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주의 선물 (3)
곽영이 눈을 떴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환단을 먹고 쓰러진 게 분명 해가 지기 전이었는데 지금은 사위가 칠흑 같은 어둠이다.
"빌어먹을 놈의 영감."
동혈 바닥에 대자로 누운 곽영이 대뜸 욕부터 내뱉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환단은 잠혈단의 해약이 아니었다.
엉뚱하게도 그건 뇌정(腦精)이었다.
바로 서문강 늙은이의 뇌정. 그것도 늙은이가 그간 익히고 깨달은 무공과 심득이 담긴.
뱃속에 들어간 해약이 녹기 시작한다고 느낄 때부터 곧바로 뭔가 잘못됐음을 직감했었다.
그리고 그 순간 환단의 기운이 갑작스레 폭발하면서 위로 치솟아 올랐다.
동시에 수많은 비기와 절초, 깨달음과 오의가 머릿속으로 밀려들었고 그 충격으로 혼절했었다.
의식을 머리에 집중해 봤다. 백회가 마치 제집인양 똬리를 틀고 앉아있는 뇌정의 기운이 느껴졌다.
"미치겠군."
정작 원한 것은 잠혈단의 해약일 뿐인데 해약은커녕 졸지에 늙은이의 전인이 되게 생겼다.
“잠깐, 그럼 진짜는 어디 있는 거지?”
바닥에 누워있던 곽영이 몸을 벌떡 일으켜 세웠다.
삼킨 환단이 진짜 해약이 아니라면 그럼 진짜는 어디에 있는 걸까.
잠시 고민을 해보던 곽영의 입가가 씰룩였다.
“진짜 따위가 있을 리가 없지.”
그간 영감이 해온 장난 같은 짓들을 돌이켜 보면 답은 뻔했다.
진짜 해약은 없다.
왜냐면 잠혈단 자체가 독약이 아니었거나 독약이었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독성이 사라지는 그런 독약이었을 테니 말이다.
그러고 보면 처음 오 년간 겪은 죽고 싶을 정도의 극통에 비해 최근의 통증은 영 참기 힘든 정도는 아니었다.
단지 몸과 머리가 기억하는 통증 때문에 더 두렵고 아프게 느껴졌을 뿐이었다.
허탈해진 곽영이 동혈 바닥에 다시 철퍼덕 드러누웠다. 그리고 대자로 몸을 뉘었다.
늙은이의 사문인 비천문은 천무대제의 무학을 잇는 문파.
그것도 일인전승의 문파다.
그러니 이제 빼도 박도 못하게 비천문의 당대 계승자가 돼버렸다.
살법을 익힌 이에게 대제의 무맥이라니. 얼토당토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은 서문강의 사적인 기억까지 쓸데없이 덤으로 얻은 일이었다.
영감의 상단전 공부가 아직 미완성이어서인지, 아니면 치명적인 부상을 입은 상태로 급히 뇌정을 만들어야 해서인지, 무공과 관련 없는 기억까지 덩달아 딸려 나왔다.
바로 숨겨놓은 딸과 손자 손녀에 대한 기억이었다.
기억에 따르면 영감에겐 마흔을 넘어 얻은 딸이 하나 있었다.
물론 그 사실은 철저한 비밀. 심지어 딸조차 아비가 무림맹주란 사실을 모른 채 고아로 자랐다.
“미친 영감탱이, 세상을 아주 감쪽같이 속였구먼.”
물론 속아 넘어간 세상에는 곽영 자신도 포함되었다.
자신에게 비밀로 한 것에 서운함이 전혀 없다면 그건 거짓말일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영감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또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충분히 이해가 가고도 남았다.
서문강은 적이 많다.
맹주위에 오르자 출신 성분을 배제하고 철저히 능력 위주로 인재를 등용하기 시작했고, 구파일방과 팔대세가가 독점해온 맹의 이권에 모든 이를 공평하게 참여케 했다.
힘의 논리가 아닌 옳고 그름의 눈으로 시시비비를 가렸고, 가진 자보다 덜 가진 자를, 힘이 센 자보다 약한 자를 위했다.
그러니 당연히 눈엣가시로 여기는 자들이 생겨났고 하루에도 몇 번씩 숨은 칼날이 등 뒤에서 날아들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문강은 언제나 수신호위 하나 없이 혼자서만 다녔다.
그게 이상해 왜 그런지 물은 적 있었다.
그러자 피식 웃으며 영감이 그랬다.
“오는 족족 내 손으로 두 동강을 내주면 될 거, 뭐 하러 아랫것들 귀찮게 하나.”
하지만 한참 뒤 어느 비 오는 날, 백주 세 근을 혼자 마시고 찾아와서는 그랬다.
하다하다 안되니 놈들이 언젠가는 자신의 수신호위 일곱을 제압해 그들 목에 칼을 들이대며 영감을 협박했다고.
“니 호위들을 살리고 싶다면 둘 중 하나를 택하라. 하나는 이 자리에서 너 스스로 자진하는 것. 둘은 팔 하나와 맹주의 직위를 내놓고 세외로 나가 영영 돌아오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그날 영감은 호위 일곱 모두를 한꺼번에 잃었단다.
하지만 그것도 통하지 않자 놈들은 다른 방법을 쓰기 시작했다.
호위들을 회유하고 협박해 자객으로 만든 것이다.
아무리 검증을 하고 아무리 호협한 이만 가려 뽑아도 호위들은 어느새 하나 둘 자객으로 변해 갔다.
동료들에게 검을 휘둘렀고 비수를 입에 물고 서문강의 침소에 숨어들었다.
그러다 마지막 남았던 호위장마저 한 손엔 벽력탄을 다른 손엔 비수를 들고 난입했을 때 서문강은 다짐했단다.
