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해탑(武海塔)으로 가는 길 (2)
아침 해가 밝았다.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하던 하린이가 문득 할 일을 기억해내고 부리나케 일어나 곽영 옆에 앉았다.
그리고 검분(臉盆: 대야)에 담그려고 이마 위의 수건을 걷어 올리다 멈칫 동작을 멈췄다.
뭔가 이상했다. 하린이가 수건을 이리저리 꼼꼼히 만져봤다.
수건이 이상하게 조금 덜 뜨거웠던 것이다.
자다 깨다를 반복하면서 하린이 나름대로 수건을 간다고 하지만 새벽 늦은 시간이 되면 깊은 잠에 빠져들어 깜빡하는 일이 많았다.
그래서 항상 아침에 일어나면 수건이 뜨뜻했었다. 그런데 오늘 수건은 뜨뜻한 기가 조금 덜했다.
하린이가 곽영에게 다가가 이마 위에 손을 올려봤다.
그리고 왼손을 들어 자신의 이마에 가져다 댔다. 온도를 비교해 보는 것이다.
그때 하린의 오빠 주청민이 물통을 낑낑대며 들고 나타났다. 오늘 하루 쓸 새 수건을 든 옥이도 그 뒤에 바짝 붙어 얼굴을 내비쳤다.
“하린아, 왜 그래?”
곽영의 머리와 제 머리에 각각 손을 올려놓고 있는 동생을 보고 청민이 물어왔다.
“열이 좀 내렸어.”
“진짜?”
“정말?”
그 말에 반색을 한 두 꼬마가 침상 위로 올라와 곽영의 이마에 앞 다퉈 손을 올렸다.
그리고 제 이마에도 손을 대 온도를 비교해봤다. 그러나 청민과 옥이가 금방 실망한 표정을 내비쳤다.
“내리긴 무슨. 똑같잖아.”
주청민의 말에 하린이가 발끈했다.
“어제보다 내렸다고!”
“안 내렸다니까.”
“내렸다고!”
“안 내렸다고!!”
“내렸다니까!!”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하린과 청민이 목청을 높였다.
그러자 옥이가 나서 대뜸 하린이와 청민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
열이 내렸다 안 내렸다 서로 말이 다른 것은 그 비교대상이 달라서일 수도 있다는 사뭇 현명한 판단이었다.
그 뜻을 금방 알아챈 하린이와 청민이도 제각기 다른 비교 대상을 찾아 손을 움직였다.
하린의 손이 청민의 이마 위로 올라갔고 청민이 하린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
이번엔 옥이의 손이 청민의 이마에서 곽영의 이마로 옮겨갔고 하린은 청민의 이마를 거쳐 옥이의 이마에 손을 댔다.
청민의 손은 하린의 이마를 만졌다가 다시 제 이마로 돌아가 뭐가 더 뜨겁고 누구 이마가 덜 뜨거운지를 고민했다.
아이들의 표정은 진지했다.
하지만 정신을 잃고 누워있는 곽영을 가운데 두고 품자로 앉아 서로의 이마에 손을 뗐다 붙였다, 이 이마에 손을 댔다 저 이마에 손을 댔다 하고 있는 세 아이의 모습은 어딘가 이상해 보였다.
연무장에서 가볍게 아침 연공을 마치고 돌아오던 황철기가 마침 열린 문틈 사이로 이 모습을 봤다.
그리고 혀를 끌끌 찼다.
“에고, 저 인간이 저리 정신 못 차리고 뻗어 있으니 애들 정신도 오락가락 하는구먼. 쯧쯧.”
황철기가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고 있을 때, 곽영은 생과 사의 갈림길 위에 서 있었다.
거대한 도가 목을 갈라왔다.
막을 수 없을 것임을 잘 알고 있었지만 곽영은 그래도 덜렁거리는 왼팔을 힘겹게 들어 올려 도를 막았다.
검을 들었던 오른팔은 이미 어깨부터 깔끔하게 잘려나간 상태.
그냥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 목을 내주기란 곽영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목이 바닥에 떨어지지 않으면 아직 죽은 것이 아니다.
