견을 고하자, 흑사방주가 질렸는지 말을 싹둑 잘라버렸다.


“스물이다.”


스물.


그것은 흑사방 간부의 전체 숫자였다.


흑사방주의 입매가 호선을 그렸다.


“그것도 지금. 이 자리에서. 상대해야 할 것이야.”

“......?”


모두의 얼굴에 의문이 떠오른 그 순간.


덜컹.


간부회의가 진행중이던 방주전의 문이 기별도 없이 열리더니, 잿빛 검을 패용한 한 사내가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가 머리채를 잡고 있던 누군가의 수급을 간부들 가운데 툭 던졌다.


흑사방 문지기의 것이었다.


그 목으로 인해 바깥의 상황은 유추할 만했다.


피바다가 되었을 것이다.


순식간에 이목을 집중시킨 사내는 덤덤하게 칼을 뽑았다.


“내가 소일도다.”


그 말이 끝맺음과 동시에, 흑사방 간부들 스무 명이 일제히 소일도를 향해 달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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