앞으로 다시는 수신호위 따위 두지 않겠다고.
벽력탄과 함께 육편으로 비산한 그 호위장이 화탄을 터뜨리기 직전 마지막으로 이런 말을 남겼다고 했다.
“흑흑. 죄송합니다 맹주님. 제 아이와 아내가 놈들에게 잡혀있....”
펑-!
맹주라는 자리는 그런 자리다.
그러니 하나밖에 없는 딸을 위해 그가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아마 할 수 있는 한 자기 주변에서 멀리 떨어뜨려놓는 일, 될 수 있으면 자기와 전혀 관련 없는 이로 만드는 일 뿐이었을 게다.
그게 딸과 그 가족을 보호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을 테니.
그래서 결국 딸은 아비가 누군지 모르고 자랐고 아비는 딸에게 한 번도 아비 소리를 듣지 못한 채 죽었다.
곽영이 백회혈에 의식을 집중해봤다.
파편처럼 이곳저곳에 부스러져있는 서문강의 기억들이 몽실몽실 흘러 나왔다.
갓 태어난 한 생명을 자칫 바스러질까 벌벌 떨며 품에 안던 기억.
그 생명이 자라나 아장아장 걷기 시작하고 또 뜀박질을 하더니 금방 아리따운 아가씨로 자라나 한 사내의 아내가 되고 종국에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강아지 같은 손자 손녀를 낳았던 기억.
그 모두를 숨어서 몰래 지켜보며 느꼈던 기쁨과 행복, 안타까움의 감정들.
단전이 부서지고 죽음을 목전에 둔 순간 느꼈던 그리움과 사랑, 그리고 후회와 미안함.
그 모든 기억과 기억 속 감정들이 실타래 풀리듯 술술 곽영 안으로 풀려 나왔다.
“이런 느낌이군.”
곽영이 자신의 가슴께를 어루만지며 입술을 씰룩였다.
왠지 모를 알싸한 기분.
마치 밀려왔던 파도가 다시 바다로 쓸려나가며 뒤에 남긴, 구멍 난 모래사장 같은 느낌.
그 구멍 안으로 아무리 모래와 물을 들이 부어도 결코 메워지지 않을 것 같은 느낌.
하지만 파도가 덮고 있던 때를 기억하면 더없이 따스하고 기분 좋아지는 느낌.
곽영에게는 낯설기만 한 감정이었다.
가슴팍을 어루만지며 한참을 그렇게 누워있던 곽영이 비로소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입구로 걸어 나가 밖을 내다보며 섰다. 하늘에는 별들이 각자의 밝기를 뽐내고 있었다.
‘웃어라. 많이 웃어라. 세상은 아직 밝다.’
바로 영감이 죽기 직전 마지막 부탁이랍시고 남긴 말이다.
“멍청한 영감.”
정신이 제대로 박힌 영감이라면 세상에 남겨질 딸자식과 손자 손녀를 놔두고 저따위 말을 남기진 않았을 거다.
이제 어찌 살 거냐는 영감의 질문에 어디 가서 살업(殺業)이나 계속하며 살리라고 답했었다.
하지만 깊이 생각하고 한 대답은 아니었다.
곽영이 원한 것은 자유롭게 사는 거였다.
남의 의지가 아닌 자신의 의지로 자유롭게.
남의 지시대로 칼을 휘두르는 살수(殺手)가 아닌, 자신의 의지로 칼을 들 때와 놓을 때를 정하고 머물 때와 떠날 때를 정하는 진정한 살객(殺客)이 되고 싶었다.
“그래. 이것도 결국은 나의 의지고 나의 선택이겠지.”
동혈 밖 하늘 위 빛나는 별들을 바라보며 곽영이 혼잣말을 내뱉었다.
그러면서 마음을 정했다.
영감이 남긴 피붙이들 곁에서 그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한 번 지켜보리라.
영감이 떠넘긴 이 짐짝 같은 무공과 깨달음도 기회가 된다면 그들에게 전해주리라 결심했다.
비록 한 마디의 부탁도 언질도 없었지만 아비와 할아비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모르고 살아온 그들에게 지난 열다섯 해 동안 그가 겪었던 영감에 대해 말해 주리라 마음먹었다.
실없는 소리나 찍찍 해대던 객쩍은 영감탱이에서부터 의(義)와 협(俠)이라면 물불을 안가리던 검협의 진짜 모습까지, 대륙 만릿길을 남북으로 동서로 가로지르며 그와 함께 보고 겪은 모든 일들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해 주리라 결심했다.
물론 이 모든 결심은 그가 늙은이를 좋아해서도 아니고 특별하게 생각해서도 아니었다.
영감과 함께 보낸 지난 세월이 아쉽거나 그리워서는 더욱 아니었고, 남겨진 영감의 혈육이 가엾거나 불쌍하게 느껴져서는 더더욱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는 냉혈의 피와 무정(無情)의 심장을 가진 이.
그 마음 한복판에 세운 얼음벽을 언젠가 거대한 빙벽으로 키워내 진정한 살법의 주인으로 거듭나게 될 이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것은 단지 유희였다.
갑작스레 자유를 부여받은 이가 마땅한 할 일을 찾기 전에 잠깐 쉬어가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것이 적어도 곽영 스스로가 생각하는 이 결심(決心)의 이유였다.
별빛을 등지고 돌아선 곽영이 이내 주섬주섬 짐을 싸기 시작했다.
그의 입꼬리가 살짝 위로 올라가 마치 웃고 있는 것처럼도 보였지만 금방 어둠 속에 파묻혔다.
아침 해가 떠오르려면 아직 한참을 기다려야할 어느 새벽녘의 일이었다.
- 작가의말
약간의 수정이 있었습니다.
(2/08/밤9시25분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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