아니 목이 잘렸어도 숨이 끊어지지만 않았다면 역시 아직 죽은 것은 아니다.
곽영의 생각이었고 그가 싸움과 죽음을 대하는 마음가짐이었다.
짓이겨지고 뭉개져 영 못 쓰게 된 왼팔을 곽영이 겨우 치켜들어 거도(巨刀)의 날을 막아 세웠다.
하지만 마교가 자랑하는 수라탈혼도의 절기를 다 헤진 팔뚝으로 막을 수는 없었다.
하나 남은 왼팔마저 가르며 날아온 거도의 차가운 날이 곽영의 목뼈에 와 닿았다.
죽음을 목전에 두자 곽영의 마음이 착잡해졌다.
한두 번 겪는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기분이 좋지 않았다. 화가 치밀었다.
하지만 역시 그러면 그럴수록 심장은 더 차가워졌다.
다음번에는 꼭 이 놈의 머리통을 부숴놓고야 말겠다는 불굴의 의지가 뼈 속 깊이 아로새겨졌다.
그리고 곽영의 목이 땅에 떨어졌다.
이로써 일백 마흔 세 번째의 죽음이었다.
곤륜산인, 사자도 적풍, 그리고 삼두도귀. 그 다섯을 처음에 벤 뒤로 곽영은 서른넷을 더 죽였다.
그리고 마흔 번째 싸움에서 왼팔을 잃었고 마흔한 번째에서 가슴에 일장을 맞고 마흔두 번째에서 머리가 깨져 죽었었다.
그리고 다시 살아나 또 싸웠다. 그렇게 생과 사의 강을 넘나든 게 벌써 일백 마흔 세 번이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몰랐다. 어쩌면 그의 생각보다 더 많은 시간이 흘렀을 수도 그 반대일 수도 있었다.
이 안과 바깥세상의 시간이 같은 보폭으로 흘러갈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의미 없는 생각보다는 한 걸음이라도 더 앞으로 전진하는 게 곽영에게는 절실했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빨리 돌아갈 수 있다. 그래서 싸우고 또 싸웠고 죽고 또 죽었다.
거도에 목이 잘려 바닥을 뒹굴던 곽영의 시체가 ‘휙’ 사라졌다. 그리고 곧바로 멀쩡한 모습의 곽영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탈혼도마의 수라탈혼도가 베고 지나간 자리를 곽영이 손가락으로 더듬듯 쓸었다.
아직도 그 느낌이 생생했다. 피륙이 베이고 뼈가 갈라졌던 기분 나쁜 느낌.
비록 심상의 공간, 가상의 공간에서 겪은 가짜 죽음이었지만 그 느낌만큼은 지독할 만큼 생생했다.
그리고 그 생생한 느낌을 곽영은 일부러 더 깊게 오래 기억하려고 애썼다.
그것이 그를 훨씬 더 강하게 만들어 준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과거에도 싸움에 임할 때면 언제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으로 임했다고 스스로는 생각했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비록 실제는 아니지만 실제보다 더 생생한 죽음을 계속 겪다보니 예전의 마음은 그저 장난이고 치기일 뿐이었다.
죽음을 경험했다는 것. 그것도 일백 번이 넘는 죽음을 경험했다는 사실이 곽영을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 놓았다.
일단 뿜어지는 기세 자체가 달라졌다. 기세만으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말이 결코 허황된 것이 아님을 스스로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보는 법이 달라졌다. 칼날이 아무리 피륙 가까이에 닿아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짧은 시간과 공간의 틈새를 안법으로 벌려, 반격할 수 있는 여지를 스스로 찾아낼 수 있게 되었다.
게다가 빙심내단의 크기가 놀랄 만큼 커졌다.
처음 빙심지경을 이루고 내단을 형성했을 때는 겨우 좁쌀만 한 크기였던 것이 이제는 쌀알 두어 개 정도의 크기까지 자라났다.
결국 그는 강해졌다. 생과 사의 강을 건너면서 계속 강해졌다.
그러니 방금 전 자신의 목을 떨어뜨렸던 이 앞의 마교 놈도 이제는 당연히 이길 수 있을 것이다.
곽영이 바닥에 떨어진 검을 주워들었다.
그리고 목을 좌우로 꺾으며 탈혼도마라 불리는 전대 거마 놈의 앞으로 다가서며 검을 뿌렸다.
꽈앙-!
그 검격이 도신에 작렬하며 탈혼도마가 세 걸음 뒤로 물러섰다.
아까 이놈과 맞닥뜨렸을 때, 곽영은 이미 이놈보다는 조금 떨어지지만 엇비슷한 경지의 무인들을 마흔 넘게 상대한 뒤였다.
그러니 힘에서 밀렸던 게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새로 시작한 지금은 아니었다. 공력이 넘치고 힘이 남아돌았다.
꽈광-!
곽영의 두 번째 검격이 작렬하며 탈혼도마가 일곱 걸음 뒤로 뒷걸음질을 쳤다.
이렇게 단순 무식하게 공격하는 게 물론 곽영의 방식은 결코 아니었다.
그러나 때로는 마음이 가는 대로 기분이 원하는 대로 손을 펼치고 싶은 때가 있는 법이다.
꽈과광-!
세 번째 검격과 마주치자 수라탈혼도가 산산조각으로 터져나갔다.
그리고 빈 도파만 부여잡고 멍하니 서 있는 탈혼도마의 목을 곽영이 가차 없이 잘라냈다.
탈혼도마의 시체가 사라지며 또 서책 한 권이 하늘에서 떨어졌다. 수라탈혼도법이라는 비급이었다.
남비하 서쪽 뚝방 언저리에 자리한 남비루.
남비루는 남비하 근처를 오가는 뜨내기 뱃사공들이나 들리는 곳이라 해서 남비루로 불렸던 이름 없는 허름한 홍루였다.
그런데 어느 날 누군가 그 남비루를 인수하더니 그 자리에 오층 누각을 올렸다.
그리고 홍화루란 이름으로 편액을 바꿔달고 장사를 새로 시작했다.
그 홍화루가 지금은 합비 너머 남경에서까지 손님들이 찾아올 정도로 제법 성황을 누리는 중이었다.
홍화루의 사층 제일 안쪽에 자리한 내실. 대낮부터 한 사내가 술에 취해 있었다.
사내는 바로 사두혁, 아니 남궁두혁이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애꾸눈 사내 독안귀 추평이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다.
독안귀에게서 무슨 말을 들었는지 순간 몽롱했던 남궁두혁의 눈이 갑자기 번쩍하며 생기를 되찾았다.
그리고 방 안이 순식간에 주향으로 가득 차올랐다. 남궁두혁이 내력으로 술기운을 몰아낸 것이다.
“곽영이라는 그놈이 말이지?”
남궁두혁이 눈을 부릅뜬 채 확인이라도 하듯 재차 물어왔다.
고개를 처박은 독안귀가 대답했다.
“드러누운 지 벌써 달포 째랍니다. 다녀간 의원들이 죄다 머리를 절래절래 내젓고 갔답니다.”
결코 잊을 수 없는 치욕을 안겨 준 그 돼지 같은 면상의 표사 놈.
그놈이 그런데 주화입마에 걸려 나자빠졌단다.
손가락 하나 꼼짝 못하고 하루 종일 제 숙소 침상에 누워만 지낸다는 소식이었다.
순간 남궁두혁의 뇌리에 이것은 절호의 기회라는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주화입마에 빠져 한 달 넘게 사경을 헤매고 있는 표사 놈.
이런 놈이 어느 날 누운 자리에서 그대로 죽어나간다면 그것만큼 자연스런 일이 또 있을까.
남궁두혁의 입술이 입가를 탐욕스럽게 핥았다.
그리고 오랜만에 야행복을 꺼내 입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 작가의말
댓글로 남겨주시는 응원들 그리고 고견들은 모두 잘 읽고 있습니다.
부족한 글을 읽어주시는 여러분께 다시 한번 감사의 인사 올립니다.
정기 휴재일인 내일(토요일)은 쉬고 일요일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그리고 혹시 다음 주중에 하루 피치못할 사정으로 휴재를 해야할 상황이 생길지도 모르겠습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다음주는 토요일에도 연재를 감행(?)하는 쪽으로 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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